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녕하셨습니까 (2)
투귀족이 지내던 석조 건물·
그 안쪽에서 한 침상 위에 걸터앉아 있던 현귀의 시선이 어딘가를 향했다·
“애완 투귀족의 유의(喩意)를 얻었나·”
어쩐지 비웃는 듯한 시선·
그러나 그의 시선엔 일말의 동정도 담겨 있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것을 얻으려 노력하는 꼴이 참으로 보기 딱하군· 슬플 정도야· 그 몸부림만큼 의미 없는 행위가 없거늘····”
혀를 차던 현귀는 공허한 눈빛으로 다시 관심을 끄고 침상에 드러누워 눈을 붙였다·
어쩌면 저 멀리에서 일어난 기사(奇事)보다는 자신이 누워서 눈을 붙이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았다·
* * *
나는 얼마간 자리에서 검진을 분석해 보다가 그만두었다·
‘됐다 차후에 연구해 보자·’
더 이상은 해 봤자 무의미할 뿐이었다·
나는 검진을 해체한 후 석조 건물의 바깥으로 나왔다·
얼마 후 흑린어령문의 수사들도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다 모인 것 같으니 다음 영역으로 출발하지요· 우리 인족 역시 한때 증룡진인의 저물도에서 사육당하던 애완 종족이었던 적이 있으니 그곳에서라면 훨씬 저희에게 맞는 수확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도 증룡진인의 애완종이었다고?]
나는 다시 귀왕화해서 주변의 열기를 막아 내며 물었다·
내 질문에 현귀가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예· 전승에 따르면 진마계와의 전쟁 당시 그 때 중경계에 사는 아주 많은 종족들이 증룡진인의 저물도에 몸을 의탁했다 합니다· 증룡진인 역시 그들을 받아들여 준 것이 이 수류층이고요·”
[흐음····]
‘그럼 애완종이 아니라 보호종이라 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현귀는 이상하게 자꾸 ‘사육’이라느니 ‘애완’이라느니 하는 모양이었지만 설명을 들으니 정작 이건 ‘방주’의 개념에 가까웠다·
진마계와의 전쟁 당시 종 보호를 위해 받아들여 준 느낌이었다·
‘···그냥 현귀와 나의 해석 차이인가?’
나는 살짝 고개를 갸웃했으나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우리는 또 다른 분지에 도착했다·
이 분지 역시 아까와 비슷한 석조 건물들이 분지 중심에 무너져 있었다·
현귀에 말에 의하면 이 분지는 대부분 예전에는 ‘호수’였다고 한다·
지금이야 싹 말라붙어서 분지가 되었다곤 했지만 예전에는 저 석조 건물들이 사실 전부 수상 가옥이었던 것 같았다·
우리는 분지 안으로 들어가 석조 건물에 도착했다·
“이곳은 인족들이 머물던 건물입니다· 지난번에 왔을 당시 못 얻었던 것들도 있기에 한번 전체적으로 다시 뒤져 보도록 하지요·”
우리는 다시 한번 흩어져 석조 건물들을 뒤졌다·
나는 인족이 사용했다는 석조 건물들을 뒤지다가 침상 밑에서 작은 옥간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건····]
상당히 칙칙하고 은은하게 은신법술도 걸려 있어 사축기 이상의 맑은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발견조차 힘든 수준이었다·
‘도대체 뭐길래 이런 수준의 은신법술이 걸린 옥간인 거지···?’
그러나 옥간에는 천지영기로 어떤 영상을 띄우는 방법이 적혀 있었고 그 방식대로 천지영기를 움직여 영상을 만들어 낸 나는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아 아니····]
이 옥간은 일종의 춘화도였다·
아무래도 방 주인이 애용했던 물건인 듯싶었다·
나는 묵념을 표하며 옥간의 주인을 존중하기 위해 옥간을 가루로 만들어 주었다·
그때였다·
츠츠츳―
[음?]
눈앞에 춘화도가 사라지고 어떠한 영상이 나타났다·
그것은 한 왜소하고 마른 남자의 영상이었다·
―먼저 이 옥간을 박살 내 준 것에 감사한다· 언젠가 내가 죽으면 스스로 가루가 되어 버리게 설정해 놓았다만 만약 그 설정에 오류가 난다면··· 이 옥간이 후세에 전해질 걸 생각하니 한 번 죽었어도 부끄러워서 한 번 더 죽을 것 같군·
[····]
옥간 주인의 말이 이어졌다·
―요새 바깥은 전화(戰火)에 휩쓸리는 중이라 하더군· 솔직히 워낙 무시무시한 분들이 힘을 쓰는 중이라 나 같은 사축기 찌꺼기는 진인께 보호나 받으며 여기 찌그러져 있어야겠지· 하지만 그렇더라도 너무 할 일이 없어 그렇더구나· 그 옥간에 담긴 것도 그 때문에··· 감상한 거고· 어쨌든 뭐··· 옥간을 없애 준 대가라기엔 뭣하지만··· 이 방에서 내 생전의 모습을 보게 해 주마· 이전에 기록해 둔 일과라도 보려면 보거라·
츠츠츳―
영상이 방 전체로 넓게 퍼지는 듯하더니 환상술법이 되어 방 전체를 얇게 덮었다·
나는 눈을 빛내며 이 환상을 지켜보았다·
왜소한 남자의 일상이 환상 속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춘화도를 많이 보는 것처럼 말했지만 의외로 남자는 딱히 춘화도를 만지고 있지는 않았다·
대신 뭔가에 골몰한 표정으로 방 안을 왔다 갔다 하거나 서책을 작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남자의 등 뒤에서 그가 작성하는 서책을 구경했다·
지금쯤이면 다 풍화해서 없어졌을 서책들이었기에 오히려 이런 환상술법으로 보는 것이 나은 듯했다·
남자가 집필한 서책의 제목은 ‘선술에 대하여’라는 제목이었다·
나는 그가 집필하는 것을 직관하며 ‘선술에 대하여’를 읽어 갔다·
이 서책은 말 그대로 ‘선술(仙術)’이라는 개념에 대해 저술하고 있었다·
―경지가 낮은 수도자는 수결과 주문으로 법술을 사용한다·
―그리고 경지가 높아질수록 수도자의 법술은 그들의 의(意)와 식(識)으로 인해 발현된다·
―천인기 이상부터는 식(識)이 천지영기 자체와 합일하며 법술의 경계가 사라지기에 오히려 특화된 힘을 연구하여 ‘본명신통’ 등을 만들어 내어 사용하곤 한다·
―지족들의 요술 역시 수결과 주언 대신 육신의 잠재력과 영기의 본질적인 이해를 통한다는 걸 제하면 법술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높은 경지의 수사들은 우리와 사용하는 법술의 단위가 어떻게 다를까·
―필자는 타락한 판관과 진인의 대결을 한 번 직관한 적이 있다· 어떻게 살아남았느냐고 묻는다면 못 살아남았다· 한 번 죽고 부활해야 했을 정도로 대결을 직관한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필자는 선술(仙術)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기회를 알았으니 어찌 감개무량한 기회가 아니랴·
‘선술?’
우리가 걷는 길을 수선(修仙)의 길이라 부른다지만 우리를 ‘수선자’가 아닌 ‘수도자’라 부르는 이유는 간단했다·
선(仙)이라는 자는 그만큼 간단히 쓰일 수 있는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수도의 끝자락·
모든 수도자들이 갈구하는 궁극의 경지가 선(仙)의 경지였다·
그리고 그런 만큼 선(仙) 자가 붙은 공법이나 혹은 그런 개념은 특히 강력하거나 위대한 것을 칭했다·
그렇다면 진선의 법술이라는 선술은 도대체 어떤 것을 칭하는 것인가·
나는 호기심을 느끼며 계속 글을 읽었다·
―선술이란 인력이다· 고작 사축기 따위가 다루는 같잖은 인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개열기 준선들이 사용하는 진정한 의미의 명의 계위에 닿는 인력을 말함이다·
―즉 명의 계위에 영향을 끼쳐 운명을 바꾸거나 혹은 역사의 줄기를 틀어서 역사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고 가는 등의 업적을 세울 수 있다면 그것을 선술이라고 하는 것이다·
‘호오 그렇다면····’
나는 내 멸신겁천을 떠올렸다·
양수진이 만든 멸신겁천의 제는 그 자체로 선술의 일종인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흠칫 놀랐다·
‘잠깐 명의 계위에 그리고 역사에 영향을 끼치는 인력이 선술이라 한다면····’
기묘성채·
연의 연·
그것 역시 선술(仙術)이 아닌가?
이 책의 내용대로라면 괴군은 필멸자의 몸으로 평생을 바쳐 선인(仙人)의 영역인 선술 제작에 성공한 것이었다·
‘차라리 종명자가 8명이라는 게 더 믿길 정도군·’
사실 괴군도 지구에서 온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무지막지한 자질인 셈이었다·
나는 흑룡왕이 이전 회차에서 연의 연을 느끼자마자 왜 그렇게 발작하면서 달려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선술 흑룡왕은 선술의 기척을 느끼고 온 거였고 아마 중경계에서 선술을 쓸 존재라면 진선은 아니고 개열기 정도라고 생각했던 거겠지····’
나는 괴군에 대해서 혀를 내두르던 중 뭔가 기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잠깐 운명을 바꾸는 힘이 선술이라면··· 결국 수선(修仙)이라는 길 자체가 선술이 아닌가?’
결국 수도자는 역천의 존재·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나가는 것이 수선이다·
아쉽게도 그에 대한 것은 이 책에는 나오지 않는 듯했다·
대신 남성은 선술을 직관했을 때의 느낌 그리고 그 무시무시함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는 듯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남성이 책을 집필하던 중 선술을 봤던 당시의 장면을 회상하는지 눈을 감고 뭔가를 떠올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허 허억··· 꺽 꺼거거걱!
남성이 갑자기 몸을 기괴하게 꺾더니 눈을 뒤집고 미친 듯이 종이에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아니 그건 ‘휘갈긴다’에 가까웠다·
우우웅―
그와 동시에 지금껏 잘 보이던 환상술법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마치 고작 환상 따위로 이 장면을 담는 것은 불경(不敬)이라는 듯·
‘뭐지 저건···?’
내가 일그러져 가는 환상을 지켜볼 때였다·
눈이 회까닥 돌아 버린 남성은 갑자기 자신이 쓴 책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뭐?’
얼마간 맛있는 음식이라도 해치우듯이 그는 손가락까지 핥아 가며 책을 먹어치웠고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듯한 남자는 경악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남자가 ‘휘갈긴’ 뭔가가 사라지자 환상술법은 다시 안정을 찾았다·
어느새 주변은 남자가 난동을 부린 여파에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남자가 읊조렸다·
―바 방금 그건··· 서 설마··· 계시인가? 그래 이건 계시로군· 흐 흐흐흐··· 증룡진인이 돌아가시면 내가 그분의 부활체가 되는 거야? 그분이 내 체내에서 부활한다고?
그는 공포에 질린 듯 안색이 하얘진 것 같았다·
―아 아니야· 이 존재는 증룡진인이 아니야· 그렇다면 누구지? 누구인 겁니까 당신은· 어떤 분이시길래··· 아 아니· 아니야···! 이건 증룡이나 영락한 판관 따위보다 더 더더더 더 거대한····
그는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더니 갑자기 손을 치켜들어 자신의 배를 찔렀다·
푸콱!
시뻘건 피가 낭자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단전 어림에서 뭔가 ‘돌’ 같은 게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동시에 환상이 ‘돌’ 같은 것을 중심으로 극도로 불안정하게 변해 버렸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쏟아져 나오는 거야! 그만 그만 나와! 흐아아아아!
남성은 공포에 질린 듯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고 뭔가 술법을 쓰는 게 보였다·
환상이 잔뜩 일그러져서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남성이 봉인술을 써 ‘돌’ 같은 것을 봉인하는 것을 보았다·
봉인술이 시전된 후 남성의 환상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러나 왜소한 남성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본래는 책을 집필하거나 어떤 생각에 빠져 있던 남성은 언젠가부터 시시덕거리며 침상 구석에 쪼그라든 채 앉아 춘화도 같은 걸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뭔가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춘화도에 집중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후·
남성은 춘화도가 든 옥간을 침상 밑이나 방 곳곳에 숨겨 두고는 어딘가로 나가 버렸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침상 밑에 있는 옥간을 제한 모든 옥간이 가루가 되었다·
남성이 죽은 것이었다·
방에 걸린 환상술법은 그로부터 한참 동안 작동되다가 꺼졌다·
나는 이름 모를 남성에게 애도를 표해 주었다·
동시에 나는 남성의 말을 기억했다·
―그분이 내 체내에서 부활한다고?
증룡진인보다 더 거대한 자라고 했으니 최소로 잡아도 진선이다·
‘그렇다면··· 그는 진선이 체내에서 부활하고 있었단 말인가?’
나는 그 모습에 식은땀을 흘렸다·
‘청문령도 같은 증상이었는데???’
광증에 빠져 기이한 것을 저술하고 그 저술본을 본인이 먹은 후 체내에서 괴기한 힘을 가진 돌을 쏟아내는 증상·
그것은 김영훈이 묘사했던 청문령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심지어 사축기였던 탓인지 청문령의 몸에서 발견했다는 괴석과 달리 아예 돌이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청문령을 통해 수계에서는 어떤 진선이 부활하고 있다는 건가?’
“허억 허억····”
나는 그를 생각하자 자연스럽게 귀왕화가 풀리고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제길····’
청문령을 구해야 한다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청문령을 통해 진선이 부활 중이라고 생각하자 도저히 그에게로 수계로 돌아갈 마음이 일지 않았다·
나는 한참 동안 방 안에서 주저앉아 일어날 생각을 못 했다·
‘나는 왜 이리··· 몸을 사린단 말인가···!’
생각뿐이라도 이전의 스승이었던 분을 구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어디가 덧난다는 거냐!
나는 문득 그런 자신이 미워져 이를 짓씹었다·
한숨을 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그 괴석이 뭔지 알아는 봐야겠지·’
나는 아까 전 보았던 환상을 생각하며 그가 괴석을 봉인한 곳을 찾았다·
그곳은 천장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천장····’
아까는 잘 몰랐지만 나는 천장에도 기묘한 인력이 흐른다는 걸 느꼈다·
아니 자기력이라 해야 할까·
천장 곳곳에 티가 나지 않게 별자리처럼 자석이 붙어 있었다·
천장에 붙어 있는 자석의 자기력의 흐름과 배치를 통해 봉인을 해석해서 풀어내는 게 가능했다·
그리고 나는 그 방식이 현귀가 하늘의 인력을 읽어 진법을 해석했던 방식과 같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래도 고대에 자주 쓰였던 방법인 건가?’
어쩌면 현귀는 고대의 비술서 같은 걸 얻은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봉인은 최소 사축기 정도가 아니면 해체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봉인 해제에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철컹―
내가 인력을 움직여 봉인을 거는 빗장을 해제하자 천장이 마치 수면처럼 일렁였다·
나는 천장으로 떠올라 천장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천장 안쪽에서 상자 같은 것을 집을 수 있었다·
의식을 뻗어 상자 주변을 훑었지만 딱히 더 뭔가가 있진 않았다·
상자를 꺼내자 천장은 원 상태로 돌아왔다·
상자는 흑단으로 만들어진 고급스러운 목함이었는데 피로 그려진 부적이 수십 장은 넘게 붙어서 상자 자체에 결계를 쳐 두고 있었다·
‘결계가 다 삭았군·’
툭툭―
부적 몇 개를 툭툭 쳐 보자 그대로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예전에는 결계로써의 기능에 충실했겠지만 세월이 지난 지금은 한참도 전에 결계의 기능이 종료된 것이었다·
나는 부적들을 털어 낸 후 상자의 뚜껑을 열어 보았다·
“음?”
그러나 정작 상자의 안쪽에는 돌 같은 건 없었고 대신 희미한 액체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물’ 같기도 한 그 액체는 어쩐지 신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러나 정작 의식을 뻗어 관찰해 보려 하면 평범한 물이었다·
나는 어쩐지 멍해지는 기분이 들어 홀린 듯 물에 손을 뻗었다·
내가 물에 손이 닿았을 때였다·
따끔―
“헛!”
나는 어쩐지 심상 안쪽에서 따끔거리는 듯한 느낌이 정신을 찌르는 느낌에 정신을 퍼뜩 차렸다·
어쩐지 정신이 맑아진 느낌이었다·
‘뭐지? 방금?’
뭔가 비몽사몽했던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는 잠시 생각해 보던 중 그게 어떤 느낌인지를 기억했다·
‘아 그렇군· 그 느낌····’
식은땀이 흘렀다·
방금 그 비몽사몽했던 느낌은 수계에서 [뭔가]를 본 이후 꿈에 빠졌던 때와 같았다·
다만 수계에서 본 [뭔가]가 치사량의 독이라면 이 액체는 치사량은커녕 간에 기별도 안 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구 식으로 비유하자면 수계에서 본 [뭔가]가 체르노빌이면 이 액체는 희토류 정도의 방사성을 가진 정도였다·
‘순간 홀릴 뻔한 거 같긴 하다만··· 의식을 집중만 했으면 막을 수 있을 정도인가····’
나는 액체에 손을 댄 상태에서 액체의 정체를 조사했다·
그리고 나는 액체를 조사하며 이 액체에는 본래 훨씬 많은 독기와 탁기가 깃들어 있었단 걸 알아챘다·
그저 수많은 시간이 흘러서 독기가 전부 빠진 상태였기에 안전했을 뿐이었다·
찌릿 찌릿····
나는 액체에 손을 댄 상태에서 액체 내에 있는 어떠한 지식을 읽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놀랍게도 이 액체는 일종의 ‘구결’이었다·
“청린갑?”
이 구결은 ‘청린갑’이라고 불리는 법보를 제어하는 구결이었다·
치이이이―
구결을 흡수하자 액체는 그대로 기화해서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정작 청린갑에 대해서는 정보가 없었고 이전 흑린어령문이 보여 준 목록 중에서도 갑옷 같은 것으로 보이는 법보는 없었었다·
그리고 이제 이 방에 더 남아 있는 것도 없었다·
“흐음····”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방을 돌아보고 방을 건물을 나왔다·
내가 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동안 흑린어령문의 사람들은 어느새 건물 바깥으로 나와 안에서 얻은 것들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특히 영약으로 보이는 것들이 많아 보였다·
그러나 나는 영약류에는 관심이 없었고 법보나 공법서 등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딱히 내가 얻은 청린갑의 제어 구결과 연관된 것들은 없는 듯했다·
“선배님께서는 혹시 뭔가 얻으신 건 없으십니까?”
“음 딱히 없는 것 같군·”
“알겠습니다· 하면 저희도 다시 출발하도록 하지요·”
우리는 다시금 길을 출발했다·
곳곳에서 달려드는 화시들을 해치우고 마탁액을 얻는다거나 간혹 화원과라고 하는 불 속에서 열리는 나무의 과목을 따는 둥 소소한 수익을 얻었지만 더 이상 석조 건물 등은 만나지 않았다·
현귀의 말에 의하면 2층으로 가는 경로에 있는 석조 건물은 투귀족과 인간족의 것 두 개뿐이라 하였다·
얼마 후 우리는 2층으로 향하는 입구에 도착했다·
철컹 철컹―
기이한 광경이었다·
2층의 입구는 굉장히 뿌옇게 안개와 수증기로 물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물기’가 있었다·
치이이이―
나는 수증기를 미친 듯이 뿜어내는 ‘물로 이뤄진 사슬’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불꽃의 강으로 이뤄진 수류층의 끝자락·
그곳은 마치 뚝 잘려나간 듯 더 이상 뒤쪽이 없었고 끝없는 허공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허공의 위쪽으로 지금 보이듯이 물로 된 사슬이 이어져 있었는데 놀랍게도 물로 된 그 사슬의 위쪽으로는 끊임없이 불길이 타오르며 물을 증발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물로 된 사슬은 어떻게 돼먹은 건지 불꽃에 뒤덮인 상태에서도 수증기를 뿜어낼 뿐 물이 사라지진 않았다·
“과연 개열기 진인의 신통은 신기하군····”
내가 혀를 내두르자 현귀가 껄껄 웃었다·
“처음 오신 분들은 다 그런 반응이시지요· 일단 저희가 먼저 올라갈 테니 어떻게 오시는지를 확인하고 오시면 됩니다·”
흑린어령문 사람들은 내 앞에 서서 하나둘 선수진혈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피부에 비늘이 돋고 꼬리와 뿔이 돋아난 그들은 반인반룡의 형태로 변한 후 그대로 불타는 사슬에 뛰어들었다·
치이이이―
굉장히 뜨거워 보였지만 그들이 가진 음기로 열기를 식히며 사슬 안쪽을 헤엄쳐 위쪽으로 올라갔다·
“재밌는 방법이군····”
나는 인력을 조종해 보았다·
역시나 인력은 물론이고 비둔술 역시 아직도 사용할 수 없어 저런 귀찮은 방식을 사용해야 하는 듯싶었다·
“사슬 안쪽을 음기로 식히며 헤엄쳐서 올라가면 되는 건가····”
우우웅―
나는 다시 귀왕화를 펼쳤다·
주변으로 음기가 뻗쳐 나갔다·
곳곳에 서리가 꼈고 나는 18개의 머리를 드러내며 마지막 흑린어령문 수사가 사슬에 뛰어드는 것을 본 다음 사슬로 다가갔다·
그리고 막 사슬로 진입하려 할 때였다·
푸확!
내 뒤쪽에서 수증기를 뚫고 누군가가 이쪽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상어의 머리를 하고 있는 혈교족의 수사 교염이라는 이였다·
교염의 뒤쪽으로는 십수 명의 천인기 요족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원래 교염을 따르는 이들은 저보다 많지 않았나?’
4분지 1 정도로 숫자가 줄어 버린 것 같았다·
교염과 요족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모두 흠칫하며 자리에 멈춰섰다·
[웬 놈이냐·]
나는 귀화를 더더욱 짙푸르게 불태우며 물었다·
교염은 내 물음에 어색하게 웃으며 살짝 고개를 낮추고 말했다·
“하하 도우· 저는 들어 보셨을지 모르겠지만 혈교족의 사축기 수사 교염이라 하옵니다· 지난번에도 저물도에 원정을 왔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이 많지요· 아마 도우는 진인의 저물도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으실 테니 제가 약소한 도움을 드리고 싶어지는군요·”
[···왜 갑자기 도움을 주겠다는 거지?]
내가 18개의 입을 벌리며 의문을 드러내자 교염은 한 발자국을 뒤로 물러서며 어색하게 웃었다·
“원래 저희 혈교족은 인족과 친분이 있잖습니까· 그··· 인마대전에서 진마계의 차원장막을 허물 때 혈교족의 기물이 도움이 되셨다고 들었는데····”
[음··· 그렇긴 하지····]
“도우와 좋은 관계를 가지고 싶어 그런 것이니 이해해 주십시오· 일단 2층으로 올라가시는 법은 알고 계십니까?”
[안다·]
“하면 2층은 어떤 곳인지도 알고 계십니까?”
[도거층이라고 안다만·]
“도거층은 진정한 진인의 저물도지요· 수류층이 도원도라면 도거층에는 진인에게 공물로 바쳐진 법보 진인에게 공물로 바쳐진 영단과 영과 그리고 공법서 등이 즐비합니다· 특히 보통 인족들은 진인의 저물도에 오면 인족들이 진인에게 공물을 바쳤던 인제단에 가서 법보와 영단 공법서 등을 찾아봅니다만···· 사실 그것 말고도 인족에게 도움이 되는 기물들이 있는 곳을 알고 있습니다·”
[호오?]
교염은 내가 묻지도 않았건만 도거층에 대한 정보를 술술 불어 주기 시작했다·
“도거층에는 각 종족의 공물을 받아 진인에게 올렸던 제사장들이 살고 있던 지역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제사장 중 인족 제사장이 지냈던 곳도 있지요· 정작 이 제사장 구역은 해수 요족들이 공물을 바쳤던 해제단 너머에 있어서 인족 중에선 위치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
[해제단이란 곳을 찾아가면 되는가?]
“예 예· 해제단을 넘어가면 있는 고궁 중 인족의 생활 양식과 맞는 고궁에 들어가시면 그곳이 인족 제사장의 근거지입니다· 일반적인 인제단보다 훨씬 귀한 것들이 즐비하지요·”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말로만 들어서는 잘 모르겠군· 같이 가는 게 어떤가·]
그러나 교염은 그 자리에서 펄쩍 뛰며 외쳤다·
“어찌 제가! 귀인과 감히 한 길을 가겠습니까!”
[으음 너는 바다 요족이 아닌가?]
“저 저는 이곳에 제 사욕을 채우러 온 게 아닌 이곳에 있는 후배들을 위해 이 아이들에게 맞는 공법이나 영약을 구하러 왔습니다· 때문에 저희는 다른 곳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아니 용서까지야···· 알겠다· 좋은 정보를 줘서 고맙군·]
나는 비록 여러 의도와 의념을 가지고 있다곤 했지만 어쨌든 겉으로나마 호의를 드러내 준 교염에게 감사를 표했다·
[너는 꼭 기억해 두도록 하지· 너는 내 안에서 함께하게 될 거다·]
이러나저러나 도움은 도움·
지금은 비록 만상인연도가 없어 기록할 순 없으나 언젠가 다시 본체를 치료한 후 교염은 내 만상인연도 안에 기록되어 내게 도움을 줬던 수사로 기억되어 내 일부가 될 터였다·
그러나 교염은 공포에 벌벌 떨며 말을 더듬었다·
“여 여 영··· 영광 입니다· 사 살펴··· 가시지요· 나중에 뵙겠···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교염은 나를 두려워하며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어 하는 듯했다·
나는 의아해하며 일단 녀석과 작별하고 사슬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 * *
“허억··· 허억····”
교염은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미치광이 놈··· 도움까지 줬는데도 기어이 나를 죽이겠단 건가?”
많은 수의 사축기 수사들은 외법기축이다·
특히 적자생존인 지족 중에선 상대를 죽여 축을 얻은 외법기축이 절대다수였다·
특히 외법기축의 사냥감으로는 사축기 초기가 가장 좋은 사냥감이었다· 교염도 본인이 그런 사냥감 중 하나라는 걸 잘 인지하고 있었고 그를 극복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사축기 중기의 힘을 펼칠 수 있는 비술도 구해서 익혔다·
사축기 수사들은 외법기축 사냥이 아니라면 잘 싸우지 않는다·
목숨을 아끼고 아껴서 죽기 싫다는 일념으로 사축기에 이른 것이 그들이기에 만약 그들이 싸울 때는 다수로서 소수를 공격할 때·
혹은 확실히 이길 자신이 이길 자신이 있을 때·
정말 피치 못할 때밖에 없었다·
그런 만큼 교염이 사축기 중기의 힘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타 사축기 수사들로부터 교염을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게 하는 억제력이었다·
하지만 교염이 느끼기에 저 미치광이 노괴는 달랐다·
‘미친놈 미친놈···!’
머리들에서 느껴지는 죽음의 힘으로 보아 전부 최소 동급 경지였다·
저 미치광이 노괴는 사축기 중기 축도 느껴지기로는 1개밖에 안 쌓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구태여 다른 사축기 수사를 17명씩이나 죽여서 자랑하듯 어깨에 박아 놓고 다닌다·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마공을 익힌 인간족의 저 미치광이 노괴는 분명한 쾌락 살해자가 분명했다·
상대를 단약으로 만들어서 먹는 인족이라면 많이 봤어도 그걸 굳이 전시하듯이 어깨에 붙여 놓는 인족은 저 노괴가 처음이었다·
그것도 17명이나!
교염은 공포에 질렸다·
‘저 미치광이 놈은 나까지 죽일 예정이다···· 분명해!’
자신과 하나가 되게 해 주겠다니!
교염의 뇌리에 미치광이 노괴의 어깨에 걸린 자신의 두개골에 대한 상상이 스쳤다·
‘빌어먹을! 천 년 전에 한 번 죽어서 이제 죽으면 끝이란 말이다!’
한 번 부활한 적도 있었기에 이제 죽으면 정말로 끝이었다·
교염은 이를 악물었다·
“젠장할··· 천련과를 얻지 않으면 아내를 살릴 수 없단 말이다···! 여기서 물러날까 보냐!”
시뻘건 혈광을 내뱉은 교염은 이를 짓씹으며 말했다·
“모두 들어라! 저 미치광이 노괴를 보았겠지!?”
그 자리에 모여있는 몇 없는 요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도착하며 교염은 그를 따라온 요족들을 제물로 바치며 왔기에 상당히 명망이 안 좋아져 있었다·
요족들 사이에선 교염을 배신하고 도망치자는 의견마저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 중 몇몇은 서립에게 도움을 청해서라도 교염을 죽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악랄한 미치광이 쾌락 살인마 서립을 다시 한번 본 요족들의 생각은 다시 달라졌다·
그에게 도움까지 준 교염을 너무나도 서슴없이 죽이고 머리를 뽑아 어깨에 달아 놓겠다는 그 당당하고 잔인한 발언!
미치광이 쾌락 살인마가 교염을 죽이면 남아 있는 그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보지 않아도 너무나 뻔했다·
그들 역시 살해당해 귀물로 제련될 게 뻔했다·
그동안 교염을 원망했던 요족들은 악독한 인간족 노괴를 본 이후 그 공포에 질려 하나로 단결했다·
* * *
촤아아아―
나는 음기로 사슬을 식히며 위쪽으로 헤엄쳐 올라갔다·
귀화로 몸을 덮으며 나는 흑린어령문에 대한 평가를 바꾸었다·
‘생각해 보면 저물도에 들어가기 이전에 흑린어령문에서 나한테 알려 줬어야 할 정보들이지· 친절한 혈교족 수사의 도움으로 알아야 할 정보가 아니야·’
흑린어령문은 묘하게 나에게 들어오는 정보를 통제하려 한다·
나는 귀화를 태우며 생각했다·
‘설마 나를 배신할 생각인가···?’
나는 흑린어령문의 전력을 생각했다·
흑린어령문은 사상원영을 이용해 외부에서 빌려오는 힘으로 한 단계를 뛰어넘는다·
일단 가늠할 수 있는 전력은 현귀와 천인기 수사들을 합쳐 사축기 넷·
그리고 원영기 수사가 7명이니 천인기 수사 7명·
놈들이 합격진이라도 펼치면 전력이 올라갈 테니 사실상 사축기 수사 다섯이라고 생각해야 할 터였다·
‘물론 아무리 외부의 힘으로 경지를 끌어올려도 사축기 초기 정도겠지·’
사축기 초기 다섯이다·
그리고 나는 현재 사축기 중기였고 괴군의 회로를 사용하면 사축기 대원만까지는 전력을 올릴 자신이 있었다·
‘상대해 볼 만···하려나?’
내 전투 경험이면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터였다·
그러나 나는 현귀를 생각하자 알게 모르게 불길함이 드는 걸 느꼈다·
‘그 녀석 뭔가를 숨기고 있다····’
현귀에게서 어렴풋이 느껴지는 불길함·
나는 만약 흑린어령문이 배신한다면 현귀가 가장 큰 변수가 될 것이라 짐작했다·
‘만약 놈들이 나를 배신하면··· 일단 현귀를 가장 먼저 제거해야겠어·’
나는 현귀를 가장 경계하기로 하며 2층으로 올라왔다·
화르르르륵―
어째 2층은 1층보다도 더더욱 뜨거웠다·
곳곳에서 싯누런 불길들이 빛을 뿜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흑린어령문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오셨군요·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잠깐 어디로 갈 거지?]
“우선 인제단이라는 곳에 잠시 들렀다가 3층으로 가는 길목으로 향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재염을 제압하게 되겠지요·”
[그 전에 잠시 어디를 다녀오도록 하겠다·]
“어디를 가시려 하십니까?”
[바다 요족들이 제물을 바치는 곳은 어디지?]
“서쪽으로 가시면 해제단이라는 곳이 나옵니다만 어찌 찾으시는지요?”
[해룡 한 마리를 상대해야 할 일이 있어 놈에게 쓸 만한 미끼라도 찾으려 할까 한다·]
내 말에 현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면 저희는 인제단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인제단의 좌표는 알려 드릴 터이니 찾아오십시오·”
나는 흑린어령문 사람들과 헤어져 해제단 쪽으로 향했다·
바다 요족들의 양식이 가득한 곳이었다·
곳곳의 건물에 해룡궁에서 봤던 양식들이 가득했다·
불타고 있는 것만 아니었다면 해룡궁에 온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양식이 비슷했다·
그러나 확실히 바다 요족들에게만 쓸모 있는 것들이 많이 모여 있어 인족들은 굳이 여길 올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 저건 해란과?’
나는 해룡족에게 있어 천고의 영약이라 불리는 해란과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해란과는 음기와 양기를 골고루 흡수해야만 생장하는 특이한 영과였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음기는 바다의 음기 양기는 마기(魔氣)가 섞인 양기만 흡수하며 자라기 때문에 굉장히 얻기가 힘든 영과였다·
그러나 증룡진인의 저물도는 우연히 두 조건을 갖춘 모양이었다·
‘서란에게 들었던 영과로군·’
해룡족의 힘과 굉장히 유사한 영기를 품고 있어 섭취하면 무조건 경지가 오르고 수 속성 신통이 생길 정도라 했다·
영액을 빼서 해룡족 특유의 법보를 제련하는 데에 써도 제격이고 해룡족의 힘을 증폭시키는 효과마저 있어 사축기 대원만 해룡족이라면 합체기에 이를 때에도 무조건 쓰인다고 했다·
‘만약 나중에 서란을 만나서 선물로 주면 딱이겠군·’
나는 잠시 해란과를 바라보다 일단 내 것이라는 표시를 남겨 두기 위해 해란과 안쪽에 백란축성문을 남겨 두었다·
백란축성문으로 인해 해란과는 더욱 싱싱하게 자라날 터였다·
해란과를 남겨 둔 후 해제단 구역을 지나자 나는 커다란 고궁들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인족의 것으로 보이는 고궁에 들어갔다·
고궁 안쪽으로는 수기가 너무 강해서 불길이 거의 침범하지 못했다·
그러나 2층은 1층보다 뜨거운 탓인지 안쪽도 덥기는 더웠다·
고궁의 안쪽은 고요했다·
그러나 나는 곳곳에서 풍기는 영기와 의식 영역 곳곳에 잡히는 영력 파동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교염··· 정말 친절한 수사군·’
이런 좋은 정보를 무상으로 알려 주다니 확실히 기억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상당한 기연이었다·
“음 혹시 부(富)의 축 덕분인가·”
나는 귀왕화를 풀며 내 안의 축을 관조했다·
오복축의 경우 일전 연위에게 듣기론 운명에도 일정 정도 작용을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부의 축을 얻은 만큼 재물 운이 상승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나는 일단 고궁을 돌면서 재물들을 쓸어모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법보 관련을 유의 깊게 살폈다·
그러나 고궁에 있는 법보 중에서는 갑옷류 같은 건 없었다·
‘청린갑은 도대체 뭘 말하는 거지?’
왜 진선이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돌·
그 돌이 사라지고 남은 액체에는 ‘청린갑 제어 구결’ 같은 게 들어 있었을까·
아무래도 이 고궁에서는 찾기 힘든 듯했다·
나는 내 저물도를 열고 손가락을 튕겨 평소 가지고 다니던 양산형 소형 서장군들을 우르르 쏟아냈다·
어쩐지 기분 나쁘게 생긴 병정 장군들은 날개를 달고서 다른 고궁들까지 옮겨 다니며 법보를 조사했다·
그 결과 나는 한 가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2층에 청린갑은 없다·”
그리고 나는 서 장군들을 통해 한 가지를 더 알 수 있었다·
“탱화도라····”
나는 고궁의 최상층으로 걸어가 서 장군들이 발견했다는 탱화도를 바라보았다·
‘이번 생에는 유난히 탱화와 많이 엮이는 것 같군·’
탱화 속에서는 위엄 넘치는 용이 춤을 추고 있었다·
탱화는 총 21개가 있었는데 그 탱화 모두 용의 다른 모습을 담고 있었다·
“이건····”
아무래도 용이 춤을 추는 동작을 그린 것 같았다·
나는 용의 동작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걸 눈치챘다·
무(武)의 영역의 동작은 아니었으나 마치 헌원의 태산열제공처럼 주술적인 의미의 동작인 듯했다·
“흠····”
나는 고궁의 최상층에 있는 탱화들을 뇌리에 집어넣던 중 한 권의 옥간을 발견했다·
수류층에서 읽었던 서책도 그렇지만 이 옥간 역시 광한계 천족 공용어로 쓰여 있어 읽는 것에 무리는 없었다·
서책은 탱화도에 대한 일지였다·
서책의 필자 고궁의 주인이자 증룡에게 공물을 바치는 제사장이 증룡진인에게 탱화 그리는 법을 전수받았다는 이야기였다·
탱화를 어떻게 하면 더 잘 그릴 수 있는지 등의 방법과 깨달음이 기술되어 있었다·
“흠····”
나는 일지를 읽어 보던 중 한 장면에 시선이 갔다·
―진인께서 우리가 그린 탱화를 보시고 몹시 노하셨다· 이딴 것을 탱화도라 그려 왔느냐면서 화형하신 상태에서 우리를 거꾸로 매달아 놓고 매우 쳤다·
“····”
아무래도 증룡진인 역시 그렇게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아니 용형이 아니라 인간형으로 화형한 상태에서 후려친 거니 자비롭다 해야 하나?’
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일지를 읽어 내려갔다·
―진인께서 제사장 일동을 불러모아 일장연설을 하셨다· 우리가 배우는 탱화는 굉장히 어마어마한 내력을 가진 탱화라 하였다· 위대한 선수이시자 명계의 판관께서 죽음의 신께 탱화를 사사하였고 그분께서 당신에게 탱화를 가르쳐 주셨다 한다·
―즉 우리가 배우는 탱화는 죽음의 신으로부터 전래된 탱화인 셈이다· 그런 위대한 탱화를 배우고 있었으면서도 마음속으로 불평불만을 했던 내 자신이 문득 부끄러워졌다· 진인께서는 자비심으로 벌레와 같은 우리를 거두셨고 그분에게 바치는 공물은 그저 예식일 뿐이며 실상은 우리가 사용하는 것이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탱화를 그리는 것일 뿐인데 그조차 하기 싫어했던 내 자신이 부끄럽다· 심지어 하잘것없는 탱화가 아닌 위대한 존재로부터 전래된 탱화인 것인데····
―거꾸로 매달려 맞은 게 수치스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용형으로 두들기셨다면 가루가 되었을 터인데 인간형으로 변해서 요력도 쓰지 않고 완력으로만 구타하셨다·
―···생각해 보니까 그것만으로도 고유 영역이 뜯겨 나가 죽을 뻔했지만 어쨌든 그분께서는 우리를 생각하고 계신다· 진정 수치스러워해야 할 것은 맞은 것이 아닌 내 마음이었다·
“···합체기 수사였나·”
아무래도 고궁의 주인은 합체기 수사로 고유 영역까지 전개할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개열기 요족이 화형해서 완력으로만 하는 구타에 영역이 뜯겨 죽을 뻔했다니····’
도대체 증룡진인은··· 아니 개열기들은 어떤 존재들인 걸까·
나는 혀를 내두르며 일지를 읽었다·
그 이후로 시선이 가는 곳은 없었다·
‘죽음의 신으로부터 전래된 탱화····’
탱화의 화풍은 기이하리만치 태열전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 * *
철컥철컥철컥철컥····
기묘한 인형들의 성채가 밤하늘을 날고 있었다·
꼭두각시의 성·
그 안쪽·
그곳에서 한 꼽추 노인이 눈을 번뜩였다·
“냄새 냄새가 난다···!”
그는 충혈된 눈으로 코를 벌름거리며 입술을 핥았다·
“서휼···! 서휼의 냄새가 난다! 어서 갑시다 내 사랑! 서휼이 드디어 다시 나타났소! 보이시오? 나와 함께 천기를 봅시다! 저기! 내가 서휼과 조우하고 있어!!!”
괴군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기묘성채의 최상층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울부짖었다·
괴군의 미래 예지에 서휼과 만나는 그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서쪽으로 진로를 돌려라! 운명이 나를 서휼에게 인도하기 시작했어! 숨어 있던 그 녀석이 드디어 기어 나온 것이렷다! 흐히히! 서 제후· 서 제후· 서 제후· 서 제후· 서 제후· 서제후서제후서제후서제후서제후서제후서장군서제후서제후서제후···! 서 제후를 만들러 가자!”
* * *
어둡고 축축한 동굴 안·
백의를 입은 청발의 남성이 상냥한 미소를 지은 채 그의 주변에 있는 안개에 손을 집어넣고 눈을 빛냈다·
“길었군요· 하지만··· 찾았습니다 서 도우·”
그의 눈이 세로로 쭉 찢어졌다·
분명 인족의 육신이었지만 마치 파충류의 것과 같이 말이었다·
“이것이 당신의 [기둥]이로군요····”
희뿌연 안개 속을 향해 손을 뻗은 남성이 웃었다·
콰악!
그가 안개 속에서 손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잠시 침묵하던 그는 웃기 시작했다·
“후후 생각해 보면 아직 천인기였었지요· 놀랍긴 합니다· 기둥을 찾으면서 틈틈이 경지도 올렸거늘···· 필시 이 ‘만상인연도’로부터 비롯되는 선수의 재능· 그 안에 당신의 재능을 봉인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 안 되지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입니다· 인력(引力)만 손에 넣는다면 기둥에 접근해서 봉인을 풀어헤칠 수 있으니 말이지요· 그럼 이제··· 전력으로 경지를 올려 드리겠습니다·”
스르륵―
백의의 남성은 의복의 술법을 써 새파란 청포로 자신의 몸을 뒤덮었다·
“후후 감상은 어떠십니까 서 도우? 당신의 만상인연도를 손에 넣는 것 역시 이제 코앞입니다·”
그러나 답은 딱히 들려오지 않았다·
“후후··· 후후후후후····”
그래도 상관없었다·
서휼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계속해서 웃었다·
===
작가의 말: 저는 웃음꾸러기 서휼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근데 워낙 웃음이 많은 친구라 아무리 망가뜨리고 괴롭혀도 울부짖는 꼴을 보려면 오래 걸릴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