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3)
쏴아아아아-
소인족 노인이 죽고 나서 비가 내렸다·
“경창의 하곡(河曲)은 불시풍우(不時風雨)라 일컬어집니다·”
화초족의 투사가 다가와 죽은 경창이 가졌던 구현의 이름을 말해 주었다·
“경창과 합을 주고받으며 그 작은 바늘에서 갑자기 어마무시한 힘이 뿜어지는 걸 보셨을 겁니다·”
“확실히 그렇더군· 그 작은 몸에서는 나올 수가 없는 힘이던데 어찌 그런 게 가능했던 거요·”
이유는 대강 짐작하고 있었으나 조금 더 자세히 듣고자 질문했다·
“경창은 개인이지만 개인이 아닙니다· 삼목숲에 모인 무수한 소인족들의 왕이요 군주입니다· 그는 언제나 백성들과 연결되어 백성들의 힘을 빌어 싸워 왔지요· 백성들의 자그마한 기력을 모아 갑자기 쏟아진 빗방울이 재난을 일으키듯 일순간 힘을 증폭시켜 전투하는 것· 그것이 경창의 하곡이었습니다· 그리고··· 짐작하셨겠지만 누군가에게 뭔가를 빌렸으면 다시 되돌려 주어야겠지요·”
쏴아아아아-
나는 빗물 속에 섞인 채 흩어져 가는 경창의 의념을 바라보았다·
장관이었다·
방금 전까지 하늘 위에서 경창에게 힘을 전해 주던 무수한 의념의 덩어리가 왕을 잃은 원통함을 드러내며 하늘에 음기를 충천하게 하고 비를 뿌린다·
흩날리는 빗물 아래로 경창이 끌어모았던 그들 종족의 힘이 다시 본 주인에게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뭔가를 빌렸다면 이자까지 합해 돌려줘야 하는 것이 이 세계의 이치입니다· 소인족의 왕은 자신에게 힘을 빌려준 백성들에게 방금 전의 전투에서 얻었던 모든 깨달음과 각오를 돌려주고 간 것입니다·”
“···그렇군·”
나는 어째서 경창이 한 치도 물러섬 없이 내 아심검을 받아 냈는지를 이해했다·
“원래부터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었소···?”
“예· 소인족들의 수명은 인족의 오 분지 일도 안 되니 말입니다· 어전일보에 올라도 이 삼천 년이 한계지요· 나름 삼목숲의 영과와 영초 천지족 수도자들에게서 강탈한 영약을 먹어 오며 지금껏 최대수명의 3배인 2만 년을 버텨 왔으나··· 그게 한계였던 듯싶습니다·”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쳐 종족 전체의 경지를 한 단계 끌어올린 왕·
그것이 경창이었다·
그것이 방금 내 앞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아침에 도를 보고 저녁에 죽은 자였다·
나는 화초족의 투사를 보며 질문했다·
“그대들 역시 경창과 다를 바 없이 목숨을 걸고자 하던데 뭔가 이유가 있는지 여쭤보아도 되겠소?”
“···자세히는 말씀드리기 힘들지만 저희는 모두 각자의 사정과 인생의 굴곡이 있습니다· 무수한 굴곡과 풍파를 거치고도 아직까지 살아남아 각오를 벼려 이 경지에 도달한 것이 저희입니다·”
그는 진중한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제 이름은 려화(麗花)· 함천존자의 제자입니다· 제 삶을 전부 말해 드리긴 어려우나 한 가지만은 확실합니다· 방금 전 제가 사제(師弟)님의 앞에 섰더라도 저는 물론이고 최고지도회 모두가 아니 구현 3단계 이상에 오른 누구더라도 망설임 없이 목숨 따윈 망설임 없이 버렸을 거란 것입니다·”
나는 그제서야 이곳이 심족들의 영역임을 확실하게 인지하였다·
싸울 수 있는 이는 누구든지 간에 목숨보다 소중한 것을 지닌 이들의 영토·
나를 위해서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위해서 목숨을 걸 수 있는 자들·
우리는 그런 자들을 일컬어 왕(王)이라고 부른다·
그렇기에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가 각각이 존귀한 왕(王)들·
이곳은 왕(王)들을 위한 대궐(大闕)을 짓는 나무의 숲·
삼목총(杉木叢)이었다·
소인족들이 몰려와 죽은 왕의 장례를 치루는 것을 끝까지 보았다·
왕과 연결되어 그의 감정을 전달받았던 탓일까 수많은 소인족 중 그 누구도 나를 원망하는 이는 없었다·
짧지만 강렬했던 경창과의 만남 그리고 죽음·
죽음 이후의 일들·
나는 그 한 번의 사건을 통해 심족 영역이 어떤 곳인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후 정중하게 심족 최고지도회 21인의 이름을 모두 묻고 다녔다·
나는 그중 소인족의 왕 경창을 포함하여 내 기세에 가장 잘 버텼던 5인의 이름은 가슴 깊이 새겼다·
소인족의 왕 경창·
미원족의 대전사 재후·
약균족의 대원로 독영·
화초족의 선지자 려화·
하곡족의 최강자 유연·
어쩐지 그들과는 삼목총에서도 강하게 엮일 거라는 예감이 내 감각을 자극했다·
나는 그렇게 진정으로 심족에 합류하였다·
* * *
심족들과 교류를 한 지도 며칠이 지났다·
나는 심족 최고지도회에 의해 삼목숲의 변두리·
삼목으로 지어진 작은 사당 안으로 안내받았다·
“스승님께서 남겨 두고 가신 당부가 있습니다· 그 당부에 의하면 사제님은 이 삼목사당 안에서 폐관을 하셔야 합니다·”
“폐관이라····”
경창의 후임으로 최고지도회의 부지도자가 된 려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스승님께서는 분명··· 자신 이후 심족에서 어전이보에 오른 분이 나타나면 반드시 홀로 떨어뜨려 두고 무조건 폐관을 시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조건을 달성하기 전에는 절대 폐관에서 나와서는 안 된다고 단단히 경고하셨지요·”
“흠··· 알겠소·”
언뜻 이해하기 힘든 것 같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장익의 의도를 알 것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전이보의 깨달음을 제대로 갈무리하라는 거겠지·’
천지족의 수행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심족의 수행은 가끔 떨어지기도 한다·
그들의 수행은 오로지 깨달음에 의지하기에 뭔가를 깨달아 경지가 올랐다가도 잊어버리면 다시 경지가 낮아지는 것이었다·
장익은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깨달음을 확실히 체화하라고 폐관을 권하는 것일 터였다·
려화를 따라 들어간 삼목의 사당 내부에는 진법이 걸려있어 빛이 들어오지 않게 되어 있었다·
까마득한 공(空)을 표현해 놓기라도 한 듯한 모양새·
“폐관에서 나가는 조건은 무엇이오?”
“간단합니다·”
우웅-
려화는 손 위로 작은 최하급 영석 하나를 올렸다·
“이 최하급 영석에 담긴 수준의 기운으로 이 사당 내부를 가득 채우면 나가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흠····”
화폐 하나로 집 안을 가득 채우라는 것과 비슷한 과제인 셈이었다·
나는 영석의 기운을 가늠한 후 고개를 끄덕이며 어두운 사당의 중심에 앉았다·
우웅-
자세히 보니 사당 안쪽은 공간압축이 걸려 있어 중앙에 앉자 상당히 넓은 모양새가 되었다·
‘아니 공간 압축은 아니군····’
무언가 장익이 박도로 행성의 일부를 생명체가 살 수 있는 곳으로 개조했듯이 심족의 비술로 공간을 개조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럼 무운을 빌겠습니다· 사제님· 부디 스승님의 과제를 달성하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알겠소·”
끼이익··· 쿵!
려화는 그리 말한 후 내게 최하급 영석을 건네준 후 사당의 문을 닫았다·
츠츠츳-
어둠 속에서 최하급 영석은 아주 미약한 빛을 내뿜었다·
‘무림인이 심법의 호흡을 통해 한 번 기운을 들이쉴 정도의 기운인가····’
고작 이 정도의 기운으로 이 안을 다 채워야 한다니 어려운 듯하면서도 재밌어 보이는 과제였다·
‘이왕 이리된 것 제대로 경지를 안정시키고 나가야겠어·’
안 그래도 북향화 등 머리가 복잡한 사건이 많았는데 여기서 마음을 정리하는 것 역시 좋을 터였다·
우웅-
나는 내 체내를 관조하며 동시에 의식영역으로 인류의 동향을 살폈다·
‘공간 개조 외에 딱히 금제 같은 건 없군·’
의식영역은 너무나도 쉽게 사당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냥 순수하게 이 사당에 들어온 이의 양심에 수련을 맡기는 구조인 듯했다·
인류는 현재 대다수가 노예종족이었던 심족들 사이에 끼어서 살아야 한다는 것에 불만을 가지는 듯했지만 개중 몇몇은 심족의 방식에 흥미를 가지고 진지하게 무를 탐구해 보려는 이들도 있었다·
특히 인류 출신으로 심족 최고지도회에 당당히 들어간 김영훈은 그를 따르는 추종자 무리가 상당히 생겨나 그를 중심으로 ‘광한무림맹’ 같은 해괴한 단체가 생겨나기도 하는 둥 재밌는 일도 있었다·
전명훈은 연위 등과 함께 이번에 죽은 금신천뢰문 제자 넷을 기리는 진혼제를 지냈다·
오현석은 창호자와 무한대련을 하며 점차 그에게 청천갑을 물려받을 준비를 하는 중이라 했다·
그리고 김연은··· 북향화와 함께하고 있었다·
그녀는 기묘성심전을 연구하는 동시에 북향화의 작품 탄생을 돕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그녀들이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향화야· 눈은 어때?”
“조금 침침해졌어요·”
북향화의 저주는 점차 몸의 감각이 흐릿해져 가다가 종래에는 완전히 모든 감각이 사라지고 신경계가 마비되어 죽어 버리는 저주라 하였다·
말이 저주지 사실상 기문법재가 타고난 천형(天刑)이었기에 반전으로 없앨 수도 없었다·
김연은 지난번 내게 섭명함 동력장치를 통해 자신 또한 괴군의 방식으로 북향화의 혼을 잡아 두는 건 어떻겠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거절했다·
괴뢰에 일천 년간 갇혀 있으면서 그건 정말로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비참한 꼴이라는 걸 명확히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뿌득····
북향화의 증세가 심해진 것은 근래의 일이라 했다·
원래도 간혹 자고 일어나면 눈이 침침하거나 손끝의 감각이 사라지는 느낌은 있었다 했으나 갑자기 천형이 악화되어 간 것·
나는 원인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태산··· 너는····’
그녀의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한 것은 고력계에서 나온 이후부터라 하였다·
그렇다면 그사이에 있었던 가장 큰 사건이 원인일 터·
‘내게서··· 뭘 계속 더 가져가려는 거냐····’
꾸드득····
나는 근처의 땅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흙 알갱이들이 손톱 사이에 끼어가며 손 안에서 흙이 느껴졌다·
뭘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이대로 무력하게 북향화가 죽어 가는 걸 지켜만 봐야 하는 것일까·
‘멸신겁천을 쓰면··· 안 되려나·’
북향화의 운명을 멸신겁천으로 덮어씌운다면 불가능한 일만도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었다·
‘멸신겁천은 본디 남을 제물로 내게 액운을 부여함으로써 운명을 바꾸는 기술·’
이것을 남에게 사용하려면 ‘나를 제물로’ ‘남에게 액운을 부여해서’ 운명을 바꾸는 선술이 되어 버린다·
즉 이걸 북향화에게 사용해 봤자 내가 사망하고 북향화는 평생을 액운과 불행 속에서 살아가게 될 터였다·
그녀도 그걸 원하진 않을 듯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냐!!!’
나는 울컥하며 심마가 올라오려는 것을 참았다·
‘···위험하다·’
지금껏 내게 위험이 된 심마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나 자신이 나의 모든 심마를 합친 것보다 더 위험한 심마였으니까·
오히려 심마들은 내게 다가오면 내게 잡아먹혔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북향화의 시한부 선고를 쐐기로 지금껏 무식하게 먹어 치워 왔던 심마들이 일제히 내 뱃속에서 터져 나오려는 게 느껴졌다·
이번에 심마가 터지면 내가 지금껏 고통 속에서 먹어 치웠던 모든 심마들이 일제히 발작할 터였다·
‘삼목숲이 지옥이 될 테지····’
비유가 아니라 이번에 진화한 흑색혈루화에서 괴물들이 일제히 튀어나와 삼목숲을 저주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가능성이 컸다·
사당 안쪽에는 특별한 금제장치도 없었기에 더더욱 위험했다·
‘일단···진정하자·’
나는 끓어오르는 감정과 분노 절망 등을 가라앉히기 위해 생각을 다시 수련 쪽으로 돌렸다·
사당 바깥으로 뿜었던 의식영역을 다시 사당 안쪽으로 되돌렸다·
우웅-
어째선지 눈 앞에서 빛나던 최하급 영석의 빛이 꺼졌다·
‘···단순히 빛만 내고 있는 거라서 몇 년은 빛을 뿜어야 정상이건만····’
최하급 중에서도 기운이 많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나는 영석에서 신경을 끄고 가부좌를 튼 채 경지를 참오했다·
우우웅-
내 현재 경지는 합체 후기·
우우우웅-
시(時) 풍(風) 한(寒) 욱(燠) 양(陽)의 신통이 내 영역 내에서 활성화되어 있었다·
지난 생의 마지막·
천련과를 먹고 심마 때문에 내 본질이 뒤틀릴 뻔했다·
그러나 효과만은 확실하여 내 경지는 합체 대원만까지 치솟았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경지를 깎아 가며 어전이보에 다다랐기에 내 수선경지는 합체 후기가 되었었다·
본래라면 회귀하며 내 경지는 다시 합체기 초기로 돌아갔어야 했을 터·
하지만 어전이보에 오른 것이 도움이 되었다·
‘몸을 전부 혼의 계위로 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내 회귀는 혼(魂)을 기준으로 이뤄진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어전 이보에 오른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회귀하더라도 경지가 퇴화할 일은 없겠군·’
즉 더 이상 만상인연도에 내 수행 경지를 저장해 놓지 않아도 내 경지 회복을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는 의미였다·
이제 남은 것은 합체기 대원만의 경지를 되찾아 우(雨)의 신통을 깨우치고 쇄성기 승급에 도전하는 것·
그것뿐이었다·
나는 남은 우의 신통을 깨우치려 노력하며 동시에 이제는 굳이 저장할 필요 없어진 만상인연도 내의 경지를 모조리 녹여 무색유리검을 연화시키기 시작했다·
어차피 쇄성기 승급의식에는 연허법보의 역시 상당히 중요했기에 연허법보의 질을 높이기 위해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
쿠구구구구!
만상인연도 내의 경지를 무색유리검에 녹여가기 시작하자 그 경천동지할 거력에 삼목숲 전체가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색유리검에 보관되어 있던 만상인연도의 힘은 애당초 무색유리검과 잘 맞았기에 무색유리검 자체를 강화하는 데에 긴 시간도 필요 없었다·
그냥 먹이면 될 뿐이었다·
츠아아아아-
희뿌연 안개가 무색유리검에서 일어나는 듯하더니 다시금 무색유리검으로 흡수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내 검들이 명동하기 시작했다·
삼천 자루의 무색유리검은 전부 연허법보화되어 이제는 부러지거나 파손되어도 언제든 내 심상과 연동되어 부활할 수 있는 특성이 생겼다·
그러나 그것뿐 아직도 삼천자루 각각은 전부 원영기 대원만 수준의 법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만상인연도에 보관된 경지가 무색유리검에 흘러들어 가자 변화가 시작되었다·
츠아아아앗!
무색유리검 삼천 자루들 각각의 예기가 더더욱 흉험해졌고 강도가 더더욱 올라갔다·
삼천 자루가 각각이 천인기급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만상인연도에 담긴 경지는 합체 중기 수준의 법력이다·’
그 정도의 법력이라면 삼천 자루의 법보의 격을 올리기엔 충분했다·
삼천 자루를 천인기 초기까지 올리는 데 만상인연도 경지의 100분지 일을 사용했다·
나는 더더욱 힘을 불어넣었다·
무색유리검들이 천인 중기 수준의 법보로 다시금 진화한다·
만상인연도 경지의 100분지 3 수준의 힘이 소모되었다·
천인 후기·
경지의 남은 힘의 100분지 6 수준의 힘이 소모된다·
천인 대원만!
남은 힘의 십분지 일 수준의 힘이 소모되었다·
콰드드드득!
어느 순간 무색유리검들이 일제히 빛나며 휘황찬란한 빛을 뿜었다·
번쩍!
마치 번데기가 허물을 탈피하는 듯한 느낌과 함께 나는 내 무색유리검들의 격이 다시 크게 오름을 느꼈다·
‘사축기····’
무색유리검의 격은 이제 한 자루 한 자루가 사축기 수준이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는데 만상인연도에 보관된 경지 중 절반을 사용했다·
나는 남은 절반의 경지를 모조리 삼천 자루의 무색유리검에 불어넣었다·
파아아앗!
그와 동시에 삼천 자루의 무색유리검들은 일제히 빛나며 다시금 격이 올랐다·
‘사축기 중기····’
사축기 수준의 법보는 ‘규격 외 법보’라고 불리웠다·
물론 창천개벽문의 청천갑처럼 사축기 수준의 법보의 위력을 뛰어넘은 것들도 있었으나 규격 외 법보의 정의는 ‘자격’이었다·
규격 외 법보부터는 ‘최소한’ 사축기가 아니라면 그 위력을 전부 끌어내는 게 절대로 불가능했기에 규격 외 법보부터는 사축기 수준의 법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었다·
츠아아아앗-
날카롭게 빛나던 무색유리검들은 규격 외 법보가 되자 오히려 날카로운 예기를 잃고 단단한 강도만 남아 땅에 떨어졌다·
모르는 이가 본다면 그냥 유리로 만든 칼 모형으로 보일 정도로 평범해 보이는 법구가 되었다·
그러나 내가 땅에 떨어진 무색유리검 중 하나를 집자 내 손길에 반응하며 사축기 수사의 기축장막을 그대로 베어 낼 수 있을 법한 예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어지간한 사축기 수사는 무색유리검을 잡고 휘두르기만 해도 동 경지 상대를 압도할 수 있을 터였다·
우우웅!
나는 흩어진 무색유리검들을 전부 다시 하나로 합치며 무색유리검을 관조했다·
무색유리검에 보관하던 경지를 전부 녹여 넣어 한 자루 한 자루를 모조리 규격 외 법보급으로 만들었다·
‘아직 제대로 경지가 융합하지 못했다·’
너무 급격하게 격을 올린 탓일 터였다· 시간을 들여 경지가 제대로 법보와 융합하게 하면 그때는 각각의 무색유리검들이 전부 사축기 대원만 수준의 격을 가지게 될 터였다·
이걸 하나로 합쳤을 때의 위력은 솔직히 시험해 보기가 떨릴 정도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츠츠츠츠-
나는 무색유리검에 깃든 만상인연도를 펼쳤다·
무색유리검은 환하게 빛나며 희뿌연 안개를 주변으로 내뱉었다·
내 주변으로 내 눈에만 보이는 만상의 인연이 펼쳐졌다·
‘···이제는 ···다시는 잃지 않아·’
이전까지는 무색유리검을 잃어버리면 만상인연도도 잃게 되어 기억의 누수를 막을 수 없었었다·
하지만 이제 무색유리검이 연허법보가 되어 내 심상에 일부 녹아든 이상·
만상인연도 역시 내 심상에 녹아든 상태가 되었다·
즉 이제 나는 앞으로 다시는 만상인연도를 잃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인연을 모두 품에 안아 무상이 되어라····’
어전이보에 오르며 알았던 깨달음이었다·
문자 그대로 만상인연을 내 심상 속에 품게 되었다·
‘채워서 도달한 무상(無常)도 공(空)이라····’
나는 무상의 깨달음에 대해 관조하며 만상인연도를 바라보았다·
본래 경지 보관용 비술이었던 만상인연도는 저장된 수행이 전부 비어 이제는 완전히 공(空)을 드러냈다·
‘아아····’
완전히 공(空)이 된 만상인연도 속의 인연들을 바라보며 나는 이전까지는 감각적으로만 이해했던 깨달음을 완전히 ‘이해’했다·
어전이보에 이르며 그냥 본능적으로만 알았던 깨달음이 완전히 영혼에 체득된다·
‘그렇구나·’
어째서 무상은 공(空)이 되는가·
많은 이들이 애당초 잘못 생각하고 있다·
공(空)은 애당초 허(虛)가 아니다·
‘비워짐’을 뜻하는 것이 아닌 ‘뚫림’를 뜻하는 것이 바로 공이다·
누군가는 텅 빈 굴을 보며 ‘비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 굴을 끝까지 걸어 나가 계속해서 파낸다면 어떻게 될까·
굴은 산 너머에 도달하여 다른 곳과 내가 있는 곳을 이어 주는 ‘길’이 되어 뚫릴 것이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길을 뚫는 것·
그것이 바로 공의 실체였으며 내가 깨달은 무상(無常)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이었다·
인연을 모두 품에 안아 무상이 된다는 것·
그것은 인연을 모두 품에 안아 모든 인연으로 향하는 길을 뚫는 것을 뜻했다·
좌탈입망에서는 심상을 압축한 일격을 난사하는 것을 목표로 수련했다·
그러나 이 경지에서의 수련법은 공(空)을 넘어 나의 모든 인연과 마음의 길을 터놓는 것이 될 터였다·
‘그렇군 장익····’
나는 장익이 어째서 말단이나 다름없는 심족 하나하나에게 모두 자신의 박도를 박아 넣었는지 이해했다·
어쩌면 그것은 그들 모두와 이어지기 위해서가 아닐까····
파아아앗!
나는 만상인연도를 한데 모았다·
희뿌연 안개는 내 앞에 놓인 최하급 영석과 같은 크기로 작아졌다·
모든 경지를 전부 무색유리검에 녹여 넣었기에 만상인연도의 자체적인 기운은 이제 최하급 영석에 있던 기운보다도 적었다·
그리고 나는 그 기운을 보며 장익의 과제를 명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파아아아앗!
만상인연도가 빛을 뿜었다·
그 빛은 어둠뿐인 사당 전체를 밝혔다·
이 빛은 내가 ‘지난 생’의 동료들의 마음을 이해하며 그들에게서 받았던 은혜였다·
어둠뿐인 사당은 내가 쌓아 온 빛으로 채워졌다·
앞으로 이 빛이 사당 안의 어둠·
공허를 지워 냈듯이 계속해서 내 인연들의 마음을 이해하려 노력할 것이다·
그리하면 이 빛은 계속해서 커질 것이다·
빛이 커지고 커져 태양만큼 밝아졌을 때 나는 마침내 다음 경지에 도달하리라·
끝없는 공(空)을 내 마음으로 밝혀 나가 허(虛)를 채워 버리는 것·
그것이 어전이보·
허공(虛空)을 마음으로 없애는 위치이다!
그러므로··· 이 경지의 명칭은 내 마음속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허공분쇄(虛空分碎)·”
비어 버린 마음을 인연의 길로 하여금 인연들에게 받아 온 은혜로 채워 가 허공을 없애는 경지·
‘아아····’
나는 허공분쇄에 완전히 진입했음을 인지하였다·
삼목의 사당 안쪽·
그곳에서 나는 무상(無常)과 함께 만상인연도의 구조를 파악했다·
만상인연도는 길이었다·
나의 지나간 시간선·
그 시간선들의 추억이 교집합되어 있는 길·
그리고 그 길의 중심에 북향화의 노리개가 자리하고 있다·
나는 손을 뻗어 나도 모르게 북향화의 노리개와의 연결을 잡았다·
츠츠츠츠츳-
그리고 익숙한 기억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아····”
뚝 뚝뚝····
그때의 기억이다·
열 번째의 회차·
그날 그때의 그 마지막 순간·
그때가 생생했다·
혼백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난 그녀·
그녀의 마음 느낌 닿을 듯 말 듯하던 그 기분·
입을 맞췄을 때의 감상·
저주가 축복이 되던 그 순간의 해방감····
“아··· 아아····”
나는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장익의 의도를 완전히 이해했다·
허공분쇄에 이르는 자들은 모두 공(空)을 깨달아야 한다·
심검에 대한 답이 모두 다르듯 공에 대한 답도 모두가 다르겠지·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사람은 모두가 공을 쉽게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뚫어 내든 비워 내든 너무나도 잊기가 쉬운 것이 공·
그리고 사람에게 받은 은혜다·
나는 지금껏 만상인연도를 통해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생각해 왔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거만하고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를 이해했다·
‘단 하나도··· 제대로 기억한 적이 없구나· 나는····’
기억은 잊지 않았을지언정 그때의 마음은 지금껏 기억하지 못해 왔던 게 아닌가·
북향화와의 마음에 이어 다른 무수한 이들의 마음·
그들과 있었던 시간에서의 추억들이 가슴 속으로 물밀듯이 밀려왔다·
서란과 함께 호풍응룡변을 수련하며 동고동락했던 순간·
제자들을 가르치며 그들에게 살라고 했던 순간···
무수한 순간순간의 마음을 기억해 내며 나는 나와 연결된 노리개를 쳐다보았다·
우우우웅-
노리개를 통해 내 것이 아닌 다른 마음 또한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현재 노리개의 주인·
이번 회차의 북향화의 마음이 흘러오는 것이었다·
나는 어렴풋이 이번 회차의 북향화의 마음을 느끼며 마침내 이번에 죽음을 앞에 둔 그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반드시 완성하겠어·
“···그렇구나·”
북향화가 죽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저주에 걸려 나를 떠나려 한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그녀를 단순히 ‘내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던 내 교만함이 불러온 오해였다·
제자들 때도 드러나지 않았던가·
자신들 일생의 목적을 얻으려는 그들의 속내를 존중하지 않고 그저 무식하게 살아라만 몇 번을 반복했던가·
이번 생의 북향화는 지금 이 순간·
죽어 가며 자신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살아나고’ 있었다·
나는 홍수령의 환영을 보았다·
-운명을 이길 수 없다면 하물며 운명의 안에서라도 선택을 하면 안 되는 거란 말이냐·
-어차피 죽음이 멸망이 예정된 운명이라면 그 안에서라도 내 마음 가는 길을 찾으면 아니되냐는 소리였다·
제자들도 홍수령도·
자신의 삶을 자신의 손으로 끝내려 했다·
중요한 것은 ‘끝내려 했다’가 아닌 ‘자신의 손으로’였다·
그리고 지금의 북향화 역시 ‘자신의 손으로’ 작품을 완성시키고 가고자 했다·
“····”
그런 생각을 했다·
모두가 나와 천년해로하면 그것이 과연 나와 ‘함께’하는 것일까·
사람은 모두 언젠가 헤어지기 마련이다·
송진이 이번에 나와 서란의 곁에서 영원히 떠났듯이·
사람은 언젠가 작별의 시간을 가진다·
그렇다면 그 시간이 오기 전까지 최대한 서로를 존중하며 서로의 마음에 남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영원히 ‘함께’하는 것이 아닐까·
파아아아아앗!
나는 만상인연도에서 뿜어지는 빛무리가 강해지는 걸 보며 눈을 떴다·
“···그래·”
북향화에 대한 태도를 정했다·
“작별을··· 준비하자·”
최대한 저주를 피할 길을 마련하되 여의치 않다면 그녀의 마지막을 작별해 주자·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그녀와 함께 있어 주며 이번 회차의 동료로서 송별해 주자·
저벅 저벅····
나는 모든 마음과 심마를 정리하고 사당을 나섰다·
법보를 정리하며 완벽히 허공분쇄에 올랐다·
그리고 북향화를 비롯해 앞으로 나를 떠나갈 모든 인연들에 대한 태도를 정했다·
끼이이익····
오는 것도 가는 것도 그들의 의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내 인연을 어찌하려 한다면 슬퍼하되 절망하지는 말자·
지키려 하되 집착하지는 말자·
그들의 삶을 존중하며 남은 시간을 더더욱 소중히 여겨 주자·
끼이익····
내가 사당의 문을 닫았을 때였다·
내 앞으로 김연이 나타났다·
“10년만이네요·”
“···?”
그 말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와 동시에·
파사사사삭-
내가 나온 삼목의 사당은 그대로 먼지가 되어 무너져 버렸다·
갑자기 풍화되어 버린 것 같았다·
장익이 무슨 조화를 부려 둔 듯했다·
“···그렇군·”
난 그제야 왜 아무리 최하급 영석이라지만 영석의 불빛이 어찌 그렇게 빨리 꺼졌는지 이해했다·
의식을 사당 안쪽에 집중한 순간부터 내 인지(認知)가 뒤틀렸을 뿐 시간이 엄청나게 빠르게 지나갔던 것이리라·
“···십 년간 엄청난 일이 있었어요·”
그녀는 뒤를 돌아 걸으며 말했다·
“일단 향화한테 가 봐요· 가면서 설명해 드릴게요·”
“그래·”
나는 선선히 웃으며 질문했다·
“엄청난 일이라니 무슨 일이지?”
“일단··· 심족 영역에 백운 성사의 화신(化身)이 와서 당신의 지위를 인정하겠다고 천명하며··· 존자로서의 별칭을 하사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