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내가 왔다·
대공자가 말한 대로였다·
초유는 말로 할 수 없이 몸이 상쾌해졌다·
대공자는 어떤 수단을 쓴 걸까?
떠오르는 의문·
초유의 의문은 그것만이 아니다·
‘왜 천화서고 대공자가 나선 거지?’
대단한 건 사실이나 몸에 활력을 북돋는 것이라면 아버지도 가능할 텐데 아버지는 왜 그에게 양보한 것일까? 더 뛰어나서? 저 나이에?
그렇게 연이어 의문을 떠올릴 때 아버지의 전음이 들려왔다·
– 오랜만에 널 다시 업어보니 좋구나·
– 저도요·
초유도 아버지의 등에 업힌 건 오랜만이었고 좋았다· 어렸을 땐 천천히 거닐었다면 지금은 거친 바람과 함께 밤의 풍경이 순식간에 뒤로 밀려난다·
그렇게 어렸을 때를 잠깐 떠올리던 초유는 아까의 의문을 다시 상기했다·
– 아버지 대공자는 나서길 좋아하는 사람인가요?
주목받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아까의 상황을 되새겨보면 초유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달빛이 아름답다고 말한 것도 이상하고 맞잡은 손을 뗀 후 삼매진화를 일으켜 불길을 일으킨 것도 기이했다·
운치 있고 멋있어 보인 건 사실이지만····
– ··· 굳이 그럴 것까진 없었잖아요·
그렇게 물었다·
아버지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답을 대신한 건 침음성·
장문인은 목이 메어 잠시 진정해야만 했다·
지천이 극독을 잠복시켰다는 대공자의 전음이 떠오른 탓이었다·
놀라면서도 반신반의했는데 초유의 손목이 검게 물들고 손이 새까맣게 변했다가 본래의 피부색으로 돌아온 뒤에야 의심하는 마음을 품었던 자신이 어리석었음을 깨달았다·
그 와중 딸의 시선을 달로 향하게 한 건 대공자의 세심한 배려· 삼매진화를 일으킨 건 뽑아낸 독을 태워 소멸시킨 것뿐이었다·
나였다면?
손을 맞잡아 독기를 유도할 수 없다·
그러한 섬세한 마음의 배려도 자신이라면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 대공자는 멋있어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 ···?
– 그저 멋진 사람이다· 그는 볼수록 놀랍구나·
딸에게 내막을 설명할 순 없다·
대공자의 배려가 옳다·
그래서 멋진 사람이었다·
자신이 더 빛날 수 있음에도 초유에게 다 드러내보였다면 더 큰 고마움을 이끌어낼 수 있었을 텐데도 대공자는 은혜를 끼치고도 이런 오해를 받는다·
그래서 볼수록 놀랍다·
대할수록 깊은 사람이었다·
– 잠시 후면 너도 알게 될 것이다·
– 이 밤에요?
– 그래·
‘잠시 후?’
초유의 시선은 유유히 신형을 날리는 대공자의 뒷모습에 닿았다· 지천주의 두 아들을 사로잡은 이· 그의 웅혼한 내력· 초유로선 당연히 놀랍긴 하다· 당연히 고마움도 컸다·
하지만 잠시 후라니?
점창은 아직 멀었고 이제 하나의 산을 넘었을 뿐이다· 지금은 두 번째 산을 오르고 있을 뿐인데 이런 곳에서 대공자가 무엇을 한다는 걸까?
‘지천이 이곳에 와 있는 건 아닐 텐데····’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 때 아버지의 신형이 멈췄다· 둘러보니 어느샌가 산의 중턱이었다·
내려선 초유가 먼저 본 건 열두 명의 사형과 사저들·
‘어? 왜 이곳에?’
갸웃한 것도 잠시 놀라운 광경에 눈을 부릅떴다·
“흐읍!”
비명을 지를 뻔해 황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사형들과 사저들이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사형들과 사저들 외 한 사람·
점창과는 무관한 사내·
나무에 기대져 있었고 눈에는 악독한 기운이 감돈다·
문제는 저 사내는 이곳에 있어서도 있을수도 없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어 어떻게··· 지 지천주의 아들이 여기에···?’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초유는 믿을 수 없었다·
얼굴을 모를 수 없다· 몇 번이고 지천의 지하 창살 너머로 조롱했던 그 사내였다· 자신의 이름이 군보라고 밝히기도 했다· 쌍둥이라도 난폭함이 얼굴에 가득한 사내·
방금 전 교환되며 서로 엇갈리던 순간조차 자신을 잔혹하게 노려보던 눈빛이 아직도 생생하거늘 왜 이곳에 있단 말인가·
‘분명 저자가 틀림없는데····’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럼 교환된 건 누구인가?
초유가 그렇게 얼이 나간 사이
천공단은 지천주의 첫째 아들 군보를 보자기에 구겨 넣고 들쳐 멨다·
아버지가 돌아섰다·
“이곳부터는 네 사형과 사저들과 돌아가거라·”
“아버지께선···?”
“나는 대공자와 함께 지천의 본거지로 간다·”
“이 이게 다··· 무슨 일인가요?”
“자세한 이야기는 네 사형과 사저들에게 들어라· 듣고 나면 아까 이 애비가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까의 말이라면····
대공자가 멋진 사람이고 볼수록 놀랍다는 말·
그제야 초유도 어렴풋이 떠올랐다·
“서 설마····”
“네 짐작이 맞다·”
“장문인 갑시다요!”
천공단이 부르는 소리에 아버지가 미소를 보이며 돌아섰다· 그 너머로 보이는 건 점창의 장로님들 천공단 그리고····
천화서고 대공자·
눈이 마주치자 그가 옅게 미소 짓더니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별것 아닌 행동인데 이제 초유는 달리 보였다·
대공자의 존재감이 말로 할 수 없이 커보였다·
‘말도 안 돼·’
대체 뭐하는 사람인가·
대공자는 교환을 넘어 지천을 농락하고 있었다·
그 사이
신형들이 눈앞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
지천은 동이 트기 전 도착했다·
해가 뜨려면 대략 일식경 정도가 남은 터·
“벌써부터 점창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듯하군요·”
“후후 그 광경을 두 눈으로 지켜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 상황에선 차라리 죽이는 것이 나을 텐데 차마 그렇게는 못하겠지요·”
둘러앉은 여섯 각주가 저마다 조롱하니 지천주의 입가에도 미소가 어렸다·
햇빛은 지천에게 칼날보다 두려운 것이나 오늘 밝아올 태양은 다르다·
희열이다·
물론 점창에겐 절망이다·
독은 곧 발현한다·
장문인의 딸은 미치광이처럼 발작할 것이고 피를 토할 것이며 울부짖을 것이다· 본래의 청순함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시뻘겋게 변한 눈동자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몸부림칠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모두도 같아진다·
모두가 무너질 것이다·
독의 효능에 의심의 여지는 없다·
극독의 출처는 동맹인 흑전(黑廛)·
흑전은 다루지 않는 것이 없다·
사천성 암시장의 주체로 온갖 보물과 희귀한 영약이며 독약도 다룬다· 비밀스럽게 진행되는 어둠의 경매의 주최자이기도 하며 그로 인해 그들은 더욱 강성해지고 있다·
그러니 독은 발현된다·
점창은 절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시간은 점점 가까워진다·
기다리고 갈망하는 터라 누구 할 것 없이 시간이 더디다 느꼈다·
“놈은 건드리지 마라· 내가 직접 죽인다· 가장 고통스럽게 가장 오래·”
대상이 언급되지 않았지만 각주들은 알아들었다·
천화서고 대공자·
교환 당시 거만한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거만함의 대가는 가혹하고 처절할 것이다·
오래 걸릴 일은 아니다·
계획은 이미 세워져 있다·
복수심에 불탄 점창과 천공단은 오늘 중으로 들이닥칠 터·
그때 지천은 이곳에 없다·
지천은 비어있는 점창을 친다·
남겨져 있을 점창의 어린 제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유린한 다음 사라진다· 그렇게 사흘· 점창의 절망과 슬픔이 극에 달해 있을 때 비로소 전면전·
승부는 우습게 끝날 것이다·
마음이 무너진 자를 상대하는 것보다 쉬운 것이 있을까·
그때가 되면 천화서고 대공자는 지천주의 손아귀에서 발버둥칠 것이다· 지난밤 지어 보인 거만한 표정 대신 비굴한 얼굴이 될 테지·
그렇게 각주들이 달콤한 꿈을 꾸고 있을 때
우당탕탕!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는 이는 없었다·
집기를 부수는 소리였고 진작부터 듣고 있었다·
분노에 찬 고성까지·
그리고 만류하는 소리까지·
지금의 분노는 괜찮다·
지천주와 각주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적을 멸살하는 데 이러한 분노는 좋은 양분이 될 터였다·
*
꽈작! 쾅!
방 안의 집기들이 부서져나갔다·
“그만 좀 해!”
군호의 말은 씨도 먹히지 않았다·
군보는 멈추지 않았다·
책장이며 의자며 화분이며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며 울분을 토해냈다·
“천화서고 개새끼! 죽여버린다! 반드시 내 손으로 죽여버린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콰앙 쾅! 꽈작!
방 안은 이제 남아난 것이 없을 정도였다·
만류하던 군호도 결국 포기했다·
“잘도 죽이겠다· 꼴사납게 당한 주제에 다시 만난다고 달라지겠냐·”
“뭐가 어째!”
군보가 벽을 후려갈기다 매섭게 쏘아봤다·
군호가 피식 웃었다·
“하던 거나 열심히 해· 대신 천장은 부수지 말고· 타 죽으면 억울하잖냐·”
“이 새끼가!”
“왜? 나부터 죽이게?”
“입 닥쳐라· 진짜 죽여버리는 수가 있어·”
“어디 해보든가·”
군호가 정색하면서 방 안 공기가 무거워졌다·
당장 누가 출수한다 해도 이상할 것 없는 살벌한 분위기는 이내 문밖에서 들려온 음성에 깨어졌다·
“해가 뜹니다· 들어가겠습니다·”
수하였다·
그는 난장판이 된 방 안의 모습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창가로 다가가 해가 들지 않도록 두꺼운 암막 휘장을 쳤다·
방 안은 이내 어두워졌다·
그 순간 군보가 나직이 불렀다·
“군호·”
“····”
군호가 갸웃할 때 군보가 창가로 성큼 걸어갔다·
가려진 휘장을 움켜쥐었다·
“네가 못 믿는 듯하니 내가 보여주마· 내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 지금 바로 나아가 천화서고 대공자의 목을 가져오겠다!”
“하하하하!”
군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병신 가지가지 하네·”
“····”
곁에 선 수하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 바로? 이 햇살을 뚫고?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심정이 그렇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군보의 손이 움직였다·
촤악!
가려진 휘장을 걷어낸 다음 창문 너머로 신형을 날렸다·
군호와 수하는 멍하니 바라볼 뿐·
현실감이 없어서였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고 할 수도 없는 일이기에 보았으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군호가 소리쳤다·
“안 돼에에에!”
그대로 창가로 달려가 밖을 바라봤다가 눈을 부릅떴다·
“···?”
그건 수하도 마찬가지·
“···?”
타지 않는다· 불타올라 처절한 비명을 내질러야 하건만 햇빛 아래를 쾌속히 나아갈 뿐이었다·
순식간에 멀어져 사라져가나 쫓을 순 없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지천주와 각주들이 들이닥쳤다·
“무슨 일이냐!”
화경의 극에 이른 지천주다·
그의 수준에서는 두 아들의 고성은 듣기 싫어도 듣게 된다·
“어 어떻게 된 일이냐? 네 형은?”
“아버지 형이··· 바깥으로 나갔습니다·”
“뭐?”
“한데··· 타질 않습니다·”
“넌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형이··· 아닌 것 같습니다·”
쿠웅!
지천주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각주들도 비로소 상황을 이해하면서 망연자실 넋이 나가버렸다·
머리에 떠오른 건
‘당했다·’
치명적인 암수는 자신들만 남겨둔 것이 아니었다·
점창도 같았다·
아니 아니다· 천화서고 대공자다·
역용의 공능자가 천공단에 있었던 것임을 깨달았다·
대체 누구인가?
머릿결이며 억양과 말투 표정과 성향까지 완벽히 복제된 탓에 감쪽같이 속았다· 교환 당시 죽여버리겠다고 분노하며 내뱉던 욕설 돌아오는 길에 신법을 날리던 모습도 지천의 신법이어서 알아차리지 못했다·
의심할 수도 여심의 여지도 없었거늘····
이제 다시 같아진 것인가?
점창 장문인의 딸도 미쳐 몸부림칠 시간이다·
축배를 들려 했는데 찬물이 쏟아졌다·
양쪽 다 하나씩 잃은 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아 아버지····”
군호가 더듬거렸다·
지천주가 걱정스레 미간을 좁혔다·
둘째가 몸을 덜덜 떨며 스스로 자신의 몸을 훑어보고 있었다·
“왜 왜 그러느냐?”
“아버지 몸이··· 이상합니다·”
“어 어떻길래?”
지천주가 아들의 어깨를 붙잡았다·
불안해져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은····”
상대도 독을 썼다고?
“그리고?”
“그리고··· 으으으으····”
그리고 시작·
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득!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군호는 비명과 함께 끔찍하게 뒤틀리고 비틀려가면서 오그라들었다·
목을 휘젓고 뼈마디가 튀어나올 것처럼 울룩불룩해지며 팔다리를 너풀거렸다· 그렇게 점점 뭉쳐 작아져 가는 군호의 모습에 지천주가 덜덜 떨었다·
황급히 마혈을 점혈해 멈춰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멋대로 휘저어대는 팔을 잡았다가 팔만 두득 부러져나갔다·
그 지경에 이르자 몸을 붙잡고 있을 수도 없었다·
미친 발작은 멈추지 않으며 점점 더 뭉쳐지고 작아진다·
점창 장문인의 딸이 보이게 될 발작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끔찍한 광경·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어찌 이렇게 끔찍한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급기야 지천주가 울부짖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기다려라 천화서고 대공자아아아아아아아아! 네놈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잘근잘근 씹어 먹어주마아아아!”
그때 들려왔다·
“지천주 올 것 없다·”
귓가에 꽂히는 나직한 청년의 목소리·
이어 들려온 말은
“내가 왔다·”
그 말이 끝날 즈음 창문 너머로 보였다·
뭔가 번뜩였다 싶은 순간
기묘하게 선회하며 허공을 딛고 선 한 사람·
아침 햇살 아래
거만한 얼굴·
모두가 알아봤다·
‘천··· 천화서고 대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