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화· 그대는 영웅이 되려 하는가?
빙글 빙글 빙글·
주란의 세상은 계속 돌았다·
땅이 보였다가 하늘이 보였다· 빙글 빙글· 우두커니 서 있는 자신의 몸도 볼 수 있었다·
떨어져나간 머리가 돌고 있는 것이다·
엽불의 더없이 짙어진 웃음도 볼 수 있었다·
웃음뿐인데 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을까·
그걸 속는다고?
확인조차 하지 않는다고?
믿고 싶었던 건가·
소망하면 이루어진다고?
낄낄낄!
그런 조롱· 비웃음·
‘난 마지막까지 어리석었구나·’
그랬다· 그런 마음이었다· 주란은 믿고 싶었다·
나의 사형 나의 연인·
날 사랑했던 사람이기에 기적같이 돌아오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기대를 품었다· 믿음이 현실이 되길 소망이 현실화되길 바랐다·
그건 착각·
빙글 빙글 빙글 빙글·
돌아가는 세상의 광경에서 주란은 다른 사람도 보았다·
이곳에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바보 소녀였다·
천 년 전· 자신의 첫 번째 환혼 대상· 그녀가 보였다· 비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소녀는 바보이므로 굳이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삶을 사느니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몸이 바뀐 소녀는 비명을 지르며 미쳐 갔다·
그렇게 죽어 갔던 소녀가 보인다·
소녀가 말을 걸어왔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내 몸을 빼앗았나요?
‘용서해다오·’
주란은 용서를 빌었다·
바보는 소녀가 아니라 자신·
또 다른 이도 보였다·
제자· 단예령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순진한 눈망울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기에 주란은 제자에게도 용서를 구했다·
내가 널 망쳤다·
잘못된 건 나였다·
돌고 돌고 돌면서 주란은 연이어 수많은 얼굴을 보았다· 천 년에 걸쳐 허락을 구하지 않았던 환혼 대상들이었고 천 년을 이어오면서 자신을 의지하다 죽어간 수하들의 모습이었다·
주란은 그들 모두에게도 용서를 구했다·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데구르르 굴러 멈춘 뒤 주란은 후공을 떠올렸다· 후공은 날 어떻게 생각할까? 그는 슬퍼할까? 아닐 것이다· 그는 별 감흥이 없을 것이다· 후공이라면 이미 이런 결과를 예상했을지도·
주란임이 드러났을 때 후공의 태도는 달라졌다·
말투는 건조해졌고 공손함은 사라졌다· 그가 차가움을 드러내지 않았다지만 차가움을 느낄 수 있었다·
환혼대법을 창안했기 때문인가?
그것만은 아니리라·
바보 소녀 제자 천 년을 보내오며 수습하지 못한 우둔함· 거듭된 어리석음· 천롱삭의 길을 안내하면서도 후공은 분명 어떤 기대도··· 콰작!
엽불이 주란의 머리를 밟았다·
퍼석 터뜨렸다·
엽불은 고개를 돌려 정면을 응시했다·
뭘 주절주절 떠들게 하는 거냐·
죽어 가면 그냥 죽여·
하나같이 쓸데없는 소리를 들어야 해!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다·’
엽불의 관심사는 오직 천화서고 대공자·
모든 분신들은 소멸되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도리어 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분신들이 죽였다고 생각한 두 놈이 소생하고 있는 것이다·
엽불은 바로 앞에서 보는 것처럼 볼 수 있었다·
‘풍제 암향야·’
그렇게 부르는 소리도 들었다·
소생하다니·
기이한 일이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가고 있었거늘·
계속 어긋난다·
자꾸만 예상을 벗어난다·
이 시대의 천하제일인의 무위가 경이롭다는 점이 예상을 벗어났고 죽음의 병사들이 멈춘 것도 충격적인 상황·
그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상황은 계속 이어졌다·
놈이 지켜냈다· 지키는 자의 약점은 지키지 못했을 때의 절망이고 잃었을 때의 상실감이거늘 죽음을 멈추다니·
위험 요소가 많다·
이 시대의 천하제일인이 남아 있고 또 하나는····
엽불의 시선이 주란의 몸에 날아가 꽂혔다·
정확히는 주란의 왼팔· 왼팔에 감긴 붕대였다·
저 붕대가 기이한 효용을 부린 것이었을까· 분명 무언가 일어나려 했다·
만약 주란의 나약한 상념이 아니었다면?
소멸·
스슷!
엽불은 주란의 몸 앞으로 이동했다·
왼쪽 손목에 감겨 있는 붕대를 잡았다· 귀기를 쏟아내며 거칠게 뜯어냈다·
기이한 광경이었다·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 힘들었다·
살이 돋아나고 있는 것이다· 뼈가 생성되고 있기도 했다·
풍제와 암향야의 손상되고 짓뭉개진 몸이 급격히 회복되고 있었다· 날아가버린 몸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다· 그런 광경을 보고 있으려니 일행은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현음신녀 미안하오만····”
나를 때려주시오!
눈물 자국이 남은 얼굴로 검선이 그렇게 청할 정도·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다·
꿈 같다·
단순히 소생하고 있는 것만이 아닌 것이다· 놀랍게도 풍제와 암향야의 백발이 점점 짙어지며 흑발이 되어가고 피부는 우윳빛으로 변해가면서 주름도 사라지고 있었다·
젊어져 간다!
얼굴이며 목에 범벅이 되었던 핏자국도 그 변화에 쓸려나가면서 피부의 윤기와 생기가 도드러졌다·
단혼각주의 죽음은?
보았다·
엽불이 보고 있는 광경은 모두가 볼 수 있는 것이다·
천 년 전 환혼대법의 창시자·
그녀이며 그녀의 후회를 들었다·
그녀가 당한 배신의 아픔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죽음이 자신이 사랑했던 연인에 의해서라는 건 예상된 부분이면서도 참담한 현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이 안타까워하기엔 눈앞의 기쁨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유대의 깊이가 다른 것이다· 소중함이 다르다·
그렇기에 단혼각주 주란을 잃은 상실감의 빈자리는 풍제와 암향야의 소생으로 채워져갔다·
“아아····”
“으으····”
풍제와 암향야가 옅은 신음을 흘렸다·
완연히 청년의 모습·
사정을 모르고 보았다면 그저 열여덟 열아홉 나이의 준수한 청년으로 생각했으리라·
후공만 본 적이 있어 정겨워했다·
청년이 된 모습에 두 아우와의 첫 만남이 떠오를 정도였다·
아니 정확히는 과거의 그때보다 더 어려 보였다·
우웅·
아우들은 젊어진 것만이 아니었다·
기운도 차오르고 있기에 후공은 되었다 여겼다·
신형을 뽑아 올렸다·
천둔공망의 유지 시간은 일식경·
시간이 줄어 겨우 일다경·
그 시간 안에 엽불을 끝낼 수 있는가·
어렵다·
수만의 죽음을 통해 귀기를 채웠으니·
길은 하나뿐·
천롱삭을 취한다·
천롱삭은 초월적인 영보(靈寶)·
엽불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크르르르르르릉·
카르르르르르르르릉·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검령과 번쾌친이 자줏빛 용이 되어 따라왔다·
그때 엽불은 의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주란의 왼팔에 휘감긴 붕대를 뜯어내지 못한 것이다· 단숨에 잡아 뜯어 수천갈래로 조각낼 생각이었는데 심지어 붕대는 늘어나지도 않았다·
결국 엽불은 주란의 몸을 먼지처럼 날려버렸다·
뜯어낼 수 없다면 풀리지 않는다면 휘감고 있는 개체를 없애면 그만· 그런 생각이었다· 통했다·
휘감을 존재가 사라진 붕대가 너풀거렸다·
한데 다시금 ‘왜?’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너풀거리는 붕대를 낚아채 귀기를 쏟아낸 뒤였다· 소멸되지 않는다·
산악이라도 만년한철이라도 수천 갈래로 찢어낼 만한 귀기였음에도 붕대는 그대로·
엽불에게 더 시도할 여유는 없었다·
카르르르르르릉!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자줏빛 용들이 보였고 수만 줄기의 강기 다발이 폭격해왔기에 신형을 이동했다·
솟구쳐 올라 허공에서 연기처럼 춤추며 비껴내면서도 엽불은 붕대를 단단히 붙잡았다· 당장 없앨 수 없다 해도 수중에 두는 것이 좋다·
귀기로 둘러 붕대를 허리에 휘감았다·
거의 서른 번이나 휘감겼고 매듭을 짓는 대신 귀기를 남겨 결코 풀리지 않게 했다·
누가 풀어낼 것인가·
그 무엇으로도 몸에서 떼어낼 수 없다·
그 무엇으···?
스르르륵· 붕대가 풀렸다·
귀기를 흩어내며 빠져나가는 모습에 엽불은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천화서고 대공자는 백여 장 너머 허공에 있지 않나· 천둥 소리와 번개 강기 다발 너머로 보인다·
용들을 비껴내고 강기 다발 사이를 누비며 엽불은 붕대를 움켜쥐었다·
붕대가 미끄러져 나갔다· 뱀인가? 살아있는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미끄러지듯 손을 빠져나갔고 다시 잡으려 했을 땐 붕대가 손길을 거부했다·
펄럭!
천롱삭은 연신 펄럭이면서 빠져나가 날아갔다·
돌풍에 길다란 옷감이 날아가는 것 같은 모습·
부르고 있는 것이다·
오행을 이룬 자였고 천롱삭을 다룰 수 있는 자였다·
오행의 기운은 강렬했고 천롱삭의 요결 중 인(引)의 요결이 작용하고 있기도 했다·
펄럭 펄럭·
하늘을 나는 길다란 뱀처럼 천롱삭이 나아갔다·
엽불은 잡을 수 없었다·
난폭한 네 마리 용 때문이었고 수만 개의 강기 다발도 곁을 스쳐 가고 있는 것이다·
‘괜찮아· 시간은··· 흐른다·’
시간이 흐르고 있다·
이제 일다경도 남지 않았다· 귀기는 채워질 것이다· 더 많은 죽음은 힘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십만· 십오만· 이십만이면 더 좋다·
그렇게 될 것이다·
‘한데····’
한편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도 있었다·
붕대가 연처럼 나부껴 천화서고 대공자 앞에 이른 것이다·
‘···불렀다고?’
불렀다· 새로운 주인의 부름이었다·
천롱삭이 너풀너풀 춤추며 글자를 만들어냈다·
물음을 던졌다·
– 그대는 의(義)를 행하는 자인가?
주인이 될 수 있는 자인지 시험했다·
그 문장이 후공의 눈에는 똑바로 보였고 엽불의 눈에는 뒤집혀 보였다·
그렇다해도 문장을 못 알아볼 것인가·
엽불이 보았고 엽불이 보았기에 온 세상이 보았다·
“엄마! 붕대가 제멋대로 글자를 만들어냈어요!”
“아버지 보여요! 아버지도 보여요?”
“의를 행하는 자인가?”
“이게 다 무슨 조화야?”
기이하고 신비한 광경에 모두가 놀라 입을 쩍 벌렸다· 곁에 앞에 주변에 멈춰 있는 시체가 있다는 것도 잠시 잊을 정도였다·
대답을 해야 하는 거야?
그런가 봐·
후공이 그 문장에 답했다·
천롱삭이 다시 너풀거렸다·
현란함 움직임 끝에 새로운 글자를 띄웠다·
– 그대는 협(俠)을 아는가?
“물론이다·”
– 그 마음을 잊지 마라·
“서둘러라·”
후공이 채근했다·
그 답변에 천롱삭이 마구 펄럭였다·
이어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냈다·
– 하하하하하!
큰 웃음을 터뜨리듯 웃음 소리를 내보였다·
천롱삭은 처음 듣는 대답이었다·
여러 시대를 거쳐 주인이 바뀌었지만 누구도 지금처럼 채근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천롱삭이 다시 새로운 문장을 띄웠다·
모두가 그 광경을 바라봤다· 붕대 자락이 웃음을 띨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번엔 무엇일까?
– 연약한 자가 악을 놓쳤다·
모두는 누굴 칭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악은 누구이고 연약한 자는 누구인지·
연악한 자는 붕대를 휘감고 있던 이·
드러났을 때의 모습은 노파·
– 그대는 다른 자인가?
“다르다·”
– 그대는 영웅이 되려 하는가?
주란도 보았던 물음·
후공이 답하기 전
“나의 영웅이 되어 주세요!”
어느 동굴 안 꼬마 아이가 외쳤다·
부모님 마을 사람들과 함께 동굴에 숨어 있었고 동굴 입구는 시체들이 막 들어서려다 멈춰 있는 것이다·
외침은 그곳만이 아니었다·
“영웅이 되어 주세요·”
“제발요!”
우물 안으로 몸을 숨긴 아이들도 소리쳤다· 저기 저 위쪽 우물 위에서 죽은 자들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산의 숲에서 길가에서 다락방에서 또 어느 호수 안에서
‘영웅이 되겠다고 말해주세요·’
갈대를 문 채 물에 잠겨 있는 아이도 마음 속으로 외쳤다·
그저 말뿐이어도 듣고 싶었다·
그가 죽은 자들을 멈추었다고 했기에 그가 영원히 멈추어주길 바랐다·
모두의 염원 속에 후공이 답했다·
“나는 영웅이 되려 한다·”
그 순간
천롱삭이 미칠 듯이 휘날렸다·
천하 각지의 아이들도 펄쩍펄쩍 뛰며 만세를 불렀다·
“와아아아!”
“와아아아아아!”
“우와아아아 대답 했어!”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운부산에 감금되어 있다 구출된 아이들에겐 이미 영웅이었다· 천공단에게도 영웅이었고 구대 문파와 십대세가에도 신주십삼파 중 몇몇들에게도 이미 영웅이었다·
그사이 천롱삭이 문장을 만들어냈다·
– 너의 그 대답이!
펄럭이며 문장을 바꿨다·
– 마음에 든다· 마음에 든다· 마음에 든다!
그와같은 글자를 연거푸 띄운 천롱삭이 후공에게 휘감겼다· 머리를 휘감고 목을 휘감고 가슴을 휘감아가니 그렇게 후공은 천롱삭에 휘감겼다·
그리하여 드러난 건 오직 두 눈·
그리고 옅게 벌어진 입술·
새로운 주인을 얻은 천롱삭 한줄기가 휘날려 후공의 눈앞을 스쳤다·
그 안쪽에 문장이 나타났다·
천롱삭의 주인이 된 자만 볼 수 있는 글자였고 오행의 완성을 넘어 각인을 이뤄낸 자만이 볼 수 있는 글자였다·
– 그대는·
글자가 날아가고 새로운 글자가 떠올랐다·
– 나의 주인· 무엇을 원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