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怪), 군(君)(3)
계약이 체결되자 우리는 다시금 계약과 언약의 성소에서 벗어나 방금 전까지 씨름하던 곳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철퍽 철퍽····
원유의 몸을 빌린 서휼이 내 몸 안에 기분 나쁘게 스며드는 게 느껴졌다·
[일단 당신을 장악한 척해야 하니 이해해 주시겠습니까·]
-···원유의 혈체는 남기고 탁혼만천은 썩 빼내서 꺼져라·
[후후··· 일단 알겠습니다· 대신 연락은 해야 하니 서 도우께서 제게 표식을 남겨 주시지요]
-알겠다·
서휼의 탁혼만천이 내 몸 안에서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놀랍군·’
놀랍게도 서휼은 ‘정말로’ 내 몸에서 탁혼만천을 빼냈다·
내 그림자 역시 살펴보았지만 서휼의 탁혼만천은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허공분쇄에 오른 내 경지였기에 탁혼만천은 바로 감지할 수 있었다·
현고의 앞에서 동맹을 맺은 것은 꽤 효과가 있었던 모양·
나는 알 수 없는 든든함을 느끼며 내가 서휼의 심상에 불어넣은 심상 분신을 통해 그와 연락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뭔가 계획이 있나 서휼·
[후후··· 혈음은 현재 조금 무리하게 광한계를 침식하기 시작했습니다· 백운과 뭔가 대화를 나눈다고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백운에게 역린(逆鱗)이라도 긁혔나 보군요·]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무리하게 광한계를 잠식하기 시작했기에 잠식에 틈이 있습니다· 본래라면 천 년 정도 유예기간이 남았지만 백운이 성사직에서 내려왔답시고 조금 무리하게 힘을 쓰느라 생긴 일이지요· 그 틈새를 향해 혈음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을 해 주면 됩니다·]
-그가 무얼 두려워한다는 거지?
서휼이 어둠 너머에서 웃는 게 느껴졌다·
명백한 비웃음·
[죽은 자가 살아날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지요· 즉··· 광한이 다시 부활하는 것입니다·]
-광한이 부활···? 그걸 우리가 한다는 거냐? 말이 안 되지 않나?
[당연히 저희 따위로 광한 부활은 소용없습니다· 하지만 그 기운을 불러일으켜서 광한의 생육신이 반응하게 만들 순 있지요·]
-뭣 어떻게···?
[괴군입니다·]
“···!”
내가 흠칫 놀라자 서휼이 부가 설명을 해 주었다·
[혈음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흑룡왕 현음이 괴군에게 당해 개조당했고 그 과정에서 괴군의 기묘성채에 [광한의 힘]이 배양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하더군요· 괴군에게도 무슨 목적이 있단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 목적에 따라 기묘성채를 발동시키면 그가 배양한 광한의 힘이 튀어나오는 구조겠지요· 그 힘을··· 혈음의 침식이 시작된 장소로 가 해방시키면 혈음의 계획을 연기할 수 있습니다·]
-계획을 연기··· 아예 무산시킬 순 없나?
[혈음이 치명상이라도 입지 않는 이상 그건 불가능합니다· 광한계에 50년 정도의 유예를 주는 것 정도가 한계겠지요·]
찌이이이잉!
나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기묘성채 쪽으로 날아갔다·
저 멀리 기묘성채가 보여왔다·
-일단 알겠다· 그럼 혈음의 침식이 시작된 장소는 어디지···?
[서 도우도 잘 아시는 곳입니다· 천련산· 성사가 거하는 곳이지요·]
아무래도 백운부터 혈음에게 당한 것 같았다·
-그럼 기묘성채와 함께 천련산에 가면 되겠····
그리 생각했을 때였다·
쿠웅!
“···!”
혼의 계위에서 알 수 없는 불길함이 피어올랐다·
혼의 계위를 통해 저 너머·
광한계의 끝자락에서부터 더없이 불길하고 흉험한 존재들이 광한계에 강림(降臨)해 있다는 게 느껴진다·
‘이건····’
[아··· 저런·]
서휼이 혀를 차는 게 느껴졌다·
후웅!
공간이 일그러지며 기묘성채 인근에 거대한 투영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쇄령(碎玲) 존자·
격할(擊轄) 존자·
위온(僞穩) 존자·
육녕(毓濘) 존자·
괴륙(壞陸) 존자·
힐기(犵技) 존자·
규천(圭踐) 존자·
혈음계 칠대존자(七代尊者)의 투영들이 서휼이 말한 광한의 힘을 제압하기 위해 이 자리에 강림했다·
쿠구구구구구!
붉은 산호로 뒤덮여 있는 거인·
쇄령 존자가 알아듣기 힘든 혈음계의 주문을 외며 기묘성채에 다가간다·
-이봐 서휼· 저놈들을 막아야 한다만 뭔가 방법이 없나?
[···제가 장악하겠다고 미리 말씀을 드렸는데 제가 조금 못 미더웠나 보군요· 흐음 이거 어쩐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서휼이 말했다·
-네가 생각해도 답이 없지?
[···후후 조금만 기다려 보십시오· 괜찮은 계획이 있····]
-됐다·
나는 서휼의 말을 듣지 않고 보란 듯이 하늘 아래에서 내 체내에서 혈체를 뜯어냈다·
[그아아아아아!!!]
내가 혈체를 뜯어 내며 괴성을 지르자 존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집중되었다·
‘어차피 존자들을 시켜서 굳이 괴군을 제압하려 한단 건 아직 혈음은 광한계를 침식 중이라 제대로 힘을 쓰기 힘든 상황이라는 의미겠지·’
그렇다면 간단한 방법이 있다·
-존자들을 뚫고 기묘성채를 가지고서 천련산에 가져다 놓은 후 괴군더러 기묘성채의 연의 연을 발동시키게 하면 되는 것 아니냐·
[후후··· 그게 가능하시겠습니까?]
나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래·
쿠우웅!
나는 별빛의 거인이 되었다·
21개의 머리를 가진 별빛의 거인이 자신들의 앞에 나타나자 혈음계 존자들은 상황 파악이 잘 안되는 듯 나를 멀뚱하니 쳐다보았다·
나는 태연하게 그들의 사이로 걸어갔다·
쇄성기 존자의 압박쯤은 허공분쇄의 경지로 흘려 버릴 수 있었기에 압박도 받지 않은 채·
그들의 사이를 걸어가 기묘성채를 잡아들었다·
쿠우웅!
그런 후 나는 아주 태연하게 기묘성채를 한쪽 팔로 들어 올린 후 존자들 사이를 걸어 나가 천련산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잠시 상황 파악을 못 하던 혈음계 존자들은 그제서야 내게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산호가 돋아난 쇄령 존자가 입을 벌렸다·
[-!]
그가 혈음계의 주언과 함께 사자후를 내지르자 대지에서 붉은 산호들이 자라나며 나를 가두려 하기 시작했다·
전신에 눈알이 돋아난 격할 존자의 눈동자들이 나를 쳐다보자 내 몸이 굳었다·
온몸이 꿈지럭거리는 뼈투성이로 이뤄진 위온 존자의 몸이 흩어지며 일대를 가두는 감옥이 되었다·
붉은 흙으로 이뤄진 거인인 육녕 존자는 내가 서 있는 지반을 들어 올렸다·
전신에 검붉은 비늘이 돋아난 벌레의 형태를 한 괴륙 존자는 비늘 하나하나에서 흉칙하게 생긴 그림자들을 내뿜어 내게 쏘았고 사마귀처럼 생긴 힐기 존자는 앞발을 휘둘러 참격을 보냈다·
콰르르르릉!
일대가 궤멸(潰滅)한다·
혈음계 존자들의 권능의 여파가 사방으로 뻗쳤다·
쿠르르릉!
우리가 서 있는 곳은 광한계 서북쪽의 난계지역·
천족 영역과 인접한 난계지역이었다·
그리고 난계지역에서 시작된 존자들의 합공 여파가 천족 영역 전체를 뒤흔든다·
혈광(血光)이 잦아들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나를 아래 경지로 보고 너무 대충 힘을 쓰셨군·]
척!
방금 전의 공격들은 모조리 피했다·
존자들이 합체기 태수를 밟아 죽이기 위해 대충대충 던진 공격이었기에 피하기도 쉬웠다·
나는 끌끌 웃으며 기묘성채 안쪽을 향해 물었다·
[상태는 괜찮으십니까 모두들?]
타앗!
그러나 딱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고 홍범만이 기묘성채 위쪽으로 화형해 올라와 대답했다·
“현재 다른 분들은 전부 기절한 상태십니다! 그리고 기묘성채 괴뢰들에겐 전부 이상한 산호 같은 것이 돋아나서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다들 기절했다고?]
쿠구구구구구!
뒤쪽에서 혈음계 칠대존자들이 강력한 기세를 뿜는 게 느껴졌다·
나를 동급의 적으로 인식하고 제대로 공격을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은 신경 쓰지 않고 홍범에게 질문했다·
“영훈 대인과 김연 대인 괴군이 버티고 계시긴 합니다· 하지만 멀쩡한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의식을 내뿜어서 빠르게 기묘성채 안을 탐사했다·
그 말대로 김연은 의식은 있는 것 같았지만 가부좌를 튼 채 미동도 없었다·
김영훈은 도를 들고 집중하면서 간신히 버티는 기색이었고 괴군은 정신은 있었지만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그아아아악! 끄아아아악! 헉 어헉! 끄어어억!}
괴군의 몸에서는 무수한 심천마들이 줄줄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부정적 기운이 인격을 일시적으로 갖는 것을 심천마라고 한다·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닌 소설의 등장인물이나 장기의 장기 말 같은 것이 심천마였다·
인격을 부여해 줄 대상만 있으면 얼마든지 부정적인 힘을 토대로 생성될 수 있는 게 심천마인 셈이었다·
그리고 괴군은 기묘성채의 인공혼들의 속삭임으로 인해 수억 수조 개의 인격을 가지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즉 그는 심천마에 둘러싸이기 최적의 상태라는 것이었다·
‘제길··· 연의 연을 발동시켜야 할 주체가 이 상황이라니····’
나는 심상분신으로 괴군의 앞에 다가갔다·
내 분신이 다가가자 이미 바깥으로 ‘나온’ 심천마들은 질겁하며 도망쳤지만 그 안에서 계속 생성되는 심천마들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심천마들이 괴군의 영혼을 끝없이 고문하는 것이 보였다·
‘어설프게 축문으로 정화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잠시 동안은 해결할 수 있겠지만 그게 끝·
결국 다시 이 상태가 될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고민할 때였다·
“···서···은현··· 이냐···?”
“···!”
나는 심상분신을 통해 괴군의 앞에 다가갔다·
“의식이 있으십니까?”
“···힘···들군····”
괴군은 무수한 심천마들에게 혼을 고문당하며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뚝 뚝뚝····
“무슨··· 변고가··· 일어난 게냐···?”
“···광한계가 멸망한다더군요·”
“그러냐····”
괴군은 피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방법이 있는 모양이구나····”
“예· 기묘성채를 천련산까지 가지고 가서 당신이 성불해 주시면 됩니다·”
괴군은 한 번에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들었는지 눈을 빛냈다·
“알겠··· 다· 해··· 주도록 하지····”
저벅 저벅····
무수한 심천마들을 매단 괴군은 간신히 기묘성채의 조종간을 잡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한단 건··· 내 제자··· 가· ‘완성’되었단··· 것이겠지···?”
나는 괴군을 보았다·
그리고 저 아래에 가부좌를 틀고 있는 김연을 보았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모르··· 겠··· 다?”
“예· 저는 연이가 완성되었는지 완성되지 않았는지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아마 그녀가 최선을 다했다면 완성되었을 것이오 다하지 않았다면 완성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연이가 진심을 다했다면 필히 완성되었겠지요·”
쿠구구구구!
기묘성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본체의 크기를 줄여 기묘성채를 이고 있는 걸 멈추고 기묘성채의 정상에 올라왔다·
괴군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조종간을 잡으며 물었다·
심천마들의 고문 속에서도 그를 움직이는 건 오로지 괴군의 정신력이었다·
“너··· 는··· 왠지··· 그 아이가 완성되었을 것이라··· 믿는 것 같군····”
“···일단····”
쿠구구구!
계멸축지진이 발동한다·
나는 김연을 보았다·
그녀의 원영 안쪽에서 광한 천원이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곧 광한 천원의 본질·
광한 천원이 회전한다는 건 그녀가 있는 힘을 다해 의미를 찾아보고 있단 뜻이었다·
“진심이 아닐 리는 없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후·
나는 김영훈과 김연이 있는 층으로 분신을 이동시켰다·
난 김영훈에게 다가가 눈빛을 보냈다·
김영훈은 의식을 집중하며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찰나·
나는 김영훈의 심상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심상에 박혀 있는 녹색 박도가 내 손에 들어왔다·
나는 심상 분신을 회수했다·
파아앗!
심상 분신은 녹색 박도를 가지고 기묘성채 꼭대기에 있는 내게 도달하였다·
계멸축지진이 발동하기 전 찰나·
혈음계 칠대존자들이 힘을 쓰려는 것이 보였다·
타락한 황룡족 규천을 필두로 일곱 존자들이 힘을 한데 모아 우리를 격살하려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저 정도 권능이라면 축지진으로 이동해도 우리를 따라와 기묘성채를 멸하리라·
그러니까·
따라올 수 있다면·
부웅-
나는 박도를 들어 올렸다·
장익이 내 옆에서 외치는 것 같았다·
“함선멸천(陷仙滅天)!”
콰르르릉!
녹색의 도광(刀光)이 존자들의 합격을 막아섰고 계멸축지진이 발동했다·
목표는 천련대산·
혈음의 침식지!
번쩍!
기묘성채가 공간을 도약했고 칠대존자들이 같이 공간을 뛰어넘어 따라붙는 게 보였다·
쿵 쿵 쿵 쿵 쿵 쿵!
나는 내 손에 죽은 경창 유연 려화 독영 재후를 떠올렸다·
그들에게 죽기 전 받은 장익의 박도들·
그리고 심족 최고지도회 전부에게 괴군 성불 작전 이전에 받았던 박도들·
총 22개의 녹색 박도가 내 주변에 꽂혔다·
“함선(陷仙)!”
쿠구구구구!
나는 박도를 하나 뽑아 들며 외쳤다·
“멸천(滅天)!”
* * *
마침내 기묘성채가 천련대산에 도달하였다·
나는 남아 있는 혈음계 존자들을 바라보았다·
혈음계 칠대존자는 혈음계 양대존자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