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괴의 발광 (4)
나는 잠시 얼어붙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뻐끔거렸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김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드디어··· 제 마음을 받아 주시려는 줄 알았어요· 계속 계속··· 좋아했거든요· 그리고 꿈에서 만났을 때 그때는 저한테 좋다는 의념을 주고 계셔서··· 그렇게만 알고 있었어요·”
스륵―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제 착각이었네요· 어째선지는 모르지만· 은현 오빠는 제게서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고 계세요· 그렇죠?”
“····”
나는 굳은 얼굴이 되어 말을 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을 보고 있다·
그래 이건 맞는 말이었다·
어찌 보면 나는 지금의 김연을 좋아해서 구해 준 게 아니라 괴군과 함께 했던 당시의 김연에게 마음을 받아 지금의 김연을 사랑하려 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결국 이 역시 나 자신을 속인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미안하다·”
나는 김연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말하자·’
회귀에 대한 것은 힘들더라도 나는 얘기할 수 있는 걸 다 얘기해 주기로 했다·
“예전에··· 강민희 말고· 나를 좋아했던 한 사람이 있었어·”
나는 이전 회차의 김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연이라는 이름은 그냥 ‘그녀’라는 이름으로 퉁치고·
천 년이라는 시간은 ‘아주 오랜 기간’으로 퉁쳤지만 의미를 전달하는 데엔 문제가 없었다·
우리는 잠시 진마계의 입구 앞 언덕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이전 회차의 김연에 대한 이야기를 전부 전달했다·
“그게 끝이야· 그녀는··· 죽었어· 마지막에 나와 만나서··· 내게 마음을 전하고· 나는 그런 그녀를··· 네게서 투영하는 중일지도 몰라·”
“···그래서였구나·”
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저한테서 ‘그리움’의 마음을 느끼셨는지 이제 알겠네요·”
그 말을 끝으로 우리 사이에선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얼마 후 김연이 질문했다·
“저 은현 오빠·”
“음?”
얼마간 머뭇거리던 그녀는 한참을 주저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내게 질문했다·
“···알고 계시죠 제가··· 은현 오빠··· 좋아한다는 거····”
김연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말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응·”
“····”
얼마간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의념이 우리 둘 사이에 흘렀다·
“···저 받아 주실 생각 없으시죠?”
나는 한참을 침묵했다·
여기까지 순식간에 파고들어 올 줄은 몰랐다·
나는 그녀의 질문에 나 자신도 몰랐던 감정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회차의 김연은 사랑했지만 지금의 김연은····
‘사랑하지 않고 있군·’
여전히 내겐 귀여운 후배일 뿐이었다·
“···그렇구나· 하하··· 물어보길 잘했네요·”
김연은 잠시 침묵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사실 저희 사귀고 있는 줄 알았거든요· 꿈에서 말 거셨을 때 그때는 의념을 구분하기도 어려웠고 저를 그리워한다는 의념을 팍팍 내시고 항상 말 걸어 주고 위로해 주고 같이 웃고 말동무해 주시고· 기어이 괴군한테 쳐들어와서 구해 주기까지 해서····”
김연은 웃었다·
밝게 웃었다·
“말 안 해 주셨으면 정말 이상하게 착각할 뻔했잖아요· 헤헤····”
스륵―
김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마워요 마음을 솔직하게 말해 주신 거· 괜히 위로한답시고 거짓말했으면 아마 상태가 더 이상해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녀는 내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등을 돌린 상태에서 말했다·
“저 목표가 생겼어요 서은현 대리님·”
난 뭔가 말하려 했지만 말이 안 나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모를 것 같았다·
“계속 당신에게 고백할 거예요· 계속 계속 사랑을 고백해서 정말로· 정말로 당신이 나한테 반하게 만들 거야·”
등을 돌린 상태에서 얼굴을 비빈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좋아해요 서은현 대리님·”
김연은 울고 있었다·
눈물은 흐르지 않지만 검푸른 빛 의념으로 울고 있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렸으나 그 의념을 보고 태도를 정했다·
이제 더는 망설이지 않겠다·
“그래·”
내가 이번 생의 김연에겐 이성으로서 정인으로서 사랑하는 마음은 없다·
그걸 인정하자·
그리고 김연이 내게 끝없이 마음을 보내는 것 역시 인정하자·
그녀의 마음이 꺾이지 않는다면 언젠가 내 마음은 함락될 수도 있으니까·
아니 사실 이미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내 마음은 그렇게 함락당했다·
북향화에게·
지난 회차의 김연에게·
홍수령에게····
“오늘은 네 마음을 받을 수 없어·”
“그럼 내일도 드릴 거에요·”
그녀가 눈빛을 굳혔다·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얼마나 지나든· 계속!”
난 얼마간 김연과 눈을 마주쳤다·
어떤 것이든·
결의를 가진 이의 눈은 빛난다·
그녀는 빛나고 있었다·
“열심히 해 봐·”
사람의 마음은 변화한다·
그러나 간혹 변치 않는 마음이 있다·
그리고 그 변치 않는 마음을 유지하고 갈고닦아 벼려 낸 이들은·
간혹 새로운 시야를 가진 종족으로 재탄생한다·
그녀는 과연 자신의 마음을 밀어붙일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지 김연을 응원할 뿐이었다·
지금 당장 그녀를 좋아할 순 없다·
그건 내 마음을 속이는 거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계속해서 그녀가 내게 마음을 보낸다면····
‘그때는 모르겠군·’
나와 김연의 관계는 앞으로 변화할 것이다·
이전까지는 내가 내 마음을 속여 가며 그녀를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그녀 역시 나와 사귄다 착각하는 기묘한 관계가 되었을 터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내 진심을 밝혔고 그녀는 내 진심을 들었을지언정 포기하지 않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더라도 나에게 마음을 밀어붙이겠다고 했다·
난 문득 김연이 두려워졌다·
저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 중간에 변화하거나 식어 버린다면 아무렇지 않겠지만·
만약 변화하지 않는다면?
만약 그렇다면 어쩌면 김연은 어느 순간 내 안에서 굉장히 큰 비중을 지녀 버리게 될 터였다·
내게 있어 누군가를 소중히 여기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를 넘어 사랑하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그 사랑을 눈앞에서 잃은 적이 너무나도 많고 사랑이 사라지면 얼마나 고통스럽고 마음이 아픈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 김연은 앞으로 나의 가장 아픈 손가락이 될 것이다·
그렇게 서로의 관계를 정리한 후 시간이 흘렀다·
* * *
쿠구구구구!
진마계의 입구에서 거대한 전함들이 넘어왔다·
인족 패잔병들이었다·
이상하게도 흑룡왕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고 그렇게 인족 군단은 방해받지 않고 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패잔병들을 인솔하는 전명훈이 눈에 띄었다·
전명훈은 평안한 얼굴로 돌아와서 내게 말했다·
“계멸천공진 같은 멍청한 짓을 한다길래 다 뒤엎어 버리고 왔다· 수뇌부 몇은 죽여 버렸는데 다들 사축기 수사니까 알아서 부활할 거다·”
“···수뇌부를 죽였다고?”
“불만이냐?”
“으음····”
“빨리 나가야 한다 해도 말을 안 들어처먹고 진은 끝까지 발동시켜야 한다니 수가 있어야지· 태수회에서 지랄할 수 있겠지만··· 너도 이제 태수니까 적당히 옹호해 줘라·”
나는 뒤가 없어 보이는 전명훈의 방식에 조금 당황했지만 한편으론 전명훈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뭐 잘했다·”
부활할 수 있는 사축기들이야 죽어도 죽은 게 아니기에 신경은 안 쓰였다·
그런 놈 몇몇 죽이고 인족을 빨리 데리고 나온 거면 오히려 잘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얼마 후 오현석을 만날 수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서은현·”
“오랜만입니다 형님·”
그는 한껏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많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태수가 됐다면서?”
“예·”
“하하· 전명훈도 예상외로 성장하고 너도 벌써 그만큼 강해지고· 후후 나만 지금 이러고 있군·”
오현석은 뭐가 잘못된 건지 현재 결단기였다·
전명훈이 팔짱을 끼며 설명해 주었다·
“원래는 천인기를 넘보는 원영기 대원만이셨다만 마지막에 마족 놈들 진격을 막아 내느라 치명상을 입고 현재 경지가 떨어진 상태다·”
오현석을 한숨을 쉬었다·
“···많은 걸 느꼈다· 창천개벽문으로 돌아가면 경지 상승에 주력할 생각이야· 이 세상은 정말··· 힘이 있어야 사람답게 지낼 수 있는 곳이더구나·”
“그렇지요·”
나는 오현석의 말에 공감했다·
그러나 창천개벽문으로 돌아간다는 그의 말에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단 그냥 돌아가서 경지를 올리는 것보단 저희와 같이 다니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오현석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지난 생에는 동료들을 모으는 걸 실패했다·
이번 생에는 전명훈 오현석 김연을 한 자리에 모았고·
이제는 강민희만 불러내면 지금 상황에서 모일 수 있는 사람은 전부 모인 게 된다·
이번 생의 첫 번째 목표는 만상인연도 개발이다·
그런 만큼 뛰어난 재능을 지닌 동료들과 옆에서 지내며 만상인연도를 운용하는 게 가장 좋을 터였다·
‘또 이전 생에선 동료들을 한 자리에서 못 봤다는 아쉬움도 있고····’
그러나 오현석은 안타깝다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음 미안하지만··· 창천개벽문의 수련 방식은 사실 어떤 문파보다도 효율적이고 강력해서 말이다· 그곳에서 수련한다면 상당히 강해질 수밖에 없다· 나는 그곳에서 우선 효율적인 방식으로 더더욱 강해지고 나올 예정이다·”
“····”
‘대창천개벽문이 효율적이긴 하지·’
“나와 함께하고 싶으면 차라리 너희가 창천개벽문에 들어오는 건 어떠냐? 꼭 제자가 아니라 빈객으로 머물러도 된단다·”
“····”
대창천개벽문은 빈객이 없다·
아니 창천개벽문의 빈객이 되고 싶어 하는 이들은 있지만 전부 사흘도 못 버티고 도망친다·
‘가장 오래 버틴 빈객이 아마 칠 주야였지?’
거기다 빈객은 내문제자도 아니니 쫓아가서 잡아 오지도 않고 도망쳐도 그러려니 하기에 다들 별 신경은 안 쓴다·
내문제자야 도망치면 사형사제들이 눈에 불을 켜고 ‘훈육’하기 위해 쫓아간다지만· 빈객이 다시 나가겠다는데 어찌할 건가·
어쨌든 중요한 건 창천개벽문은 빈객조차도 가만히 내버려 두는 문파는 아니었고 빈객조차도 도망치는 곳이었다·
아마 김연이나 전명훈이 가면 내 장담컨대 닷새 정도에 도망칠 터였다·
물론 대놓고 이렇게 말하면 기분이 나쁠 테니 나는 순화해서 말했다·
“죄송하지만 창천개벽문에서 수련 받는 것보다 저희와 같이 다니시는 게 더 효율이 좋을 겁니다·”
“으응?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그야··· 창천개벽문의 창호자께서는 사축기이시지 않으십니까·”
“그렇지?”
“현 시점에서 여기 전명훈과 김연· 그리고 저 모두 사축기 이상의 전력을 지녔습니다· 그리고 저는 벌써 인족 총연맹 태수 자격을 가지고 있지요·”
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현석 형님은 솔직히 창천개벽문에서 수련하는 것보다 저희와 다니며 수련하는 게 더 낫습니다· 그리고 저는 현석 형님에게 제격인 공법도 여럿 구할 수 있습니다·”
“으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뭐 정 창천개벽문이 좋다 하시면 어쩔 수 없지만요·”
오현석은 생각해 보겠다 했고 나는 그들과 함께 잠시 잡담을 나누며 회포를 푼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왕 모인 김에 강민희도 찾아볼까요?”
“아 흑색귀골곡에 있다고 했지?”
“그렇지요· 그럼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꾸우웅―
나는 동료들을 나와 인력으로 연결한 후 흑색귀골곡 쪽을 향해 한 걸음을 디뎠다·
파아앗!
그리고 순식간에 축지법을 써서 흑색귀골곡에 도착한 나는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흑색귀골곡 앞에는 새하얀 백의를 입은 오혜서가 근처 바위에 걸터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