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3화· 괜찮아· 후공을 다시 만나게 될 테니·
천하십객은 어느 때보다 진중해졌다·
“누구일까?”
“설마 그들인가?”
무연객은 회영부를 옥면자는 악인곡을 떠올렸다·
맹을 확인하고 돌아온 초류객은 무림맹의 상황뿐 아니라 악인곡에 대해서도 말을 전했던 터·
하지만 능소화는 고개를 저었다·
천하십객 중 유일한 홍일점인 그녀가 입을 열었다·
“회영부와 악인곡 두 곳 다 귀운종과는 접점이 없어요· 그리고 악인곡의 경우는 확인되지 않은 사안입니다·”
“그렇긴 하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들려온 말은 귀운종을 멸절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목소리에도 악의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러니 아닐 것이다·
회영부가 귀운종을 철천지원수로 여기고 있다면 무림맹보다 귀운종을 먼저 찾아와야 맞다·
악인곡은?
그들은 아직 실존하는지도 검증되지 않았다·
악인곡에 대한 소문이 감숙성을 뒤덮고 있는 걸 직접 들은 초류객조차 그저 신빙성 없는 소문으로 여겼다·
풍제가 죽다니·
암향야가 죽다니·
거기에 검선과 검존까지 악인곡에 당했다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그리하여 다시 떠오른 의문은·
‘그럼 누구지?’
알 수 없다·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것도 있었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자라는 점·
목소리를 들었다면 통상 상대의 기척도 감지된다· 한데 아직까지 상대의 위치는 오리무중· 이미 목소리가 끝나고도 여섯 번의 호흡이 지났다· 한데 지금까지도 감지해내지 못하고 있으니 마음은 한없이 무거워졌다·
칠절선생의 시선이 염백에게로 향했다·
“염백·”
그다음 말이 나오기 전 염백이 피식 웃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는 꼭 들어야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속히 모두를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켜라·
네가 인솔해라·
흐흐 웃겨 죽겠군·
“이건 귀운종의 일· 저는 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온실 속 화초로 여기지 마라!
언제까지 보호받고 살라는 거냐!
죽게 되면 담담히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런 의지를 실은 눈빛으로 쏘아볼 때 칠절선생의 손이 뻗어왔다·
염백이 그 손을 쳐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처억· 맥없이 어깨가 잡힌 염백이 멍해졌다·
‘이 정도였다고···?’
분명 쳐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손이 느려졌다· 기이한 기운에 밀려 마치 스스로 천천히 손을 움직이는 것처럼 다가가지 못했다·
화경과 현경이 차원이 다른 영역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실로 너무도 맥없이 마혈이 점혈된 터라 염백은 놀란 눈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이번엔 칠절선생이 웃었다·
“네 앞에서 으스대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 누가 오고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자를 찍어누른 다음 기고만장해하는 우리 모습을 너도 보고 싶지는 않을 것 아니냐· 그리고····”
칠절선생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염백이 눈동자를 굴려 그 시선을 따라갔다가 보았다·
작은 사내 아이·
올해로 아홉 살·
자신의 아들인 염후였다·
염후가 손을 잡아왔다·
부드럽고 작은 손 온기가 느껴지는 손·
그리고 언제까지라도 잡고 싶은 손·
“아버지 왜 화가 나셨나요?”
“아니다· 화난 거 아니다·”
“그래요?”
염후가 주변을 둘러봤다·
원래 이곳 이 자리는 모옥의 내실·
모옥은 먼지처럼 날아가버렸고 아버지는 크게 고함을 쳤던 것이다·
아버지는 분명 화가 나 있었다·
“다행이에요·”
염후가 활짝 웃어보였다·
그 웃음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 염백은 자신도 모르게 다른 손을 뻗어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행은 무슨· 후후·”
쓰다듬으면서 알게 되었다· 어느샌가 점혈이 풀렸다· 칠절선생의 세심한 배려였다·
이내 염백은 아들을 들어올려 품에 안았다·
잊고 있었다·
아니 잊고 있지는 않았다·
잊을 수 없는 존재가 아닌가·
그저 생각하지 않으려 했을 뿐·
살다 보면 어느 땐가는 삶이 송두리째 바뀌곤 한다·
염백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두 번이었다·
첫 번째는 귀운종이 흔적도 없이 쓸려나갔을 때였다·
모든 걸 잃었다고 생각했다·
삶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후공의 생각은 달랐다·
날 원망해도 좋다·
복수를 하기 위해 날 찾아와도 좋다·
하지만 그보다는 너희가 너희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뻔한 말·
역겨운 말·
우리의 삶? 앞으로 다가올 행복 따위는 없을 텐데 다가올 날의 행복을 찾으며 살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찾아왔다·
염후를 얻었다·
삶이 다시금 송두리째 뒤바뀌었다·
“가자· 여기는 공기가 그리 좋지 않구나·”
“공기가요?”
염후가 갸웃거리고 염백이 막 걸음을 떼려 할 때였다·
“멈춰라!”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운종을 멸절하겠다던 그 목소리였다·
그리고 이번엔 목소리로만 끝나지 않았다·
일진광풍이 불어온다 싶을 때는 이미 하나의 신형이 저만치 앞쪽에 모습을 드러냈다·
은발의 노인·
은령존이 모두를 빠르게 훑어보다 염백에게서 멈췄다· 이내 기쁨에 겨워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어찌 기쁘지 않을 것인가· 드디어 찾은 것이다· 환혼하기에 적합한 몸이었다· 나이도 적당해 보이니 은령존은 흡족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더 기쁜 건 놈이 아이를 안고 있다는 점이었다·
비참함이 더해질 것이다· 완전히 미쳐버릴 것이다· 자신을 농락한 손광이란 놈을 생각하니 더 좋았다· 아예 다른 이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대는 누구인가?”
칠절선생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그 좌우로 칠객이 늘어섰다· 모두의 의문이기도 했다·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오고 지척에 이를 때까지도 팔객 중 그 어느 누구도 전혀 위치를 가늠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훑어보는 시선도 문제·
그저 스쳐 지나가는 눈길에 전신이 따끔거리니 대체 어떤 경지인지 모를 일이었다·
“후후 너희는 손광을 아는가?”
대답 대신 은령존이 물음을 던졌다·
지켜보는 눈동자마다 동요하고 누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손광이 죽었구나·’
‘손광이 잡혔구나·’
‘손광····’
저마다 심장이 주저앉았다·
이자가 어떻게 이곳을 찾아낸 것인지 알게 된 것이다· 손광이 이자에게 잡혀 실토했고 손광은 죽은 것이 틀림없었다·
연청의 시야는 이미 뿌옇게 변했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뚝뚝 떨어져내렸다·
은령존이 고개를 저었다·
위로의 말을 던졌다·
“울지 마라·”
위로의 말은 이어졌다·
“손광은 살아 있다· 손광은 무사하다·”
‘뭐?’
‘살아 있다고?’
그런 반응에 은령존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후후 놈은 내 휘하에 있다· 목숨만 살려준다면 모든 걸 말하겠다는 놈을 내가 굳이 죽일 리가·”
물론 사실이 아니었다·
손광은 배신하지 않았고 자신을 농락했을 뿐·
놈의 마지막이 환하게 웃는 얼굴이어서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르기에 은령존은 이미 죽었음에도 놈을 다시 죽이고 싶었다·
거기에 더해 귀운종에게도 비참함을 안겨주고 싶었다·
“거짓말! 거짓말! 손광이 그럴 리 없어!”
연청이었다·
그녀는 거의 울부짖다시피 외쳐댔다·
은령존의 비웃음이 짙어졌다·
“후후 그럼 본좌가 어찌 이곳을 찾아올 수 있었겠느냐·”
연청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납득된 건 아니었다·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야·’
툭툭·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져내렸다·
‘손광은····’
몸을 들썩일 정도로 울음을 터뜨렸다·
도리어 그녀는 진실을 헤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음 속에 담아둔 정인·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떴는데····
차라리 귀운종을 배신하고 살아남기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손광은 그럴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럴 사람이 못 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어서 좋아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연청은 진실이 보였다·
이 자가 왜 손광의 이야기를 먼저 꺼냈겠는가·
손광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이자는 화가 난 것이다·
‘···죽었구나·’
손광의 마지막이 어떠했을지 어떤 마음이었을지 어떤 죽음을 맞이했을지 막연히 떠올라 연청은 서럽게 울었다·
그 모습을 은령존이 흡족히 여겼다·
더 서럽게 울어라·
배신은 그런 것이다·
배신당한 사람의 분노는 말로 할 수 없지·
죽음을 맞기 전 너희의 심정이 더욱더 참담하고 비참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젠 울음소리와 함께 비명소리도 듣고 싶어졌기에
소매 안에서 울려나온 방울 소리가 주변 일대를 뒤덮었다·
누구는 귀를 틀어막고 비틀거렸고 누구는 머리를 감싸쥐고 쓰러져 뒹굴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앙!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앙!”
비명 소리는 더 커졌다·
고막을 파고든 소리에 피가 들끓고 기운이 제멋대로 요동쳤다· 내공이 없는 아이도 모든 피가 역행해 머리로 몰려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채 비명을 내질렀다·
손으로 귀를 막아도 소용없었고 막아줘도 소용없었다·
염백이 안아 든 아들의 귀를 막았다가 이내 청력을 일시적으로 상실하게끔 점혈을 했음에도 아들의 울음이 멈추지 않자 당혹을 금치 못했다·
몸도 부들부들 떨었다·
그조차 서 있는 것이 쉽지 않았고 이미 귀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귀운종에도 음공을 다루는 이가 있었고 그에 관한 공부는 되어 있었지만 지금 들려온 방울 소리는 아예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호기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
단지 방울 소리만으로 화경의 극에 이른 자신이 옴짝달싹도 할 수 없으니 한없이 초라해졌다·
나는 겨우 이 정도였던가·
나는 이렇게 하찮은 놈이었던가·
그렇다 해도 제발····
‘도와줘·’
천하십객을 향해 마음 속으로 목숨을 구걸했다·
그에 응하듯 팔객은 일제히 신형을 날렸다·
짓쳐드는 모습에 은령존은 웃음·
‘너희가 무림맹의 천하십객이로구나·’
오른팔을 휘돌렸다· 어느샌가 그의 손아귀에는 방울이 쥐어져있었다·
줄에 다섯 개의 방울이 매달려 있었고 어떤 방울은 금색과 어떤 방울은 은색이었다·
그중 세 개의 방울이 함께 부딪친 순간
쩌저어어어엉!
거대한 음파가 밀려갔다·
그건 팔객의 눈에는 파도처럼 보였다·
아니 거대한 해일처럼 느껴졌다·
대자연이 덮쳐오는 것과 같은 거대한 힘에 무연객과 초류객이 튕겨 나갔고 단심객과 철담객 옥면객도 다를 건 없었다·
호신강기로 둘러 음파를 차단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튕겨낼 수 있다고 자부했던 마음도 속절없이 무너져내렸다·
분명 소리일 뿐인데
본 적 없는 거대한 해일 거대한 산악과 부딪힌 것만 같았다·
환우자와 능소화까지 실끊어진 연처럼 날아갔다·
하지만 칠절선생만은 아니었다·
거센 맞바람을 뚫고 나아가듯 안면 근육이 뒤로 밀려남에도 멈추지 않았다·
‘소공참!’
일곱 개의 절기를 지녔다 하여 칠절선생·
그 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절기라 할 수 있는 소공참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일격을 가해갔다·
은령존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너는 제법이군·”
하지만 그뿐·
다시금 방울이 딸랑·
이번에도 세 개의 방울이 함께 부딪혔다·
다른 점이라면 음파가 넓게 퍼지지 않았다는 것· 오직 한 지점만을 향했기에
쩌어어어어어어엉!
우수에서 떨쳐 나오던 원반 형태의 소공참이 스러지고 칠절선생이 그 모습을 보았을 땐 이미 엄청난 속도로 튕겨 나가고 있었다·
‘모 몸이··· 목이····’
칠절선생은 믿을 수 없었다·
기운이 들끓는 것뿐 아니라 몸이 쓸려나가려 하고 있었다· 머리는 뽑혀나가기 직전·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가 몸과 머리를 따로 붙잡고 당기는 것만 같았다·
목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몸도 어디 한 군데 빠짐없이 쓸려나가고 있었기에
‘내가··· 이렇게 죽는구나·’
웃음도 났다·
이해도 되지 않고 어처구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클클 뭐 나쁘지 않아· 나름 멋있었어· 그럼 이제 다시 만나게 되는 건가· 후공을 다시 보게 되는 건가·’
“이건 뭐하는 새끼야!”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칠절선생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붙잡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뽑혀나갈 것 같은 목도 순식간에 압력이 사라졌다· 쓸려나가던 몸도 쓸려나감이 멈췄다·
눈동자를 굴려 바라보았다·
흉악함이 말로 할 수 없고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이었다·
‘이건 또 누구야?’
그런 마음 속 의문에 화공신타가 답했다·
– 멍청한 새끼야 먹고 죽어!
전음과 함께 칠절선생은 입에 독약이 들어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떻게 한 건지 미끄러지듯 독약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산 게 아니라 죽는 방법이 달라진 것뿐이었군·
더 어처구니가 없어진 칠절선생은 내심 허탈해졌다·
그래도 괜찮다·
후공을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
산 채로 후공을 만난 것이었다·
칠절선생은 알아보지 못했고 입에 넣어진 것이 독약이 아니란 것도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소림의 대환단이란 걸 아직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