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소저, 달빛이 아름답습니다·
다음 날 저녁·
좌정하고 있던 후공이 운기를 마무리했다·
“왔구나·”
나직한 음성은 색관조에게 전해졌다·
[왔다 왔어!]
[그윽 그윽!]
색관조는 날아 점창 장문인에게 소식을 전했다·
[장문인 주인님께서 지천이 왔다고 전하라 하셨어요·]
장문인은 시선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검을 집어들고 몸을 일으켰다·
자신은 아직 감지하지 못했다·
한데 대공자는 알아차린 모양이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원래라면 의심해야 마땅한데 점창 장문인인 자신이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겪어서겠지· 어떤 의문도 없이 무턱대고 믿고 있으니 어찌 이렇게 되나 싶어 고개를 휘젓게 된다·
색관조의 날갯짓은 천공단에게로 향했다·
그렇게 지천의 각주 목광을 마중 나간 건 천공단의 일부·
산의 초입에서 땅을 뚫고 나온 목광이 밤의 적막함에 뒤덮인 점창산을 올려다봤다· 자신은 사신· 점창산 지하를 뚫고 위에서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는 일· 이곳부터는 신법을 펼쳐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막 신형을 날리려던 목광이 멈칫했다·
“여어~ 지천이냐!”
“늦어어어어!”
“뭘 꾸물대고 있었던 거냐!”
스스스슷·
목소리가 들렸다 싶은 순간 수풀을 빠르게 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섯 인영이 엄청난 속도로 다가왔다·
목광이 놀라 주춤 뒷걸음질쳤다·
‘···?’
놀랄 수밖에 없다· 이들의 말 지천이냐는 말· 자신은 이제 막 땅을 뚫고 나온 터인데 어떻게 자신이 도착한 것을 알고 마중 나올 수 있단 말인가·
그사이 항마삼협과 낭인왕 무흔신투가 목광 앞에 이르렀다·
“올라가자· 멍청한 얼굴로 뭐해?”
“너희는?”
“천공단· 들어봤지?”
“····”
목광도 들었다·
대답은 할 수 없다·
지천의 진짜 상대를 알게 된 것이다·
‘아! 천화서고 대공자였구나·’
상념도 잠시
신법을 펼쳐 산을 올랐다·
한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자신이 예상했던 분위기가 아니었다·
원래 이런 상황에서는 숨막힐 듯한 무거운 공기가 흘러야 마땅한데 이놈들 이상한 것이다· 계속 말을 걸어온다· 너무 쾌활했다·
불편하지 않았냐 땅속으로 왔냐 밥은 챙겨 먹고 다니냐는 등 하등 쓸데없는 말이었고 대답을 안 하면 대답을 왜 안 하냐고 성질을 내니 목광은 잠시 자신의 목적을 잊을 정도였다·
그래도 한 놈은 조용해서 다행이었다·
뒤에 따라오는 추레한 노인만은 고요했다·
너무 조용하고 인기척도 느낄 수 없어 따라오긴 따라오나 싶어 고개를 돌려 보면 부드러운 발걸음으로 바로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지천아 다 왔다·”
낭인왕이 전각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
“넌 왜 자꾸 대답을 안 해·”
“···어·”
눈에 보이는데 도착한 걸 모를까·
하나마나한 소리라서 대답을 안 했던 목광은 꾸지람이 이어질까 봐 어정쩡하게 답했다·
‘이게 아닌데····’
“가자·”
“그러지·”
낭인왕이 목광을 데리고 천천히 한 전각으로 향할 때 항마삼협이 전음을 발했다·
– 신투! 똑같이 할 수 있겠어?
– 나 무흔신투야·
– 흐흐 잊고 있었네·
– 근데··· 그보다 솔직히 나 무서워·
호기로움도 잠시 무흔신투가 울상을 지었다·
– 무서운 게 정상이지· 그렇게 크는 거고·
– 난 크고 싶지 않단 말이다!
– 클클 그건 우리 알 바 아니고·
*
방으로 안내된 목광은 기괴한 광경과 마주했다·
“와서 앉아·”
좌탁 너머 상석에 젊은 서생이 앉아 있고 좌탁 옆쪽에 점창 장문인이 보조하듯 자리를 잡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되면 기괴하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앉으라 말한 것도 젊은 서생이었다·
잘못 본 건 아니었다·
그는 점창 장문인의 인상착의를 알고 있었다·
왜 이렇게 되는 것인가?
도착해서부터 온통 이상한 광경·
목광이 다가가 자리했다·
“지천의 각주 목광이라 하오· 그대는 천화서고 대공자인가?”
“묻는 말에만 답해라·”
목광이 흠칫 몸을 떨었다·
나직한 한마디 말과 함께 그저 바라볼 뿐인데 숨이 턱 막힌 탓이었다·
분위기가 천공단과는 그야말로 천양지차·
“다친 곳은?”
“없··· 없다·”
누구인지가 생략되었지만 모를 수 없다·
점창 장문인의 딸·
거기에 왜인지 하마터면 존대를 할 뻔해서 목광은 그만 더듬고 말았다·
“날짜는 내일 자정을 넘긴 인시(寅時)다·”
“····”
“장소는 서로의 중간으로 한다· 추명산 선인봉이다·”
“그러지·”
그렇게 날짜와 장소가 정해졌다·
목광은 이 대화를 통해 묻지 않고도 몇 가지 사실에 대한 답을 얻었다· 낮을 피해 밤 시간을 약속 시간으로 잡았다· 천화서고 대공자는 지천의 약점을 알고 있는 것·
지천주의 말대로였다·
소주들의 동선까지 파악했을 정도이니 지천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셈이다· 금원장으로 떠났던 삼당주와 그 휘하의 수하들이 당한 것이 확실해졌다·
“몇 가지 묻겠다·”
“····”
“난 너희가 여기에서 멈출 수 있는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가 궁금하다·”
토기(土氣)를 무궁히 받아들이기 이전으로·
사람의 피가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냐고 묻는다·
목광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의 침묵·
후공은 기다림을 끝냈다·
대답이나 다름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방법이 없는 건지도 모른다·
또는 돌아가고 싶지 않을 걸 수도 있었다·
높은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큰 유혹· 무언가를 희생해야 한다 해도 잘못된 길이라는 걸 알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경지로 나아가려는 이들은 수도 없이 많다·
후공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신검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너희가 가진 건 둘·”
“····”
“그런데 하나뿐이더군·”
목광이 놀라 눈을 부릅떴다·
“그 그걸 어떻게····”
그 말에는 내내 고요히 자리를 지키던 장문인 초광도 눈이 커졌다·
대공자는 신검의 회수자·
무림맹을 대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하나를 회수한 건 직접 들었지만 지금 말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지천이 하나만 가지고 있다니?
‘대공자는 이미 지천 내부로 들어가 보았단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들어 놀랐고 지천 각주의 반응이 사실임을 증명한 것과 같았기에 한 번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천 내부로?
그건 아니다·
그저 검연의 공능을 통한 감응·
후공은 지천의 본거지 부근에서 ‘번’과 감응할 때 ‘쾌’를 찾을 수 없었기에 이번 질문은 그저 확인이었다·
반응이 곧 대답·
쾌는 지천의 손에 없다·
이 자리에서 쾌가 어디에 있고 누구에게 전해진 것인지 묻는 건 시간 낭비·
“이야기는 여기까지· 돌아가라·”
“····”
목광은 일어나지 않았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속속들이 지천의 사정을 알고 있는 것에 놀라서만은 아니었다·
떠나기 전 해야 할 일이 있다·
“돌아가기 전··· 확인해보고 싶다·”
**
목광은 지하석실에서 군보와 마주했다·
그들 곁으로 천공단이 심드렁하니 지켜보고 있었기에 둘의 대화는 전음으로 이루어졌다·
– 소주 괜찮습니까?
– 난 괜찮다·
– 날짜와 장소는 정해졌습니다· 그리고····
오고 간 이야기를 전해들으며 군보는 몇 번이고 침음성을 흘렸다·
– 피 외에 복용한 것이 있습니까?
– 전혀·
– 다행입니다· 대공자에게 당한 것입니까?
– 그래·
– 그의 수준이 어느 정도입니까?
– 그는····
당시 붙잡힌 상황을 설명하자 이번에는 목광이 연신 침음성을 흘렸다·
– 쉽지 않은 상대다·
– 이미 복안이 있습니다·
– 독?
– 네·
– 마음에 드는군·
– 소주께서도 피 외에는 그 무엇도 드시면 안 됩니다·
– 물론·
목광은 자리를 옮겨 군호와도 비슷한 대화를 나누었고 비로소 마음을 놓고 점창을 떠났다·
**
약속의 날·
창살이 열리며 초유가 끌려나왔다·
“나 나를··· 어디로····”
겁에 질린 초유 앞으로 호리병이 내밀어졌다·
“마셔라· 이곳에서 마시는 마지막 물이다·”
“마지막이라니···?”
“넌 오늘 점창으로 돌아간다· 그동안 고생했다·”
“어 어떻게····”
“이야기는 돌아가서 들어라·”
“지 진짜인가요?”
멍해진 초유를 향해 목광이 웃으며 다시 물을 권했다·
“물론·”
그 웃음이 선해 보여 초유가 호리병을 받아들었다·
하루 넘게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던 터라 단번에 들이켰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목광의 웃음은 더 짙어졌다·
무색무취·
절현독·
발현 시간은 세 시진(약 여섯 시간) 후·
교환된 후 여인이 점창에 도착할 시간·
그때쯤 독은 활성화될 테고 발작해 미쳐 날뛰며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 모습을 점창이 보고 천화서고 대공자가 볼 것이다·
그렇게 되면
‘미쳐버리겠지· 무너질 테지· 후후····’
거만하기 짝이 없던 어린놈·
천화서고 대공자·
놈도 결국 점창과 불화를 겪을 것이다·
서로를 원망하면서·
그 뒤엔··· 끝이다·
*
추명산 선인봉·
산이라곤 해도 나무 한 그루 찾아볼 수 없다·
대부분이 붉은 토양이고 또 대부분이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어 밤임에도 시야가 확 트였다·
그렇게 인시를 맞이한 가운데 양쪽은 어둠 속에서 마주했다·
한쪽은 지천주와 여섯 각주가
다른 한쪽에는 점창의 장문인과 장로들 그리고 천공단이 위치했다·
그렇게 서로가 인질을 교환했다·
교환이 끝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온 순간
“개새끼들! 다 죽여버릴 거야!”
“그만!”
군보가 분에 못 이겨 악을 지르자 지천주가 나무랐다·
서두를 일이 아니다·
점창이 절망할 시간은 곧 온다·
지옥은 여러 단계를 거칠수록 좋다·
이제 곧 점창에 첫 번째 지옥의 문이 열린다·
‘해가 떠오를 때쯤이면····’
“돌아간다·”
지천이 신형을 날려 산을 내려갔다·
“하아····”
점창의 장로들이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딸은 아버지의 품에 안겨 한참이나 울음을 터뜨렸다·
천공단주와 천공단은 말없이 기다려준다·
얼마든지 언제까지든·
잠시 후 부녀는 진정되었고 초유는 그사이 대강의 사정을 들어 알게 되었다·
“대공자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초유가 진심 어린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웃으며 말하지만 왜 안쓰러워 보이는 건가· 후공은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소저 괜찮다면 은혜를 한 번 더 끼치고 싶습니다만·”
“네?”
“제가 잔재주가 많습니다· 그중에 지친 몸을 빠르게 회복시키는 재주가 탁월합니다· 맡겨주신다면 돕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거짓말이다·
몸을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초유의 체내에 잠복한 독을 빼내는 것·
초유가 가까이 왔을 때 삼악이 알아차렸다· 삼악은 불순한 기운을 견디지 못한다· 공청석유와 융화된 후로는 그런 현상이 더욱 심해져 거의 발작적으로 꿈틀거렸다·
후공이 둘러댄 건 그렇지 않아도 지친 심신·
겁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초유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이미 전음으로 상황 설명을 들은 아버지는 그저 대공자의 배려에 감사한 마음일 뿐·
다시금 그의 눈시울은 붉어졌지만
이미 많이 울어 붉어져있던 터라 다행이었다·
“대공자 부탁하네·”
“그럼 잔재주를 부려보겠습니다· 소저 손을 내밀어보십시오·”
초유가 수줍게 내민 손을 후공이 장심을 맞대고 쥐었다·
“충격이 있을 겁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네·”
대답과 동시에 광풍과도 같은 기운이 휘몰아친 탓에 초유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웅혼하고 따스한 기운이 전신을 둔중하게 이동하니 지나는 곳마다 상쾌함이 말로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일다경·
“소저 달빛이 아름답습니다·”
그 말에 유도되어 초유가 달을 올려다볼 때
삼악의 기운이 독기를 집어삼킨 채 초유의 팔을 타고 손목에 이어 맞잡은 후공의 손아귀로 돌아왔다·
그런 흐름 중에 초유의 팔과 손목이 순간적으로 검게 변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초유는 달을 바라본 탓에 그런 변화를 알아차릴 수 없었다·
알아본 건 초유 외 모두·
손이 놓이고 대공자의 손아귀가 한순간 화르르 타올랐기에 모두는 비로소 안심했다·
지천의 암수가 끝난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남은 건 대공자의 암수·
‘해가 뜨면 지천은 좌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