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녕하셨습니까 (4)
침묵은 상당히 오래 이어졌다·
서립은 한동안 뭔가를 생각하는 듯 가만히 서 있었고 교염은 피가 마르는 느낌이었다·
“저··· 수사?”
그리고 교염의 말에 서립이 귀화가 일렁이는 눈두덩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런 빌어먹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아무리 종족들의 생김새가 달라 표정을 알기 힘들다거나 몸짓을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고는 하나 그래도 생명체인 이상 얼굴을 찌푸리거나 하는 정도는 대부분 일치했다·
부휴족이나 균해족 그리고 충족 수사들 같은 경우야 워낙 생활 방식이 달라 알기가 힘들다지만 그래도 인족이라면 혈교족과 거래를 자주 하는 편이었기에 교염도 인족의 표정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미치광이의 경우 두개골로 된 얼굴이다 보니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는 게 불가능했다·
그렇게 서립의 침묵이 이어지자 잠시 긴장하고 있던 두 명의 천족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하하 인족 도우· 보아하니 흑색귀골곡의 도우이신 듯한데 천련과가 어찌 필요한지 여쭤도 되겠소?”
[····]
서립은 딱히 답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녹주와 백위익은 웃었다·
“만약 영과가 필요한 거라면 차후 장목족에서 키우는 열매 등으로 배상하겠소· 차기과 해란과 심해과 도염과 등···· 흑색귀골곡 수사라면 심해 속성을 가진 이런 영과들이 엄청나게 유용하지 않소이까?”
“우리 비익족에서도 천련과를 양보한다면 따로 배상하겠소· 듣자 하니 귀족의 흑색귀골곡이 본족에 최근 뿌리를 내리려 한다는데 종족 차원에서 흑색귀골곡을 지원해 줄 생각도 있소· 그러니 저 지족 놈의 말 따윈 듣지 말고 같은 천족끼리 뭉쳐서 지족 놈을 죽이고 같이 나갑시다· 어떠시오?”
그리고 서립의 입이 열렸다·
[···아니다·]
“으음!?”
“뭐라고 했나?”
“다시 말해 보게·”
세 명의 사축기 수사들은 서립에게 신경을 기울였다·
그리고 서립이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미치광이 쾌락 살인마가 아니라는 말이다·]
“····”
“····”
“····”
그 말에 장내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녹주와 백위익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 아하하하하!”
“그 그렇군· 그렇지· 그럴 수 있네· 우리 비익족에도 자네 같은 이들이 있는데 하나같이 스스로를 ‘예술가’로 칭하지· 물론 그들 중에서도 자네 정도로··· 엄청난 예술가들은 없네· 누가 자네더러 쾌락 살인마라 했는가? 자네의 행위는 음··· ‘예술 행위’인 걸세·”
어색하게 웃으며 특히나 백위익은 서립을 끌어들이기 위해 서립을 마구 칭찬했다·
그리고 서립은 더더욱 침묵했다·
교염은 어색하게 웃는 두 천족 수사들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설픈 놈들·’
어설프다·
저 녀석들에겐 ‘각오’가 없다·
그저 이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려는 마음뿐·
각오가 있는 자신에게는 절대로 비할 수 없다·
그러니 이 자리에선 그가 이길 것이다!
“그렇소· 저 비익족 비둘기 놈 말이 맞소· 수사는 분명한 ‘예술가’요! 어깨에 그것들 역시 당신의 ‘역작’들이겠지· 분명 뛰어난 ‘예술 행위’들임에 틀림없는 훌륭한 형상··· 나는 그 예술 행위를 이해하오·”
[····]
여기까지는 백위익도 했던 말이다·
하지만 교염은 자신이 방금 한 말을 되새기며 한 발짝을 더 나아갔다·
“그러나 저 천족 놈들이 수사의 예술을 이해할 것 같소? 천만의 말씀! 그저 지금의 상황을 모면하려고 입을 놀리는 것뿐이오! 나 교염은 감히 한 말씀을 드릴 수 있소! 나는 수사의 행위 예술을 이해하는 자로서 기꺼이 수사의 ‘작품’이 될 생각이 있소!”
[····]
“부디 내게도 기회를 주시오· 그러나 저 천족 놈들은 감히 수사의 ‘작품’이 되겠다는 열의가 없으니 함부로 기회를 줄 수 없소· 하니 일단 나와 힘을 합쳐 저 거짓말쟁이들의 머리통을 뽑은 후 나를 작품화시켜 주시오!”
교염은 비릿하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제 죽겠지·’
미치광이 인족 마두의 ‘작품’이 되어 어깨에 전시되리라·
하지만 그의 앞길을 막던 두 천족 역시 오늘 죽게 될 것이다·
교염의 말에 녹주와 백위익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세 사축기 수사의 시선이 서립에게 쏠렸다·
모두가 서립의 결정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나는 어이가 없어서 한참 동안 침묵했다·
‘이런 젠장 여태껏 나를 모두 그런 시선으로 보고 있었단 말인가·’
요족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려 한 ‘미치광이 쾌락 살인마’는 나인 셈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보면 나를 그런 막되먹은 존재로 볼 수 있는 거지?’
내가 원립도 아니고 그런 취급을 받은 것이 못내 불쾌했다·
‘기분 나쁜 병정 괴물인 서 장군도 아니고 도대체 내 어디가 어때서!’
문득 뭔가 울컥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지만 심상 안쪽에서 또 쿡쿡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골이 아파 머리를 꾹꾹 누르며 생각했다·
‘그래 뭐··· 인간의 심미관은 다양하고 또 이종족들이니만큼 우리의 심미관과 많이 달라서 무섭게 생각할 수도 있지····’
일단 가장 문제인 건 사축기 수사들의 머리를 뽑아 다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오해를 풀기 위해 말해 주었다·
[이건··· 예술 행위가 아니다·]
그러나 녹주와 백위익 교염은 미친듯이 각자 고개를 끄덕이며 이상한 맞장구를 쳤다·
“암요 수사· 단순한 예술 행위는 아니시겠지요·”
“그 원대한 의미를 저희 같은 범부가 알아볼 수 없지 않겠습니까·”
“저 보십시오 저 천족 놈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럴 패기도 용기도 없는 겁니다!”
[···일단 예술 행위라고 부르지 말아라· 그리고 오해하는 게 있는데 이 머리들은 타인의 머리가 아니다· 이 머리는··· 또 다른 나 자신들이다· 알겠나?]
“····”
“····”
“····”
어째선지 모르지만 나머지 세 사축기 수사의 의념이 썩어 들어가는 게 보였다·
나는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빌어먹을 어떻게 설명을 해도 안 먹힐 듯싶군·’
뭘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 도대체·
나는 결국 심미관이 인간과는 많이 다른 이 사축기 수사들을 설득하는 걸 포기했다·
어차피 너무 이종족에게 많은 걸 기대한 듯했다·
[뭐 그건 그렇고··· 왜 천련과가 필요하냐고 물었나···? 나는 흑린어령문의 의뢰를 받아 이 자리에 온 게다· 흑린어령문은 반드시 천련과를 필요로 하는 듯하니 협상은 필요 없을 듯하군·]
그 말에 교염의 얼굴에는 희색이 녹주와 백위익의 얼굴에는 패색이 짙어졌다·
녹주와 백위익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흑린어령문이라· 분명 흑룡왕 현음 님의 휘하 문파였지요?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한데 흑린어령문이 당최 어떤 이유로 천련과가 필요한지는 모르지만 우선 저희 장목족은····”
“예 그리고 저희 비익족은····”
두 수사는 자신들의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난 눈두덩이에서 귀화를 태우며 가만히 들어볼 뿐이었다·
둘의 설명을 들은 나는 이번에는 지족의 교염에게 물었다·
[너는 무슨 이유로 필요한 거지?]
그 말에 교염은 움찔하는 듯하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제 아내를 치료하려면 고련단이란 단약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약의 가장 중요한 약재가 바로 천련과입니다· 다른 부재료는 전부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지만 주재료인 천련과만큼은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가 없어 이리 구하러 왔습니다· 세 방울의 과즙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흐음····]
“부디 부탁드립니다! 저는 아내가 없으면 살아도 산 게 아닙니다· 저는 죄가 많고 쓰레기 같은 놈이지만 아내는 아무 죄도 없는 착한 이입니다· 부디···!”
나는 애걸하는 교염과 각자의 종족에서 중요한 임무로 온 천족들을 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천린수해성이나 원립의 비술로 장생과를 빠르게 맺히게 했던 것처럼 천련과도 빠르게 자라나게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눈앞의 천련과는 척 봐도 장생과조차 따위라고 칭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영성이 맺혀 있었다·
저 작은 열매 하나에 맺혀 있는 영성만 해도 범인을 사축기 수사로 만들 수 있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거기다가 은은한 신성함마저 느껴지는 것이 나는 본능적으로 저 천련과는 절대 인위적인 힘으로는 열매를 맺히게 할 수 없으리란 걸 알아챘다·
‘안타깝군·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좋겠다만····’
아무래도 그건 힘들 듯했다·
그렇다면 이미 결정 났다·
[미안하게 되었군· 이야기를 들어 보면 너희 둘은 충분히 대체할 수 있는 것 같지만 나도 이 녀석도 대체가 안 되는 것 같구나·]
교염의 아내도·
그리고 흑린어령문도·
각자의 목적을 위해선 반드시 천련과가 필요했다·
흑린어령문 역시 현음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는 중대한 목표가 있으니 명분에서 크게 뒤지지 않았다·
물론 이런 사정을 다 말해 줄 필요는 없었으니 나는 간결하게 교염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네 이야기가 가장 가슴을 울리게 했으니··· 너를 도와주지·]
“가 감사····”
[네 아내는 경지가 어찌 되지?]
“···저와 같은 사축기입니다만····”
[오 그렇군· 그럼 나중에 한번 병이 나으면 문안이라도 가도록 하지· 정인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내 가슴을 울리게 하니 말이다·]
나는 껄껄 웃으며 교염의 어깨를 두드려 준 후 앞으로 나섰다·
몇 번이나 생각하지만 나는 연인들의 이야기에 약했다·
제자였던 계화와 만호도·
마계의 인연인 수인과 홍연도·
전명훈과 금소해도·
그리고 나 자신도·
그런 만큼 교염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슴이 가장 마음이 떨린 것도 있었다·
‘세 방울이라면 흑린어령문에서도 허락해 주겠지·’
교염과 그의 아내가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이 나도 모르게 일어나는 듯했다·
어째 교염의 의념이 차갑게 내려앉듯이 식어 버린 것 같았지만 적을 앞에 두고 의념이 차갑게 식는 것은 좋은 현상이었다·
‘전투 경험이 꽤 있나 보군· 나쁘지 않아·’
쩌어어억―
나는 18개의 입을 벌리며 양팔을 벌렸다·
[자아 그럼· 안타깝지만 덤벼라·]
끼야아아아아아―
오오오오오―
소름 끼치는 귀곡성이 사방을 울렸다·
[엄호해라· 한 번에 끝내겠다·]
치이이이―
나는 저주문을 왼손 위로 모으며 말했다·
내 저주를 본 적이 있던 교염은 눈을 빛내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녹주와 백위익이 눈길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백위익이 수결을 맺었다·
파아아앗!
그와 동시에 백위익의 주변에서 세 개의 기둥이 떠올랐다·
사축기 후기·
기축 장막을 전개할 수 있는 경지·
세 개의 기둥이 연결되며 ‘장막’이 완성되었고 ‘장막’은 커져 가며 우리와 그들을 뒤덮었다·
삽시간에 주변의 풍경이 뒤바뀌었다·
우리는 어느새 봉양층에서 높은 산맥 위쪽 구름이 떠다니는 거대한 석조 건물의 앞쪽에 도착해 있었다·
석조 건물 위쪽에는 백위익이 세 쌍의 날개를 펼친 채 떠올라 있었다·
비익족은 달리 천익족(天翼族)이라고도 불렸다·
그들의 신통은 절대다수가 저 날개에서 나왔으며 저 날개에서 빛이 뿜어져 나올 때 그 빛의 힘으로 모든 마공을 물리치고 파사현정의 힘을 뿜는다 알려져 있었다·
치이이이이―
내 귀기는 그렇게 상성이 좋지 않았다·
거기에 더불어 녹주가 주변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주변이 숲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한쪽은 파사현정 한쪽은 목 속성이라····]
목극토(木克土)라 하여 목 속성 공법은 음 속성 공법을 익힌 내게는 최악의 상성이었다·
음은 곤 곤은 토였으니까·
더군다나 이곳은 백위익의 장막 안쪽·
이 안에서라면 백위익은 사축기 대원만이나 다름없었다·
쿠구구구구!
백위익의 빛이 교염을 내리쬐었고 녹주가 소환한 숲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교염의 움직임을 제약했다·
[그아아아아아!]
교염이 본체로 변하며 거대화하기 시작했다·
녀석의 본체는 핏빛의 거대한 상어로 변하며 주변으로 핏빛의 해수를 소환했다·
거대한 산맥 위·
녹빛의 산맥과 핏빛의 바다가 생겨나며 산맥 아래로 줄줄이 흘러내렸다·
녹주의 숲이 교염을 묶었고 백위익은 내게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치이이이―
사축기 대원만 수준의 백위익의 빛이 내게 내리쬐어 온다·
[정통기축인가····]
나는 백위익의 체내에서 느껴지는 정밀한 오행의 힘을 느끼며 눈을 빛냈다·
남을 죽여 얻은 게 아닌 본인이 제의를 치러 제대로 얻어 낸 기축이었다·
비록 오행축이었지만 확실히 일반적인 외법기축 수도자들보다 한참은 안정되고 강력한 기세였다·
꾸구구구국!
산맥의 인력이 나를 잡아 두었다·
중력이 훨씬 강력해지며 빛과 함께 나를 으스러뜨리려 하고 있었다·
백위익의 장막 안에 있는 이상 이곳의 인력은 오로지 백위익의 것·
나는 백위익의 인력에 저항하여 인력을 내뿜으며 저주문을 완성시켰다·
빛에 휩싸인 백위익이 담담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번쩍!
휘광이 나를 향해 쏟아진다·
나를 덮고 있던 저주의 영역이 쪼그라들었다·
[파사현정이라··· 좋군· 그럼 나도 해 볼까?]
그리고 나는 저주를 반전시켰다·
츠츠츠츳!
백란축성문이 주변을 덮는다·
축문으로 변한 저주문이 새하얗게 빛나며 도리어 백위익의 빛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뭐 뭣···!?”
백위익은 당황하는 듯했으나 어느새 백란축성문은 빛을 먹어치우며 산맥 전체를 덮을 만큼 성장했다·
백위익은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는지 빛을 뿜는 것을 그만두고 인력으로 축성문을 묶어두었다·
그리고 나는 파사현정의 빛이 사라진 걸 느끼자마자 다시 저주를 반전시켰다·
파아아앗!
다시금 시커먼 귀주문으로 바뀐 저주문이 일 점으로 모인다·
시커먼 저주가 내 손 위에서 지글지글 불타올랐다·
“이런 제길···!”
내 저주가 가진 흉험함을 알아봤는지 백위익은 나와의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소용없다·
우우웅!
나는 주변으로 강환들을 띄우고 다시 몸에 흡수시켰다·
부우우웅―
나는 순식간에 백위익의 앞에 도달해 그의 앞으로 저주문을 뻗었다·
“이 이익···! 저리 가라!”
[어림없는 소리·]
나는 백위익이 쏘아 대는 빛 덩이를 피하며 그에게 접근했다·
그는 위기감을 느꼈는지 황급하게 날개에서 빛을 뿜었다·
날개는 아까처럼 빛을 뿜지는 않았으나 빛으로 변한 상태에서 수천 개로 쪼개졌다·
쪼개진 날개는 빛의 손이 되어 나에게 날아들었다·
나는 피하려 했으나 인력에 의해 몸이 둔해져 결국 사방을 감싸는 빛의 손들에 의해 잡혀버렸다·
“잡았다 이제 죽어라···!”
[음 잡았다고?]
그러나 나는 왼손에 저주문을 띄운 채 귀화를 불태웠다·
키기기긱―
키기긱―
전신에 회로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어마어마한 힘이 전신을 맴돌았다·
꾹 꾸구구구국!
나는 힘으로 빛의 손을 무시하고 백위익에게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백위익은 화들짝 놀라서 외쳤다·
“마 말도 안 돼! 귀물에게 효과가 없을 리 없는데···! 오지 마라!”
콰드드득!
빛의 손에 더해 인력마저도 나를 얽어매었다·
그러나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그에게 점차 다가갔다·
백위익은 공포에 질린 모습이었지만 점차 나와 그의 사이는 가까워졌다·
나를 묶고 있는 게 그의 등에서 나온 빛의 손이었기에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
‘무겁군·’
그러나 그에게 다가갈수록 인력이 강해졌기에 내 걸음은 점차 느려졌다·
그리고 그와의 거리가 약 5보 정도 남았을 때였다·
꾸드드득!
갑자기 땅에서 자라난 나무들이 내 몸을 얽어매었다·
[호오····]
녹주와 호각으로 싸우던 교염은 점차 지속력이 달리는지 녹주에게 밀리고 있었다·
여유를 찾은 녹주는 이쪽으로 지원을 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나무 빛의 손 그리고 인력!
나는 셋의 조합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무릎을 꿇었다·
콰아앙!
결국 나는 그 자리에 엎어져 버렸다·
“후 후후후··· 자만하더니 이 꼴인가· 수라족으로 불리는 인족치고는····”
그리고 나는 입을 열었다·
쩌어어억!
동시에 내 어깨에 달려 있던 얼굴 중 하나가 몸 안으로 들어가더니 입안에서 튀어나왔다·
쭈우우욱!
입에서 뻗어 나간 얼굴은 귀왕이 되어 내 저주를 받아 백위익에게 날아갔고 백위익의 몸에 내 저주가 직격했다·
“···! 끄아아아아악!”
백위익은 눈이 뒤집힐 정도로 비명을 질렀고 내 저주를 받고는 발작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빛의 손과 인력·
그리고 기축 장막 전체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느새 다시 봉양층으로 돌아왔고 내 앞에는 마구 발버둥을 치는 백위익만이 남아 있었다·
백위익은 입에서 거품을 흘리며 몸부림쳤다·
사축기 수사라서 심장 마비로 쉽게 죽지도 못하는 고통!
결국 백위익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본인의 천원지방을 스스로 흩어서 자살해 버렸다·
나는 백위익의 혼이 혼의 계위를 통해 부활할 곳으로 떠가는 걸 본 후 뒤를 돌아 녹주와 싸우고 있는 교염을 바라보았다·
교염은 녹주에게 밀리고 있었으나 내가 합류할 것이 기정사실이 되었다·
그에 더해 저 멀리서 흑린어령문 수사들이 이쪽으로 합류하려는 게 보였다·
[이제야 오는군· 나를 도와 장목족의 녀석을 제압해라·]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래에서 몇 가지 신경 써야 할 게 있어서 말입니다· 지원하도록 하지요·”
나와 흑린어령문 수사들의 지원이 시작되었고 이내 녹주는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
교염이 앞에서 녹주의 공격을 견뎠고 내가 뒤에서 저주를 날리고 귀조를 날려 녹주의 숲을 오염시켰다·
흑린어령문의 음기가 숲을 황폐화시켰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현귀는 그 자리에 보이지 않았다·
* * *
현귀는 멀구슬나무가 있는 호숫가·
호숫가의 주변에 늘어져 있는 장승들에 붙여져 있는 탱화도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탱화도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화풍을 자랑했으나 간혹 괴이한 탱화도도 있었다·
예를 들어 시커멓게 먹칠을 해 놓아 탱화도가 아닌 그냥 ‘먹지’로 보이는 종이가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현귀는 그 먹지를 보며 희열에 찬 표정이 되었다·
“찾았다 서천탱화도(西天幀畫圖)···!”
그의 손이 시커멓게 먹칠을 한 먹지에 다가가 먹지를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그와 동시에 현귀와 먹지를 중심으로 어떠한 파동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가장 오래된 존재와 연결된 파동이었다·
그 파동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퍼져 나갔다·
봉양층에서 도거층으로 도거층에서 수류층으로 증룡진인의 저물도 안에서 사토역으로·
그리고 사토역에서 삽풍역으로····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은밀한 파동이었다·
* * *
콰과과과광!
녹주의 팔에 내 저주가 꽂혔다· 그의 팔이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무슨 결심을 한 것인지 교염과 나를 상대하다 말고 천련과를 품에 안은 채 봉양층 중앙의 제단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가속을 시작했다·
파아아앗!
시간이 느려진다·
동시에 나는 녹주를 향해 산군월악비를 쓰며 달려갔다·
녹주는 나를 뒤돌아보며 이를 악물었다·
“크윽 크으으으윽!”
[이리 오너라· 너도 동료와 함께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리 와서 나와 대화를 나누자꾸나·]
18개의 머리로 귀화를 뿜어내며 그를 향해 달려갔고 36개의 눈과 눈을 마주친 녹주는 눈을 질끈 감고는 천련과를 멀리 던져 버린 후 제단에 몸을 투신했다·
동시에 녹주의 몸이 빛에 휩싸이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흐으음····]
나는 그가 던진 천련과를 받으며 제단을 바라보았다·
현귀가 내게 다가오며 웃었다·
“하하 본래 봉양층의 제단은 치제층으로 향하는 문입니다만 바른 절차를 바쳐 제의를 치르는 게 아니라면 치제층으로 향하지 않고 대상을 바깥으로 쫓아내 버립니다· 물론 단순히 바깥으로 나가는 용도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만 정식 문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거칠게 쫓아내는 방식이기에 생명력에 상당한 무리가 옵니다· 생명의 화신인 사축기 수사가 아니라면 대부분 정식 문으로 나가는 편이지요·”
[그렇군··· 도망친 건가·]
“잘된 일입니다· 천련과를 얻었으니까 말입니다· 하하···· 이제 식죄탱화도만 얻으면 되겠군요·”
[그런가··· 식죄탱화도는 저기 있는가?]
“예 저 장승들 중에서 찾으면 됩니다· 다만 저 탱화도들은 장승에 매달린 채 전부 멀구슬나무를 향하고 있지요· 저건 일종의 봉인입니다· 진마계의 어떤 존재가 가졌었다는 업화의 권능을 멀구슬나무로 봉인하고 업화의 열기가 삐져나오지 못하도록 탱화도로 봉인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진법을 해치지 않게 조심해서 꺼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듯하군요·”
[알겠네· 일단 천련과는 넘겨주지· 그리고 나도 식죄탱화도를 찾으면 되는 건가?]
“그래 주시면 감사할 듯하군요·”
[아 그리고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다만····]
“무엇입니까?”
나는 교염을 가리키며 말했다·
[녀석이 도운 덕에 천족들에게서 천련과를 얻을 수 있었으니 놈에게도 천련과 즙을 좀 나눠주는 게 어떤가·]
“알겠습니다· 한 잔 분량 정도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그럼 식죄탱화도를 찾을 때까지 얼마나 걸리겠는가?]
“한 식경 정도면 될 듯합니다· 잠시만 기다리고 계시지요·”
[알겠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귀는 교염에게 다가가 천련과의 과즙을 빼서 작은 호리병에 한 잔 분량을 담아 넣어 주었다·
* * *
교염은 눈물을 흘리며 현귀에게 감사를 구했다·
그는 천련과 즙을 보며 다시 서은현을 바라보았다·
‘이제 결산의 시간인가····’
마두에게 부탁을 했으니 대가를 바칠 때였다·
그는 서립에게 머뭇머뭇 다가갔다·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무엇인가·]
“부디··· 저를 ‘작품’으로 만드시기 전에 이 과즙을 아내에게 전달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서립은 잠시 침묵하다 뭔가가 억울한 것인지 한숨을 쉬었다·
[하아아아····]
18개의 입에서 시퍼런 숨결이 튀어나오자 교염은 움찔거렸다·
[너는 작품으로 만들지 않는다·]
“예···?”
[네 아내에게 가거라· 보내 주겠다·]
“···그게··· 정말입니까?”
서립은 나름대로 최대한 따뜻한 표정을 지어 보이려 노력하며 말했다·
물론 두개골에는 표정이 없었기 때문에 교염은 소름만 끼칠 뿐이었다·
[말하지 않았나· 나는 연인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너희 부부가 최대한 행복했으면 좋겠구나· 나중에 문안이라도 찾아가도록 하지· 혈교족에 가서 교염을 찾으면 되는 게냐?]
“····”
[묻지 않았나?]
“···대답을 하면 보내 주시는 겁니까···?”
[뭐 당연하지 않나·]
서립은 교염이 베푼 친절로 인해 고궁에서 많은 보물과 기연을 얻었고 천련과를 얻을 때도 도움을 줬기에 그에게 상당히 호감이 생긴 상태였다·
‘비록 의념으로는 나를 좀 무서워한다지만 겉모습이 다가 아니란 걸 자주 만나며 주입시켜 주면 친해질 수 있겠지··· 문병 갈 때는 무슨 선물을 하는 게 좋으려나····’
서립이 그런 생각을 할 때 교염은 창백해진 얼굴로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혈교족 영역에 오시면···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좋군· 약속은 지켜야 한다·]
“···예····”
교염은 녹주와의 싸움에 진이 빠진 듯 서립에게 인사를 올린 후 터덜터덜하게 쓰러질 듯이 제단을 향해 다가갔다·
그는 제단 위쪽으로 올라갔고 새하얀 빛이 그를 뒤덮으며 바깥으로 교염을 전송시켰다·
그리고 이후로 교염은 혈교족 영역으로 가지 않았고 다시는 서립에게 연락하지 않게 되었다·
“으음?”
그리고 서립은 교염이 제단 위로 올라서며 하얀빛이 그를 내쫓을 때 제단 아래쪽에서 뭔가를 보았다·
* * *
나는 제단 아래쪽에 잠시 밝게 빛나게 된 문자들을 보았다·
그것은 갑골문 비슷한 문자 같았다·
‘이건····’
광한계 천족 공용어를 배우며 여러 기초 상식을 배운 상태였기에 나는 갑골문을 알아볼 수 있었다·
총 세 개의 갑골문이었다·
첫 번째 갑골문은 물(水)을 뜻하는 갑골문·
두 번째 갑골문은 ‘가다’(去)를 뜻하는 갑골문·
그리고 마지막 갑골문은 어떤 짐승을 뜻하는 갑골문이었는데 현재 광한계에서는 치(廌)라고 읽는 갑골문이었다·
[으음····]
나는 잠시 세 개의 갑골문을 보던 중 뭔가를 떠올렸다·
세 개의 갑골문·
물(氵)·
가다(去)·
치(廌)·
이를 합치면 법(灋)이라는 글자가 되었다·
동시에 나는 뭔가를 알 수 있었다·
‘수류(水流) 도거(道去) 치제(廌祭)· 증룡진인의 저물도는 전부 합하여 ‘법’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는 거로군····’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법(灋)이라는 자를 생각해 보던 중 문득 머릿속에 천둥이 내려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법(灋)의 획은 총 21획·
그리고 내가 도거층 제사장의 고궁에서 보았던 용이 그려진 21개의 탱화도·
21개의 탱화도에 그려진 용은 각각의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나는 그 동작을 전부 합하면 법(灋)이라는 글자가 드러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제단을 바라보았다·
그냥 발을 디디면 바깥으로 추방된다·
하지만 올바른 형식을 취하면 치제층으로 향하는 문이 열린다고 하는 제단·
우우웅―
나는 귀왕화를 풀었다·
그리고 인간형의 몸으로 자세를 잡았다·
‘용형비호조를 만들었던 기억을 되살려 볼까·’
황룡인 규련의 움직임을 본떠 만든 용형비호조·
나는 탱화도에 있는 용의 동작을 떠올리며 그 자세를 인간에게 맞게 용형비호조를 떠올리며 변환시켰다·
그리고 자세마다 획이 드러나게 하여 모든 자세를 합치면 탱화도와 마찬가지로 법(灋) 자가 드러나게 만들었다·
용형비호조를 만들며 이미 한 번 해 본 일이라 어렵지는 않았다·
나는 인간형으로 탱화도의 용이 해낸 춤을 추기 시작했다·
총 21개의 동작·
제단 위로 올라가 바깥으로 튕겨 나가기 전·
나는 물 흐르듯이 21개의 동작으로 이뤄진 춤을 추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내 시야가 둘로 분리되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 이건···?’
투웅!
그와 함께 나는 내 ‘몸’이 제단 바깥으로 퉁겨지는 걸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제단 위에 올라와 있기도 했다·
“이건····”
나는 제단 위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나는 제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제단 위와 아래에 ‘내’가 있었다·
제단 위쪽에 있는 ‘나’는 반투명했고 내게만 보이는 건지 흑린어령문의 사람들은 전혀 눈치를 못 채는 느낌이었다·
나는 이 반투명한 ‘나’를 한 번 본 적 있었기 때문에 당황했다·
“···꿈의 육신?”
명계의 외곽 샛길을 경유할 때 귀도공법을 익히지 않은 이가 만들어야 하는 ‘꿈의 육신’이었다·
나는 눈앞의 꿈의 육신과 내 몸이 나눠진 것을 인지했다·
‘분신이라기보단 그냥 손발이 나뉜 느낌이군·’
새로운 손이 생겨난 느낌이었다·
나는 꿈의 육신을 조종해 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꿈의 육신의 눈을 통해 제단을 둘러보았다·
“하····”
귀도공법으로도 알아채지 못했다·
“이게 왜 여기 있는 거냐····”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져 중얼거렸다·
제단 위쪽·
꿈의 육신으로 보는 제단의 위에는 [샛길]의 입구가 있었다·
흑색귀골곡의 샛길과 거의 차이가 없었으며 차이가 없다면 샛길의 문에 커다란 뿔을 달고 있는 거대한 짐승이 양각되어 있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꿈의 육신으로 샛길에 진입했다·
‘이곳은····’
고요하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 샛길이 내가 지난번에 들어왔던 샛길과 완전히 다르다는 걸 인지했다·
단순히 ‘다른’ 샛길이라서가 아니었다·
‘깊다·’
말 그대로였다·
이건 압도적으로 ‘깊었다’·
똑같은 잿빛의 세계였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이 샛길이 흑색귀골곡의 샛길 따위보다 한참은 더 깊은 곳에 만들어진 것이란 걸 알아챌 수 있었다·
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샛길을 걸어갔다·
얼마나 샛길을 걸어갔을까·
나는 마침내 샛길의 끝에 도착했다·
‘이곳이 치제층····’
나는 꿈의 육신을 통해 샛길의 반대편 문을 열어젖혔다·
* * *
“선배님 잠시 도와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음?”
나는 내게 다가온 현귀를 보며 물었다·
“뭘 도와달란 건가?”
“식죄탱화도를 빼냈으니 이제 봉인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업화가 빠져나오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래··· 내가 뭘 도와주면 되지?”
“인력을 빌려주시면 됩니다·”
“아 그런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현귀의 어깨에 손을 올린 후 저주문을 발동시켰다·
치이이이―
저주문이 현귀를 감쌌다·
“거짓말하는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해라· 무슨 짓을 꾸미는 거냐·”
내가 서슬 퍼런 눈으로 그를 노려보자 현귀는 빙긋 웃었다·
“여러분 눈치채셨습니다· 공격하시지요!”
그와 동시에 흑린어령문의 수사들이 등 뒤로 사상원영을 띄웠다·
쿠구구구구!
시커먼 어둠의 힘이 그들에게 깃들며 흑린어령문의 천인기 대원만 셋은 순식간에 사축기 초기급으로 강해졌고
원영기 6명은 천인기 6명급으로 강해졌다·
“역시 배신할 생각이었나·”
“하하 아무리 선배님이시라도 저희를 모두····”
콰아앙!
나는 현귀의 저주를 터트려 버렸다·
“죽어라 이 빌어먹을 놈···!”
역시나 이 녀석들은 나를 배신했다·
나는 가장 요주의 인물이던 현귀를 그대로 죽여 버렸다·
현귀는 목 아래쪽이 전부 저주로 썩어 죽었고 그의 원영마저도 전부 흩어져 버렸다·
그러나 나는 기묘한 싸함을 느꼈다·
현귀의 얼굴은 경악과 황당 공포로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분명했다·
놈이 마지막 순간 보였던 의념은 경악이 아닌 ‘귀찮음’이었다·
귀찮음 안도 그리고 ‘상관없음’ 등의 의념이 느껴졌었다·
도대체 어떤 이가 어떻게 죽는 순간 ‘상관없다’는 의념을 흘리게 된단 말인가?
‘이 자식····’
서휼을 죽였을 때만큼이나 찜찜하다·
하지만 나는 서휼 때처럼 인피면구를 벗기진 않고 현귀의 남은 머리통을 완전히 썩혀서 없애 버렸다·
그리고 현귀는 은근 흑린어령문 사람들에게 중요한 인물이었던지 녀석들이 하나같이 격분하고 있었다·
“이 자식! 현 사제를 죽이다니···!!!”
“죽여버리겠다!”
“아무리 사축기 노괴라 해도 용서하지 않는다!”
[웃기는군· 너희 따위가 내게 대적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나는 다시 귀왕화를 시전했다·
그때였다·
‘잠깐 이놈들····’
천인기 셋·
원영기 여섯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사상원영으로 인해 실 전력은 그보다 한 단계씩은 위였지만 분명히 9명이었다·
‘원영기가 7명이었는데?’
나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나는 멀구슬나무 호숫가 장승들 안쪽에서 한 손에는 천련과를 한 손에는 커다란 뿔이 그려진 짐승·
‘샛길’의 문에 그려진 것과 똑같이 생긴 짐승이 그려진 탱화도를 들고 있는 흑린어령문의 원영기 제자를 발견했다·
[네놈 뭘 하려는 게냐!]
흑린어령문의 제자는 씨익 웃더니 한 손에 든 천련과를 탱화도에 가져가며 외쳤다·
“식죄(識罪)께 청하오니 부디 흑룡왕 현음이 우리에게 행한 부당한 계약을 부당한 압제를 부당한 학대를 심판(審判)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청하나이다! 만약 부덕(不德)하다 판결하신다면 이 계약을 해제해 주시기를 청하나이다!”
우우우웅!
탱화도가 빛나며 탱화도 안쪽에 있는 ‘식죄’라는 존재가 살아 움직이는 듯하더니 입을 벌렸다·
흑린어령문의 제자는 식죄의 입안으로 천련과를 던져 넣었다·
그러자 식죄의 눈이 빛나기 시작하더니 그 빛이 흑린어령문 제자들의 몸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흑린어령문 제자들의 눈에 희색이 맴돌았다·
“되었다! 드디어 현음 그 개새끼한테서 벗어났다!!!!!”
“우린 자유다!”
“각오해라····”
그들의 눈에서 투기가 타올랐다·
“이제 현음의 제약이 끊겼으니 우리의 목숨은 우리가 걸 수 있어···!”
화르르르륵!
나는 분위기가 심상찮음을 느꼈다·
놈들이 생명을 태운다·
천인기였던 이들은 어느덧 한 명 한 명이 사축기 중기급으로 오른다·
원영기였던 제자들은 하나하나가 천인기 대원만급이 되었다·
그들은 합격진을 짜서 내게 덤벼들었고 나는 괴군의 회로를 전신에 입힌 채 그들에게 맞섰다·
콰과과과과!
봉양층 전체가 진동했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내가 이들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명을 태운다 해도 전체적인 기량 자체가 달린다·
[간지럽기만 하구나· 죽어라···!]
나는 귀화를 전신에서 내뿜으며 대막사해성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천지영기가 내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지금이다!”
“발동!”
[뭣···?]
철컹 철컹 철컹!
봉양층의 바닥에서부터 갑자기 수천 개의 사슬이 튀어나왔다·
나는 이 사슬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아냈다·
‘이건··· 함정?’
봉양층의 밑·
1층 수류층 2층 도거층·
1층과 2층 곳곳에 연결되어 그곳의 영맥의 힘과 연결된 사슬들이 나를 얽어매었다·
동시에 멀구슬나무 호숫가에서 강력한 인력이 뿜어졌다·
[이 이 자식들···! 그때 설치한 게 이종족을 위한 함정이 아니었구나···!]
흑린어령문 제자들이 수류층에서부터 지나간 길에 설치했던 함정들·
나는 그 함정들이 우리를 뒤따라오는 이종족들이 더욱더 힘들게 하려고 까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애당초 그 함정은 내 뒤통수를 치기 위해서 깔아 놓았던 것이었다·
나는 그제야 현귀의 자축을 이해했다·
그들은 내 저주를 보고 ‘나를 영입했던 것’을 자축한 게 아닌 ‘내 뒤통수를 치기 위해 함정을 미리 깔아 놓은 것’을 자축했던 것이었다·
나는 현귀의 철두철미함에 혀를 내두르며 동시에 너무나도 허망하게 죽어 나자빠져 버린 현귀의 시체가 썩은 조각들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뭐지 이놈···?’
철컹 철컹 철컹!
저항할 수가 없다·
사슬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호숫가에서 뿜어지는 인력이 너무 강했다·
“식죄탱화도를 봉인에서 빼냈으니 봉인이 흔들릴 겁니다· 당신은 이 봉인의 또 다른 축이 되어 주셔야 합니다·”
흑린어령문의 제자들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현귀를 죽인 값이라 생각하시지요·”
[이 개 같은 흑린어령문 놈들이··· 현귀가 아니더라도 뒤통수 칠 생각밖에 없었으면서···!]
나는 마구 발버둥을 쳤고 그때마다 흑린어령문이 설치한 함정 사슬들이 마구 흔들거렸다·
“시끄럽습니다· 패배하셨으니 그만 구차하게 발버둥 치시고 받아들이십시오!”
[이런····]
첨벙!
나는 인력에 이끌려 사슬에 묶인 채 그대로 멀구슬나무 호수에 빠져 버렸다·
‘히 힘이····’
호숫물은 평범한 물이 아닌지 호수에 빠지자마자 어떤 힘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완전히 힘이 무화(無化)되는 느낌이었다·
법력은 사용할 수 있었지만 물리력 자체가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법력은 검은 사슬에 묶였기 때문에 나는 완전히 이곳에 봉인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이를 뿌드득거렸으나 이내 마음을 진정시켰다·
‘뭐 상관없나····’
어차피 놈들은 다시 나를 풀어주게 되리라·
그것도 제 손으로·
* * *
“끝났군요·”
“노괴를 잡기는 했지만··· 현 사제가 죽었네·”
“계획을 세운 당사자가 이렇게 죽다니····”
“흑린어령문은 책사를 잃었습니다· 앞으로 어찌해야 합니까···?”
“···희생은 있었지만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네· 우리가 자유의 몸이 된 걸 알게 된 유일한 목격자도 봉인의 축이 되었네· 봉인도 문제가 없고 기밀도 문제가 없지· 현음은 당장 알 수 없을 테니 일단 원로회에 보고하러 가지· 현음이 알기 전에 일단 뒷배가 되어 줄 새 태수를 찾아야 해·”
“···알겠습니다·”
그들은 현귀의 죽음에 울적해하며 식죄탱화도와 그들이 저물도에서 얻은 기연들을 챙겼다·
그렇게 그들은 자유와 함께 3층에서 내려갔다·
그리고 눈치채진 못했지만 서립이 월수궁무록과 함께 그들 모두에게 흩뿌려 놓은 기괴고도 함께 말이었다·
그들은 알게 모르게 서립에게 잠식당하며 도거층 수류층을 거쳐 증룡진인의 저물도 바깥으로 나섰다·
흑린어령문의 원영기 제자가 천인기 대원만 장로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사형님들· 사형님들 생각에 어떤 태수님을 뒷배로 둘 것 같습니까?”
“음··· 응연 개진 헌원 같은 분들은 각자 문파가 있으니 안 될 것이고· 위령선 위수 님은 총연맹의 일만으로도 바쁘시고 준제 님께서는 총연맹주로서 편파적으로 어떤 문파의 뒷배가 되면 안 되니 남은 건 골맥 태열전 그리고 이번에 새로 들어오신 서은현 태수님이시겠군·”
그 말에 원영기 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세 분 중에서 어떤 분이 되시리라 생각하십니까?”
“아마··· 골맥 태수님같은 경우 오랜 시간 세력을 만들지 않으셨으니 이번에도 그럴 게다· 그리고 태열전 태수님 같은 경우는··· 도대체 무얼 하시는지 감이 안 잡히는 분이시기에 모르겠군·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서은현 태수님이다·”
“어째서입니까?”
“가장 최근에 들어오셔서 세력이 없고 젊기 때문이지· 그분께서도 본래 인족 오대종문이었던 세력이 본인 휘하로 들어오면 좋아하실 것이다·”
“태열전 님도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글쎄··· 나는····”
그들은 현귀의 죽음을 잊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열성적으로 밝은 체하며 저물도 바깥 환상진법에서 하늘로 올라갔다·
얼마 후·
촤아악!
10명의 흑린어령문 사람들은 삭월 아래 천지를 통해 바깥으로 나왔다·
“그럼 이제 출발을··· 으음?”
그리고 그들은 움찔했다·
천지의 앞쪽·
누군가가 서 있었다·
그는 청포를 입은 채 손을 닦고 있는 청발의 사내였다·
사내의 옆에는 목이 뽑힌 채 죽어 있는 교염의 사체와 녹주의 사체가 널브러져 있었고 곳곳에 피가 낭자해 있었다·
상냥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교염의 옷을 찢어 피 묻은 손을 전부 닦아 낸 후 천 조각을 던져 버렸다·
서은현의 얼굴을 하고 있는 청발 청포의 사내가 흑린어령문의 제자들을 향해 말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서 도우?”
그리고 흑린어령문 제자들의 눈이 뒤집히며 그들의 몸 안쪽에 있는 기괴고가 발작하기 시작했다·
===
작가의 말: 4일째 15000자 이상씩 분량으로 밀어서 지루할 수 있는 던전 에피를 끝냈습니다만··· 새벽 2시에 일어나서 쓰기를 반복하다 보니까 조금 피곤하게 되어서··· 작가의 건강 보호를 위해 당분간은 5000자씩만··· 연재되겠습니다·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