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화정은 그저 반딧불·
네 줄기 자줏빛 광채가 밤을 질주한다·
모두가 시선을 빼앗겼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어떨 때 시간은 멈추고 어느 순간에는 세상이 정지한 것 같은데 지금 아미파가 그랬다·
찬란한 자줏빛이 질주하는 광경은 실로 장관이었고 아미의 장로 중 몇은 맹주의 신검임을 알아보아 눈이 커졌다·
이미 듣기도 했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맹주의 신검을 찾았고 신검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카르르르르릉!
울부짖는 신검을 보고 있자니
아미는 마치 맹주가 현신한 것 같았다·
후공이 아미를 지키려 이곳에 나타난 것만 같았다·
그리고 비로소 확실히 깨달았다·
숨겨진 의미가 느껴진다·
대공자의 말과 행동이 전부가 아니다·
대공자가 악(惡)일 리가·
신검들이 새로운 주인으로 맞이한 자가 아미를 쓸어버릴 리가· 그저 대공자는 악을 자처하며 백혼곡으로부터 아미파를 지키려는 것· 역설적이게도 백혼곡이 아미를 지키게끔 유도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맹주의 현신····
마치 후공의 현신····
그건 당명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더했다·
‘···대형의 신검들·’
번 쾌 친에 하나가 더해졌지만 감흥을 깨뜨릴 순 없었다· 줄기 줄기 자줏빛을 뿌리는 신검의 폭주를 보고 있자니 당명의 눈빛은 아련해졌다·
어느 한때
대형과 함께 보낸 그 시간으로 자신이 돌아간 것만 같았다·
대형이 떠났을 때는 세상이 사라져버린 것처럼 공허해 혼자만 남겨진 것만 같았는데 지금 이 순간 대형이 곁에 있는 것처럼 공허함이 채워져가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불공평한 것·
누군가에겐 찰나가 영원이나 누군가에겐 급박하게 흐른다·
극진마군과 파양마군에겐 그야말로 찰나·
파양마군을 향해 짓쳐드는 자줏빛 광채는 빛살처럼 빠르고 위협적이었다·
물론 걱정은 없다·
‘제법이다만····’
극진마군의 시선엔 여유가 있었다·
파양마군은 삼백 년 전 혈교의 교주!
백혼곡의 서열 또한 세 번째다·
자신은 아직 현경 초기인 예이나 파양마군은 현경의 중에 이르렀지 않는가·
화경과 현경의 차이는 천지격차·
결코 다가갈 수 없는 힘의 차이가 존재한다·
그리고 현경의 예의 경지와 중의 경지 또한 아득하다·
그런 파양마군이 당할 리가·
극진의 생각대로였다·
‘후후후····’
파양마군의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저 우스울 따름·
청성에서 농락당했기에 혹여 놀랄 만한 한 수를 지녔나 기대했거늘··· 같잖다·
고작 이기어검인가·
고작 비검인가·
그리고 느리다·
‘화연(火聯)!’
각각 방위를 달리해 날아드는 자줏빛 광채를 바라보며 불의 기운을 발출했다·
화연은 투명한 불의 밧줄·
네 줄기의 실타래·
화연이 질주해오는 자줏빛을 붙잡아 옭아맸다·
폭주하며 쏘아져가던 검령과 번쾌친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붙들린 채 허공에서 몸부림쳤다·
빛마저 서서히 잃어가는 광경에 천공단이 얼어붙고 후공의 눈에도 이채가 떠올랐다·
실망스런 마음도 감추지 못했다·
원래라면 번쾌친은 붙잡힐 수 없다·
그렇게 제련되었고 모든 걸 깨뜨려야 했다·
후공이 번쾌친을 향해 자신의 그런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오늘 내가 죽는구나· 너희와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주인과는 의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불길함을 감지한 검령과 번쾌친이 울부짖었다·
까르르르르릉!
크르르르르르르릉!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잃어가던 빛을 되찾고 울음을 터뜨렸다·
주인의 체념· 실망·
여태껏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목소리였다·
아니겠지?
그럴 리 없다· 주인이 죽을 리가·
하지만 불안함은 쉽게 떨쳐낼 수 없었다·
어떻게 다시 만난 주인인가·
결코 다시 잃을 수 없다· 이 속박을 빠져나가야 한다· 벗어나 주인의 적을 갈가리 찢어버려야 한다·
주인의 경지가 낮아졌지만
우리는 우리만큼은 지난 시절의 힘을 되찾아야 한다·
우리는 그대로이니!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거칠게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다·
하지만 소용없다·
‘히히히히히!’
파양마군이 히죽거렸다·
검들이 어찌 다시 기운을 회복해 빛을 뿌리는지 어찌하여 다시 맹렬히 꿈틀거리는지 기묘한 느낌을 받긴 했지만 단지 그뿐·
히히히!
결코 화연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스윽!
신형이 사라졌다 싶은 순간 파양마군의 신형은 이미 후공의 눈앞에 도달했다·
손을 내밀어 열화의 기운으로 목을 그어가던 순간
파파팡!
떠오른 건 세 개의 환명·
눈앞에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광경에 파양마군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그의 손이 빨려들어가 정체되어 머무는가 싶을 때는 이미 환명이 꿰뚫렸다·
“히히히히히히히히!”
웃음의 끝·
극렬장!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기운으로 목을 그었다·
후공은 목이 잘려나가는 대신 그대로 날아가 전각의 벽을 연거푸 뚫고는 처박혔다·
전각의 뒤편으로 뿌옇게 흙먼지가 퍼져나오고 주인의 기운이 급격히 잦아들어 가기에 번쾌친이 미칠 듯이 요동쳤다· 심지어 주인과의 이어짐이 끊어지려 하는 것이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주인을 잃게 된다·
다시 주인을 잃게 된다·
주인이 의식으로 전해온 작별이 현실로 닥쳐오는 탓에 번쾌친은 아미파가 울릴 정도로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런 울부짖음은 파양마군의 미소만 더 짙게 할 뿐이었다· 그런 한편으로 의문도 떠올랐다·
‘어떤 묘리지? 마치 검들이 살아있는 것 같지 않는가·’
천화서고 대공자가 직접 운용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니 검들이 스스로 발현한다는 의미· 어쩌면 뜻밖에도 재밌는 장난감을 얻게 된 건지도 모른다 싶었다·
그 와중
기회를 놓칠 극진마군이 아니었다·
천공단인지 천궁단인지가 넋이 나가버렸다·
그리고 자신이 상대해야 할 이도 상태는 마찬가지·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오만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묵빛의 장포를 걸친 이가 당혹해하며 고개까지 돌리고 있었기에
‘후후 눈을 뽑아주마!’
감히 나를 아무것도 아닌 사람 취급했던 너의 눈·
감히 나를 앞에 두고 한눈을 팔고 있는 눈·
그 눈을 뽑아 으깨주마!
생각이 끝나기도 전 이미 극진마군은 눈을 뽑아갔다·
그만큼 그의 신형은 빨라 손가락은 어느샌가 당명의 눈을 파고들었다·
물컹한 감촉 그 안에 눈알의 단단함이 벌써부터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당명이 부서져내렸다·
부스스스스스!
마치 수만 개의 종잇조각으로 찢어지고 흩어지는 것처럼 부서져 내렸다·
“···?”
스악·
헛손질을 하고 만 극진마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게 무슨?’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분명 놈은 무방비였거늘 어찌 이미 허상일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더 놀라운 건 여전히 눈앞에서 얼굴이 흩어지며 부서져 내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미 이곳에 없는데도 말이다·
이는 귀원공(歸元功)·
귀원공이 펼쳐지면 형체는 비산하고 흩어진 잔영만 남게 된다· 그것이 적에게는 공포·
그리고 이미 당명은 다른 곳에 있었다·
전각의 뒤편 언덕에 파묻히다시피 처박힌 천공단주 곁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 단주 괜찮나?
– 제가 괜찮아 보입니까?
영차 하는 소리까지 내며 흙더미에서 빠져나오는 모습에 당명이 피식 웃었다·
– 멀쩡하군· 왜 그런 건가?
왜 제대로 맞서지 않았느냐는 물음·
알아본 것이 기특하기도 하고 역시 내 아우다 싶어 후공도 웃고 말았다·
– 각성을 촉구하던 중이었습니다·
– 각성?
각성은 번쾌친의 각성·
검령은 제련의 날이 짧아 논외로 치더라도 번쾌친은 검령과는 달라야 했다· 고작 이 정도의 기운도 풀어내지 못하고 옴짝달싹 못 한다는 건 후공 입장에선 어이없는 일이었다·
1년 여를 떨어져 있었다 해도
번쾌친은 이미 지나온 길이거늘 정점에 올랐거늘 어찌하여 검령과 같은 수준에서 헤매고 있단 말인가·
그렇기에 겁을 주었다·
영영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의식을 녀석들에게 투영했다· 남은 백혼곡의 마두들이 어디 한둘인가·
지금도 연결은 희미하게 두었고
의식을 분리해 여유로움과 자신만만함은 번쾌친에겐 숨겼다·
하지만 단숨에 해결되는 일은 아니겠지·
– 이야기는 나중에·
당명도 바로 의미를 알아차렸다·
놈들이 짓쳐들고 있음이다·
순간
바삭!
이미 여러 구멍과 벽이 무너져내렸던 전각이 먼지가 되어 통째로 날아갔다·
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건 소맷자락을 휘둘러 전각을 날려버린 파양마군이었다·
멀쩡한 모습을 확인한 파양마군이 고개를 갸웃하며 웃었다·
“후후 애송이 주제에 제법 몸이 튼튼한걸?”
“넌 화정에 닿았나 보구나·”
“오호!”
파양마군이 감탄했다·
자신이 펼친 건 화연과 염화 둘뿐이거늘 어린 애송이가 자신의 근간을 간파한 것이다·
“후후 제법이구나· 실로 제법이야· 하지만 이를 어쩐다· 안다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는걸? 히히히히히!”
의미가 없을 리가·
후공이 미소를 머금었다·
너는 화정을 취했지만 여기는 화극이다·
화정은 화극에 비하면 그저 반딧불·
아직 화극이 일주에 불과하다 해도 화정의 극성을 뛰어넘는다·
그 화극일주에 허운과 통격이 더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기에 후공은 바람이 되어 나아갔다·
‘히히히!’
웃음을 머금은 건 파양마군도 마찬가지·
삼백 년 전 혈교의 교주는 그저 우스울 따름·
고작 스무 살 남짓인 핏덩이가 불나방처럼 불길로 들어오는 모습으로 보일 뿐이었다·
화극의 극성·
염화의 불꽃을 일으키며 마주해갔다·
태워버린다!
그렇게 화정의 기운과 화극의 기운이 충돌한 순간 불길이 솟구쳤다· 보이는 건 사람이 아닌 오직 두 개의 푸른 불꽃뿐· 사람의 형체를 띤 불꽃은 한곳에 머물지 않고 사방으로 비산하며 춤췄다·
춤춘 건 신형만이 아니었다·
파양마군의 눈동자도 춤추듯 요동쳤다·
‘어··· 어떻게?’
믿을 수 없었다·
놈이 불타지 않는다·
아니 아니다· 자신의 몸이 뜨거워진다· 어떻게 화신(火身)을 두른 자신의 몸이 뜨거워질 수 있는가?
‘놈도 화정을? 나보다 더한 불의 정수 불의 극단에 이르렀다고?’
아니다·
이는 화극·
이름이 같다 하여 같은 화신일 수 없고 똑같이 지옥의 불길 염화라 이름붙였다 해도 같을 수 없다·
화정은 그저 화극의 잔존물일 뿐·
비록 일주에 불과하다 해도
‘뜨 뜨거워!’
불꽃 속에서 파양마군은 공포에 젖어갔다·
몸이 점점 타들어간다· 몸 안에 흐르는 피까지 펄펄 끓고 있었기에 두려움이 차 올랐다·
삼백 년을 지나 겨우 나왔는데
아미를 멸하지도 못했는데 몸이 타들어간다·
어떻게 된 일인가?
어떻게 모든 기운을 흘려보낼 수 있지?
어찌 반탄되어 오기도 하는 것인가?
어떻게 내 피를 문자 그대로 끓어오르게 하는 것인가?
놈이 누구길래?
파양마군이 지옥의 불길 속에서 물었다·
푸른 불꽃에 휩싸인 채 후공의 대답은 그저 무심한 시선·
그 무심한 시선에 파양마군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더 더는···· 사 살려줘·’
마음으로 빌어보았지만 늦었다·
피가 부글부글 끓어오를 지경인 파양마군의 움직임이 더할 나위 없이 둔해진 순간
후공의 손길이 파양마군의 머리에 내려앉았다·
부서지지 않는 북해빙궁의 빙벽을 한순간에 녹여낸 염화의 불길이 고스란히 떨어져내린 순간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파양마군이 불타올랐다·
미칠 듯이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 너풀대며 요동친 것도 잠시 잿더미가 되어 무너져내렸다·
그사이
당명도 이미 끝을 맺고 있었다·
현경의 예에 이른
하지만 어느샌가 피범벅이 되어 피를 게워내는 극진마군의 눈을 뽑아내고 있었다·
“너··· 아까 이상한 행동을 하던데?”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