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면(多面) (2)
“앉으시지요· 무슨 큰 짓을 한 게 아닙니다·”
나는 그녀의 몸에서 기괴고를 반쯤 뽑아내며 보여 주었다·
완전히 뽑히지는 않았기에 그녀의 행동은 여전히 제약이 있었다·
“그냥 제 술법으로 헌 선자를 두 달 정도만 감시했을 뿐입니다·”
“···간이 크구나· 감히 합체기 태수인 내게 기생법술을 기생시키고 두 달 동안이나 나를 감시해? 네가 무사할 수 있을 성싶으냐?”
“흐음··· 큰 위협은 아니군요·”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애당초 헌 선자의 형제자매분들 봉래궁의 다른 이들 역시 헌 선자의 몸 곳곳에 덕지덕지 추적과 감시 법술을 붙이고 있지 않습니까·”
“····”
“그중 몇 개는 정말로 못 알아차리셨지만 그중 몇몇은 알고도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까? 평소에도 그런 걸 붙이고 다니시면서 제 법술이 하나가 더 붙었다고 해서 너무 과민 반응하시는 게 아니신지요?”
그녀는 계속 무표정을 유지하고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의념을 읽으며 그녀가 상당히 당황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일단··· 제 술법으로 두 달간 선자를 감시했고 몇몇 중요한 장면들은 따로 기록도 해 놓았지요·”
내가 기괴고의 술을 조금 조작하자 기괴고가 꿈틀거리며 허공에 영상을 띄웠다·
그녀가 자신의 시종과 나를 곤경에 빠뜨릴 음모를 모의하는 장면이었다·
“애당초 헌 선자부터 저를 이리 하려고 하셨으니 상호간에 원망은 없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원하는 게 뭐냐?”
그녀는 차가운 얼굴로 내게 물었다·
나는 싱긋 웃었다·
“제가 묻고 싶습니다· 헌 선자는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저를 손에 얻음으로써 뭘 얻고 싶으신 것이지요?”
그 말에 그녀는 딱딱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 술법을 풀어 주면 말해 주지·”
“그러지요·”
“음?”
나는 그 말에 그녀의 몸에서 기괴고를 빼냈고 헌위는 내가 너무 쉽게 기괴고를 빼내 주자 미심쩍은지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진짜 풀어 버린 거 맞다만····’
물론 나로서는 이제는 조금 진솔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었기에 정말로 기괴고를 뺀 것이었다·
“제가 약속을 지켰으니 말씀해 주시지요· 헌 선자께서는 왜 금신천뢰문에 접근하셨습니까?”
“···금신천뢰문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다·”
“···흐음·”
나는 그녀의 의념을 보며 조금 어리둥절했다·
거짓이 아니었다·
“본문의 ‘호의’가 목적인 겁니까?”
“정확히는 나와 이 문파 간의 밀접한 교류와 관계· 그 자체가 목적이다· 금신천뢰문에게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되는 것 그게 내 궁극적인 목적이었고 그래서 차후 금신천뢰문의 주인이 될 너를 손에 넣으려고 했던 것이지·”
“····”
기이했다·
금신천뢰문을 손에 넣는 것이 아닌 ‘사랑을 받는 것’이라는 목적·
하지만 놀랍게도 그건 사실이었다·
‘도대체 왜지?’
나는 살짝 당혹스러워서 질문했다·
“본문의 사랑을 왜 받으려 했던 겁니까?”
“이제 내가 질문 좀 해도 되나?”
“···예 그러시지요·”
“너는 나한테 뭘 원하는 거지? 내게 이런 짓을 한 이유가 뭐냐·”
“왜 이런 짓을 하냐니··· 당신이 먼저 시종을 시켜 본문에 이상한 진을 까셨잖습니까·”
“뭣···! 네 의식 영역 바깥에서 일을 치렀거늘····”
“저는 금신천뢰문의 차차기 장문인입니다· 곳곳에 제 눈이 있지요·”
“···그렇군· 내가 먼저 실례를 했구나·”
그녀의 태도에 나는 살짝 풀어져서 질문했다·
아무래도 금신천뢰문 자체를 어찌 하려는 류의 음험한 계획은 아닌 듯했다·
“본문과의 관계를 얻어 뭘 얻으려 하신 겁니까?”
“···뭐 이리된 이상 그냥 말해 주는 게 좋겠지·”
헌위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봉래궁의 부궁주 자리를 얻으려 했다·”
“부궁주 말입니까?”
“그래· 아버님을 제외하고 봉래궁의 지고한 위치이지· 현재 우리 남매 17명은 모두 부궁주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어·”
“그게 본문과 무슨 상관입니까?”
“지대한 상관이 있다· 우리 남매들은 모두 다 배다른 측실들의 소생이고 아버님에게는 아직 정실이 없다· 왜인지 아느냐?”
이어진 그녀의 말에 나는 그제야 그녀가 왜 금신천뢰문의 호의를 사려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님께서 진정으로 사랑하셔서 정실로 맞이하려고 했던 이는 본래 금신천뢰문의 여인이었다· 하지만 4만 년 전 전쟁에서 아버님이 사랑하셨던 금신천뢰문의 여제자는 전쟁에 참여했던 머리 둘 달린 노괴에 의해 ‘잡아먹혔다’고 전해지더군·”
“····”
“그 이후 아버님께서는 굉장히 삭막하게 살아오셨다· 내가 봐온 아버님께서도 늘 엄격하고 근엄하고 냉혹한 모습만 보이셨지· 하지만··· 너희 금신천뢰문이 단체로 비승하고 뇌운각의 배후에 있는 노괴를 밀어낸 후 뇌령제일종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신 아버님은··· 4만 년 만에 처음으로 뛸 듯이 기뻐하셨다· 그분께서 그렇게 인간적인 모습을 보인 적이 없으셨지· 그걸 보고서 바로 깨달았다· 너희 금신천뢰문의 사랑을 받으면 그것이 바로 아버님의 최측근이 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이건 개인적으로 궁금한 겁니다만·”
나는 의문이 들어 물었다·
“태수 헌원께서는 어째서 사랑하는 정인을 잡아먹은 노괴에게 복수하지 않으신 겁니까?”
그 노괴가 누군지는 나도 알 것 같았다·
금신천뢰문의 고문헌에는 금위·
즉 연위가 4만 년 전 동문들을 배반하고 잡아먹었다고 적혀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합체기 태수의 정인을 잡아먹은 연위는 어떻게 최근까지 뇌운각에서 살아 있을 수 있던 것일까·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그저··· 4만 년 전의 일에는 너무나 복잡한 세력과 종문 간의 이해관계가 꼬여 있었다고만 들었으니까·”
“그렇군요····”
“여하튼·”
그녀가 나를 보며 물었다·
“여기까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혼인할 생각이 없느냐? 널 사랑하진 않는다· 반한 적도 없다· 그건 인정하지· 하지만 네가 나와 혼인하면 너는 정말로 아버님의 직계제자로 들어갈 수 있다· 아버님은 자신의 자식이라도 금신천뢰문과 이어진 것에 뛸 듯이 기뻐하실 테니 당연히 직계로 넣어 주시겠지· 또한 나는 아버님의 총애를 받고 봉래궁 부궁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
“····”
“아버님께서는 봉래궁의 궁주시지만 그와는 별개로 봉래궁 운영에 크게 손을 대지 않으신다· 한 마디로 부궁주가 실질적인 봉래궁의 우두머리라는 말이다· 금신천뢰문과 봉래궁은 하나가 되어 인족에서 우뚝 설 수 있단 말이다·”
“···저는··· 당신과 혼인할 수는 없습니다·”
내 말에 헌위는 노골적으로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대신····”
그러나 나는 그녀와 금신천뢰문 모두에 이익이 될 일을 제안하였다·
* * *
쿠구구구!
헌위는 흙집을 부수고 나와 나를 바라보았다·
“뭐 나쁘지 않은 거래군·”
“저희는 서로를 도울 수 있을 겁니다·”
“그래 어쩌면 결혼이라는 패를 쓰지 않고도 서로가 이득을 보니 더 이득일 수도 있겠어· 단·”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약속은 지켜야 할 것이다· 봉래궁에 있는 내 다른 형제자매와는 손을 잡지 않아야 할 것이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좋아 그럼 난 이만··· 더는 찾아오지 않으마·”
파아앗!
나와 밀약을 맺은 헌위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시종이 있는 쪽을 향해 날아갔다·
‘됐다···· 생각보다도 그녀에 관한 건 잘 풀렸어·’
앞으로 이 일로 조금 몇몇 사건이 생길 수는 있겠지만 사소한 일들이리라·
‘지금부터는 정말··· 다른 귀찮은 걸 신경 쓸 필요 없이 수련에 매진할 수 있겠군·’
나는 만족스럽게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 * *
또다시 그렇게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츠츠츳!
김연의 꿈속에서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기다리는 김연을 바라보았다·
“최근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헤헤··· 당연한 거 아닌가요?”
하긴 생각해 보면 대화 상대라고는 자기 괴뢰에다가 입을 맞추는 미치광이 노인네밖에 없는 공장 안에 있다가 꿈 안쪽에서나마 나와 대화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기분이 안 좋으면 그것도 이상한 일일 터였다·
따악!
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내 기묘성심전과 등봉조극의 무리가 들어맞으며 그녀의 꿈속 시간 배율이 늘어났다·
“그럼 오늘 교육을 시작하기 앞서 어제 배운 걸 한번 펼쳐 볼까?”
“네!”
우웅!
꿈속인 탓인지 김연이 상상을 하자 바로 그녀의 양손에 연분홍빛 부채가 쥐어졌다·
그녀는 두 개의 부채를 잡은 채 그대로 선무(扇舞)를 추기 시작했다·
단순한 부채춤이 아닌 그 자체로 하나의 무공이었다·
괴군의 그녀가 만들었다는 비익창은 쌍선무가 되어 내려왔고 나는 쌍선무와 비익창을 합친 후 거기에서 내 단악검법의 무리 몇몇을 덧붙여서 김연에게 딱 맞는 무공을 만들어 냈다·
비익무(比翼舞)가 그것이었다·
총 8초식으로 이뤄진 그녀의 비익무는 쌍선무의 동작과도 어느 정도는 엇비슷했다· 동시에 유사시에는 쌍선무의 원조인 [그녀]의 비익창이 가진 공방 일체의 성격을 완전히 비틀어서 비익창을 무력화시킬 수 있도록 설계했다·
만약 김연이 기묘성채에서 탈출할 일이 있을 때 유사시 [그녀]를 제압하라고 만들어 준 무공이었다·
“연아 보법을 밟을 때 기를 더 빨리 순환시켜·”
나는 그녀의 비익무를 보며 부족한 부분을 짚어 주었다·
하지만 [그녀]를 제압하는 것 외에도 내가 비익무에 신경 쓴 것은 바로 끊임없는 ‘힘의 순환’이었다·
단악검법의 산외산부진의 묘리를 집어넣어 1초식에서 8초식을 펼치면 다시 8초식에서 다시 1초식으로 이어지게 하여 끝없이 춤을 출 수 있게 해 주는 묘리가 그것이었다·
산외산부진이 몸의 반동만 버틸 수 있으면 무한히 검법을 펼칠 수 있듯이 비익무 역시 ‘기운이 떨어지지 않는 한’ 끝없이 춤을 출 수 있는 무공이었다·
다만 산외산부진이 반동을 억지로 몸 안에 억눌렀던 것이라면 비익무의 경우에는 반동을 몸 안에 머무르게 하지는 않는 대신 기운을 더 많이 소모시켜 계속 무공을 펼칠 수 있게 하는 것인지라 일장일단이 있었다·
‘물론 제대로만 펼친다면 장점은 확실하겠다만····’
비익무에서 중요한 것은 초식보다는 ‘심법’이었다·
연리지심(連理枝心)이라 이름 붙인 이 내공심법은 가지가 서로 맞닿는다는 이름처럼 초식과 내공이 맞닿아 있어 초식을 펼칠 때에 기운이 소모됨과 동시에 조금씩 조금씩 축기가 된다·
그리고 비익무와 연리지심을 동시에 펼치며 장기전에 들어갈 경우 비익무의 8초식을 계속 회전시키면 한 번의 회전을 겪을 때마다 연리지심의 축기 속도가 조금씩 더 빨라진다·
그리고 비익무를 사용하다가 임계점을 넘으면 어느 순간 비익무를 사용할 때 소모되는 내공보다 연리지심으로 축기가 되는 내공량이 더 많아지기 때문에 ‘이론상’ 무한(無限)의 힘을 다룰 수 있는 무공이 바로 그녀의 무공이었다·
‘어디까지나 이론이지만·’
그 ‘임계점’을 넘으려면 아마 김연이 같은 자리에서 비익무를 약 70억 번 넘게 추어야 간신히 임계점을 넘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이론상으로만 무한인 무공인 것이었다·
그리고 저런 식으로 임계점을 넘어 봤자 말이 무한의 힘이지 결단기 수준의 공격력일 뿐이었다·
‘아마 영훈 형님이면 이런 효율 나쁘고 멍청한 무공이 아니라 훨씬 현실적이면서도 효율 좋은 무공을 만들겠지?’
물론 그래도 김연은 애당초 축기기에 다다른 후 체내에 흐르는 정순지력으로 무공을 펼치기 때문에 비익무를 펼치며 내공 자체가 부족할 일은 절대 없을 터였다·
‘저건 그냥 유사시 [그녀]를 제압할 용도임과 동시에 연이에게 의념을 깨닫게 해 주고 오기조원과 등봉조극을 넘게 해 주기 위한 무공이지·’
그 외에는 딱히 의의가 없다·
나는 김연의 무공을 지도해 주고 조금 부족한 점을 봐 주었다·
“음 잘했어 연아·”
“헤헤····”
최근 그녀의 실력은 빠르게 일취월장해 어느덧 일류 초기의 실력이었다·
아마 10년만 더 가르치면 일류 후기에 이르러 절정을 눈앞에 둘 터였다·
‘절정 고수부터는 의념을 볼 수 있으니 그녀의 기묘성심전이 큰 도움이 되겠지·’
아마 삼화취정과 오기조원에서는 기묘성심전이 큰 도움이 될 터였고 등봉조극이 조금 걱정이긴 했으나 등봉조극도 극한에 이르면 그 다음 월도입천은 걱정이 없었다·
‘기묘성심전의 극성에 달하면 월도입천의 시야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 시야를 통해 그녀가 익힌 무공을 통해·
더더욱 빠르게 월도입천에 도달할 수 있을 터였다·
‘연이가 애당초 의식 관련 재능을 각성해서 절정만 넘어서면 그 이후부터는 더 쉽겠어·’
오히려 동작을 가르치는 초반만 어려운 셈이었으니 나로서는 더 좋은 것이었다·
나는 그녀가 환한 얼굴로 비익무를 펼치는 걸 보며 살며시 웃었다·
고작 20년 차밖에 되지 않았다·
처음 광한계로 비승했을 당시 괴군에게 잡혀갔을 당시·
그때의 20년 차 김연의 얼굴에는 항상 공포와 고통만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15회차 당시 서휼과 신경전을 벌일 때는 아예 연락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였어서 연락을 못 했었고 결국 그녀의 정신이 나가 버리는 사태가 발생했었다·
결국 이제 와서야 나는 김연이 조금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꿈속에서 연결되어서나마 너를 위로해 줄 수 있어 다행이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아 벌써 끝났나요?”
“그래·”
“내일도 기다릴게요·”
처음에는 나와 헤어지는 걸 두려워했으나 날이 갈수록 그녀는 점차 성장하고 있었다·
어느덧 그녀는 내일을 기약할 줄 알게 되었다·
언제나 괴군에게 호되게 당해 정신이 망가져 있었던 과거의 김연들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스스스····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두근 두근····
나는 무언가 간질간질한 느낌이 가슴 안쪽에서부터 올라오는 걸 느꼈다·
근 10년간 김연을 전명훈을 홍범을 가르치며·
그들이 성장해 가는 것을 보며 나는 점차 뭔가를 느끼게 되었다·
‘···비인간····’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며 나는 양수진이 말한 비인간론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했다·
양수진의 심마는 10년 전 극복하고 답천 너머에 대해서 확실한 방향성을 깨달았다·
하지만 양수진의 말이 만든 심마를 극복하긴 했으나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운명의 노예이기 때문에 비인간이지만 그렇더라도 내가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것에는 의미가 있다·
그것이 내가 깨달았던 것·
하지만 나는 저 ‘운명의 노예’라는 말 자체를 깨부숴야 한다는 것을 지난 10년간 알 수 있었다·
‘비인간이··· 아니야· 단순한 비인간이 아니었어·’
나는 북향화와 손을 잡고 춤을 췄던 그때를 기억한다·
청문령에게 수업을 받았던 그때를 기억한다·
창호자가 산화하며 우리를 지켜주며 죽었던 그때를 기억한다·
‘그게 단순히 꼭두각시들의 각본이라고? 아니야····’
근본적으로 양수진의 논리를 벗어날 뭔가가 필요했다·
‘···하지만 어떻게 운명을 벗어날 수가 있지·’
운명은 절대적이다·
그 어떤 것도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
아마 운명을 벗어날 수 있다면 그건 창세신 정도는 되어야 하리라·
어떻게 해야 하늘 끝에 있는 운명을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파지직····
콰아아앙!
붉은 벼락의 폭포가 동부 안에서 얌전히 수련하고 있던 내게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황급히 몽둥이를 꺼내 들어 벼락의 폭포를 반으로 갈라 버렸다·
다음 순간 전명훈이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내게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몽둥이로 녀석의 사각을 파고들어 수십 대를 후려쳤다·
“크으으윽!”
쿠르릉!
전명훈은 적뢰에 휩싸인 채 뒤쪽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전명훈의 앞쪽으로 달려가 녀석의 머리를 향해 몽둥이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콰앙!
그대로 전명훈의 머리를 터트려 버렸다·
녀석의 뇌수가 사방으로 비산한다·
[젠장!]
촤르르륵!
하지만 녀석의 머리에서부터 붉은 뇌전이 꿈틀거리더니 다시 전명훈의 머리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랬다·
10년 동안 전명훈은 어느덧 결단기가 되어 있었다·
[죽어라 서은현!]
콰르르르릉!
전명훈은 그대로 하늘로 날아올라 나를 향해 벼락을 뿌렸다·
이제는 단순히 내가 전명훈을 두들겨 패는 것에서 녀석이 나를 향해 주도적으로 공격을 하는 식이 되어 있었다·
번쩍!
붉은 뇌전의 기둥이 나를 내리찍었다·
나는 몽둥이에 강기 한 줌을 불어넣은 채 결단기 수준의 공격을 막아 내며 틈을 노렸다·
하지만 전명훈은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내게 더더욱 강한 적뢰를 쏟아부었다·
[서은현 튀김으로 만들어 주마!]
파치지지지직!
일순간 뇌전이 폭발했다·
* * *
“드디어 죽었나?”
전명훈은 기대가 섞인 눈으로 먼지구름 안쪽을 들여다 보았다·
부스스스····
전명훈은 먼지구름이 걷힌 곳에 서은현이 없고 타다 남은 재만이 있는 것을 보며 씨익 웃었다·
“드디어! 놈을 죽였다! 놈이 죽었····”
“안 죽었다·”
퍼억!
하지만 전명훈의 바람과는 다르게 서은현은 허공에서 허깨비처럼 튀어나와 전명훈을 두들겼다·
얼마 후 전명훈은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드러누웠고 그 위에서 서은현이 몽둥이를 든 채로 말했다·
“최근 점점 움직임이 좋아지는군· 거기에 축기기 공법인 적뢰진경도 벌써 결단기 초기 수준까지 진화시키고····”
그는 문득 어이없다는 듯이 전명훈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적뢰진경을 거기까지 진화시켰으면서 왜 칠뢰진경은 못하는 거냐?”
“···몰라 묻지 마라·”
서은현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물었고 전명훈은 대답을 회피했다·
하지만 전명훈은 속으로 생각했다·
‘좋아· 잘 속여넘기고 있군·’
최근 서은현이 칭찬했듯이 전명훈은 점차 서은현에게 꽤 의미 있는 움직임을 이끌어 낼 공격을 가하는 횟수가 늘기 시작했다·
그가 딱히 무(武)에 재능을 개화한 건 아니었다·
근래 전명훈은 점차 뭔가 새로운 감각을 개화하고 있었다·
서은현이 보는 의념의 시야도 홍범이 보는 요족의 시야도 아니었다·
천족의 운명의 시야도 아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제 3의 감각이었다·
번개의 목소리·
전명훈은 그 감각을 그렇게 불렀다·
‘속삭인다····’
그는 눈을 감고 번개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최근 그가 수행을 높여 갈수록 ‘번개’들이 그에게 말을 거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전명훈은 번개의 목소리들을 따라가며 뇌도공법을 운용했고 그는 적뢰진경에 무언가 숨겨진 비밀이 있음을 발견했다·
번개가 속삭이고 있었다·
적뢰진경의 진짜 이름은 이것이 아니라고·
자신들을 따라오면 더더욱 위대한 힘에 도달할 것이라고·
그는 점차 번개들의 목소리를 따라갔고 최근 그 성과가 나오는 중이었다·
‘서은현에게 의미 있는 공격을 하는 횟수가 점차 많아지고 있다·’
서은현은 전명훈이 주뢰진경을 익히지 못하는 걸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전명훈이 주뢰진경을 못 익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익히는 공법은 이미 적뢰진경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더 상위의 무언가였다·
‘이 공법을 익히는 데에 성공하면 말 그대로 적이 없어질 것 같은 느낌이다·’
그는 서은현을 올려다보았다·
지난 20년간·
그와 서은현은 두들겨 맞고 반격하고 공격하고를 반복하며 저들도 모르게 사이가 꽤 가까워져 있었다·
그를 두들겨 패는 서은현을 죽이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조차 임계점이 지나자 어느덧 친숙함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죽이고 싶었던 살의는 어느새 호승심과 경쟁심으로 바뀌었다·
‘반드시 놈을 뛰어넘는다·’
파직 파지직····
전명훈은 그의 체내에서 끓어오르는 붉은 번개의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번개가 인도해 주는 새로운 공법을 익히면··· 어쩌면 녀석을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든다·’
그는 서은현을 보며 호승심을 불태웠다·
‘반드시 네놈을 뛰어넘어주마!’
전명훈이 서은현을 노려볼 때였다·
“금 장로님! 그리고 전명훈! 조금 이따가 시작한다고 해요!”
저 멀리서 금소해가 비둔술을 쓰며 날아와 외쳤다·
그 말에 전명훈과 서은현의 눈이 금소해에게 향했다·
금소해는 전명훈의 옆에 내려앉아 그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주며 일으켜 주었다·
“벌써 시간이 됐나?”
서은현은 다시 금은현이 되어 금소해를 보며 물었다·
“네 장로님· 홍범이 전부 준비되었으니 봐 달라고만 하네요·”
“···그래·”
전명훈은 헛웃음을 흘렸다·
“빌어먹을· 결국 지네보다 늦게 생겼네·”
“왜 홍범한테까지 호승심을 가지는 거야? 요수공법하고 인족공법은 완전히 다르잖아?”
그녀는 전명훈의 옆구리를 꼬집으며 쏘아붙였고 전명훈은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순수한 경지도 데리고 있는 애완 요수도··· 모두 나를 압도하는군· 서은현····’
서은현이 비둔술을 써 어딘가로 향했고 전명훈과 금소해는 그런 서은현을 뒤따라갔다·
‘하지만 반드시 널 뛰어넘는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직은 한참 그보다 더 멀리 날아가고 있는 서은현을 바라보았다·
* * *
파아앗!
“왔느냐?”
홍수령이 나를 맞아 주었다·
금신천뢰문 뇌도봉(雷導峰)·
이곳은 천겁을 맞을 때가 된 경지의 요인들이 와서 천겁을 맞는 장소였다·
나는 홍수령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곳곳에서 금신천뢰문의 제자들이 나와 있었다·
“와 주셨군요 주인님·”
그리고 나는 어느새 마디마디가 3층 집만큼 커진 이젠 숫제 작은 산만큼 거대해진 지네 요수·
홍범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 결단기 대원만에 이른 홍범이 원영기에 이르며 화형(化形)을 시도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