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화· 아홉 번의 죽음·
나의 무공을 폐하겠다고?
단전을 부수겠다고?
회영일존·
아니 단혼각 삼호법 섬악의 눈에는 은은한 분노가 떠올랐다·
이런 상황은 예상 밖·
예상 범주는 죽이느냐 데려가느냐였다·
이들의 실체가 악인곡이 아닌 것도 예상을 벗어나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공을 폐하겠다는 건 너무 나갔다·
신뢰를 얻기 위한 대가가 황당하기 그지없다·
“단전 부숴!”
“부숴 부숴! 뿌셔! 크하하하하하하!”
누구 할 것 없이 낄낄대며 웃는 모습·
실상은 화산의 검선이고 무당의 검존이며 북해빙궁의 절세 고수들일 텐데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너희는 황당한 말을 하는구나· 너희는 악인곡을 연기하다 그만 악인이 되기라도 한 것인가·”
“클클 지나칠 것까지야·”
후공이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누군가를 신뢰하려면 자신을 무방비로 맡길 정도는 되어야 해· 걱정 마라· 무공을 폐한 후 다시 회복시켜 줄 테니· 클클··· 뭐 시간은 좀 걸릴 테지만·”
삼 호법 섬악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너는 내게 맡길 수 있나?”
“안 하지·”
“하하하하하하!”
“크하하하하하하하 당연히 안 하지· 어떤 멍청이가 그걸 할까· 하하하하하!”
후공의 즉답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말이 안 되는 요구인 건 안다·
실로 극단적인 요구·
의미는 하나다·
누군가에겐 대형 누군가에겐 대공자·
함께하며 본 바가 많다·
대형은 함정에 빠뜨리는 자일 뿐 걸려드는 자가 아니다·
천화서고 대공자는 대충 넘어가지 않는다·
게다가 지금 걷는 길은 모든 순간이 살얼음판·
한 발만 헛디뎌도 끝이다·
현 상황이 막중하기에 검증은 그 어느 때보다 명확해야 한다· 그저 말 몇 마디에 단혼각이냐며 반길 순 없는 일· 또한 단혼각이 맞다 해도 과연 단혼각을 신뢰할 수 있느냐는 또 별개의 문제로 남아있었다·
섬악이 미간을 찡그렸다·
“한데 기괴하군· 풍제····”
“뭐가?”
섬악이 풍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희의 신중함은 이해한다· 너희가 악인곡이 된 것도 놀랍다· 혹여 너희로 인해 강호가 볼모가 될 것을 우려했을 테지· 그 치밀함과 자상한 마음을 엿볼 수 있으니 너희가 정녕 이 시대 강호의 명숙들임을 나는 믿는다· 한데····”
“왜 아직까지 천화서고 대공자가 너희의 우두머리 행세를 하고 있지?”
한 번의 격전을 통해 본신 절학은 드러났고 그것이 곧 자기 소개가 되었다· 한데 여전히 중심축은 천화서고 대공자· 대공자가 상황을 주도하고 모두가 그저 호응하고 있을 뿐이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나 두 사람·
이 시대 천하제일인의 두 아우는 거만함이 말로 할 수 없어서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이는 일이 없다고 했는데 그 두 사람이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후후 쓸데없는 소리·”
“그게 답인가? 암향야 그대는 어떠한가· 이 상황이 즐겁지만은 않을 것 같다만·”
당명이 웃었다·
즐겁지 않을 것 같다고?
아니 매일이 즐겁다· 아주 좋다· 대형을 다시 만난 뒤로는 매일매일 신바람이 나 춤이라도 추고 싶을 정도였다·
“일존 넌 시간을 끄는 것처럼 보이는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다·
삼 호법 섬악은 길게 숨을 내쉬며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스쳐가는 바람을 느꼈다·
바람은 좌에서 우로·
다시 휘돌아 우에서 좌로·
이내 뒤쪽에서 불어오기에
‘검증은 내 스스로 한다·’
소매 안쪽에 머물게 둔 요심환(搖心丸)을 터뜨렸다· 엽전 크기의 검은 빛깔의 환이 잘게 부서져 갔다·
‘아깝지만····’
극히 미세한 가루 형태가 된 요심환은 더 잘게 부서져 미세함이라 칭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형태를 잃었다· 향취도 없이 소맷자락에서 빠져나와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주변 일대에 퍼져갔다·
한 호흡·
티끌 하나만 흡입해도 피부에 하나의 알갱이가 닿기만 해도 스며든다·
그럼 끝이다·
즉시 진기의 움직임은 멈춘다·
내력을 운용할 수 없다·
공청석유를 복용한 자라도
그 어떤 수단을 갖춘 자라도!
마교 교주라 해도
사천당가주라 해도!
회영부는 요심환에 대한 대비책을 지니고 있지만 이 무리가 막을 수 있을 리가·
유지 시간은 일각·
역용도 풀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통했다·
바람이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 모두의 얼굴에 당혹스런 표정이 떠올랐고 추락했다·
“이 이게 무슨!”
숲 위·
누군가는 나뭇잎을 누군가는 나뭇가지를 딛고 있다가 그대로 숲 안으로 곤두박질쳤다·
겨우 신형을 바로 했을 땐 어느샌가 모두의 역용은 풀려 있었다·
이내 삼 호법 섬악도 내려섰다·
그는 한껏 여유로운 미소로 모두를 둘러봤다·
“후후 이 모습이 낫군· 다들 조용해진 것도 마음에 든다·”
마음을 뒤흔든다 하여 요심단·
일순간 내공을 상실하게 되면 마음은 놀라고 뒤흔들리니 말이 없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섬악이 말을 이었다·
“회복까진 일각· 그 시간이 지나면 너흰 다시 내공을 운용할 수 있게 된다· 달리 말해 일각 안에 너희를 죽이는 건 식은 죽 먹기라는 의미다· 그러니 둘 중 하나이겠지? 내가 회영일존이라면 일각 안에 너희 모두를 죽일 것이고 단혼각의 삼 호법이라면 일각을 그저 흘려보낼 테지· 후후 그러니 어디 기다려 보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섬악의 미소는 짙어졌고 한곳으로 향했다·
“천화서고 대공자·”
후공이 무심히 바라봤다·
섬악은 그 무심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전히 건방지다·
“꼽추일 때의 너의 건방짐은 실로 대단하더군· 어떠냐? 다시 한번 조롱의 말을 해보는 건?”
후공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활짝 웃어 보임과 동시에 두 손을 내밀었다·
그건 공격이 아닌 포권·
“위대한 존안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단혼각의 삼 호법님을 뵙습니다! 살려주십시오!”
“허어····”
섬악이 멍해졌다·
하지만 풍제와 당명 검선 등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대형의 유쾌함은 언제나 즐겁고
대공자는 정녕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것이다·
또한 이쯤 되면 알 수 있다·
상대는 회영일존이 아님도 알게 된다· 단혼각의 호법이 아니고서야 아직까지 구구절절 떠들 이유가 없었다·
한편 어이가 없어진 섬악은 콧방귀를 뀌었다·
태연히 살려달라 말하는 것을 듣자니 괜히 노기가 치솟았다·
“대공자 너의 표변은 경이로울 정도군· 궁금하구나· 너의 무공도 너의 처세만큼 대단한지 말이다·”
“보잘것없습니다·”
“그럴 리가· 어디 견식해 보자· 공평히 대해주마· 나 또한 내력을 운용하지 않고 초식으로만 너를 상대해주마· 어떠냐?”
“괜찮겠습니까·”
섬악이 다시 멍해졌다·
사양하는 걸 넘어 괜찮겠냐니·
“넌 동등한 조건이라면 질 자신이 없나 보군·”
“아홉 번·”
“아홉 번 죽이겠습니다·”
멍해진 것도 잠시 섬악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땐 후공이 보법을 밟으며 나아가고 있었다·
무형보·
다섯 걸음 딛고 휘청이듯 섬악의 어깨를 짚어갔다·
오직 신체 능력에 의지하고 있음이 분명한데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진 것이다· 하마터면 놀라 내공을 운용할 뻔했다가 정신을 차리고 우수를 내뻗어 쳐냈다·
손은 튕겨나가지 않았다·
후공의 손은 섬악의 팔을 타고 뱀처럼 흘러 다시 어깨로 향했다·
놀란 섬악이 좌수로 잡아갔다·
추룡수였다· 그가 용을 쫓는 금나수의 손길로 손을 잡아 연격으로 손목의 근육을 뒤틀 때 후공이 그 자리에서 한 바퀴 허공을 회전하며 뒤틀림을 풀어냈다·
휘돌며 발끝으로 섬악의 명치를 스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거궐혈과 양문혈이 거의 동시에 닿았다·
정확했고 명백히 느낄 수 있었기에 섬악의 눈이 커졌다· 둘을 동시에 타점당하게 되면 사혈로 작용된다·
바로 들려왔다·
“죽었습니다·”
“!”
부인할 수 없어 섬악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직 손은 잡고 있었기에 즉시 각법을 전개했다· 우퇴를 내뻗어 번개같이 머리를 강타할 때 후공은 섬악의 우측으로 보법을 내딛었다·
각법 혹은 퇴법은 동작이 크기에 그만큼 허점은 크게 드러난다· 그 틈을 타고 후공은 섬악의 우측 겨드랑이를 건드린 후 손까지 떨쳐냈다·
이번엔 양강혈·
이곳도 사혈· 평범한 일반인의 손길이라면 문제될 일이 없다· 하지만 내력을 갖춘 자가 제대로 건드린다면 이 혈도도 사혈·
벌써 두 번 죽었다·
섬악은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금 세 번 더 사망·
이번엔 목덜미에 한차례 손이 닿았고 이어 정수리 백회혈과 어깨를 내주었다·
추룡수에서 해공권으로 보법은 호격보에서 풍한보로 바꾸어 나아갔지만 그때마다 이미 그곳에 없으니 번번이 헛손질만 할 뿐이었다·
죽음이 일곱 번·
섬악은 연신 들려오는 사망 선고에 몸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켜보는 입장이 그와 같을 순 없었기에
“대공자 살살하게· 울겠어·”
“단혼각이 은근 고집이 세네· 이쯤 죽었으면 멈출 때도 되지 않았나·”
“섬악 적당히 하고 멈춰라· 안 부끄럽냐!”
검선과 검존은 바라보며 안타까움을 표했지만 당명은 호통을 내질렀다·
당명은 아는 것이다·
이것도 지금 대형이 살살 다뤄주고 있었다·
초식을 다루지 않아서 그렇지 대형은 권격과 하찮은 금나수도 일품인 것이다·
어느샌가 여덟 번의 죽음·
남은 목숨은 단 하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농락당하는 현실에 섬악의 눈이 돌아갔다· 스무 살 남짓 애송이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감히 날····’
날려주마!
팔 하나는 부러뜨려 주마!
날아드는 오른발을 떨쳐내 튕겨낸 후 회전하며 지면에 내려서는 대공자를 향해 섬악이 내력을 운용하여 지풍을 날렸다·
아직 일각은 지나지 않았다·
대공자의 내력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그러니 팔을 부러뜨릴 정도로만·
스치게만·
저 기고만장한 웃음은 걷어내자·
쏘아져오는 지풍을 후공이 본 건 지면에 착지한 순간이었고 후공은 웃었다·
‘환명·’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싶을 땐 지풍의 기운은 환명에 갇혀 꿈틀대다 소멸되었다·
섬악이 놀라 눈을 부릅떴다·
분명 아직 일각은 지나지 않았다·
그럼? 그럼··· 처음부터?
후공이 피식 웃었다·
“물론 일각은 지나지 않았지·”
일각이 문제가 아니었다·
일각이고 뭐고 애초에 후공은 내력을 잃은 적이 없는 터·
섬악의 독이 무색무취였다곤 해도 천향오주는 감지했다· 그리고 해독은 뜻밖에도 오행의 수극과 금극이 해결했다· 삼악(三惡)의 기운이 가라앉으며 잠들고 화극과 토극도 잠들었지만 수극은 언제나 잠든 상태인 터라 잠들지 않았다·
도리어 깨어났고 금극이 수극을 도우니 삼악이 다시 기운을 회복했다·
후공이 한 일이라곤 내력을 잃은 것처럼 연기한 것이 전부였다·
확신을 얻기 위해서였고
변수를 없애기 위함이었다·
놀라 눈을 부릅뜬 채 어찌할 줄 몰라하는 섬악을 바라보며 후공이 모습을 바꾸었다·
두드드드드득·
순식간에 다시 악인곡주·
한 손을 들어 보이며 끔찍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여어~ 삼 호법! 한 번의 죽음이 더 남았지? 그렇지?”
그 모습에 삼 호법 섬악이 질려버렸다·
‘대 대체··· 뭐 뭐하는 놈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