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화· 천 년 전의 천하제일인· 그리고····
‘무림맹주?’
여인은 옅게 미소 지었다·
간단한 말이었지만 여인은 이 한마디로 많은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공손함이 깃든 정중한 인사·
지금까지는 본 적이 없는 무게감도 느껴진다·
장난기는 온데간데없다· 여태 보인 유쾌함조차·
가히 천변만화·
가히 천의 얼굴·
유쾌한 자는 진중함이 떨어지고
진중한 자는 따분할 때가 많다·
한데 이 아이에게선 한없는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각각의 환경에 맞춰 언행을 달리하는데 그때마다 그 순간마다 그 모습이 가장 그답다는 생각이 드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마음에 얽매임이 없는 자라는 뜻·
‘그래서겠지· 그렇기에 나의 공간에서 자신의 영역을 창조해낼 수 있었겠지· 당연히 바깥세상에서의 무공의 경지도 드높을 테고·’
“너의 강호는 태평성대일 듯싶구나·”
“과찬이십니다· 강호는 언제나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그건 선배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는지요·”
“후후·”
여인은 흡족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공손함을 담고 듣기 좋게 들려오는 것이다·
“그동안 나의 대접이 소홀했다· 너에게 좋은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데 괜찮겠지?”
“소홀하지 않으셨습니다· 동굴에서 먹은 육포는 제가 여태 맛보았던 어떤 요리보다 훌륭했습니다·”
“후후 다행이구나· 조금 걸을까?”
여인이 노란 꽃길을 나아가니 후공이 그 곁을 걸었다·
후공은 왜 걷느냐고 묻지 않았다·
사실 이곳에 전각을 세우면 그만이었다· 여인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존재였고 그건 자신도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여인이 걷고 싶어하니 그 마음을 헤아렸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천천히 걸었다·
싱그러운 바람이 스쳐 지나고 햇살은 따사로웠다·
여인은 풍경을 둘러보며 기묘함을 느꼈다·
늘 보던 풍경인데 오늘은 왜 이리 달라 보이는가·
새롭게 느껴져 낯설기까지 했다·
이곳은 자신이 만든 세상이었기에 새로움은 없었다· 모든 것이 결국 자신에게서 비롯되었으니 결국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는 것처럼 익숙할 따름이었다·
그러서겠지·
한 사람은 하나의 세계·
이 아이라서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자유롭고 유희를 아는 이가 첫 손님이어서 다행이었다· 마치 현실의 세상으로 나온 것 같은 느낌까지 받고 있으니·
“너는 이 시대의 천하제일인이더냐?”
“사람들이 그리 부르곤 했습니다·”
“후후 과거의 일처럼 말하는군· 그래 알 것 같다· 너는 지금 유희를 즐기고 있는 것이로구나·”
무림맹주·
천하제일인·
고작 이십 대 초반의 나이로 이러한 경지에 오를 순 없다· 천하제일인이 될 수 없고 무림맹주가 되는 건 더욱 더 힘든 일이었다·
그러니 반로환동·
여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반로환동한 후 원래의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천공단주가 된 것이리라· 그렇다면 하루하루 유쾌하리라· 그러니 유희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녀가 그런 자신의 생각을 말했을 때
“환혼입니다·”
“환혼?”
돌아온 대답이 상상을 초월했기에 여인이 놀라 걸음을 멈췄다·
“화 환혼으로··· 지금의 몸을 취한 것이라고? 타인의 몸을?”
“환혼당했습니다·”
“아····”
그 말에는 여인이 할 말을 잃었다·
여인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여인은 한참 동안 그 모습을 유지했다·
생각이 많아보였다·
미간을 찡그리기도 하고 한 번씩 크게 한숨을 내쉬기도 했기에 후공은 차분히 기다려주었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간단히 차를 한잔 나누는 건 어떠하냐?”
“좋습니다·”
“올라가자·”
그 말과 함께 주변 풍광이 돌변했다·
어느 객잔의 내부였고 계단이 눈앞에 나타났다· 계단을 올라 두 사람은 이 층 창가에 마주앉았다·
손님은 없었다·
주인도 점소이도 없었다·
창 밖에도 그 누구도 지나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두 개의 찻잔이 탁자에 나타났다·
여인은 여전히 생각에 잠겼고 후공은 찻잔을 들어 차를 음미했다·
‘환혼에 대해 알고 있구나·’
그런 기대감을 드러내지 않은 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이윽고 여인의 입이 열렸다·
“누구의 소행이었지?”
“회영부· 최근 알아냈고 쫓고 있습니다·”
“회영부? 부주는 누구냐?”
“누구인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 말을 시작으로 후공은 지금까지의 경과를 상세히 설명했다· 거기엔 환혼의 부작용도 담겨 있었고 환혼진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었다·
“···환혼의 부작용을 고려할 때 최소 삼백 년 전의 인물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에겐 어떤 염원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염원···· 하지만··· 그럴 수 없을 텐데····”
“선배께선 짐작 가시는 부분이 있으신 것 같군요·”
“결국··· 그렇게 된 것인가·”
여인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먼 과거를 떠올리는 것 같았고 그리워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네가 말한 환혼진의 묘리를 들은 적이 있다·”
“나의 시대· 나의 사매에게·”
사매를 언급할 때는 여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런 여인을 후공은 무심히 바라봤다·
천 년 전에 본 환혼진과 같다고 했으니····
눈앞의 여인은 사저·
회영부주는 사매·
두 사람 모두 영원을 꿈꾸었나 보다·
한 사람은 미녀도 안에서 영원을 누리길 선택하고 다른 한 사람은 현실 속에서 영원의 길을 찾은 셈·
그럼 염원 따윈 없었나?
그 생각은 떠오르자마자 사라졌다·
방금 전 여인이 염원에 대해 말할 때 고통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인 걸 상기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연능화라고 한다·”
“기억하겠습니다·”
“사매가 결국 그 길로 나아갔다니···· 그러니까 천 년 전 우리는 세 명의 제자였다· 한 스승을 모셨다· 스승님은 당대 천하제일인· 강호를 떠나 우릴 거두어 가르치셨다· 이름은 듣지 못했다· 하늘을 가르고 땅을 뒤집는 공능을 전수하신 후 떠나셨을 때에도 듣지 못했다· 그저 우리에겐 스승님이었고 세상에는 월하노인(月下老人)이라 불리셨지·”
그녀가 시선을 창밖으로 옮기며 말을 이었다·
“스승님이 떠나신 후 우리도 스승님과 같아졌다· 속세에는 관심이 없었다· 부와 명성도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저 삶에 대해 생각할 때가 많았다· 사형의 영향이 컸다· 놀라운 공능 신비한 무공 천지를 무너뜨릴 수 있는 무공을 지녔다 해도 결국은 한정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에 사형은 늘 의문을 갖곤 했지· 그 명제는 당연히 나의 마음에도 와닿았다·”
“각자 다른 길을 선택하신 것이로군요·”
“그래· 사형이 먼저 선택했다· 사형은 천 년을 약속하고 길을 떠났다· 천 년이 차면 그땐 자신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지· 사매는····”
그리워했다·
사랑하고 있었기에 매일 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러다 결국 길을 찾았지·”
“환혼이었군요·”
“그래· 환혼을 통해 천 년의 세월을 계속 지나 다시 사형을 만나겠노라 말했다· 그러면서도 과연 옳은 일인가에 대한 생각으로 갈등하기도 했다· ”
“선배의 사매는 좋은 사람이었나 봅니다·”
“그래····”
연능화의 목소리가 탄식처럼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녀의 염원이 더 컸나 봅니다·”
후공은 이제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해졌다·
천 년 전의 비사·
회영부주는 여인의 사매·
사형이자 연인을 그리워하며 환혼에 환혼을 거듭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약속된 천 년의 시간은 이제 곧 다가온다·
사형이란 인물은 과연 나타날까?
회영부주는 만남을 확신하고 있는 것인가?
“그때 내가··· 사매 곁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때 나의 생각이 짧았다· 사매의 성품이라면 환혼을 실행에 옮기지 않으리라 생각했거늘·”
회한과 함께 연능화가 후공을 바라봤다·
“말씀하십시오·”
“너는 경이로운 자· 마치 나의 사형을 보는 듯하고 스승님을 보는 듯하다· 그러니 사매를 찾아내겠지·”
“그렇게 될 겁니다·”
“찾게 되면 사매를··· 어떻게 할 셈이지?”
“제 손에 죽습니다·”
연능화가 입술을 떨었다·
“그래···· 그럴 수 있겠지· 그럴 수 있어· 하지만 너도 다칠 수 있다· 죽게 될 수도 있고·”
후공은 미소를 머금었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하아····”
연능화가 탄식을 터뜨렸다·
“내 너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부탁하고 싶다· 나의 사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다오· 그녀의 사정을 들어줄 수는 있겠지?”
후공은 의자에 느긋하게 등을 기댔다·
입가엔 비웃음이 맺혀갔다·
“사연이 있을 것이다· 그 뜻입니까?”
“분명히 그러할 것이다·”
“후후 재밌군요· 선배의 사매가 지금까지 해온 일에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요?”
“····”
그 말에는 연능화도 답을 할 수 없었다·
천 년의 세월·
사매가 몸을 바꿔가며 거쳐온 사람들 그리고 들어서 알게 된 사매의 수하들의 잔혹함· 회영부·
그럼에도 그녀는 사매의 얼굴이 떠올랐다·
분명 사매에겐 사연이 있다·
사매에겐 사연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믿음이 부서지는 것이 싫어서 사매를 향한 자신의 신뢰가 무너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반드시 사연은 있어야 했다·
한데 확인조차 안 하겠다고?
그녀의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주변 공기도 어느샌가 서늘해졌다·
“선배 저를 죽일 생각이군요·”
“아니·”
순간 풍광이 달라졌다·
어느샌가 산의 중턱·
“너는 이곳에서 나가지 못한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 연능화를 향해 검령과 번쾌친이 쇄도했다·
카르릉!
쿠르르르르르르릉!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앙!
자줏빛 광채가 그녀의 머리를 직격할 찰나 검령과 번쾌친은 가느다란 실이 되어 춤추듯 떨어져내렸다·
이곳은 그녀의 공간·
검령과 번쾌친은 실체가 아닌 터·
하지만 이 공간은 더 이상 그녀만의 것은 아니다·
연능화가 다가갈 때 그녀의 움직임은 더뎌졌다·
당연했다· 장소가 바뀐 터·
어느샌가 수중·
바다 속이었다·
물고기 떼 너머로 후공을 바라보던 그녀의 안광이 빛을 발하자 다시금 주위 광경이 달라졌다·
사막 한가운데·
그것도 잠시 다시 풍경이 달라졌다·
눈 덮인 산이 보였고 얼어붙은 호수 위·
풍경은 계속해서 달라졌다·
순간 무림맹이 되기도 했고 남궁세가가 되기도 했으며 순식간에 다시 약왕문의 별채가 되었다·
이는 후공의 의식의 범주 안이었고
연능화도 그에 대응해 자신이 살아온 풍광으로 후공을 끌어들였다·
산이었다가 바다였다가 바다 위가 되기도 하고 땅 속이 되기도 했다· 이 모든 변화가 결전이었다· 누가 서로의 의식을 잠식하는가· 만약 의식이 잠식당하면 끝·
수없는 풍광의 변화 속에 이제 하늘 위·
구름을 발밑에 둔 채 연능화가 의식을 확장하니 눈부신 백색 광채가 일어 후공을 덮쳐갔다·
후공에게선 자줏빛 광채가 일었다·
백색 광채가 파고들면서 후공의 피부는 순간적으로 나무 토막이 되었다가 빠르게 회복 되었다·
‘실패·’
잠식되지 않아·
연능화의 눈에는 당혹이 어렸다·
다시 의식을 집중해 잠식을 시도했다·
그에 따라 후공의 몸은 시시각각으로 변모해갔다·
흙손이 되었다가 등에 독수리의 날개가 생기기도 했고 두 다리가 없어지고 순간적으로 눈과 코와 입이 사라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건 찰나의 변화에 불과했기에 여인은 점점 더 초조해져 갔다·
실패 실패 실패 실패 실패!
종이로 만들었지만 실패·
연기처럼 흩어버렸지만 실패·
사슴으로 만들고 늑대로 만들고 새가 되게 하기도 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본래의 모습을 찾으니 이제 손이 덜덜 떨려올 지경이었다·
마음에 두려움에 차오를 때
자줏빛 광채가 전신을 덮쳐왔다·
그리고 그 순간 여인은 자신이 잠식당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끼이이이····]
말 대신 짐승의 흐느낌이 나온 것이다·
어느샌가 그녀는 여우의 모습이 되었고 목이 틀어잡혀 있었다· 모습을 회복하려 했지만··· 실패!
구름 위·
후공이 여우의 목을 쥐고 비웃음을 머금었다·
“연능화·”
[끼이····]
“너의 사매는 내 손에 죽는다· 그리고 너도 죽겠지·”
여우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