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를 위해 서를 향해 (4)
320년이 지났다·
증룡진인의 저물도가 열리기까지는 100년이 남은 시점·
나는 마침내 사축기에 이르렀다·
쿠구구구구구!
시커먼 귀기가 나를 뒤덮었다·
쿠릉 쿠르르릉!
하늘에 먹장구름이 끼기 시작하며 안쪽에서 금빛의 천겁이 넘실거렸다·
천원(天圓)을 기반으로 지방(地方)의 근간을 형성한다·
천인기 때에 형성한 천원을 흐르는 사계(四界)·
그리고 원영기 때 만든 여오악지수·
오악 중 자신의 본명공법의 속성을 중앙에·
나머지 네 개의 속성을 사방에 배치한다·
그렇게 만든 산악(山岳)을 하늘과 땅을 잇는 기둥으로 삼는다·
네 개의 기둥이 하늘에 존재하는 사계와 이어지며 하늘의 힘을 내려받는다·
우우웅!
원영의 상단전 뒤쪽에 후광처럼 떠올라 있던 천원의 후광·
그리고 원영의 하단전 안쪽에 후광의 힘이 내려오며 똑같이 둥근 원을 만들어 냈다·
이 하단전의 원에 네 개의 축을 박아 넣음으로써 사각형으로 만든다·
그렇게 천원지방을 완성하는 것·
그것이 사축기 경지의 수행이었다·
쿠르르릉!
지방의 기초를 만들기 시작하자 하늘에서 금색의 빛살이 우르릉거렸다·
천인 후기에서 대원만으로 갈 때 맞았던 천겁은 20줄기·
그리고 천인기에서 사축기로 향할 때 맞는 천겁은 일반적으로 25줄기라고 알려져 있었다·
콰르르릉!
하늘이 빛의 폭우를 쏟아부었다·
그러나 나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들었다·
쿠구구구구!
귀기가 몸을 덮었다·
귀선규마결로 만든 귀왕화를 사용하면 그냥 평범한 귀왕 중 한 명이 될 뿐이었다·
하지만 대막사해성으로 만든 귀왕화는 달랐다·
내 혼에 덮인 죽음의 힘을 최대한으로 끌어 사용할 수 있는 공법·
그것이 대막사해성·
꾸득 꾸드드드득! 꾸득!
머리 주변으로 귀기로 이뤄진 두개골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몸이 점차 귀체(鬼體)로 변이하며 손에는 귀조가 발에는 염주가 채워졌다·
내 원래 얼굴도 점차 말라비틀어지며 두개골과 같이 변하기 시작했다·
18개의 두개골 머리를 가진 귀왕·
그것이 나였다·
[오오오오오오―]
귀곡성이 사방을 사른다·
곳곳에서 음기가 들끓어 오르며 흑색귀골곡 곳곳에 있는 귀신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웅!
체내에 생성된 지방(地方)의 틀이 체내의 기운을 끊임없이 순환시키며 생명력으로 전환시켰다·
보다 더욱더 요족의 감각이 뚜렷해지고 명확해졌으며 ‘생명’에 대한 이해가 한 손아귀에 잡혔다·
천지영기가 순환하는 것이 더더욱 확실히 느껴졌으며 의식이 확장되고 뚜렷해졌다·
콰르르르릉!
금빛의 폭포가 나를 덮쳤다·
그러나 나는 당황하지 않고 18개의 입을 벌렸다·
오오오오―
18개의 머리가 각자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죽음의 노래였다·
시커먼 음기가 충천하며 천겁을 약화시켰다·
동시에 음기 너머로 시커먼 흑뢰(黑雷)들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육극음뢰신이었다·
콰지지지직!
내 발아래로 흑뢰가 모이며 마치 그림자처럼 여섯 개의 귀신의 형상이 떠올랐다·
이것들은 실제 귀신이 아닌 각각이 횡사(橫死) 질병(疾病) 우(憂) 빈(貧) 악(惡) 약(弱) 등의 육극(六極)을 상징하는 저주의 상징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횡사요절을 상징하는 귀신은 다른 귀신들보다도 특히 머리통이 하나는 더 거대했다·
귀신들은 죽음의 노래에 맞춰 손을 잡고 내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점차 귀신들의 주변에서 음뢰(陰雷)가 생성되며 천겁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위이이이잉―
머리 위쪽으로 태극의 형상이 나타나며 약화된 천겁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태극진뢰신이었다·
비록 흑색귀골곡의 영역 안쪽이라 대놓고 사용할 수는 없지만 천겁을 맞으면서 이렇게 몰래 태극진뢰신으로 천뢰를 제련하는 정도는 누구도 모를 터였다·
억겁 같던 시간이 지났고 마침내·
콰르르르릉!
나는 마지막 한 줄기 천겁마저 극복해 냈다·
번쩍!
쿠르르르릉!
몸에서 빛이 뿜어지며 인근의 천지영기를 미친 듯이 흡수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대막사해성의 구결 때문이 아니었다·
인근의 천지영기를 흡수하던 육신은 어느덧 주변의 영맥과 동화하였다·
이는 대지(大地)와의 동화였다·
소경계에서는 줄곧 하늘에 제사를 지내 왔다·
그러나 사축기에서 제를 지내는 대상은 이제 하늘이 아니었다·
하늘이 아닌 땅(地)·
대지·
즉 기(氣)의 계위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부터는 방식만 조금 차이가 있을 뿐·
천족과 지족의 수련 방식에 거의 차이가 나지 않게 된다고 했다·
물론 천족은 기의 계위에 제사를 지내서 명의 계위에 영향을 주는 것이 목표고·
지족은 기의 계위 그 자체가 더더욱 목표가 되는 차이가 있었지만 방식 자체는 거의 닮게 된다·
대지와 동화한 육신은 대지의 천지영기를 흡수하며 동시에 인근의 천지를 물들였다·
쿠오오오오―
인근의 대지가 시커먼 귀기로 물들었다·
곳곳에서 귀신들이 울부짖으며 희희낙락한다·
귀곡성이 천지간을 울렸다·
대지 전체가 귀신들이 살기 적합한 땅이 된 것이었다·
사축기 수사는 이렇게 변한 대지를 내버려 둘 수도 아니면 원래대로 되돌릴 수도 있었다·
이제 그들에게는 천지자연을 사역할 수 있는 기본적인 권한이 주어졌으니 말이었다·
쿠그그극―
나는 힘을 끌어모아서 천지에 가득해진 귀기를 다시 몸 안에 끌어 담았다·
후우우―
나는 36개의 눈에서 귀화를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축기부터는 요족의 경우 본인의 육신이 강대해지고 커진다·
그러나 천족의 경우 본인이 익힌 공법이 이끄는 이상향대로 육신이 변이하기 시작했다·
천인기에서도 잠깐잠깐 몸을 변이시킬 수는 있었으되 천인기에서의 그것은 거의 환상 술법이나 다름없는 얄팍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축기에서는 달랐다·
정말로 본신(本身)이 변이한 것이었다·
물론 원래 몸으로도 되돌아갈 수 있지만 공법의 힘을 끌어내면 끌어낼수록 다른 형태로 변해 간다·
이제 내 본신(本身)은 더 이상 인간형이 아닌 18개의 머리를 가진 이 귀왕의 모습이었다·
나는 잠시 내 모습을 관조한 후 인간형으로 몸을 되돌렸다·
나는 흑포를 입은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꾸그그극―
손에서 인력(引力)이 뿜어지며 공간을 휘기 시작했다·
사축기 수사부터는 천인기에 얻었던 ‘천기유도’의 힘이 ‘인력’으로 진화하게 된다·
인력은 땅에서부터 나오니 대지의 깨달음을 얻은 사축기부터 인력을 얻는 것이었다·
이 인력은 경지를 올릴수록 강해지고 거대해져 사축기 때는 축지법 정도를 행하게 한다·
그러나 합체기 때엔 계위에 간섭하지 않고 인력만으로도 공간을 휘고 찌그러뜨려 아공간을 만드는 게 가능해지고·
쇄성기 때엔 무량한 시공간을 휘어서 수 광년에 해당하는 거리를 뛰어넘을 수 있게 해 주며 성반기 때엔 인력으로 성계에 있는 별의 궤도를 뒤틀고 중경계의 흐름을 자신의 손에 매어 둘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개열기부터는 인력이 명의 계위로 올라가 시공간을 뒤틀고 운명에 미약한 간섭을 하는 것이 가능해진다고 전승된다·
꾸구국―
나는 허공을 쥐며 인력을 발생시켰다·
지금 시점에선 그렇게 강한 인력은 사용할 수 없었다·
축지법조차 특출난 재능을 지니거나 특이한 공법을 익힌 게 아닌 이상 사축기 중기부터 가능했다·
사축기 초기에서 인력으로 이득을 볼 수 있는 것은 하나·
쿠구구구구구!
기의 계위에 인력을 발생시키자 어마어마한 천지영기가 내게 쏟아져 오기 시작했다·
사축기부터는 인력을 통해서 다룰 수 있는 천지영기의 단위가 달라진다·
천인기가 단순히 체내와 체외의 경계가 흩어져 외부의 천지영기를 다루는 것에 그치고·
기껏해야 천기 유도를 했다면·
사축기부터는 인력을 사용해 천인기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천지영기를 끌어모아 부리는 것이 가능했다·
꾸구구구국―
생명력이 전신에 충천한다·
나는 수명이 1만 년으로 늘어난 천기를 읽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드디어 사축기가 되었다·’
천족 공법·
그리고 괴군의 회로를 합치면 사축기 후기 수준의 전력이었다·
‘무형검을 못 쓰게 된 것 때문에 너무 약화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심상을 기운에 비출 수 없게 되었다·
아마 본체와 완전히 분리된 탓이리라고 생각되었다·
‘아니 어쩌면····’
서휼이 본체를 차지한 탓일 수도 있었다·
마음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무학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서휼이라면 무형검을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고 그대로 잃어버릴 가능성도 컸기 때문이었다·
나는 본체와 연결은 끊었지만 근본적인 근간은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본체의 심상에 이상이 생긴다면 무형검은 사용할 수 없었다·
내가 무형검을 다시 사용하고 싶다면 방법은 한 가지였다·
‘서은현과의 연결을 완전히 끊어 버리고 완전히 ‘서립’이란 인격으로 재탄생한다면····’
그리된다면 무형검을 다시 사용하는 게 가능해질 터였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의미가 없지·’
나는 서립이다·
그러나 동시에 서은현이다·
구태여 서은현이란 틀에서 벗어나서 독립적인 ‘내’가 될 필요성은 없었다·
“···뭐 큰 상관은 없겠지·”
어차피 증룡진인의 저물도에서 쓸 만한 것들을 얻으면 전력의 격차는 해소된다·
거기에 아직도 서휼이 결계에서 벗어나려면 600년은 필요했으니 시간은 더 있었다·
‘점차 공법을 익히며 경지가 높아지는 속도가 가속되는 기분이다·’
이 속도라면 몇백 년 후에는 합체기조차 노려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마 처음부터 시간 낭비하지 않고 마공만 팠다면 지금쯤 쇄성기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 거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다고 마공이 좋은 건 아니다만····’
내 본신이 이렇게 흉측하게 변한 건 둘째 치고 아직도 원립에 대한 증오와 분노 마공에 대한 격노와 혐오감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마공이되 마공이 아니게 개조한 대막사해성 역시 간혹 수련하다 보면 은연중에 느껴지는 혐오감에 치가 떨릴 정도였다·
어쨌든 마공의 효용성은 알았으니 앞으로 마공을 개조해서 익히든가 남을 희생시키지 않아도 되는 것 위주로 익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성싶었다·
내가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주인님 경지에 오른 것을 경하드립니다·
“홍범이냐·”
나는 홍범의 연락을 받고 자리에서 걸음을 뗐다·
별로 익숙하지 않은 산봉우리 위쪽·
산봉우리 아래로는 음풍이 쌩쌩 불어닥치며 소름 끼치는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곳은 삽풍역·
흑색귀골곡은 귀도음화선근을 지닌 십만 년꼴에 한 번 나타난다는 천재 강민희를 구하기 위해 삽풍역에 와서 샛길을 뚫는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나는 당연히 삽풍역 샛길 제작에 자원해서 강민희 구조를 돕기로 했다·
그리고 삽풍역의 음기를 흡수하며 몇백 년간 용맹정진한 결과 사축기에 이른 것이었다·
“지금 그곳으로 가겠다· 준비해 놓고 있어라·”
―예 감사드립니다·
꾸구구국!
나는 인력을 발생시키며 그 자리에서 발을 굴렀다·
파아앙!
목표 지점에 인력을 설치해 놓고 그곳을 향해 당겨져 간다·
이렇게 하면 비둔술을 쓰지 않아도 날아다니는 것이 가능했다·
얼마간 하늘을 날아갔을까·
나는 마침내 홍범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휘이이이이―
삽풍역에 있는 험난한 봉우리들·
그 산봉우리들이 원형을 그리고 둘러싼 분지가 있었다·
홍범은 쪼글쪼글한 몸으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분지 중심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됐나?”
“예 주인님·”
홍범은 300여 년 만에 원영기에서 천인기 대원만이 되어 사축기로 넘어갈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내가 아무리 마공에 자질이 있다고 한들 홍범보다 재능이 있진 않을 것 같았다·
“그럼 슬슬 시작해도 된다·”
쿠웅!
내가 발을 구르자 분지가 윙 울리며 모래로 변해 사막이 되었다·
그리고 곳곳에서 흙으로 이뤄진 장승들이 나타나 하늘을 향해 입을 벌렸다·
장승들이 피뢰침 역할을 해 주어 천뢰를 분산시켜 줄 터였다·
“천기를 봐 주십시오·”
“지금이 적기다· 두수 우수 위수가 하늘에 차올랐다·”
“감사합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쿠구구구구!
홍범이 본체를 드러냈다·
시커먼 독기를 풀풀 흘리는 거대한 지네의 모습이 눈앞에 드러났다·
어느새 홍범의 본체는 한 마디마디가 3층 건물에 맞먹을 정도로 거대해져 있었다·
홍범 본체만으로도 연국 수도 황성을 그대로 감쌀 수 있을 크기였다·
치이이이이―
녀석의 독기에 삽시간의 주변 대지가 오염되었다·
나는 홍범의 독을 들이마시면 위험하다는 걸 알았기에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녀석의 승급이 시작되었다·
콰르르릉!
번쩍!
하늘이 빛나며 금빛의 천뢰가 쏟아졌다·
이번에도 홍범의 천뢰는 말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종명자들처럼 금빛과 쪽빛의 천뢰가 동시에 치진 않았으나 동급 수사들보다 월등히 거대한 천뢰가 홍범에게 내리쳤다·
쩌어어어엉!
홍범은 빛의 기둥 안쪽에서 천겁을 견뎌 갔다·
내가 사전에 펼쳐 준 진법이 홍범의 천뢰를 조금 흩어 주긴 했지만 그럼에도 홍범은 상당히 힘겨워 보였다·
콰지지지직!
천뢰가 절정에 달했을 때 즈음·
나는 태극진뢰신을 운용하며 홍범의 천겁 중 일부를 태극에 가두었다·
콰르르르릉!
하늘이 진노한 듯 천지영기가 더 몰렸다·
하지만 나는 씨익 웃으며 태극에 가둔 천겁 중 실오라기만큼을 홍범에게 떨어뜨렸다·
홍범이 실오라기만큼의 천겁에 닿자 하늘은 천겁을 강화시키려던 것을 중지했다·
일종의 편법이었다·
천겁을 완전히 도와주는 것은 안 되지만 이런 식으로 천겁을 가두었다가 조금씩 조금씩 나눠 주는 건 아슬아슬하게 허용 범위인 것이었다·
물론 이조차 정해진 범위가 존재했고 그 범위를 넘어서거나 두 사람 이상이 이런 짓을 한다면 천겁은 결국 커져 버렸다·
그러나 그 정도만큼이라도 홍범은 살 것 같은 듯·
내게 찰나를 틈타 감사 인사를 했다·
치이이이이―
홍범은 독기를 풀풀 피워 올리며 기운을 끌어모았고 천겁을 극복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번쩍!
천겁이 다하고 마침내 홍범은 대지와 동화되었다·
쿠구구구구구!
대지에 독기가 차올랐다·
얼마 후 독기를 회수한 홍범은 몸을 움직였다·
덜걱 덜걱덜걱!
곧이어 녀석의 갑피가 떨어지더니 홍범이 허물을 벗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이―
허물을 벗은 홍범은 더더욱 시커먼 독기를 내뿜는 검은 지네로 변했다·
얼마간 독기를 음미하는 듯하던 홍범은 이내 다시 인간형으로 몸을 돌렸다·
[후우우우····]
나는 독기를 들이마셨다 내뿜는 홍범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괜찮나 홍범?”
얼마간 독기 속에 있던 홍범은 그대로 독을 흡수했다·
이내 독 구름에 휩싸여 있던 녀석의 모습이 드러났다·
“음···!”
나는 홍범의 모습에 살짝 놀랐다·
“홍범 너 그 모습····”
홍범은 젊어져 있었다·
노년에서 청년이 된 정도는 아니었고·
완전히 백발이 성성하고 쭈그러든 모습에서 머리칼에 거뭇거뭇한 기가 조금씩 돌고 쪼글쪼글하던 피부도 조금 나아졌다·
거기에 완전히 쪼그라들었던 허리도 조금 펴져 키가 커진 상태였다·
‘원영기에서 천인기로 갈 때도 조금 느끼긴 했다만····’
그때도 쪼글쪼글하던 것이 조금 나아지고 조금 더 생생해 보이는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생기가 완연해진 것이 원영기에서 천인기가 될 때는 100세 늙은이에서 90세 정도로 젊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은 90세에서 80세 정도로 젊어진 것 같았다·
‘경지를 올릴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젊어지는 건가····’
마치 ‘홍범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같은 문구가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홍범은 숨을 들이마시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아주 상쾌하군요· 사축기에 드니 인지가 넓어져 더더욱 많은 독을 더더욱 다양한 독을 제조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입니다·”
“음 그래· 다행이구나·”
나는 홍범을 보며 마음이 아주 든든해지는 걸 느꼈다·
홍범이 제조하는 독이라면 합체기에게도 충분히 효용이 있다·
그러니 본체와 싸우게 된다 해도 두렵진 않았다·
‘홍범도 사축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이제 샛길을 빠르게 안정화시키는 것이었다·
‘지금은 샛길에 허곽과 허령이 들어가서 빠르게 안정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었지····’
아마 곧 있으면 강민희와 다시 접촉할 수 있을 터였다·
사축기에 들고 며칠이 지났다·
마침내 허곽과 허령 쪽에서 연락이 왔다·
츠츠츳!
삽풍역에 새로 세워진 흑색귀골곡의 근거지·
흑색귀골곡 삽풍역 지부의 섭명함 정박항·
그곳에 있는 내 동부 안·
그곳에 허곽의 투영체가 나타났다·
츠츠츠―
귀기로 이뤄진 귀령이 허곽의 형상을 하고 내 앞에 나타났다·
[오오 정말로 사축기에 이르렀군· 고작 400년 만에 원영기에서 사축기에 오르다니· 아마 강 원로만 아니었다면 그대가 흑색귀골곡 최고의 인재로 추앙받았겠지· 아쉽군····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문파에 큰 경사가 난 것이니 축하를 해 줬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니 그런 건 힘들 것 같군· 이해해 주게·]
허곽은 내 경지를 보며 놀랍다는 듯이 혀를 내둘렀다·
나는 예를 차리며 말했다·
“별 것 아닙니다· 오히려 문파의 도우가 위험에 빠졌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당연한 일이지요· 그보다 제게 연락을 하셨단 것은····”
[그래· 샛길이 완전히 안정되었네· 원래는 인족 지부에 지원 인력을 요청하려 했는데 자네가 사축기에 이르렀으니 필요 없겠군·]
“예·”
우리는 몇 마디 말을 나눈 후·
곧바로 섭명함 안으로 들어갔다·
섭명함 내부·
귀혼각 각주의 집무실·
우리는 그곳으로 가 귀혼각주가 그려 놓은 샛길로 통하는 도안의 앞에 섰다·
[이 앞에 서서 알려 준 대로 귀력을 운용하게·]
“알겠습니다·”
[자 그럼··· 가 보도록 할까?]
나는 수결을 맺으며 귀기를 운용했다·
내 모습은 삽시간에 18개의 머리를 가진 귀왕으로 다시 변했다·
귀왕화를 하자 샛길이 더더욱 뚜렷하게 보였다·
섭명함 안쪽에 그려진 도안은 그저 좌표 고정용일 뿐·
‘진짜’ 도안은 명각으로 보이는 명계의 외곽에 그려져 있었다·
죽음의 힘을 사용해서 그려진 도안을 향해 수결을 맺자 도안들이 움직이며 하나의 문을 형성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 문이 어떻게 이뤄져 있는지·
이 문을 만들기 위해 어떤 인력이 작용했는지 어떻게 하면 문을 만들 수 있는지가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사축기에 들고 나니··· 샛길의 구조도 어렵지만은 않군·’
인력을 다룰 줄 알고 귀도공법을 다룰 줄 안다·
샛길은 명계의 외곽에서 조금 깊은 곳을 경유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이 방식을 통하면 고력계 자금계와도 이어지는 샛길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직감했다·
흑색귀골곡에서 다른 중경계와 통하는 샛길을 만들지 않았던 건 그저 그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끼이이이익―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짙은 잿빛의 세계가 나타났다·
나는 잿빛의 세계에서 오로지 순수한 어둠으로만 이뤄진 듯한 길을 밟았다·
어둠의 길과 잿빛의 하늘을 제하면 어떤 것도 없는 공간·
난 공간의 길을 걸어갔다·
얼마나 걸어갔을까·
저벅 저벅····
얼마 후·
나는 길을 걷던 도중 저 멀리 두 명의 인영이 보이는 걸 알아챘다·
전신에서 여덟 자루의 창이 돋아나고 있는 귀왕 그리고 어깨에서 네 개의 돛이 돋아나는 귀왕·
두 명의 귀왕이 그곳에 공간을 점하고 있었다·
귀왕들은 길의 경로가 아닌 다른 잿빛의 허공을 밟고 서 있었는데 그들이 밟고 있는 곳을 향해 검은 길이 자라나 있었다·
그 검은 길은 내가 밟고 있는 샛길과 연결되어 있었다·
[허곽 님 허령 님·]
[왔군·]
[놀랍군 놀라워· 강 원로만큼은 아니어도 고작해야 400년 만에 사축기라니· 그대 역시 몇 세대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였어····]
창이 자라난 귀왕은 허령·
돛이 돋아난 귀왕은 허곽이었다·
둘은 순수하게 경탄한 기색으로 내게 찬탄성을 보냈다·
얼마간 나를 칭찬해 주던 둘은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명각을 집중해 보게· 이 ‘길’과 정확히 같은 기질을 가진 어둠을 찾는 걸세· 그곳에 분명 강 원로가 있을 걸세· 칠 주야 정도 기다려 줄 테니 명각을 집중해 보게·]
나는 그들의 말을 따라 내가 밟고 있는 어둠의 기질을 느꼈다·
익숙한 기질이었다·
익숙한 섭명함의 기운·
나는 잿빛의 세계에서 명각을 집중하며 똑같은 어둠을 찾아냈다·
우우우웅―
기이한 기분이었다·
마치 잿빛의 세계가 접혀 내 손 안에 들어오는 이 기분·
나는 내 손 안에 들어온 작아진 잿빛 세계를 관조하며 그 안에서 너무나도 쉽게 강민희가 있는 샛길을 찾아냈다·
너무나도 간단했다·
그냥 우리가 서 있는 것과 같이 섭명함의 어둠으로 만들어진 길을 찾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닌가?
[···찾았습니다·]
[···?]
[잠깐 벌써???]
두 명의 흑색 원로의 귀면에 경악이 맴돌았다·
허령이 몸에 돋아난 창을 만지며 탄성을 내뱉었다·
[나조차도 샛길에 들어와서 하루는 집중해야 찾을 수 있는데··· 그걸 몇 초 만에 찾았다고···?]
[음··· 우연인가 봅니다·]
[···우연인지 아닌지는 보면 알겠지· 그럼 일단 느껴지는 샛길을 향해 우리 셋이 인력을 발해서 끌어당기도록 하세·]
[예·]
우리는 각자 손과 귀체의 특징들을 뻗었다·
허령은 몸에 돋아난 창들을·
허곽은 돛의 방향을·
그리고 나는 18개의 얼굴을·
전부 한 곳을 향해 우리는 의식을 집중하며 인력을 발했다·
꾸구구구국!
세 명의 사축기 수사들이 인력을 발하자 어마어마한 힘과 함께 공간이 굽어지는 게 느껴졌다·
[귀력을 발하게!]
[샛길을 잇는다!]
동시에 우리는 귀력을 뿜었다·
우리가 내뿜는 죽음의 힘에 검은 길이 꿈틀거리는 듯하더니 우리가 서 있는 장소에서 검은 길이 뻗어 나와 저 멀리 어딘가로 향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파아아아앗!
나는 공간을 넘어 저 멀리 우리가 서 있는 곳 말고 ‘또 다른 샛길’을 보았다·
‘저기에 이 샛길을 연결하면 되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귀력을 보충했다·
그러나 나머지 두 원로가 이해하지 못할 소리를 내뱉었다·
[으음 강 원로의 샛길이 보이나?]
[안 보입니다· 인력을 더 발해 보지요·]
[···?]
‘뭐지? 저기 보이는 게 아닌가?’
나는 너무나 훤히 보이는 저 샛길을 보며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의문이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 보이는 거 같습니다만····]
[음?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잘못 본 게 아닌가? 나는 특히 감지에 특화된 귀도공법을 익혀서 명각이 오히려 귀왕들보다도 강하다네· 그런 나조차 보이지 않거늘· 귀선규마결이나 육극음뢰신 같은 위력 특화 공법을 익혔다면 보는 게 가능할 리가 없다네· 인력이나 더 발해 보게·]
허령과 허곽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고 특히 허곽은 감지에 특화되었다는 돛을 더더욱 바싹 펼치며 말했다·
나는 허곽의 말이 이해가 안 됐지만 일단 그러려니 하며 얌전히 인력을 뿜었다·
얼마 후·
거의 코앞까지 강민희의 샛길이 다가왔다·
그제야 허곽은 샛길을 발견했다는 듯이 탄성을 질렀고 그곳을 향해 우리의 샛길을 연결했다·
그리고 허령은 아예 샛길이 연결된 후에야 샛길을 발견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허령은 나를 보며 말했다·
[아까 자네가 본 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조심하게나· 이곳은 어쨌든 명계의 외곽· 심지어 평소 명각으로 보던 곳보다도 더더욱 깊은 심층이라네· 생자에게는 너무 깊은 곳이라 명각이 잘 발동하지 않으며 이 안에선 한 치 앞도 제대로 볼 수 없는 게 정상이라네· 지금은 조용해 보이지만 어떤 존재들이 이곳에 도사리고 있는지는 쉬이 장담할 수 없어· 최악의 경우 잘못하면 명도천으로 빠질 수도 있지· 다음부턴 함부로 뭔가가 보인다고 주의를 기울이지 말게·]
[···네· 주의하겠습니다·]
‘···잘못 본 거 아닌 거 같은데····’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강민희의 샛길로 건너갔다·
[자 그럼 자네는 저쪽으로 가 보게· 우리는 이쪽으로 가 보지·]
[음····]
나는 순간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원로들이 가려는 곳에 강민희가 있는 것 같은데····’
본능적으로 그들이 가려는 곳에 강민희가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가고 싶었지만 내가 뭐라고 하면 별로 안 좋아할 테니 일단 그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나는 광한계 쪽으로 그들은 명귀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원로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반대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였다·
[음?]
뭐지?
나는 기이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가던 곳은 분명 ‘광한계 방향’이었다·
그러니까 가던 곳에서 뒤로 돌아가면 ‘명귀계 방향’이 되어야 맞았다·
그런데 뒤를 돌아도 ‘광한계 방향’인 것이 느껴졌다·
광한계의 힘이 느껴졌기에 너무나도 확실했다·
‘뭐지 도대체?’
난 혼란스러움을 느끼며 일단 다시 뒤를 돌았다·
그러나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기도 광한계 방향?’
어느 쪽으로 가든 광한계가 나오게 된다·
나는 혼란스러움에 일단 길을 걸어가 보기로 했다·
얼마나 길을 걸었을까·
나는 저 멀리·
길의 끝에서 거대한 존재를 볼 수 있었다·
‘···저건····’
곧고 좁은 검은 길 위·
그곳에 샛길의 영역이 갑자기 넓어진 곳이 있었다·
아니 차라리 그 영역은 샛길보다는 ‘분지’라는 말이 어울렸다·
그리고 그 분지 위쪽·
그곳에 태산처럼 거대해진 귀물·
강민희가 몸을 쪼그린 채 앉아 있었다·
‘설마···!’
나는 심장이 졸아드는 듯한 느낌과 함께 천천히 강민희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