531화 우리가 후회할 줄 아는 한, 영원히 (3)
인퀴지터는 설렁설렁 자리를 피하는 데스브링거를 지긋이 살펴보다 결국 고개를 주억였다·
본래도 높으신 분들이 마련한 자리에 참석하는 걸 싫어하던 녀석이었으니 이번에도 붙잡기는 어렵겠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녀 자신도 본인이 싫다는데 억지로 붙잡고 싶지 않았고 말이다·
“말이 잠시 헛돌았지만··· 녀석 말이 맞습니다· 저 역시 당신께 화낼 의향이 없습니다· 녀석이 말한 대로 화낼 이유가 없으니까요·”
대신 그녀는 본래 대화하던 것에 집중했다· 소년의 몸이 달칵 떨렸다·
“그래도····”
인퀴지터는 자존감 낮은 모습을 두고 구태여 말을 더 잇지 않았다· 소년이 지금 몰라서 되묻는 것도 확신하지 못해서 재차 질문하는 것도 아님을 아는 까닭이었다·
단지 소년은 그냥 믿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이것이 제게 주어져도 되는 것인지 정녕 자신이 이것을 누려도 되는지 등을·
“모험가님께선 말입니다· 돌아가기 전 제게 물으셨습니다·”
“···?”
“모든 것이 끝난 후에는 무엇이 하고 싶은지 어떤 것을 할 것인지 말입니다·”
그것에 대한 답은 그녀가 줄 수 없다· 준다고 해도 소년이 거절할 것이다·
그러니 인퀴지터는 모두가 소년에게 해 준 말을 되풀이하기보다 언젠가 모험가와 했던 질답을 떠올렸다·
“저는 그 물음을 두고 여행을 하고 싶다 했습니다·”
누군가를 구하고 살리는 여행· 동시에 그녀가 몰랐던 많은 것들을 알아 가는 여행· 인퀴지터는 그런 것들이 하고 싶었다고 답했던가·
“그리고 그분은 제 답에 정말 기뻐하셨죠· 별것도 아닌 답을 두고 정말 멋진 포부라 말해 주셨습니다·”
그 응원이 그때의 그녀를 얼마나 기쁘게 만들었는지· 생각지도 못했던 후일을 상상해 보고 그것을 대략적이나마 그려 보는 건 정말 즐겁고 행복한 일이었다·
“파우스트 군은 한다면 무엇이 하고 싶습니까?”
“···저는 그러니까·”
“천천히 답해 줘도 괜찮습니다· 떠오르는 것이 없다면 답을 미루는 것도 괜찮습니다· 곤란하게 만들고자 꺼낸 질문이 아니니까요·”
물론 그 자리에 함께 있어 줬으면 했던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이제 없다· 대신전의 사람들도 존경하는 모험가도 그녀가 가지 못하는 곳을 향해 떠나 버렸으므로·
“다만 아주 작은 것이라도 좋으니 한 번쯤은 꿈꿔 보세요·”
하지만 그들이 자리를 비웠다고 해서 그녀가 멈춰야 할 이유는 없다· 도리어 그들이 떠나갔기에 그녀는 정체되지 않고 나아가야만 한다·
“아무렴 언젠가 정말 우연히라도 그들을 마주하게 됐을 때 자랑할 만한 한 가지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직 그것만이 그녀를 떳떳하게 만들어 주므로 그녀는 그리해야 했다·
“···그레첸께서·”
“네·”
“아직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땅을 탐험해 보는 건 어떻냐고··· 물어본 적 있으세요·”
“그거 멋있군요· 파우스트 군이라면 분명 가능할 겁니다·”
파우스트 본신의 무력은 본 적 없지만 모험가의 절반만 해도 일이 어렵진 않을 것이다· 정신력 쪽이야 대악마로부터 몇 년을 버텨 낼 정도니 말 꺼낼 필요도 없고 말이다·
“저로 인해 죽은 사람들이 마음에 걸린다면··· 죽은 사람만큼 사람을 살리고 다녀 보는 것도 좋을 거라고 하셨고요·”
“그것도 나쁘지 않지요· 물론 저는 기왕이면 파우스트 군이 파우스트 군만의 삶을 사는 게 더 낫다 싶습니다만·”
소년 스스로가 도저히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면 차라리 속죄를 하며 사는 삶도 최악까진 아닐 것이다· 그런 자기만족이라도 있다면 최소한 삶을 이어 갈 의향 정도는 생길 테니까·
“제가 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그 모든 걸 시도할 수 있는 용기고 의지다· 그것이 없다면 그 어떠한 것도 시작될 수 없다·
“당신을 믿을 수 없다면 당신을 지켜 낸 사람들을 믿고 해 보세요·”
이사야의 손이 소년을 정수리에 축복의 금빛 기름을 부었다·
* * *
베르세르크는 하품을 쩌억 하며 기름 부음 당하는 소년을 응시했다· 신성력을 액체처럼 보일 정도로 밀도 있게 응축하는 것도 어지간한 일이 아닐 텐데 하여간 용사는 전쟁이 끝나도 용사였다·
“댁은 우짤 거요?”
“술과 음식은 거부하지 않지만 귀찮은 자리는 사양이다·”
“동감이야· 격식이니 예의니··· 정말 따지는 것들만 많다니까·”
“그럼 그냥 저희끼리 먹고 마시는 자리나 만들까요? 정상 영업 하는 주점이 과연 있을진 모르겠지만·”
“거 좋은 의견이오· 없으면 이짝끼리 해 먹어도 되니까네·”
“너 요리 잘해?”
“나가 잘하는 거는 아니고··· 우리 아 중에 잘하는 놈이 쪼까 있소· 바베큐 하나 기깔나게 잘 구운다니까네·”
“아 고기· 최고지· 쓰읍 상상하니까 벌써 배고프네· 그냥 지금 바로 판 깔면 안 되나?”
“음 다친 아들이 있어서 그건 쪼까 그런디· 애초에 술과 음식을 구할 곳도 당장 없지 않소?”
“에이 김 새네·”
그사이 술과 고기를 눈앞에서 놓친 크러셔가 풀썩 쪼그려 앉았다· 호크아이도 눈치를 슬그머니 보더니 크러셔의 옆에 달라붙듯 무릎을 쪼그렸다· 웃긴 놈들이었다·
“영업하는 주점은 없어도 점거할 만한 식당 하나는 있겠지·”
“···양아치요? 주인 허락도 안 받고 점거하게?”
“돈이야 후불로 주면 되는 거 아닌가?”
고귀하신 귀족 나으리들이야 야만적이니 못 배워 먹었다니 험담을 잔뜩 하겠지만 아무래도 좋다· 그들이 사탄을 죽이는데 한 손 보태고 용사가 그들의 뒷배로 있는 이상 그들에게 함부로 벌을 내릴 자는 아무도 없다·
후불로 대금을 치르겠다 약속한다면 더욱 그렇다· 뻔뻔하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죄를 저질렀다고 하긴 뭐하리라·
“오 그래! 바로 이거지! 역시 뭘 알아도 안다니까·”
“음 마침 멀지 않은 곳에 그럭저럭 멀쩡한 식당 하나가 있네요· 구조 지역과 거리가 있어서 시비도 덜 걸릴 것 같아요·”
“그 좋은 눈으로 찾는다는 게····”
“그래서 넌 안 갈 건가?”
“끄으응·”
미스틸테인이 머리를 벅벅 긁다가 결국 외쳤다·
“사람을 구조해야 한다느니 뭐니 무보수 노동 할 바에야 먹고 마시며 노는 게 훨 낫긴 하니까네· 아들만 챙겨뿌고 바로 합류하겠소· 위치만 알려 주소·”
결국 이쪽도 뻔뻔하기 짝이 없는 북쪽 놈이었다·
“좋다· 나도 데려올 애가 있으니 걔만 데리고 오지·”
“그래애· 그럼 우린 미리 자리 정리하고 있을 테니 얼렁 오라고·”
제멋대로 구는데 선수인 이들은 기어코 귀찮은 일들을 피해 도망쳤다·
* * *
“베르세르크를 비롯해 다른 이들은 대체 어딜 간 건가?”
“그러게요?”
사람을 도와야 한다며 인퀴지터가 다니엘과 맥시를 이끌고 신전 쪽에 합류했을까· 인퀴지터 대신 소년을 떠맡은 아크메이지가 퍼득 나머지 인원을 떠올렸다· 당연하지만 술 마시러 떠난 용병들이 이제와 보일 리는 없었다·
“일하기 싫어서 도망친 거 아니야?”
“아까의 테이 군처럼요?”
“씹 아니라고·”
뭐··· 그들이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위인은 아니니 괜찮을 것이다· 뒷수습을 도와주지 않는 것도 그들이 한 고생을 고려하면 탓할 일도 아니고·
“저 저도 도울 만한 건····”
“음? 아 괜찮네 괜찮네· 자네는 여기서 푹 쉬게·”
신성력에 닿아도 괜찮다는 건 확인했으나 신전 사람을 볼 때마다 흠칫거리는 걸 모든 일행이 본 참이다· 그런 소년을 신전에 보낼 수는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영주 쪽 병력에 붙이는 것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마탑은··· 말할 것도 없다· 아크메이지는 그냥 자신이 끼고 다니기로 했다· 보라뱀이나 요정의 안위를 실시간으로 확인하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어차피 둘 다 목숨에 문제가 없다는 건 판명이 났다· 그걸 안 이상 이곳에 있는 편이 몸도 마음도 훨 편했다·
“하지만····”
“정 마음에 걸린다면 아까부터 자네만 보고 있는 이들과 대화해 보는 건 어떤가?”
“···!”
별개로 아크메이지의 말에 소년이 파드득 몸을 떨었다· 살짝 정말 닿은 건가 싶긴 할 정도로 약하게 옷깃을 잡은 손도 같이 떨렸다·
“저쪽은 그대를 참 열렬히 보고 있네만·”
“···그게·”
모든 일이 끝난 후 뮌문트에서 파견된 두 기사는 바로 보고에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당최 알 수 없지만 그 후로 두 기사가 소년만을 빤히 보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고 말이다·
“···제가 저분들과 대화해도 될지 모르겠어요·”
“음 어떤 연유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물어도 되겠나?”
“그게····”
모험가는 자신이 강령된 상태이고 몸의 원주인이 따로 있으며 그가 어떻게 악마에 휘둘려 모험가를 부르게 됐는지까진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나 정작 몸의 원주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으니· 사정을 알지 못하는 아크메이지로선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아크메이지의 손이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소년을 기다렸다· 그녀의 옆에서 생존자들을 위한 물품을 만들던 마이스터와 티마뉴크는 용케도 눈치껏 끼어들지 않았다·
“전 그게·”
음· 그러고 보니 아까 안아 주었을 때 말을 좀 더 편히 했던 것 같은데·
아크메이지는 조그만 소년을 자신의 다리 위에 앉혔다· 성인과 아이의 중간 시절에 걸친 소년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자아 말하기 힘들면 억지로 말하지 않아도 되네·”
이러니까 꼭 손주 안고 있는 것 같군·
아크메이지는 모험가와는 또 다른 맛의 손주를 두고 허허 웃었다· 모험가보다 귀엽고 인퀴지터보다 더 수줍은 데다가 누구보다도 어려서 정말 손주처럼 느껴졌다· 괜히 코가 간지러웠다·
“···혹시 뮌문트의 잉걸불을 아시나요?”
한참 부끄러움을 타던 소년이 쭈뼛쭈뼛 말을 꺼냈다· 다행히 아크메이지도 아는 지식이었다·
“들어 본 적 있네· 아주 훌륭한 기사였다지·”
“···네· 정말 훌륭한 분이세요·”
맞장구를 쳐 주니 아이의 볼이 살짝 발그스름해졌다· 꼭 자신이 칭찬받은 것 같았다·
“···제가 그분의 그러니까 자식 이어서·”
“···그렇군· 그랬나· 그랬던 거였나·”
아크메이지는 유난히 모험가를 신경 쓰던 뮌문트의 성주를 떠올렸다· 어쩌면 어쩌면 그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군야 형 아니 소성주님도··· 그걸 아세요· 그 모험가님이 배려해 주셔서··· 소성주님께는 말할 수 있었거든요·”
“···많이 좋아하나 보군·”
별개로 소년 역시 뮌문트의 성주를 많이 아끼는 듯했다· 군야 형이라는 발언도 그렇고 이야기를 꺼내는 것만으로 풀어지는 표정도 그렇고· 소년의 눈동자에는 단순히 군신 관계로는 해명되지 않을 무언가가 있었다·
“···네· 가족이나 다름없는 분이세요·”
“가족·”
그런가· 소년에겐 아직 남은 것이 있었나·
아크메이지는 그 사실을 깨닫는 즉시 안도감이 들었다· 모험가 남기고 간 말이 있다지만 소년이 과연 그 말만을 움켜쥔 채 일어서 줄지는 미지수였던 탓이다·
그런데 가족이 있다니· 모험가의 말 외에도 소년을 붙잡고 의지를 불어줄 존재가 남아 있다니· 이것이야말로 다행이고 경사일 수밖에 없다·
아크메이지의 눈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그럼··· 찾아가 봐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긴 한데·”
“한데?”
“···제가 돌아가도 되는 걸까요?”
“오 아가·”
동시에 아크메이지는 결국 소년의 이마에 입술을 묻었다· 악마에게 너무 시달린 나머지 용기조차 쉽사리 내지 못하는 안타까운 생명에게 감히 기도를 맞춰 보았다·
“내가 그분의 입장이었다면 자네가 살아 돌아만 와도 기쁘고 행복했을 걸세·”
부디 이 아이가 스스로 삶을 걸어가는 날이 오기를·
“···정말 그럴까요?”
“하면 진실을 전할 때 그가 한 말이 달리 없던가?”
“그건 아닌데····”
“분명 언제고 좋으니 돌아만 와 달라고 했을 테지?”
“···네·”
“그래· 바로 그걸세·”
모험가처럼 크고 튼튼하게 자라 목가적인 웃음을 매다는 날이 오기를·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에는 어떠한 자격도 필요 없네· 자네의 용기만 있으면 될 뿐이지·”
“···용기·”
“그래· 용기·”
아크메이지는 그런 미래가 반드시 오기를 빌며 아이를 천천히 내려 주었다· 일종의 재촉이었다· 어서 용기를 내어 저쪽으로 가 보라는 어른의 떠밂·
“···그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그것이 촉매가 되었는지 혹은 그 전에 결심이 섰던 것인지 소년이 머뭇거리다 발길을 돌렸다· 무엇이 계기가 되었든 참 다행인 일이었다·
“와 지켜보다 열불 나는 줄·”
“잘 참았네·”
“뮌문트면 기사로 유명한 도시죠· 나중에 한번 가 보고 싶어요· 거기도 말을 잘 타는 분들이 계실까요?”
“그렇겠지·”
아울러 소년이 자리를 비운 직후 마이스터가 참았던 숨을 후 토해 냈다· 그동안 진짜 답답했는지 마이스터의 얼굴은 형편없이 찌그러진 채다·
“그보다 형은 아까부터 뭘 만드는 거야? 생필품 같지는 않은데·”
“아· 이건 욥이 부탁한 선물입니다·”
“···그게?”
“네· 모두에게 각자 하나씩 돌아가도록 제게 시안을 주었습니다·”
티마뉴크의 해맑은 발언을 두고 마이스터와 아크메이지는 잠시 말을 잃었다·
“마침 두 분의 것이 완성되었네요· 자 받아 가세요·”
그리고 그런 그들의 손 위에는 얼마 안 가 고운 디자인의 손수건이 얹어졌다· 그들을 모티브로 짠 듯한 각각의 문양을 배경 삼아 산문 하나가 적혀 있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느니·
선한 인간은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시간아 멈추어라 너는 정말 아름답다·
괴테· 희곡:파우스트·」
비록 마지막 문장은 알 수 없는 글자로 적혀 있었지만 이것을 적었을 사람의 마음만은 분명 전해졌으니·
아크메이지의 눈가에 일순 눈물이 맺혀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