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혹시 전생에 무림맹주였습니까?
후공이 내심 혀를 찼다·
금적자에게 부탁한 건 음공의 시전·
금적자의 음공은 단순치 않다· 적을 직접적으로 해하는 용도만이 아닌 상대의 심리를 뒤흔들어 놓는다·
음률은 희로애락을 자극하여 우울하게도 들뜨게도 하니 약왕문 전반에 감정적인 영향을 끼쳐 주의를 분산시키면 그 틈에 개방이 특유의 은신법으로 휘젓고 다니며 정보를 수집해오는 것이 계획이었다·
한데
정작 거지들이 시작부터 감정적인 동요를 보이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변수·
내심 녀석들이 한심스러웠지만 나쁠 건 없다· 이는 그만큼 금적자의 음공이 약왕문에도 효과를 낼 것이라는 의미이다·
“은앙개 소천개· 가까이 와라·”
눈물을 글썽이며 다가온 둘을 차례로 점혈했다·
귀 부근·
정확히는 이문혈과 청궁혈을 자극하고 이어 목 뒤쪽 서봉혈을 통해 기운을 연동시켰다·
이내 거지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형아 어떻게 한 거야? 이게 그건가?”
“으잉 땀이 멈췄어· 천상의 손길이 이건가 보네·”
자신들도 아는 혈도인데 어찌한 건지 따끔한 순간 기이하게도 청각은 그대로 유지된 채 의식이 명료해지며 감정이 통제되기 시작한 것이다·
뒤에서 지켜보던 항마삼협과 무산쌍웅도 놀라 미간을 좁혔다·
자신들도 거지들의 상황을 보며 내심 어찌 대처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는데 단주가 음공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점혈만으로 단번에 의식을 고취시킨 것이다·
이런 공능은 스스로를 지키는 것과는 의미도 깊이도 완전히 달랐다·
후공이 입을 열었다·
“은앙개 풀리는 시간은 일식경 이내다·”
“시간이 넘으면?”
“길바닥에서 울고 있겠지· 저 꼴로·”
“와아···· 물웅덩이 생기겠네·”
후공이 저 꼴로 라고 가리킨 건 묘빙빙 쪽·
묘빙빙은 아예 땅바닥에 퍼질러져 엉엉 곡소리를 내며 울고 있었다·
“그러니 엉뚱한 짓 말고 부지런히 움직이도록 해라· 암호의 좌표 외에도 약왕문인들의 밤 이야기들을 최대한 많이 듣고 오도록 해·”
은앙개가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두목 우리 누군지 알잖아· 개방이야· 낮 이야기든 밤 이야기든 닥치고 수집하는 전문가라고·”
“그래 잘해내면 방금까지 질질 짠 건 잊어주마·”
“좋아 약속 잊지 마!”
“형아 질질 안 짜고 슝 다녀올게·”
두 거지의 모습이 숲을 파고들면서 잔영이 흐릿해졌다·
“형님·”
뒤에 있던 무산쌍웅이었다·
후공이 뚱하니 바라보자 쌍웅이 실실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째 웃는 것인데도 당장이라도 칼로 쑤셔 박을 듯이 음흉함이 물씬 풍겼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뭡니까?”
“흐흐 혹시 말입니다· 전생에 무림맹주였습니까?”
“전생에?”
후공은 갸웃해 보였다·
무산쌍웅은 씨익 한쪽 입가를 올렸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게 아니면 얼마 전까지 먹물서생이었는데 어찌 적재적소에 천공단의 능력을 활용할 수 있단 말입니까· 금적선생의 음공과 개방의 재능까지 파악하고 또 방금 보인 점혈은 또 뭔가요?”
그러면서 무산쌍웅이 흉악하게 껄껄거렸다·
후공은 그만 피식하고 말았다·
이놈들은 농담을 해도 방향을 못 잡고 생뚱맞기 그지없다·
감히 전생이라니·
“현생에·”
“···예?”
짧게 답을 알려주자 무산쌍웅이 멍청해져 눈만 깜박였다·
그렇게 후공이 성큼 걸어가버리자 쌍웅의 곁에 있던 항마삼협이 깔깔대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와우 우리 형님 이걸 이렇게 받아버리네·”
“하하 개소리에는 역시 개소리가 답이긴 하지·”
**
개방은 역시 개방이었다·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했다· 거의 모든 정보가 수집되었다·
그 내용은 뜻밖이었고 충격적이었다·
뜻밖인 건
“두목 보물이란 건 장서각에 있는 것 같아· 약제실의 지붕과 처마의 그림자가 생긴 게 딱 화살 모양인데 그 방향에 있는 건 장서각뿐이었거든·”
보물이란 것이 서책 중 하나라는 사실이었고
“그리고 약왕문주께선 정신이 온전치 않은 모양이야· 정신착란을 일으켰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다는걸·”
약왕문주의 상태는 모두의 예상범주를 훌쩍 뛰어넘는 충격이었다·
“정신착란? 원인은?”
“약의 부작용이래·”
“확실해?”
미간을 좁히며 묻자 은앙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확실하고 말고도 없더라· 금적선생의 음률이 약왕문을 휘도니 각 처소마다 한숨소리가 끊이질 않았거든· 우린 한숨 모으고 다니는 줄 알았다니까· 여러 대화들이 다 같았어·”
후공도 절로 한숨이 났다·
‘약쟁이 녀석 약을 그렇게 해대더니 결국····’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약의 배합을 스스로에게 시험하는 것이 독이 될 수도 있으니 적당히 하는 것이 어떠냐고 주의를 주었거늘 결국 이 사달이 난 것이다·
어이가 없는 건 천공단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시발 무슨 약왕이 약에 당해버려! 진짜 개한심하네·”
항마가 욕을 쏟아내며 비난하는 것을 시작으로 한마디씩 이어갔다·
“그러게 말입니다 어이없네· 이런 식이면 염병 독왕은 독에 중독되어 죽는 건가?”
“듣는 내가 다 창피하네· 이거 누가 들으면 믿기나 하겠습니까!”
후공은 그저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천공단의 욕은 단지 비난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안타까움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잦아들길 기다렸다 은앙개에게 물음을 던졌다·
“약왕문의 통제력은?”
“문제없어 보였어· 결속은 꽤 강해 보이더라고·”
후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약왕문주 용악이 약에 미쳐 있어서 그렇지 결코 허술한 인물이 아니다· 후계 체계를 공고히 해놓은 것은 물론이고 불온한 세력들은 미리 미리 싹을 정리해 두었을 것이다·
“단주 이제 어찌 할 생각인가?”
금적자가 물었다·
“하나씩 해가도록 하죠· 우선은 다들 내색하지 말고 평소처럼 행동해 주십시오·”
모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씩이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지만 평소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건 공감했다· 약왕문이 먼저 말을 꺼내기 전까진 드러내선 안 된다·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간밤에 피리 소리를 타고 약왕문을 헤집고 다녔다고 말할 순 없지 않은가·
하지만 무엇보다
섣부른 위로가 도리어 상처가 되기도 하고 불행은 어떨 땐 눈감아주는 것이 배려라는 것쯤은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
다음 날 오전
외무각주 용화청이 별채를 찾았다·
“식사 중이셨습니까?”
뜨락에서 천공단은 식사 중·
치이이익····
달구어진 돌판에 고기가 잘도 익어갔다·
지난 밤의 소식은 그리 유쾌하지 않아 다들 말없이 아침부터 고기를 구워 먹던 중이었다· 유쾌하지 않다는 이유로 고기 양이 많았다·
“일찍 왔구나· 식전이면 같이 먹자꾸나·”
“각주 이리 오시오· 고기는 넉넉하다오·”
고기는 약왕문 제공인데 주객이 완전히 전도· 천공단이 선심을 베풀었다·
“그럴까요?”
거절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용화청이 미소를 띠며 자리에 함께 했다·
“그런데 대공자 아니 천공단주께선 어찌 보이지 않으십니다· 원래 겸상 안 하십니까?”
“두목 형아는 겸상 그런 거 안 따지는 사람이에요· 지금은 그냥 쿨쿨 자· 밤을 꼬박 샜어·”
“밤을 샜단 말입니까?”
“네~~·”
용화청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암호 해독에 열심이다 싶으니 절로 기분이 좋아진 것· 진행 경과를 확인차 온 것이었기에 이 정도면 됐다 싶어 화제를 바꿨다·
“어르신 지난 밤 피리 소리는 어르신의 음률이었겠지요?”
“···?”
금적자가 미간을 찡그렸다·
혹시 뭘 알고 묻나 싶어져 괜히 찔린 나머지 고기를 씹다가 혀를 깨물고 만 것이다· 피가 고기에 섞여 쇠맛이 났다·
‘젠장·’
천공단도 뭔가 싶어 고기를 뜯다 말고 일시 정지·
용화청이 갸웃하며 미소 지었다·
“다들 뭘 그리 놀라십니까· 서정적인 음률이 듣기 좋아서 드린 이야기였습니다· 이 나이에 감성이 아직 남았던 건지 주책맞게 저도 모르게 좀 울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위로 받는 기분도 들기도 했고요·”
쩝쩝쩝·
안도한 천공단의 고기 씹는 속도가 정상을 회복했다·
금적자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위로는 무슨· 그저 운치가 돌아 그런 것뿐이다·”
“어르신의 운치가 자주 돌았으면 좋겠습니다·”
“운치를 니가 뭘 안다고 그래!”
정색하며 소리친 말이 비수 같았다·
괜한 면박에 용화청이 머리를 긁적였다·
덕분에 분위기가 일순 싸해지며 정적이 일었다·
유연함에 일가견이 있는 은앙개가 얼른 나섰다·
“흐흐 마음에 담아두지 마십쇼· 선생께서 멋쩍어서 그리 말씀하신 겁니다· 그건 그렇고 각주 약왕문주님께서 폐관 중이시라고요? 오래 걸리시는 겁니까?”
용화청이 일순 멈칫했다·
하지만 그건 찰나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게··· 당장은 기약이 없습니다·”
“폐관 일찍 끝내고 나오시라고 하면 안 됩니까? 약왕문에서 약왕문주님을 못 뵙고 돌아간다 생각하니 여간 섭섭한 게 아닙니다· 성질 더러운 제 사형은 절 놀릴 테고요·”
“허허···· 아버님도 나중에 아시면 서운해하실 겁니다·”
은앙개가 말을 돌린다고 돌렸지만 싸해진 분위기가 돌아오지 않았다· 불편해진 용화청이 몸을 일으켰다· 이미 찾아온 목적도 달성한 터·
“인사차 들른 것이니 마저 식사하십시오· 저는 일이 있어 이만 가보겠습니다· 또 시간이 되는대로 들르도록 하겠습니다·”
용화청이 총총히 떠나 보이지 않게 되자 기다렸다는 듯 모두가 금적자를 향해 성토를 쏟아냈다·
“선생께선 말을 꼭 그렇게 하셨어야 했나요?”
묘빙빙을 시작으로
“피리 한 소절 부르는 것이 뭐라고 유세십니까?”
“위로가 됐다는 사람을 앞에 두고 성질을 내버리시다니요!”
“금피리 할아버지 나빠!”
금적자가 발끈했다·
“아니 어린놈의 새끼들이 어디서 눈을 부라려!”
“어른이면 어른답게 처신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제 이야기 다 끝냈잖습니까· 평소처럼 하기로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평소에 내가 이래!”
“평소에 그런 거면 평소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금피리 할아버지 평소에 나빠!”
“울었다니까 그냥 성질이 나는 걸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거기다 혀도 깨물었단 말이다!”
영원할 것 같던 천공단의 다툼은 의외로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송화가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다가 한 방에 정리했다·
“고기 타요! 안 드실 거면 그만 굽고 판 접을게요!”
다들 화급하게 고요해졌다·
이내 이건 좀 탔어도 맛있네 같은 말들이 조금씩 오갈 뿐이었다·
***
오후에도 손님이 찾아왔다·
“소는 이제 물린다· 돼지고기 없나? 살에 비계가 섞여 들어간 부위가 그렇게 맛있는데·”
“저녁에는 멧돼지나 한 마리 잡으러 가시죠·”
삼시 세 끼 꼬박꼬박 챙겨먹는 천공단이 점심때도 둘러앉아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을 때였다·
“듕듕이 형아다! 듕듕듕듕!”
소천개가 눈을 크게 뜨고 반색했다·
직접 마주하게 되면서 둥둥이 아니라 듕듕이란 걸 확실히 알게 된 소천개가 미친 듯이 듕듕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