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 (4)
다음 날·
나는 해룡궁의 앞에서 타 계면으로 향하기 위해 본체로 변해 날아가는 서휼을 배웅하였다·
[그럼 내 다녀오겠네· 부디 모두 해룡궁을 잘 부탁한다네·]
파아앗!
직후 서휼은 먹장구름을 타고 빠르게 저 멀리 날아갔다·
‘됐다····’
나는 그제야 숨을 몰아쉬며 미소를 지었다·
서휼이 드디어 갔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 나니 그제야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았다·
지난 7년은 그야말로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든 나날들이었었다·
‘이제야 숨을 쉴 틈이 생겼다·’
물론 숨 쉴 틈이 생겼다고 해서 진짜로 멍청하게 숨만 쉬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나에겐 수작을 못 부려 놨다지만 해룡궁에는 무슨 수작을 부려 놨을지 모른다·’
해룡궁이 아니라 해룡족들은 물론이고 인근의 수저 요족들 역시 전부 요주의 대상이었다·
서휼의 영향권이 미치는 모든 곳의 모든 존재들을 믿어선 안 된다·
“대군께오서 가시며 흑룡 선수 진혈자이신 서은현 님께 대군의 진혈을 남기시며 관작을 하사하라 명하셨습니다·”
서휼이 가고 나자 해룡궁의 원로들이 나를 불러세웠다·
“이제 진혈자께서는 대군과 선수의 진혈을 둘 다 물려받으셨으며 원영기 장로가 되셨으니 관례대로 대서장(大庶長)의 관작을 부여하겠습니다· 이는 대군(大君)의 명이시니 거부는 불가하옵니다·”
“서 대군의 영지(令旨)를 받잡사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대서장·”
나는 서휼의 명에 따라 해룡궁의 관작을 받았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서휼이 남기고 간 족쇄는 고작해야 그의 피 따위가 아니었다·
“대서장께오선 귀한 몸이시오니 앞으로 해룡궁 전사들이 상시 호위를 맡을 것입니다·”
원영기 해룡족 전사 10명이 내게 하루 종일 붙어서 나를 상시 감시한다·
“또한 대서장께서는 대군이 내리신 관작을 받으셨으니 대군이 남기시고 간 영지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셔야 할 것입니다·”
“무슨 임무입니까?”
“주로 해룡궁의 내정과 또한 몇 가지 제의(祭儀) 때에 나서 주시어 제의를 도와주시면 됩니다·”
“어떻게 해야 하지요?”
“우선 제의를 도울 때 쓰일 공법을 드릴 터이니 공법을 익히시고 공법 흐름에 따라 제를 지내시면 됩니다·”
“····”
이제는 서휼이 아닌 해룡궁 원로들이 들이대는 공법서들을 익혀야 했다·
“참 해룡궁의 해서제가 앞으로 한 달이니 한 달 안에 빨리 앞서 드린 해월진룡변을 익혀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서휼은 그뿐이 아닌 온갖 사회적 제약을 내게 걸어 놓아 그가 없는 틈에도 내가 해룡궁 바깥으로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게 해 놓았다·
‘지독하군·’
하지만 우습다·
키이잉―
나는 해룡궁에 깔아 놓은 괴군의 회로를 만지작거렸다·
괴군의 회로란 단순히 서 장군을 만드는 회로를 뜻하는 게 아니었다·
기묘성채 전역에 깔려 그의 기묘성심전과 연동되던 회로가 괴군의 회로였다·
한마디로 기묘성채 곳곳에서 운용되던 모든 괴뢰의 기술이 총집합된 것이 내가 다루는 괴군의 회로인 것이었다·
괴군의 회로가 깔린 이상·
이 해룡궁은 나만의 괴뢰나 다름없었다·
‘물론 진짜 괴뢰로 쓰려면 한참 개조를 더 해야겠지만 일단은 해룡궁의 금제나 결계 혹은 곳곳에 걸린 법술을 장악한 것에 만족하지·’
괴군의 회로의 가장 큰 효용은 상대의 ‘법기나 법보’를 ‘괴군의 꼭두각시’로 강제로 개조하는 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괴뢰나 다름없어진 해룡궁 전체의 금제를 자유자재로 조작하며 다른 해룡궁의 원로들 몰래 누군가에게 전음부를 발송하였다·
‘한 달 뒤에 제의를 지낸다고?’
아마 그것 말고도 서휼이 나를 위해 준비해 놓은 제약은 한두 개가 아닐 터다·
하지만 녀석이 무슨 제의를 준비해 놓았든 전부 소용없어질 터다·
왜냐하면 당장 한 달이 아니라 며칠 후면 해룡궁은 난장판이 될 테니까·
* * *
내가 전음부를 보내고 사흘 후·
나는 월수궁무록을 써서 내게 붙은 감시 10명을 따돌리고 해룡궁의 모처에 도착했다·
“간만에 다시 뵙습니다·”
“간만은 무슨· 고작 며칠 만이 아닌가·”
나는 내 도움을 통해 해룡궁의 금제를 그냥 전부 통과하다시피 들어온 유화를 반겨 주었다·
“그나저나 이 시간이면 한창 요선루가 활발할 시간인데 그냥 와도 되는 건가?”
“뭐··· 귀하를 만나러 간다 하니 동료들이 선뜻 보내 준 것도 있긴 합니다·”
“···? 날 만나는 데 왜 보내 주는 거지? 혹시 뭔가 알아챈 건가?”
“흠···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군요· 다만 저희가 심족인 걸 알아챈 눈치는 아니었습니다· 힘내라면서 오히려 응원해 준 것이··· 음· 아무래도 귀하께서 지난번 영석을 듬뿍 기부해 주셔서인지도 모르겠군요· 어쩌면 후원금을 더 주실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닐까요?”
“아 그래서였나 보군·”
“뭐 그런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어차피 제 본직은 요선루의 악사가 아닌 심족 첩보공작원이니까요·”
그녀는 싱긋 웃으며 말하였다·
“그럼 이제 백녕에게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그러지·”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했지만 나는 해룡궁의 금제를 통제해 주고 자네가 나갈 수 있도록 돕겠네· 하나 백녕을 데려가는 것은 순수하게 자네의 몫이야·”
“예 당연한 말씀이지요·”
나는 그녀를 데리고 해룡족 원로들에게 들키지 않게 백녕과 그의 백염족이 지내는 해룡궁 옆 산호초가 펼쳐진 마을로 향했다·
백녕과 백염족은 해룡궁 옆· 산호초로 이뤄진 마을 안에서 지내고 있었다·
산호초들은 수중에서 결계의 축이 되어 마을 전체에 커다란 공기 방울을 씌워 주고 있었고 백염족 대다수는 그곳에서 값비싼 산호를 몸에 치장하고 생활하고 있었다·
그 사치스럽고 평화로운 모습에 유화는 흠칫 놀라는 듯했다·
“이게 무슨····”
“···현재 백녕과 그의 백염족은 서휼이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잘 지내고 있는··· 중이지·”
유화는 당황한 듯이 사치스럽고 부유한 백염족을·
그리고 백염족 마을 곳곳에서 노예로 부려지는 다른 노예 종족들을 둘러보았다·
“···이곳에 백녕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저기 가장 호화로운 장원이 백녕의 것일세·”
나는 산호 마을 안쪽·
거대한 장원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녀는 잠시 얼이 빠진 모습을 하고 있다가 들고 온 금을 튕겼다·
우웅!
그녀의 주변으로 주홍빛 강물이 휘몰아쳤다·
얼마 후 그녀는 노을빛과 완전히 동화(同化)되어서 노을빛 그 자체로 화하였다·
아무래도 내 답천처럼 자신의 곡 그 자체와 동화되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노을빛 강물로 변한 그녀는 너울거리며 백녕의 장원으로 빠르게 잠입하였다·
나 역시 그녀를 따라 백녕의 장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와 유화를 맞이한 것은 전신에 푸른 갑주를 입고 용의 비늘로 만든 용린편을 든 채 장원에 서 있던 백녕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유화 님· 그리고 대서장님·”
그가 목에 차고 있던 목줄에서 음양의 흐름이 흘러나오며 자연스레 요족어가 되었다·
아무래도 그의 말을 요족어로 통역하는 법기인 듯했다·
유화는 당혹스러운 듯 주홍빛 강물의 모습으로 그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말을 걸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것이냐? 내 너를 구하···려고 왔다만·]
“아 유화 님·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대군 아래에서 충성을 바치는 지금의 생활이 매우 만족스러우니까요·”
[···지족 아래에서 충성을 바치는 게 만족스러워? 바깥에서 네 동족들이 다른 노예 종족들을 학대하는 것을 보았다· 어찌 된 일이냐?]
“어찌 된 일이긴요·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라 이제 상위 종족이 된 저희가 제대로 된 권리를 누리는 것이지요·”
[그게 무슨 말 같잖은··· 네가 목화 농장에서 채찍질을 당하던 기억은 잊은 거냐?]
“그때는 약해서 그랬습니다· 아 어쨌든 유화 님께는 정말 감사드립니다· 유화 님께서 의념을 막 깨달은 제게 접근하여 지도를 해 주지 않았다면 하현에 도달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하현··· 내가 부르는 대로 구현을 칭하면서도 너는 내 뜻과 반대로 무고한 노예 종족들을 학대한다는 거냐?]
“무고하다니요? 저들에게는 죄가 있습니다·”
[뭐···?]
유화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강물 속에서 백녕에게 찌릿한 의념을 쏘아 보냈다·
“저들은 약합니다· 그게 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뭐···라고?]
“유화 님 당신은 제 스승님이나 다름없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이끌어 주신 덕분에 이 경지에 이르렀지요· 그렇기에 오히려 당신이라면 아실 겁니다! 제가 이 경지에 오르기 위해 얼마나 피땀을 흘리며 노력했는지! 제가 강해지기 위해 어떤 노력을 쏟아붓고 어떤 집념과 갈구를 통해 도달했는지!”
[···그래· 너는 노력했다· 하나····]
“그렇다면! 약자들이란 노력하지 않은 자들이 아닙니까!? 현재 우리 백염족의 밑에서 일하는 이들은 나태하기로 이름이 난 종족들밖에 없습니다· 저희 백염족은 그런 이들을 교화하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채찍을 든 것입니다!”
백녕의 기막힌 논리에 유화는 어이가 없어진 듯했다·
[···그럼 이전에 네가 나타나기 이전의 너희 백염족도 나태한 이들이라서 학대받았다는 거냐?]
“예 슬프지만 그것이 진실입니다· 이 세상의 진리는 약육강식! 오직 그것입니다!”
[···그렇군·]
스르르····
백녕은 강물의 형태에서 본래의 형태로 되돌아와 백녕의 앞에 나섰다·
물론 상반신 부분은 일렁이는 강물처럼 변화한 채인지라 완전히 드러나지는 않았다·
백녕은 그 모습을 보며 눈을 찡그렸다·
유화가 그에게 말하였다·
[너 세뇌가 진행되어 있구나· 누군가 네게 지독한 세뇌와 암시를 걸어 놓았어· 해룡궁의 주인··· 너를 납치한 서휼인 건가?]
그러나 그 말에 백녕은 찌푸린 얼굴을 더더욱 일그러뜨리며 일갈하였다·
“세뇌라니! 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저는 제 의지로 대군께 충성을 맹세한 것입니다!”
[뭐···?]
“솔직히 유화 님께서는 지금도 마찬가지이시지만 한 번도 제게 진짜 얼굴을 보여주신 적이 없으시지요·”
[그건··· 천 지족들은 혼백을 고문해 기억을 읽는 능력도 있으니 내 얼굴이 드러나면 곤란할 수도 있어서고··· 심족 영역에 도착하면 얼굴을 드러내고 제대로 사제의 예를 맺자고 하지 않았느냐!?]
아무래도 백녕이 의념을 각성할 때 그와 접촉하여 그를 입천까지 이끈 것이 유화인 만큼·
그녀와 백녕의 사이는 스승과 제자에 준하는 듯했다·
“하 사제의 예 말씀입니까? 제가 대군의 손에 잡혀갈 때 유화 님께선 뭘 하셨지요? 계속 심상 속에 심족 존자의 일격을 품고 있다고 말씀하시며 한 번도 안 쓰지 않았잖습니까? 제가 대군의 손에 잡혀갈 때에 존자의 일격을 썼다면 저는 어쩌면 당신과 함께 심족 영역이란 곳에 도착해서 말씀대로 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백녕의 일갈에 유화는 침묵하였다·
“하! 저는 오히려 당신과 함께 가지 않아 다행이라고도 생각합니다· 끝까지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던 당신과 달리 그분은 처음부터 웃는 얼굴로 저를 반겨 주셨고 천한 종족인 제게서도 의념을 통제하는 기술을 배우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더군다나 늘 말뿐이었던 당신과 달리 대군께서는 인근의 백염족들을 해방시켜 준 후 해룡궁 인근에서 지배종의 위치까지 주셨습니다!”
[····]
“이래도 제가 세뇌되었다고 하실 겁니까!?”
잠시 그녀와 백녕 간에 침묵이 일었다·
그리고 유화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구나·]
“하 이제 와서····”
[하지만!]
투웅!
그녀가 금을 뜯었다·
동시에 사방팔방으로 주홍빛 강물이 넘쳐흐르기 시작하였다·
[너는 세뇌된 것이 맞다·]
“변명하실 게 없으시니 저를 세뇌된 놈으로 만드시는군요·”
[세뇌된 게 아니라고? 그렇다면 한 가지 묻지· 너는 서휼의 심상에서 무엇을 보았지?]
“대군의 심상이요? 말해서 무엇합니까 향기가 풍기고 깨끗한 바람이 부는 마치 신선향 같은 무릉도원을 보았습니다!”
[····]
쩌억····
나는 백녕의 대답에 너무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고 유화도 잠시 어이가 없었는지 침묵하였다·
놀랍게도 답천의 눈에 달한 나와 유화의 눈에도 전혀 거짓말을 하는 의념이 포착되지 않았다·
정말로 본인이 서휼의 심상을 무릉도원이라 믿고 있는 것이었다·
[···역시 세뇌되었구나·]
“제가 볼 때 세뇌는 유화 님께서 심족 존자란 놈에게 당한 게 아닙니까!”
“글쎄···”
나는 듣다 듣다 못 해 백녕의 말을 끊었다·
“나 역시 함천존자의 분체를 한 번 뵌 적이 있네· 그분께선 힘은 강대하지만 세뇌를 잘 걸고 다니실 분은 아닐 것 같군·”
“아 이것 참· 대서장님께서도 계셨지요· 하하 대서장님도 생각해 보니 하현의 중간 달에 도달하신 분이셨지요? 이제 보니 유화 님을 이곳까지 데리고 오신 분이 대서장님이셨나 봅니다?”
백녕은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대군께서 본인이 자리를 비우시면 대서장님을 잘 감시하라 하셨는데 이렇게 바로 심족 첩자이신 유화 님을 해룡궁의 옆까지 데리고 오시다니· 당신은 해룡족을 배신하려 하시는 겁니까?”
“너····”
그때였다·
콰앙!
주홍빛 강물이 넘실대더니 실컷 떠들던 백녕을 후려쳐 장원의 저 멀리로 날려 보냈다·
“끄··· 으으으···!”
백녕은 비틀거리며 일어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화가 보낸 노을빛에 맞은 뒤 ‘잠’에 저항하고 있는지 비틀거리며 겨우 눈을 뜰 뿐이었다·
[···배신자는 네가 아니냐 백녕!]
“뭐···?”
유화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렸다·
[언젠가··· 학대받는 노예 종족들을 모두 구원하겠노라고··· 다시는 자신들 같은 종족이 생기지 않게 하겠다고 맹세하던 그때의 백녕은 어디에 있느냐! 너는 그때의 너 자신을 배신한 거다!]
“내가··· 배신자라고? 웃기지 마! 배신자는 당신이다 유화! 심족 존자의 일격을 가지고 있다고 백날 잘난 체하며 나를 안심시키더니 결정적인 순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를 방치하지 않았나!”
[그래··· 긴말은 필요 없겠지· 네가 그리 나온다면 너를 하현으로 이끈 내가 책임질 수밖에·]
“하 이제 와서 스승 노릇을 해 보겠단 거냐!?”
[···못난 스승으로서 네게 씐 세뇌를 두들겨 패서라도 풀어 주마·]
투웅 퉁!
그녀가 금을 뜯었고 유화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그녀의 연주는 백녕에게만 향하는 연주였다·
그렇기에 나에게는 영향이 없었고 모든 힘은 백녕에게만 집중되었다·
본래라면 일순간에 잠에 빠져들어 환몽의 세계를 헤맸어야 할 백녕이었다·
하지만 백녕이 찬 장신구 중 하나가 빛을 발하였다·
파아아앗!
그리고 희미한 영기가 백녕의 백회로 흘러 들어가 상단전을 휘몰아치더니 그의 미간으로 뿜어져 나왔다·
‘정신 각성···!’
잠에 빠져들려던 백녕은 가지고 있던 법기를 써 정신을 다잡았다·
그러나 나는 그 법술을 보며 소리쳤다·
“너···! 그건 위험한 법술이다!”
단순한 정신 각성의 술이 아니었다·
일전 내가 상단전을 불태웠던 기술 혹은 진씨세가에서 상단전에 귀신을 불어넣어 격발시켰던 기술과 비슷하다·
자신의 정신을 격발시킴으로써 어마어마한 의식을 일순간 얻게 되는 기술!
키이이잉!
백녕의 주변을 둘러싼 의식 영역의 크기가 일순간 거대해지더니 그의 기운과 일체화하여 그의 채찍에 스며들었다·
촤라락!
하현 척산편(斥山鞭)!
쿠구구궁!
그가 지어낸 절학명이 의식을 통해 울리며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유화가 금을 뜯으며 연주를 이어 갔으나 정신을 격발시키는 중인 백녕은 유화의 연주를 버텨 내며 그녀에게 채찍을 마구 휘둘렀다·
나 역시 그들의 싸움에 가세하려 했으나 유화가 나를 막았다·
[끼어들지 마십시오 저희의 일입니다!]
그녀의 의지는 너무도 확고하였기에 나는 일단 그들의 싸움의 여파를 통제하며 가만히 있었다·
쿠궁 쿠구구궁!
백녕의 정신 각성을 위해 녀석의 수명이 그대로 깎여 가고 있었다·
백녕은 자신의 수명을 깎아 가며 유화에게 저항하고 있었다·
‘서휼에게 장생단을 받았었던가?’
아무래도 수명이 조금 깎여도 다시 늘리면 된다는 식으로 생명을 불태우는 모양·
그리고 자신의 제자를 공격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수마(睡魔)를 극복한 상대에게는 상성이 좋지 않은 것인지 유화는 그렇게 생명을 불태우는 백녕을 상대로 큰 힘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장기전으로 간다면 유화가 당연히 유리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곳은 해룡족의 영지 해룡궁의 바로 옆에 있는 마을이라는 것이었고 이 정도의 소란이 일어나고 있으니 곧 해룡족 원로들이 출몰할 것이란 것이었다·
아무리 내가 여파를 통제하고 있다곤 해도 해룡족의 영역에서 천인기 해룡들의 눈을 완전히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뭐 잘 됐다·’
어차피 소란이 이렇게 난 것·
해룡궁을 아예 폭발시켜 버리고 그쪽으로 주의를 끌어 둘의 시간을 보장해 준 후 그것을 빌미로 해룡궁의 여러 잡다한 제약에서 벗어나면 될 터·
그러나 그때였다·
[뭔가 저희를 도우시렵니까?]
유화의 영언이 내게 전해져 왔다·
[도우실 것 없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이건 저와 제 제자의 일이니·]
“하지만 곧 해룡족 천인기 원로들이 올 거다·”
[···저와 제자의 일입니다· 누군가의 간섭은 필요 없습니다·]
“아니 현실적으로····”
[또한 저는 심족 첩보공작원· 주요 임무는 천 지족 영역에서 각성하는 심족들을 포섭하여 심족 영역으로 오게 하는 것· 그리고 당신 역시 제 임무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하나 당신은 심족인 동시에 천 지족이기도 하시니 심족의 공부에 관심이 없을 가능성도 있겠지요· 그러니 제자의 일을 처리하는 김에 더러운 지족들의 영지를 불태워 버리고 동시에 당신에게도 심족이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드린다면 조금은 당신도 심족에 관심을 가지시겠지요?]
투웅 퉁!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완전히 자신의 본신을 드러내었다·
지금껏 백녕에게는 보여 주지 않았다는 그녀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났다·
[해룡족의 호수 바깥으로 피하시기를 권장합니다· 지금부터 하현의 마지막 달 구현 3단계라고 불리는 경지를 보여 드릴 테니까요·]
말하자면 답천 너머를 보여 주겠다는 소리·
분명 무의 다음 경지를 보여 주겠다는 말이었으니 평소의 나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그 광경을 보겠다고 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어째서였을까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지며 천기가 갑자기 변화하는 것이 보였다·
‘하 하늘이····’
겁(劫)의 천기를 드러내고 있다·
당장이라도 도망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큰 낭패를 볼 것이다·
육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천지영기가 불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으며 천기는 경고를 해 준다·
당장이라도 그녀가 말하는 범위 바깥으로 도망쳐라·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산호 마을의 공기 방울 너머로 천인기 해룡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이냐!]
[네놈은 누구냐! 어찌 본 해룡족의 영지에서 난동을 피우는 것이야!]
그들은 으르렁거리며 유화를 향해 이를 드러냈고 각기 천지영기를 끌어모으며 요술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덤덤하게 금을 뜯으며 다시 한번 내게 권하였다·
[다시 말하겠습니다· 지금부터 구현 3단계를 펼칠 것이니 해룡족의 구역인 운심호를 벗어나십시오·]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순간 하늘을 쳐다보았다·
도망치는 게 맞다·
하지만·
“···아니 옆에서 지켜보지·”
[···무모하시군요· 당신이 심족인 동시에 천 지족이기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당신은 상당한 손해를 보실 겁니다·]
나는 어떤 손해를 보더라도 [다음 단계]가 무엇인지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나저나 궁금하군 원래 구현 3단계의 강자였나?”
[하현 중간 달의 극한에 있기는 했고 원래부터 하현 마지막 달을 목전에 두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줄곧 감고 있던 두 눈을 떴다·
그녀의 눈은 그녀가 다루는 주홍빛 강물처럼 노을빛을 띄고 있었다·
[이 상태에서 존자께서 심어 두신 일격을 등대로 삼아 제 생명을 불태우면 짧은 순간이나마 구현 3단계를 제 손으로 펼칠 수 있겠지요·]
그녀는 노을빛이 도는 눈으로 백녕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제 제자에게 그리고 더러운 지족의 용들에게만 보여 주면 족한 힘입니다· 다시 권하겠습니다· 멀리 떨어지십시오· 실력으로 펼치는 게 아니기에 당신이 곁에 있더라도 조절은 불가능합니다·]
“상관없다·”
나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다음 경지를 볼 수 있다면 딱히 목숨이 아깝진 않아·”
[···뭐 그러신다면야·]
쿠구구구!
산호 마을의 결계 너머로 천인기 해룡들이 들어와 그녀를 포박하기 위하여 요술들을 사용하였다·
삽시간에 사방이 물로 가득 차오른다·
그리고 그녀가 눈을 뜬 채로 금을 뜯기 시작하였다·
[하현 마지막 달·]
월도답천 이후의 경지·
구현 3단계로 불리는 심족의 힘이 펼쳐졌다·
그날·
나는 천족과 지족이 어째서 심족을 끔찍할 정도로 박멸하려 하고 그들을 공포스러워했는지를 이해하였다·
동시에 어째서 고수의 숫자가 만 명도 되지 않는 약소 종족이 어째서 광한계의 패권을 다투는 천 지족의 사이에서 독립적인 칭호를 얻는지도 이해하였다·
천지만상이 노을빛으로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