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점혈을 예약할 수 있다고?
후공은 두 아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희는 반 소저께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던 모양이지?”
“형님 반 소저께서 겸손을 표하신 겁니다· 박학다식한 건 반 소저입니다· 점혈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시는데 어찌나 재밌던지 저희는 그저 경청하기 바빴습니다·”
반교인이 손을 휘저으며 웃었다·
“호호 과찬이세요· 두서없이 이런저런 말씀을 드렸을 뿐인걸요·”
“두서없긴요· 아참 큰형님· 청월문 장문인께서 사용하시는 무기가 뭔 줄 아세요? 한번 맞춰보십시오·”
부몽이 갑자기 문제를 냈다·
장문인 반광은 아예 무기를 소지하지 않고 찾아온 터였다·
이 또한 오해의 여지가 없게 마음 쓴 반광의 배려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후공은 반광을 마주하는 동안 오른손 엄지와 검지 또 그 마디의 흔적을 이미 읽은 터라 답을 알고 있었다·
– 붓·
솔직히 의외이긴 했다·
외모만 봤을 때 반광에게 어울린다 싶은 병기는 망치였기 때문이었다·
기괴한 웃음소리며 용암물을 한 사발 들이켠 듯한 우렁찬 목소리 거기에 체형까지 망치가 여간 잘 어울리는 것이 아니어서 당장 녹림왕 옆에서 망치를 들고 있어도 위화감이 없을 것 같거늘 뜻밖에도 판관필이었다·
하긴 곱상한 미모의 구천협녀(九天俠女)는 독문병기가 철장(쇠몽둥이)이었고 그걸로 패고 다녀 철장마녀라는 별칭이 생기기도 했으니 외모가 다가 아니긴 하다·
“글쎄·”
“판관필을 쓰신대요· 그게 뭐냐면 쇠로 만든 붓이랍니다· 그것으로 혈도를 점혈한다니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요·”
“오호 장문인께서 점혈법의 대가이신 게로구나·”
“네 큰형님 저도 이참에 청월문에 입문해 점혈 비기를 배워볼까 싶습니다·”
부몽의 농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 와중에 반교인은 내심 의아함이 커지고 있었다·
지난번 만났을 때도 느꼈던 것인데 오늘은 더욱 확실해졌다·
천화서고 대공자에게서 우울한 기색이나 어두운 그늘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도리어 이제 두 번째 본 것임에도 안색은 화사하고 언행은 호감이 생길 만큼 자연스러웠다· 뭐라도 된 듯 무게를 잡지도 않고 한 번씩 편히 말을 하는데도 마냥 가벼운 느낌도 아니었다· 과시하지 않음에도 존재감이 우러나온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지난 만남 때처럼 묘하게도 대화와 분위기를 대공자가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니다· 적절히 추임새를 넣는다든지 시선을 던지고 옮긴다든지 표정을 바꾼다든지 하는 것만으로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대공자 중심으로 흘러갔다· 미소에는 여유가 묻어나고 반응을 보이는 표정도 다채로웠다·
게다가 이 형제들은 우애도 좋아 보이지 않는가·
‘정말 소문은 대체 뭐였지?’
“소저? 반 소저?”
“···네?”
잠시 생각이 깊어진 탓에 반교인이 뒤늦게 반응했다·
부른 건 천화서고 이공자 윤이었다·
“하하 이거 제가 대답하기 난처한 질문을 한 모양입니다·”
“그게····”
못 들었다고 말하기에는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반교인이 머뭇거리니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공자였다·
“녀석아 반 소저가 난처해하시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점혈이 무슨 맡겨둔 물건도 아니고 어떻게 몇 시간 뒤에 효과가 나타나게 할 수 있단 말이냐!”
“흐흐 하긴 그건 좀 무리일 테죠·”
범윤이 스스로 상상력이 지나쳤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 물음이 이것이었구나· 점혈 후 몇 시간 뒤에 점혈의 효력이 발휘될 수 있냐고?’
대공자의 핀잔 소리에 반교인은 질문을 이해하고 미소를 찾았다·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당연히 본문도 그렇고 일반적으로는 무리겠지만요·”
“그게 가능하다고요?”
윤과 부몽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전설적인 상승점혈법 중에 후혈법(後穴法)이 있다고 하셨던 기억이 나네요· 물으셨던 것처럼 이미 점혈을 했음에도 결과가 한참 뒤에 나온다고 합니다· 신기한 일이죠· 무슨 예약해놓은 것처럼 말이에요·”
“와아 그게 되는 것이었군요·”
“형님 어쩌죠· 소저께서 된다고 하시는데요?”
“호호호!”
반교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공자가 놀리듯 말하니 대공자가 ‘크흠’거리며 애써 불편한 기색을 드러낸 것이다·
반교인은 바로 대공자 편을 들며 수습에 들어갔다·
“하지만 대공자의 말씀도 틀렸다고만 볼 수 없답니다· 후혈법은 말 그대로 전설로만 거론되는 상승 절학일 뿐 누가 언제 어떻게 펼쳤는지에 대한 건 밝혀진 바가 없으니까요·”
“전설이라 해도 누군가는 펼쳤으니 알려진 것일 테죠· 형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크흐흠·”
대공자의 기침 소리는 더 커졌다·
그러곤 짐짓 화가 난 듯 아우들을 꾸짖었다·
“너희가 날 놀리는 취미가 붙었나 보구나· 꼴도 보기 싫으니 둘 다 썩 물러가거라·”
질책이어도 과장되고 꾸며낸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났기에 윤과 부몽은 의미를 바로 알아차렸다· 큰형님이 반 소저와 따로 이야기를 나누려 하는 것이다·
“어이쿠 그럼 저희는 이만 도망갑니다· 가자 부몽·”
“네·”
둘만 남게 되자 반교인이 빙긋 웃음을 머금었다· 수줍음도 옅게 드러났다·
“대공자께선 제게 무엇이 궁금하실까요?”
똑똑함이 마음에 들어 후공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서문세가에 대해 묻고자 합니다· 가주의 직계 그리고 안휘 북부에서 서문세가와 끈끈한 연을 맺고 있는 가문이나 문파 혹은 적대적인 세력이든 아시는 것이 있다면 모두 들려주십시오· 이번 논란을 원만히 마무리하고 싶습니다만 제가 안에 틀어박혀 있어 서문세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습니다·”
***
“또 먼 길을 가셔야겠군요·”
후공은 산문 앞에서 작별을 고했다·
그 뒤로 윤과 부몽 호위대가 서 있었다·
“퀄퀄퀄 대공자! 본문의 행사가 끝나는 대로 내 한번 초대하리라·”
“갑작스레 찾아온 불청객이었을 텐데 반갑게 맞아주셔서 감사드려요· 또 뵙길 바라고 있겠습니다·”
부녀도 인사를 건넸다·
둘이 한참을 걸어 천화서고인들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장문인 반광이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교인아 대공자 말이다·”
“네·”
“사람이 좀 이상하지 않더냐?”
“왜요?”
“퀄퀄퀄퀄 멀쩡해 보이는데 이상하게 웃더란 말이지· 뿌뿌거리며 말이다· 근데 그리 웃으면서도 사람이 자각이 없어 보이니 원·”
“···”
반교인이 멈춰 아버지를 말없이 바라봤다·
“퀄퀄퀄 왜 그러느냐?”
“아버지·”
“퀄퀄 무슨 일이기에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고·”
“···”
“퀄퀄 이마에 땀도 맺히고·”
“얼른 가요·”
“퀄퀄퀄 같이 가야지· 혹여 무슨 일이 있었던 게야?”
***
‘청월문은 됐고 남은 건 서문세가 하나로군·’
늦은밤 뜰을 천천히 거닐며 후공은 생각을 정리해갔다·
서문세가 하나라 해도 쉽다는 뜻은 아니었다·
명망가에 대대로 쌓아온 강호 십대 세가의 저력은 무시할 수 없다·
옳고 그름 따윈 중요치 않다·
강호에서 진실의 여부보다 쓸데없는 것이 또 어디에 있을까·
진실은 언제라도 왜곡될 수 있다·
그래서 믿어달라고 외치는 건 징징거림이 될 뿐이다·
꼴만 우스워진다·
무림맹에 도움을 청한다?
그저 나오느니 웃음뿐·
명성과 힘은 여러 묘기를 부리는 법이다·
그렇기에 냉정히 현실을 직시하면 서문세가를 대적할 방법은 없다·
그건 모두가 알고 있다· 서문세가도 그리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믿음이 유일한 길이기도 하지·’
삶은 역설· 믿음이 만용이 되면 틈이 생긴다·
그 틈을 따라 비집고 들어가 정확히 칼을 겨눈다면 서문세가를 무너뜨릴 수 있다·
달리 생각해보면 이쪽이 지닌 무기도 충분하다·
살아있는 증거물인 총관·
서문세가의 자만심·
천화서고 내 기상천외한 진법과 기관·
범항의 방대한 지식과 재능·
그리고 전직 무림맹주의 연륜과 능력·
‘크흠 내 능력은 조금 더 키워야겠다만····’
여기에 하나를 더하자면 외부의 조력자가 필요하다·
그리되면 꽤 근사한 그림이 나올 수 있다·
물론 그림이 완성되기까지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모든 과정을 매끄럽게 처리해야 한다·
그렇게 고심하며 계획을 세밀히 검토하고 있자니 그 모습이 자못 심각해 보였나 보다· 아까부터 뒤쪽에서 슬금슬금 따라 걷는 세 사람이 있었다·
“부몽 형님께서 흠뻑 빠지신 듯하구나·”
윤이 나직이 소곤거렸다·
부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요· 큰형님은 계속해서 떠오르나 봅니다·”
“누가요?”
둘의 대화에 송화가 속삭이며 끼어들었다·
부몽이 갸웃했다·
“송화야 넌 자칭 큰형님의 그림자라면서 영 눈치가 없구나·”
“혹시 그 빠졌다는 분이 반 소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당연하지· 반 소저가 떠난 뒤로 줄곧 저리 넋을 놓고 계신 상태가 아니냐·”
송화가 빤히 부몽과 윤을 바라봤다·
어째서인지 불쌍하다는 표정이어서 두 공자는 살짝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 한심하다는 얼굴은 뭐냐?”
“공자님들 죄송한데요 두 분 모두 여자를 사귄 적 없으시죠?”
“그 그렇지·”
윤과 부몽이 더듬거렸다·
송화가 피식 웃었다·
“흠뻑 빠졌다면 아마 반 소저 쪽일걸요· 반면 대공자께선 아예 관심이 없으시고요·”
“그 그걸 네가 어떻게 안다고!”
“훗 다 알죠· 여자들은 쉽게 안답니다· 두 분께서도 만약 한 번이라도 연애를 해보셨다면 알아보셨을 텐데요·”
윤과 부몽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송화가 배시시 웃었다·
“놀리려는 건 아니니 오해 마세요·”
“그럼 큰형님이 왜 저리 심각해하신단 말이냐?”
“그건 너무 쉽죠·”
이것이 여자의 직감인가· 두 아우놈이 내내 헛다리를 좌로 우로 짚는 말에 코웃음이 났는데 송화만은 달랐다· 제대로 꿰뚫어 보고 있는 듯했기에 후공은 자신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다·
‘괜히 그림자가 아니로구만·’
송화의 입이 열렸다·
“대공자님께서 어디 보통 분이신가요· 분명 서문세가를 어찌 대적할지 심대한 계획을 떠올리시고 계셨을 테죠· 그러다 그만 막막해져 다른 고민에 빠지신 거예요·”
“다른 고민?”
“네 그건 바로 야식·”
“야식?”
“답이 안 나올 땐 야식만 한 게 없다고 늘 말씀하셨거든요· 그런데 이젠 야식으로 뭘 먹어야 좋을지 고민이 되신 걸 테죠·”
송화의 태도가 굉장히 당당했다·
윤과 부몽이 욕을 참느라 입술을 앙다물었다·
물론 후공도 퀭해졌다·
대체 누굴 믿은 건가·
‘그림자 따위 믿는 게 아닌데····’
굳어있는 것도 잠시 후공은 성큼성큼 처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만 따로 불렀다·
“형님 부르셨습니까·”
“윤아 네게 부탁할 것이 있다·”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이틀의 시간을 주마· 너의 능력이라면 충분하겠지· 본 서고의 외부진법을 절벽 너머까지 확장해 놓거라·”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고 굳이 그럴 이유가 없다 싶었기에 윤이 갸웃했다·
“형님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별일 아니다· 그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수비를 튼튼히 하려는 것뿐이다· 그리고 난 며칠 명상에 들 것이니 그리 알거라·”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