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10)
휘이이이-
나는 시의 신통과 풍의 신통을 관조했다·
동시에 풍의 신통에 의해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심족이란 난감하군·’
애도를 해 주고 싶어도 내게 남긴 것도 맡겨 둔 것도 없었다·
그저 내 마음속에 두고 기억해야 할 뿐이었다·
경창의 경우에는 장례에 참석하여 애도했으나 그녀의 경우엔 시체조차 찾을 수 없게 되어 버려 장례를 치룰 수 있을지조차 의문·
그러므로 나는 그저 풍의 신통을 통해 바람으로 그녀를 애도하였다·
“···죽였나·”
나는 옆에서 들려온 소리에 그곳을 바라보았다·
김영훈이었다·
우리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던 듯했다·
“···혹시 이분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알다마다· 십 년간 대련해 온 상대 중 하나니까·”
김영훈은 어디서 가져왔는지 술 한 병을 내 앞에서 열더니 유연이 서 있던 자리에 따라 주고는 내게도 건넸다·
나 역시 그처럼 술을 유연이 서 있던 자리에 따라 주고는 그와 함께 근처 바위에 가 앉았다·
“유연의 얘기를 좀 해 주마·”
그는 술잔을 꺼내 내게 따라 주며 유연에 대한 얘기를 해 주었다·
애당초 삼목총에 남은 하곡족은 그녀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곡족의 최강자’라는 칭호도 어쩌면 그녀 외에는 다른 하곡족이 없었기에 붙은 칭호일 수도 있었다·
듣자 하니 애초에 그녀는 동족들을 구해서 삼목총으로 오지 못했다 한다·
피부가 햇빛에도 타 버릴 정도로 연약한 그들은 애초에 상위 종족의 관리가 필요한 종이었고
그녀가 구해 온 하곡족 몇몇은 전부 삼목숲에서 관리를 받지 못해 피부가 타들어 갔다·
듣기로는 학대받던 동족들을 구해 왔으나 정작 그녀가 구한 동족들은 그녀를 원망하며 불타 죽었다고 했다·
부모도 형제도 상위종인 거인족에게 학대받다 죽었고 친우들은 전부 삼목총에서 햇빛에 타 죽은 유연·
그녀에게 남은 것은 함께해 온 경창뿐이었고 이제 경창이 없어졌으니 같이 갔을 뿐인 것이었다·
“그녀와 경창은 둘 다 독특한 사후관을 가지고 있지· 혼의 계위에 어느 정도 진입했다 보니··· 간혹 어전이보의 경지에 도달할락 말락 하는 수준에서 ‘극락’을 봤다고 주장하더구나·”
“극락···?”
“그래· 구름 너머··· 저 하늘보다도 높은 곳·”
“····”
“그 둘은 거인족의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소인족인 그들은 평생을 거인족과 싸워 왔다고 했으니··· 거인족의 사후관에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지· 거인족들은 [지혜의 뱀]을 숭상하는 종교를 가지고 있고 그 종교의 교리에 따라 용맹하게 싸우다 죽으면 구름 너머의 세계로 가서 영원히 싸울 수 있으리라 믿었다· 듣자 하니 거인족들도 이런 사후관을 가지고 있다더구나·”
그가 술잔을 꺼내서 내게 따라 주었다·
“그 둘에게 죽음이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일 터다·”
“새로운 시작이라····”
나는 쓰게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부디 그러길 바라겠습니다·”
경창과 유연·
둘 다 저 너머에서는 행복하기를····
나는 김영훈과 밤새 그 자리를 지키며 유연을 애도했다·
그녀는 동족이 없었기에 유연의 장례는 내가 치러 주었다·
난 유연이 죽었던 자리의 흙을 퍼 경창의 무덤 옆에 놓아 주었다·
자그마한 봉분이 만들어졌다·
* * *
나는 밤낮없이 검기를 광한계 전역으로 날렸다·
쿠구구구구!
내 단말이나 다름없게 된 심족 최고지도회 구현 3단계의 고수들은 내 힘을 중계하여 광한계 곳곳을 침공한 시(尸)들을 쓸어버렸다·
촤아아아악!
내가 밤낮없이 광한계 전역을 수호하고 있자 그 누구도 감히 심족들을 쉬이 상대할 수는 없게 되었다·
듣자 하니 노예종족을 학대하던 천지족 수사들도 시들을 쓸어버리는 내 검기가 언제 자신들에게 향할지 몰라 현시점에서는 한 사람을 빼고는 누구도 학살 같은 과격한 짓을 저지르지 않고 있다 하였다·
그 한 사람은 괴군이었다·
‘괴군도 끝내 줘야겠지·’
이제는 그럴 수 있는 힘이 있다·
물론 이렇게 멀리서 날리는 검기 정도론 준쇄성기 수준인 괴군의 힘을 못 꺾는다·
직접 찾아가서 끝장을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지금 당장은 시들을 척결하느라 괴군을 찾아갈 수 없었지만····
백운이 회복하는 날 나는 바로 괴군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내게 준 것은 많지만 그는 결국 학살자이자 미치광이·’
힘이 있는 상태에서도 내버려 둘 순 없었다·
나는 삼목총에 앉아 시들을 격퇴하며 백운이 회복될 그날을 기다렸다·
* * *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삼목총에서 광한계 전체에 검기를 날린 지도 어언 10년·
우리가 삼목총에 온 지는 20년이 지났다·
김영훈은 허공분쇄에 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했다·
전명훈은 그 당시 성사의 배에 꽂혀 있던 것과 같은 뇌전창을 구현하기 위해 수련에 힘을 쏟았고 오현석과 홍범은 마침내 합체기에 올랐다!
특히나 오현석은 창호자가 가르쳐 줄 것이 없게 된 이후에는 천지쌍수 공법을 익힌 골맥이 나서서 그에게 자신의 본명공법을 전해 주었다·
골맥은 오현석을 오기조원과 등봉조극 등 요족과 관련된 경지에 오르고 싶게 해 주고 싶다며 김영훈을 자주 찾아갔는데 김영훈은 잘 상대해 주고 있진 않았다·
여하튼 덕분에 오현석은 최근 골갑보원공을 열심히 익히고 있다고 하였다·
김연은 북향화와 함께 최근 공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가끔 나올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는 보통 북향화와 함께 산책을 나올 때였다·
북향화는 날이 갈수록 상태가 안 좋아지는 게 보였다·
그녀의 눈빛은 흐려졌고 점차 감각이 사라져 간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그러나 10년이 지났음에도 기문법재의 저주를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딱히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시점·
나는 나를 찾아온 려화와 마주하게 되었다·
* * *
“한 수 가르쳐 주시지요 존자·”
“···미친 건가·”
나는 삼목총의 가장 높은 삼나무 위쪽에서 그날 역시 검기를 날리던 중 나를 찾아온 그녀를 흘긋 보았다·
려화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부지도자 자리는 재후에게 맡기고 왔습니다· 그러니 마음 놓으셔도 됩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잖소·”
“뭐가 문제가 되지요?”
그녀는 빙긋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
“원래 소중한 것을 걸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법· 그게 이 세계의 이치입니다·”
삼목총에 온 지 20년 차·
나는 부지도자인 려화의 진심 어린 투지를 마주하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한번 겨뤄 주시지요·”
“···죽을 수도 있습니다·”
“아직도 모르십니까· 벌써 경창과 유연 두 사형사저를 보내 놓고서도····”
그녀의 눈빛이 타올랐다·
“이 경지에 제정신으로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심족이란 모두 정신병자 집단입니다· 제정신으로는 오를 수 없지요· 영훈 대인을 제외하고 지금껏 제가 보아 온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츠츠츠츠츠-
그녀의 몸에서 한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당신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서 존자· 우리는 모두 미치광이이고 ‘죽을 이유’조차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녀의 일갈에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많은 천지족 수사들은 우리를 부나방처럼 높은 경지를 위해 목숨을 버리고 혹은 상대의 목숨을 취하는 정신병자로 봅니다· 하지만 그건 틀렸습니다·”
우우웅!
말라 비틀어진 그녀의 몸에서 점차 시린 기세가 흘러나와 내 뼈마디를 적셨다·
“경창은 모두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며 유연은 아무도 없었기에 목숨을 던졌지요· 애당초··· 여기까지 올라온 순간· 모두는 목숨을 던질 이유 정도는 하나씩 가지고 있다는 소리입니다!”
쿠광!
그녀가 발을 구르자 그녀의 주변으로 땅이 움푹 꺼졌다·
나는 잠시 그녀를 보다 말했다·
“···예전에 나는 삶을 포기하고 복수에 매몰되어 죽고자 하는 이들을··· 나의 소중한 사람으로 삼은 적 있소·”
“그렇습니까·”
“그들의 복수심에는 아무것도 못 해 주며 살아라만 몇 번을 외쳐 댔을까··· 어찌어찌 그들을 구해 주긴 했소· 그러나 나중에··· 정작 내가 내 정인을 잃고 복수심에 타오르고서야 알게 됐지· 때로는 목숨을 버려서라도 이 마음을 해갈해야 할 때도 있다는 걸·”
“나름의 깨달음을 얻으셨군요·”
“그런 셈이외다· 하지만··· 심족 영역에 와서 그런 생각이 들었소·”
나는 려화의 눈을 마주보며 물었다·
“과연 모든 것을 걸어서 삶을 갈아 가면서까지 ‘위’를 추구하는 그 행위가··· 의미가 있는 게 맞소···?”
난 씁쓸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당신을 죽이게 된다면 남은 이들의 마음은 어떻단 거요···?”
경창은 남은 이들을 위해·
유연은 남은 이들이 없어서·
그렇게 목숨을 불태우고 갔다·
그러나 그들이 착각한 것이 있다·
그들을 죽여 준 나는 그들에게 남은 이들이 아닌가·
어쨌거나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나누어 그들은 내게 있어 마음 깊이 박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마음 깊이 박힌 이들은 전부 숨졌다·
나에 의해·
“그냥··· 논검이나 혹은 말로 깨달음을 나눈다거나 할 수는 없소? 굳이 전력으로 ‘대결’하는 게 아니라 여유를 두고 ‘대련’을 하면 아니되는 거요?”
내 말에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웃었다·
“제가 존자와는 만날 일이 그리 많지 않아 이번이 딱 세 번째 만남이군요· 첫째는 처음 존자께서 삼목총에 오고 깨어나신 날· 둘째는 폐관수련에서 나오신 후· 그리고 셋째는 지금입니다·”
“그렇소·”
“스승님께서도 제가 말하기 전에는 눈치채지 못했던 제 비밀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 비밀은 스승님을 포함하여 서 존자··· 아니· 사제님만 알게 된 비밀입니다·”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말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저희 화초족의 본 수명은 삼 개월입니다· 아무리 경지를 높여 봤자 10여 년이 최대··· 영약을 잔뜩 먹고서야 겨우 12년 정도를 살 수 있지요·”
“뭣···!”
“다시 소개드리겠습니다· 사제님· 처음 뵙겠습니다 제 이름은 려화· 9년 전에 막 태어난 려화랍니다·”
“····”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구 년 전?
수명이 삼 개월?
그렇다는 건····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려화가··· 전부 타인이란 말이오···?”
“그런 셈입니다· 화초족의 기원에 대해 설명해 드릴까요?”
그녀의 설명이 시작됐다·
“저희 화초족은 딱히 노예종족도 아닙니다· 그냥 천족 수사들이 정인에게 선물용 화초를 선물하기 위해 법술로 개량된··· 꽃밭의 꽃들입니다· 법술에 의해 3개월 동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죽어 버리는 게 바로 저희지요·”
난 그녀의 머리를 보았다·
그녀의 머리에는 아주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었다·
“그 꽃들 중에서 법술에 의해 영성이 자극되어 이성을 가지게 된 게 바로 저희입니다· 저희의 삶은 굉장히 짧기 때문에 죽을 때가 되면 다른 적당한 화초를 찾아 저희의 기억과 영성 생명을 전해 준 후 죽습니다· 그런 족속을 통틀어 ‘화초족’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려화’라는 존재인 셈입니다·”
“····”
나는 려화를 잠시 바라보았다·
꽤나 익숙한 얘기였다·
‘탁혼만천····’
“···그 모든 려화가··· 동일 인물이란 것이오?”
“아닙니다·”
“음···?”
나는 일말의 불길함을 느끼며 질문했지만 그녀는 너무나 깔끔하게 그것을 부정했다·
“오히려 기억을 전하며 생명을 전하는 저희이기에 알 수 있습니다· 저희는 모두가 다른 존재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에 오히려 의아해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소···? 기억은 존재를 증명하지 않소?”
“기억이 존재를 증명한다라··· 많은 분들이 그리 생각하시지요· 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만약 정보가 자신을 정의한다면 같은 문파의 문파원들은 전부 동일인인 것일까요?”
“···그렇진 않지·”
“그렇습니다· 제게는 최초의 려화가 준 기억 또한 있지만 ‘저 자신이’ 그냥 평범한 꽃이었을 때의 기억 또한 있습니다· 그리고 저 이전의 려화에게 기억을 ‘주입받았던’ 기억 또한 명백하지요· 물론 제 이전의 려화에 대한 기억을 너무 많이 주입받아서 ‘원래의 제 자신’에 대한 정체성은 조금 희박해졌습니다만··· 저는 저입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던 중 질문했다·
“그렇다면 그대는 자기 것도 아닌 기억으로 9년 만에 좌탈입망··· 그러니까 어전일보에 올랐단 거요?”
“후후 ‘최초의 려화’의 깨달음 중 하나입니다· 어차피 존재의 마음은 모두 서로의 영향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상대에게 어떤 말을 들었다면 그걸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결국 그건 제 것이 되지요· 저는 이전 려화의 기억을 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나는 려화의 말을 듣던 중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잠깐 잠깐··· 그렇다는 말은 결국 ‘려화’라는 존재가 이어진다면 그 존재가 이어지기도 전에 나와 싸우겠다고···? ‘려화’의 의지를 끊겠다는 말로 들린다만····”
그러나 그녀는 도리어 빙긋 웃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지요·”
츠츠츠츠츳!
그녀의 주변에서 뿜어져 나온 한기가 새하얀 구름을 주변에 흩뿌렸다·
“‘려화’를··· 존자님께 잇고 싶어 지금 겨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뭐···?”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입을 벌렸다·
아마 서휼이나 육린 같은 놈이 말했다면 일수에 쳐 죽였을 법한 발언이었다·
기억 전송이란 어찌 보면 일종의 탁혼만천·
내게 탁혼만천을 걸겠다고 앞에서 당당히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난 잠시 생각을 해 보다가 그녀를 보며 말했다·
“···그냥 ‘려화’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시면 안 되겠소?”
“그거 아십니까 존자님?”
“뭐요?”
“어차피 만 년 후에 이 세계는 끝납니다·”
“····”
아무래도 종말에 대한 건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종말을 극복할 아주 최소한의 가능성이라도 있는 것은 최소한 존자부터지요· 그리고 무수한 ‘려화’는··· 결국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해서는 최소 6만 년의 시간은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츠아아아아!
려화는 진중한 표정으로 내게 얼음의 창을 내밀었다·
“부디 ‘려화’를 받아 주십시오·”
나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결국 그걸 받아들이면 당신이 되는 게 아닙니까?”
“아닙니다· 려화의 긍지를 걸고 말씀드릴 수 있지요· 그저 저라는 존재를 조금 더 깊게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
나는 무색유리검을 꺼냈다·
그러나 그녀에게 겨누지는 않고 늘어뜨렸다·
“···나 또한 ···누군가를 죽이는 게 즐겁진 않소·”
콰악!
나는 내 가슴을 움켜쥐며 씹어 뱉듯이 말했다·
“나는 살육에 절은 미치광이가 아니야··· 누군가를 죽이면 죽일 때마다 내 검은 조금씩 조금씩 무거워진단 말이다····”
려화를 노려보았다·
“나랑 상관없는 악인을 죽이는 게 아니라 내 지인을 내 손으로 죽인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극심한 고통이란 말이다·”
나는 그르렁거리며 그녀에게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내가 왜 너희를 죽여 주며 고통을 받아야 하지? 말해 봐라·”
그리고 그녀는 빙긋 웃었다·
“죽이기 싫으면 안 죽이셔도 됩니다·”
“뭐···?”
“실제로 저희 스승님께서도 제자 일곱을 죽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는 죽이지 않으셨지요·”
다음 순간·
콰칭!
어마어마한 한기가 나를 향해 내리꽂혔다·
“왜냐하면··· 그 시점에서 이미 저희와 스승님의 격차는 아득히 벌어져서 저희가 전부 힘을 합쳐 달려들어도 ‘죽이지 않고’ 제압할 경지가 됐기 때문입니다·”
“뭣····”
“그 이후부터는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존자께서는 다르시지요· 아직 많이 미숙하신 분· 그러니··· 당신께서는 어찌 되었든 저희와 겨뤄 주십시오· 모두가 서로 각자의 이유를 안고 각자의 마음을 안고 당신께 달려들 것입니다!”
“어림없는 소리·”
츠아아앗!
나는 또다시 날아온 얼음의 창을 노려보며 내 몸에 총천검을 씌웠다·
계위를 변환하는 검의 능력에 의해 내 육신은 그대로 혼의 계위로 올라갔다·
슈르르-
얼음의 창은 그대로 내 몸을 투과했다·
“···상대하지 않겠다·”
[상대해야 하실 겁니다·]
“···!”
나는 이어지는 그녀의 변화에 눈을 부릅떴다·
‘저 저····’
[려화는 수천 수만 대를 지나며 ‘려화’를 계승했습니다· 기억과 함께 자신의 남은 생명과 기력도 같이 말이지요· 그 기력이 모이고 모이고 또 모여··· 지금의 저는 지족 수도자와 같습니다····]
쿠구구구구!
어마어마한 기력이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기운의 형태 자체는 고작해야 단수기다·
아마 기운을 정제해서 연기기 이상으로 나아가는 법을 모르는 듯했다·
아무래도 식물족 수도자들은 흔치 않고 장목족은 절대로 자신들의 공법을 유출하지 않으니 말이었다·
그러나 기운의 형태가 단수기일지언정 그 양만은····
‘준사축기···!?’
난 이 막대한 기력에 황당해하며 내게 달려드는 그녀를 향해 방어 태세를 갖췄다·
[지(地)와 심(心)을 전부 품은 저는 육의쌍수(陸意雙修) 수련자···! 봐주면서 이기실 순 없습니다!]
막대한 기력에 의해 공간이 일그러졌다·
계위에 상관없이 공간 전체가 우그러지자 나는 어쩔 수 없이 피해야 했다·
콰드드득!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와 합을 겨루기 시작했다·
그녀는 일격으로 승패를 보는 경창이나 유연과는 다르게 나름대로 섬세한 기예를 겨루는 쪽이었다·
-화혼(華魂)
혼의 계위로 그녀의 의념이 울려 퍼진다·
화혼이라 불리우는 그녀의 입천이 혼이 시릴 정도의 냉기를 뿜었다·
-무궁한창(無窮寒窓)
그녀의 화혼이 일어나자 어마어마한 냉기가 나를 덮쳐 왔다·
‘이 냉기는····’
난 냉기를 느끼자마자 냉기의 본질을 알아차렸다·
‘고독····’
얼음의 창이 사방에서 내게 날아온다·
나는 총천검을 사방에 흩뿌리며 얼음의 창을 쳐 냈다·
하지만 쳐 낸 순간 마음에 냉기가 남는다는 걸 인지했다·
아무리 밀어내도 쳐 내도 그녀의 공격과 ‘닿는 순간’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냉기가 남게 된다·
냉기의 정체는 외로움 그리고 그리움이었다·
촤아아아아-
청색의 의념이 얼음으로 실체화되어 천지를 덮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몸을 베어 냈다·
촤르르륵!
그녀는 몸을 재생시켰다·
배어 낸 내 쪽이 오히려 더 추웠다·
-왜 외롭지·
눈이 흩날린다·
나는 몸이 얼어 가는 걸 느끼면서도 그녀의 화혼을 계속해서 쳐 냈다·
-너는 동료들이 있지 않나·
우리는 의념을 통해 대화하였다·
-너를 기억해 주는 이들이 있지 않나· 네 심상엔 장익의 박도가 있어 모든 려화를 기억해 주지 않나·
그녀가 웃으며 주변으로 더욱 더 한기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존재의 증명은 기억으로 되지 않는다 했지요· 그렇다면 무엇으로 되는지 아십니까?
촤아아아악!
나는 그녀를 상대할수록 내 혼이 얼어붙음을 인지하며 려화를 바라보았다·
-존재의 증명은 누구에게 사랑받았는지로 결정됩니다· 누구에게 어떤 마음을 받았느냐로도 결정되겠지요··· 모든 려화들은 이전의 려화에게 지극한 사랑을 전달받으며 태어납니다· 그렇기에 저는 저 자신이 아니라 려화로 살아도 상관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려화의 이야기를 이 마음을 다음의 려화에게만 줄 수 있습니다·
투웅 투웅 투웅!
그녀는 제자리에서 세 번을 내리 회전하며 내게 쌍장을 뻗쳤다·
그녀의 공격은 한파가 되어 나를 몰아붙였다·
-남들은 제자를 받아 이 마음을 전승합니다· 하지만 저는 제 마음을 줄 이가 다음의 려화 외에는 없지요· 저뿐이 아닌 모든 려화가··· 그렇기에 려화는 이 마음을 다른 이에게 전승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제 마음을 전부 받아 다른 이들에게 전승시킬 수 있는 건 최소 어전이보의 존자뿐이란 걸 알았지요·
그녀의 눈이 한기로 인해 타오르는 듯했다·
-즉··· 네 말은 네 이야기를 무공으로 만들어서 전승시키고 싶단 건가· 모두가 려화를 기억하도록···?
-그렇습니다·
-어리석다· 그건 결국 려화가 끝나는 게 아닌가···?
-당신에게 전해져 존자님의 손으로 려화의 이야기가 모두에게 사랑받는다면··· 그 자체로 족하나이다·
그녀는 겨울이 되었다·
꽃은 절대로 피어날 수 없는 겨울이 되어 나를 덮쳐 왔다·
그녀를 이기려면 난 겨울 그 자체를 베어 내야 했다·
‘베지 않을 수 있을까·’
그녀를 베지 않고 제압할 수 있을까···?
나는 영역을 꺼냈다·
저주와 술법 모든 신통을 꺼냈다·
화르르르르르!
그러나 알 수 있었다·
눈앞의 겨울이 점차 거대해져 간다·
그녀가 자신의 모든 기운을 불사르고 있었다·
몸이 터져 나가는 걸 신경쓰지 않고 내게 달려들려 하고 있었다·
‘이건····’
베야 한다·
죽이지 않고서는··· 제압이 불가능하다·
나는 어전이보에 올랐음에도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제압할 수 없단 사실에 절규했다·
아직도··· 내 실력은 일천하기만 하구나·
모든 생명을 불사른 그녀가 일순간·
편법으로라도 혼의 계위에 올라왔다·
‘그렇군····’
혼의 계위로 일순간 올랐기에 계위를 조절해서 베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나는 이를 악물며 그녀의 최후에 가장 잘 맞는 일격을 선사하였다
단악검법
제이십오초
의해은산(義海恩山)!
내 영혼을 포함한 모든 것을 불어넣은 일검이 혼의 계위에서 그녀의 겨울을 향해 쏟아졌다·
별빛의 검과 꽃이 피워 낸 겨울이 맞부딪혔다·
촤아아아아아!
별빛의 검은 만상인연을 품고 꽃의 겨울을 그대로 뚫어 버렸다·
내 검은 려화를 뚫었으나 동시에 검에 만상인연도에 한기가 남았다·
이어 나는 의해은산으로 그녀를 뚫어 낸 후 뒤를 보았다·
츠츠츠츳-
그것은 겨울에 이어 온 너무나도 아름다운 봄이었다·
화혼(華魂)
그것은 겨울 뒤쪽에 이어지는 려화가 모아온 마음을 다음의 려화에게 건네는 그 순간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촤라라라락!
그녀의 이야기가 내 마음 안으로 들어왔다·
최초의 려화부터 시작하여 지금의 려화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모든 려화는 사랑을 주고 싶은 존재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화초족은 몇 개월 살면 죽어 버리고 그나마도 생존률이 높지도 않아 평균수명이 짧다·
그렇기에 진정 려화의 위치에서 그녀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화초족은 없었다·
다른 심족들조차도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10년을 살고 다음 려화로 전승되는 려화의 의지는 누구도 쉽게 알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식물이 아니더라도 제자를 받고 싶었다·
제자를 통해 최초의 려화부터 이어져 온 이 의지와 감정 사랑을 전하고 싶었다·
장목족을 납치해서 가르쳐 보기도 했다·
하지만 장목족은 수분과 백운 성사밖에 머리에 안 든 머저리들이었다·
그녀의 가르침을 이해조차 못 했다·
그녀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었다·
말로 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불립문자라 했던가·
도대체 어떻게 최초의 려화부터 이어진 이 마음을 말로 전한단 말인가·
아마 장익의 투혼은 가능할 터였다·
어전 이보 장익의 투혼이라면 이 마음을 전달받아 ‘가르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려화는 장익에게 도전도 했다·
하지만 장익은 그녀를 상처없이 제압하고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자신의 어깨엔 심족 전체가 걸려 있단 이유에서였다·
려화의 기억을 받아 정신이 이상해지면 심족을 지킬 수 없다는 이유로 그녀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녀는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외로웠다·
자신의 마음을····
최초의 려화부터 시작된 ‘누군가에게 사랑을 전하고 싶은 이 마음’을··· 다음 대의 려화 외에겐 절대로 전할 수 없단 걸 알았으니까·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며·
끝없이 려화를 전승시키기만 하던 어느 날·
그녀의 앞에 희망이 나타났다·
“···좋느냐·”
나는 가루가 되어 눈 속으로 녹아드는 려화에게 물었다
그녀는 웃었다·
“감사합니다·”
“····”
‘려화’란 존재는 이제 끝이다·
하지만 그녀의 의지는····
내가 무공으로 변환하여 이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대의 려화는 자신의 기억과 목숨을 내게 바쳤다·
려화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그러나····
내 안에서 무(武)의 이름으로 재탄생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이 무를 계승받는 이의 안에서 다시 이어지리라·
난 려화의 최후를 지켜보았다·
그녀의 고독을 품에 안으며 나는 한(寒)의 신통을 깨우쳤다·
그것이 나의 세 번째 신통이었다·
화르르륵!
그녀의 화혼이 내 안에서 불타올랐다·
동시에 나는 흠칫 놀랐다·
‘자혼만천이····’
자혼만천의 구결이 갑자기 날뛰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보랏빛 안개가 화혼 속에 있는 모든 려화의 기억을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통제하려 해 보았으나 되려 화혼은 물 만난 고기처럼 내가 통제하는 자혼만천에 달려들어 흡수되었다·
처음부터 하나였다는 듯 자연스레 합쳐진 둘을 볼 때였다·
“···!”
자혼만천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건····’
보랏빛의 자혼만천이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자혼만천 안쪽의 구결이 변화하는 걸 알아챘다·
그것은 려화의 인생에 대한 구결이었다·
동시에 나는 지금껏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던 자혼만천이 완전히 내게 녹아듬을 인지하였다·
“이게··· 자혼만천····”
나는 자혼만천의 실체를 느끼며 헛웃음을 흘렸다·
자혼만천은 애초에 내가 익힌다고 익혀지는 게 아니었다·
자혼만천은 전승(傳承)으로 완성되는 비술이었던 것이었다·
심어(心語)의 성질과 자혼만천의 성질이 비슷했던 것과 같이 자혼만천은 누군가에게 ‘전하기’ 위한 비술이었다·
‘진화 같은 게 아니야····’
진화를 위한 비술이 아닌 과거의 누군가가 먼 미래의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 자혼만천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자혼만천은 과거의 려화의 마음이 내게 전해지며 완성되었다·
‘그렇다면 이름도 바꿔야겠군·’
이건 더 이상 자혼만천이 아니다·
려화의 마음으로 완성된 비술·
화혼만천(華魂滿天)이 맞으리라·
촤라라라라락!
나는 화혼만천을 흡수했다·
화혼만천의 보랏빛 안개는 만상인연도의 안개 속으로 아주 자연스레 흡수되었다·
파라라라락!
화혼만천이 만상인연도 속으로 들어가자 마치 책장이 넘어가듯이 과거의 순간순간이 비춰졌다·
‘이게 내 과거인가····’
나는 화혼만천의 힘을 통해 내 과거의 ‘마음’을 현실로 불러들여 타인에게 ‘전승’할 수 있단 걸 깨달았다·
“아아····”
난 눈물을 흘렸다·
지나간 청문령의 마음을 되새길 수 있게 됐다·
별이 된 창호자의 마음을 지금의 오현석에게 계승시킬 수도 있게 됐다·
내 기억 자체는 려화가 그랬듯이 내 목숨을 바쳐야 전송시킬 수 있지만····
기억에 따르는 ‘마음’ 자체는 이제는 얼마든지 계승시킬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나는 화혼만천으로 과거의 마음들을 불러일으켜 되새기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젠··· 잊지 않을 수 있게 됐어·’
정보가 아닌 마음마저 기억할 수 있게 됐으니 나는 이제 어떤 것도 잊지 않으리라!
“내 마음만은··· 절대로!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화혼만천이 과거의 어느 순간을 비췄다·
서악 마을의 한구석·
[언니를 기다리는 아이]와 대화를 했던 순간이었다·
“···어?”
툭!
정신을 차리자 서악 마을이었다·
나는 서악 마을에서 홍범의 어미에게 언니를 잃었단 여자아이 앞에서 동화를 읽어 주는 순간으로 돌아와 있었다·
“···뭐?”
뇌가 인지를 거부한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던 그때·
여자아이가 빙긋 웃으며 내 뒤쪽 어딘가로 달려갔다·
“아! 언니 왔어요! 저 언니한테 가 볼게요!”
아이는 총총거리며 내 뒤쪽으로 달려갔다·
어찌나 언니를 반기며 달려갔던지 평소에 아끼던 동화책조차 내던진 상태였다·
“···언니?”
홍범의 어미에게 먹힌 게 아닌가?
나는 침을 삼키며 뒤쪽에서 언니와 만나는 아이에게 물었다·
뒤를 돌지는 않았다·
“···얘야 언니는 저 고개 너머로 갔다 하지 않았니?”
내 질문에 여자아이는 이상하다는 듯 소리쳤다·
“무슨 소리예요 아저씨! 언니는 산 아래 대갓집에 잠시 일하러 갔다 말씀드렸잖아요!”
“····”
이상하다·
화혼만천을 통해 [기억이 또렷이 났]다·
아이의 언니는 홍범의 어미가 살던 곳으로 가 죽었다·
꿀꺽····
나는 체내를 관조했다·
영역이 그대로였다·
즉 내가 정신병에 걸려 어마어마한 여정을 겪는 환상을 겪은 게 아니란 소리였다·
나는 과거로 끌려왔다·
“나그네께서 꿈이라도 꾸셨던 모양이구나·”
[언니]가 여자아이에게 말했다·
“집에 가서 놀고 있으렴·”
“네 언니~”
[그녀]가 내게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점차 식은땀이 났다·
이제야 [기억났]다·
나는 다음 회차에서 그녀의 존재를 잊었었다·
[그녀]는 내 뒤에서 말했다·
“책 좀 주워 주시지요·”
난 동화책을 들어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건넸다·
“감사합니다· 그 애와 놀아 주셔서··· 혹 궁금한 게 있으시면 질문하시지요· 뭐 예를 들어··· ‘마음을 일정 이상 들여다본 자들’은 왜 자살을 갈구하는지 등에 대해서라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