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화· 장문인은 경지만으로 선택되지 않는다·
해가 저물어갈 즈음
죽립 사내는 합달산에 있었다·
청해성 중서부·
곤륜산에서는 한참 북쪽·
“늦는군·”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저 멀리에서 한 신형이 보였다·
놀라운 속도로 올라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삶은 늘 그렇다· 참다 참다 왜 오지 않느냐고 할 때 기다리는 사람이 오기 마련·
이내 눈앞·
흰 눈썹의 흑의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내 인사를 건넸다·
“하하! 곤륜 장문인 늦었소이다·”
“넌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군·”
“제곤 진인· 원래 그대가 불려야 할 이름이고 본래 장문인의 위(位)도 그대의 것이었으니 쓸데없는 소리는 아니지 않소이까·”
죽립 안 제곤의 눈이 악독해졌다·
순간 주변의 풀들이 자라나 흑의 중년인을 향해 길게 뻗어나왔다·
스아아아악!
흑의 중년인이 신형을 뽑아 올리려 했지만 역부족· 넝쿨에 뒤덮이듯 삽시간에 몸이 친친 감겼다·
목을 조여가던 두 줄기 풀 끝이 살아있는 뱀처럼 흑의 사내의 두 눈앞에 어른거렸다·
“눈은 하나만 있어도 볼 수 있겠지?”
“두 개면 훨씬 좋지요·”
흑의 중년인이 실실거렸다·
“그래?”
“농담이오 농담· 사과드리리다·”
흑의 중년인이 웃음기를 지웠기에 그제야 풀들이 스르륵 그의 몸에서 떨어져나갔다·
하지만 이제 제곤이 감겨갔다·
옛 기억에 휘감겼다·
원래라면 곤륜 장문인·
그 전 어느 시절에는 곤륜의 대사형·
제곤에겐 잊고 싶은 기억이었다·
하지만 잊은 적은 없었다·
잊을 수도 없었다·
‘협잡과 모함에 의해 곤륜에서 파문당한 그날을 잊을 수 있을 리가·’
단전이 파괴되었고 경맥이 절단당했다·
겨우 목숨만을 부지하고 곤륜을 내려온 그날·
산 아래에서 쓸쓸히 곤륜을 올려다보았다· 쓸쓸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어 떠오르는 건 복수심·
언젠가는 피로 물들이리라·
피로 물든 곤륜을 지켜보리라·
가증스런 곤륜이 파멸하는 것을 지켜보리라·
나를 버린 오늘을 후회하게 만들겠다·
그렇게 다짐하며 살아왔다·
그러니 곤륜 장문인이라 불리는 건 반갑지 않다·
“소식은 들었소·”
흑의 중년인은 다시 미소를 되찾았다·
싱글벙글 말을 이었다·
“곤륜의 선택이 뜻밖이더구려·”
“난 마교의 선택이 뜻밖이더군·”
“하하 물론 그 말도 맞소이다· 본교의 소교주가 소호탈마대를 제어했던 것이겠지요·”
“흥!”
제곤은 콧방귀를 뀌었다·
원래 계획은 소호탈마대가 곤륜을 쓸어버리는 것이었고 눈앞의 신기마군은 그리될 것이라 장담했다·
“차라리 잘된 일 같습니다만?”
“내겐 그렇지·”
“후후 그럼 이제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원하던 건 하나·
곤륜을 직접 멸문시킨다·
“너흰?”
“거의 끝나 갑니다· 대부분이 돌아섰습니다· 풍제 픙혼마제의 시대는 가고 새로운 마교가 다가옵니다·”
“후공이 없으니·”
“그렇지요· 후공이 떠났으니 풍제도 떠나야 마땅하지요· 그리고····”
“···?”
“그대는 나의 상관이 될 테지요·”
“후후후·”
“흐흐흐·”
함께 웃었다·
풍제가 폐관을 마치고 나올 때 보게 될 광경은 새로운 마교 새로운 세계일 것이다· 어떤 얼굴을 하게 될지 기대되어 웃음이 났고 흥건한 피로 물들어갈 곤륜을 생각하니 또 웃음이 났다·
소교주 도운연도 돌아와 보게 되겠지·
바뀐 세상을 새로운 천마신교를·
중년 사내 신기마군이 작별을 고했다·
흐르듯 사라지면서 이내 저 멀리 보이는 신기마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제곤이 죽립을 벗었다·
기괴한 얼굴이 드러났다·
이목구비는 반듯하나 기괴한 건 안색·
옅은 초록색과 짙은 녹색이 혼재된 낯빛이었고 눈동자는 진한 녹빛으로 번뜩였다·
저물어가는 석양을 바라봤다·
햇빛에 닿았기에 목(木)의 기운으로 충만한 눈빛이 시시각각 색을 달리했다· 마치 다양한 꽃의 색상들처럼 노랗게 되었다가 붉게 되었다가 하얗게 되기도 했고 검게 물들어가기도 했다·
‘내일··· 곤륜은 최후를 맞이하리라·’
마음은 이미 곤륜에 가 있었지만 내일로 미루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밤이 되면 잠들게 된다·
오행의 목(木)에 치중한 결과·
의지나 정신력과는 다른 문제·
이내 제곤의 신형이 질주했다·
나아가는 길 산야의 나무와 풀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솨아아아아아아아!
수수수수수수수!
**
그 시각·
어느 산야의 골짜기·
석양 아래 도운연이 손가락을 까닥해 한 사람을 불렀다·
소호탈마대 중 하나가 날듯이 달려와 예를 취했기에 도운연이 짧게 한마디를 던졌다·
“땅 파라·”
“존명!”
도운연은 도운연이 아니었고 소호탈마대 중 하나도 소호탈마대가 아니었다·
무흔신투와 지귀객·
곤륜으로 돌아가는 건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땅속으로 이동하기로 되어 있었기에 지귀객이 지면을 파고들려고 할 때
“잠깐!”
혈령신마가 제지하고 나섰다·
“혈령 무슨 일이냐!”
“닥치고 당장 역용이나 해제해라·”
현 위치는 골짜기·
외부의 시선이 닿기 어렵다·
돌아가는 마당이니 역용을 더는 봐줄 수 없는 혈령신마였다·
“넵!”
무흔신투가 이내 추레한 노인의 모습으로 돌아왔기에 혈령신마가 신투의 목을 틀어쥐었다·
“켁켁!”
“캬캬캬 봐주는 건 이번 한 번뿐이다·”
“크으윽··· 뭘 뭘요?”
“한 번만 더 주군의 모습으로 역용하면 그땐 죽는다·”
시발놈아 내가 하고 싶어서 했냐!
까라니까 깐 거잖아!
안 하면 대공자님에게 죽는다고!
이 새끼가 대공자님 무서운 걸 모르네·
화공신타신데!
그렇게 말할 순 없는 노릇이었기에
“···제가 왜 또 하겠어요·”
켁켁대며 다소곳하게 답했다·
“후우·”
그제야 혈령신마가 손을 놓았다·
“근데 굳이 땅속으로 이동해야 하냐?”
“그럼 각자 따로 갈까요?”
“그 뜻이 아니잖아!”
“속도가 제법 빠르니 걱정 마십시오·”
“캬캬 그래?”
“네 지귀객이란 별호는 들어보셨을 텐데요?”
“느리면 죽어·”
“시발 이 새낀 왜 말끝마다 죽는다고 하는 거야·”
“뭐?”
무흔신투가 하얗게 질렸다·
“방금 들렸나요?”
“속으로 말한 거였냐?”
“네·”
혈령신마가 갸웃했다·
“캬캬··· 나 왜 이상한 재주가 생겼지?”
“축하드립니다! 이제 마음을 읽으시는군요!”
“캬캬캬!”
“하하하!”
혈령신마가 그냥 넘어가준 것이란 사실은 곁에 있는 지귀객도 알 수 있을 정도·
‘분위기 좋을 때 출발!’
구르르르르르르·
바로 땅을 파고 들어갔다·
그 뒤를 무흔신투와 혈령신마를 비롯 소호탈마대가 따랐다·
“캬캬캬 신기한 새끼네·”
“크크크크크!”
“히히히히히!”
**
그 밤·
곤륜 장문인 제금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제곤··· 대사형·’
천화서고 대공자가 생각해보라던 과거의 곤륜 중 결국 떠올린 건 대사형이었다·
‘아니겠지·’
아닐 것이다·
마교 소교주의 시녀를 죽이고 곤륜의 검흔을 남긴 자는 최소 화경의 경지라고 하지 않았던가·
대사형은 그때 무공이 전폐당했다·
내공을 쌓을 수도 없고 평생 검을 들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아직 살아있을 순 있어도 무공을 되찾는 건 무리· 곤륜의 검결을 펼쳐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떠오르는 이는 대사형뿐이었다·
한번 떠오르니 좀처럼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날을 잊을 수 없다·
파문당해 대사형이 곤륜을 떠나던 날·
비틀비틀 걸으며 산을 내려갔다 싶을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드시 곤륜을 피로 물들이겠노라 외치는 소리·
복수를 다짐하는 울부짖음!
분명 대사형의 목소리였다·
“장문인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자리에 함께하고 있는 이는 당명과 후공·
당명의 물음에 장문인 제금이 쓴웃음을 지었다·
“본 문의 장문인은 원래 대사형의 것이었다오· 당연히 이 노도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고 대사형 스스로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소· 곤륜의 제자들은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오·”
“하지만 위쪽의 생각은 달랐군·”
제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쪽·
스승과 전대의 장문인 그리고 장로님들은 생각이 달랐다·
“대사형이 곤륜제일검이 되리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었으나 장문인의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셨던 것이오·”
“흔한 일이지·”
당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공도 옅은 미소로 아우의 말에 동감을 표했다·
한 문파를 이끌어갈 장문인은 경지만으로 선택되지 않는다·
인품과 소양 사람을 두루 아우를 수 있는 이가 장문인으로 선택받는다·
그렇기에 장문인이 한 문파를 대표할 순 있어도 문파의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이라고 볼 순 없다·
현 구대 문파 중 청성이 그렇고 화산과 무당도 그렇다·
장문인보다 경지가 더 뛰어난 이가 즐비하다·
제금의 이야기는 더 들을 것도 없었다·
장문인으로 제금이 내정된 순간 대사형이란 이는 이성을 잃고 반발했을 터·
제금의 말이 이어졌다·
“대사형에게 큰 원망을 받은 건 당연히 본 노도였다오· 왜 너여야만 하냐고 너만 없었다면 이런 상황이 되지 않았을 거라며 날 원망하였소· 그리고 결국····”
제금이 왼쪽 소매를 걷었다·
그의 팔꿈치 위로 긴 검상이 드러났다·
몸을 볼 때면 떠오르는 사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검상으로 아로새겨졌다·
당명이 코웃음쳤다·
“가관도 아니군· 팔 하나일 리가·”
“후후 그렇소이다·”
복부와 옆구리에도 검이 지나갔다·
달려온 스승이 보았고 장로님들이 보았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목에 검이 박혔을 상황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 결과는 파문·
죽여야 한다는 의견과 파문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다투었지만 단전을 부수고 무공을 폐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대사형은 억울해했다오· 끝까지 자신의 뛰어난 재주를 시기해 궁지로 내몬다고 생각했소·”
“거참 재밌는 친구네·”
“후후 그래도 이번 일을 꾸민 자가 대사형은 아니겠지요?”
잔잔히 목소리를 내는 제금을 후공은 물끄러미 바라봤다·
제금의 말이 다르게 들려온 탓이었다·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다른 이었으면 좋겠다는 말로 들려온다·
**
다음 날 정오가 가까워 오는 시간·
대공자가 곤륜을 거닐고 있는 모습에 도운연이 다가왔다·
“대공자 나와 계셨습니까?”
“네 해가 좋아서 걷기 좋군요·”
그 말에 도운연이 맑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고 빛이 강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곤륜에 오른 지도 어느덧 닷새·
그사이 대공자는 그제도 이 시간에 걷고 어제도 이 시간에 나와 거닌 것이다·
꼭 이 시간에 누가 오길 기다리는 사람 같은 모습·
“혹시 이 시간에 숨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
“···?”
대공자가 뚱하니 바라보기에 도운연이 겸연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 어린데 왜 자꾸 주눅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이내 대공자가 손으로 해를 가리켰기에 도운연은 그만 웃고 말았다·
“단지 그뿐이었군요·”
“후후·”
단지 그뿐일 리가·
후공은 그저 예측의 영역일 뿐이라 말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오행의 목(木)을 다루는 이·
그가 과거의 곤륜일지도·
그런 생각이 들었기에 온다면 목의 기운을 왕성하게 끌어낼 수 있는 이 시간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탐지해냈다·
‘온다·’
“도 형 준비는 되었습니까?”
“물론입니다·”
결자해지·
맺은 자가 푼다·
무흔신투와 함께 떠났던 소호탈마대도 새벽에 돌아왔다·
운연은 적을 천공단에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그건 곤륜도 마찬가지·
누군가 곤륜을 노리고 있으니 곤륜이 나서야 할 일이었다·
“그 자가 지금 오고 있습니다·”
“?”
도운연이 미간을 좁힌 것도 잠시 손을 들어 올렸다·
스스슷!
소호탈마대가 유령처럼 도운연 뒤편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곤륜도·
장문인 제금과 곤륜삼선· 뒤를 이어 장로들과 검수들이 쏟아져나왔다·
마교와 곤륜의 연합·
그 너머 지붕 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천공단은 그저 싱글벙글·
“야아 재밌겠다·”
“너무 신나잖아·”
“시발 아주 두근두근하네·”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마교와 곤륜의 연합을 다 보고 말이지·”
“난 마교 편·”
“난 곤륜·”
“육포 있는 사람?”
“나무관세음보살 저도 육포 좀·”
삐리리리~~ 삐이삐~~~ 삐리삐삐~~~~·
금적자의 피리 소리는 신바람이 났고 제곤은 무서운 속도로 짓쳐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