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1)
‘예비 천왕?’
나는 천왕이라는 말에 예전에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불가(佛家) 칠화왕(七華王)·’
태열전의 입에서 처음 나왔던 것이 천왕(天王)이라는 개념이었다·
불가에 존재하는 위대한 일곱 보살들·
그들의 이름 끝에는 전부 천왕(天王)이란 이름이 붙었었다·
‘그걸 말하는 건가?’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날더러 예비 천왕이란 말은··· 천왕이란 종명자들이 도달할 수 있는 어떠한 ‘지점’이라고 볼 수 있는 건가?’
대충만 생각해 봐도 칠화왕 중 결속을 상징한다는 ‘차거광한천왕’은 광한계의 주인·
광한천군을 상징하는 천왕이었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들어 온 풍문들에 의하면 광한 역시 아마도 종명자일 확률이 높았다·
그러므로 그녀가 말하는 ‘예비 천왕’이라는 말은 종명자를 달리 말하는 것일 확률이 높았다·
‘어찌 보면 종명자에 대한 실마리를 잡고 있는 존재다·’
결코 방심하면 안 된다·
나는 유사시 유오에게 저항키 위해 내 몸 상태를 확인했다·
‘몸은 없어졌고 현재 혼(魂)만 있는 상태다·’
아무래도 영혼만 명계로 끌려가던 중 섭명함을 통해 잠시 유오 성사의 앞으로 떨궈진 듯했다·
덕분에 나는 쇄성기의 의식영역만을 지녔을 뿐인 그냥 강력한 영체 덩어리일 수밖에 없었다·
‘총천검의 힘을 통해 본체의 힘을 끌어올 순··· 없겠군·’
나는 유오의 이공간을 확인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계위를 조절해 본체의 힘을 끌어와도 그녀의 공간 자체가 그런 걸 할 수 없게 봉인된 곳이라는 게 느껴졌다·
‘여차하면 허공분쇄의 경지나 선술을 통해서 빠져나갈 순 있겠지만 명귀계와 동화한 그녀의 힘이 얼마나 될지는 미지수이니··· 경거망동할 순 없겠군·’
허공분쇄에 도달한 후 바로 백운에게 송곳니를 드러냈던 건 그녀가 양수진에게 당한 상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내 옆에는 양수진의 힘을 언제든 발휘할 수 있는 전명훈이 있었다·
그렇기에 백운 성사와는 유사시에 ‘한 판 붙어도 해 볼 만하다’라고 느꼈기에 조금 세게 나갔었다·
‘그런데··· 같은 성사가 맞나?’
나는 눈앞의 유오에게서부터 밑도 끝도 느껴지지 않는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동시에 어떠한 기시감도 느낄 수 있었다만 그게 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여하튼 함부로 대하면··· 큰일 나는 존재란 건 확실하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눈앞의 차를 보았다·
은은한 매실 향이 나는 것이 명귀계 특산품인 매실차인 것 같았다·
‘흑매실이군·’
명귀계 흑색귀골궁의 관할 영역에서 탄생하는 종자였으며 명귀계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매실 품종이었다·
그리고 그런 만큼 살아 있는 사람은 먹으면 심장마비가 걸릴 만큼 신맛이 강했다·
홀짝
‘괜찮네·’
나는 흑매실차를 홀짝인 후 유오 성사와 서란을 번갈아 보았다·
“좋은 차를 대접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저야말로 부족한 차를 맛있게 드셔 주셔서 감사드릴 뿐이지요· 원래는 더 맛있는 차를 손수 타 드리고 싶었거늘 상황이 이리되어 아쉬울 뿐입니다·”
“하하 겸손하시군요· 이 정도로도 훌륭한 차입니다만····”
“과한 칭찬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럼 말이 나온 김에··· 이 훌륭한 차를 제 벗인 서란도 마실 수 있게 조금 도와주셨으면 좋겠군요·”
나는 사시나무처럼 떨어 대는 서란을 보며 말했다·
“제 벗에게 거신 압박을 조금 풀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사축기 벗인지라 성사의 권능을 감당하기가 힘든 모양입니다·”
흑매실차를 홀짝 마시며 나는 최대한 유오가 기분 나쁘지 않을 선에서 서란에 대한 압박을 멈춰 달라 부탁했다·
그리고 유오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저는 저 아이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섭명함의 힘을 통해 존자와 본인의 혼을 제 궁 안쪽으로 데려온 게 저 아이입니다· 두 분을 이곳에서 뵙는 건 제 계획이 아니었으며 당연히 계획에 없었기에 어떤 수작을 부릴 틈도 없었답니다·”
“으음····”
나는 서란을 쳐다보았다·
이 궁 안쪽은 유오가 무슨 짓을 해 놓은 것인지 의념이나 심상을 읽을 수 없었다·
‘그럼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서란 무슨 일이냐?”
그러나 서란은 내 말이 아예 들리지 않는 듯 더더욱 사시나무 떨듯이 떨 뿐이었다·
“으음 보아하니 정신의 균열을 막아 주는 선술이 걸려 있는 것 같습니다만· 아무래도 너무 거대한 존재와 인접해서 그 영향으로 선술에 흠이 생겼군요· 그 탓인 듯합니다·”
“으음····”
나는 곽암이 서란의 배를 후려치며 선술을 걸어 줬던 걸 떠올렸다·
‘태산의 선술이 정신을 보호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 혈음을 대면하게 되며 그 선술에 균열이 갔단 건가·’
“다행히 제가 아는 선술이라 봉합할 수 있어 보이는군요· 이리 만난 것도 인연이니 봉합해 드리겠습니다·”
따악!
유오가 손가락을 튕기자 서란 주변의 인력이 변화하는 듯하더니 그는 바로 정신을 차렸다·
“허억··· 헉··· 헉····”
“괜찮으냐 서란?”
서란은 사시나무 떨듯 떨다가 고개를 들어 유오를 쳐다보았다·
잠시 그녀를 보던 서란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저분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저분은 명귀계의 성사로 ‘유오’라고 불리는 분이시다·”
“거기에 더해 청색귀골궁 현 궁주(宮主)이기도 하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서 후배님·”
그녀는 서란이 입은 검은 장포를 보며 따스하게 웃어 주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서란의 입에서는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어머니···?”
“···?”
“어머님··· 맞으십니까···?”
나는 뒤통수를 후려 맞은 듯한 충격을 느끼며 서란과 유오를 번갈아 보았다·
‘뭐지? 이건··· 아니 잠깐· 서란의 얼굴에서 서휼 같아 보이는 부분을 빼면··· 유오와 닮은 것 같기도···?’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으며 둘을 바라볼 때였다·
유오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서란을 보며 말했다·
“흠··· 후배님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요?”
서란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원영기에 이를 때 제가 태어나던 순간도 봤습니다· 너무 순식간이라 잘은 보지 못했습니다만··· 어머니의 얼굴은 똑똑히 기억납니다· 그리고 제 스승님께 청해 어머니의 초상화를 본 적도 있습니다· 제 어머님의 성함은 흑색귀골곡의 제자 ‘유오’· 성사님과··· 이름과 생김새가 모두 같습니다·”
그는 아연한 표정으로 유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성사님께서는··· 제 어머님이 아니십니까···?”
그 말에 유오 성사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흐흠··· 제게는 딱히 자식이 없습니다· 하지만 유오에게는 자식이 있을 수도 있지요·”
“예···?”
나와 서란은 그게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인가 싶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유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엇···!?”
“헛····”
뚝 뚜두둑····
나와 서란은 둘 다 그녀의 기행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자신의 목을 완전히 꺾어 버리며 고개를 180도 돌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더욱 놀라운 건 그것이 아니었다·
“···!!!”
그녀가 목을 완전히 돌린 곳에 드러나는 건 ‘또 다른 유오’였다·
‘또 다른 유오’의 얼굴은 눈을 감고 곤히 자고 있는 모습이었다·
“명귀계의 높은 자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만··· ‘유오’라는 건 사실 ‘저희 둘’을 의미합니다· 제게는 두 개의 얼굴과 두 개의 인격이 있지요· 그리고 저희 둘은 서로서로 번갈아 가며 수년에 한 번씩 한 명이 잠들고 한 명이 깨어나 활동하는 걸 반복합니다·”
우드드득!
유오는 다시금 머리를 반시계 방향으로 돌려 ‘깨어 있는’ 얼굴이 우리 쪽을 향하게 했다·
“그렇기에··· 지금 깨어 있는 인격인 ‘저’는 자식이 없습니다만· 지금 잠들어 있는 ‘다른’ 유오라면 혹시 또 모르는 일이지요·”
“그 그렇다면··· 다른 분을 지금 깨우실 순 없습니까?”
“으음 그건 곤란한 일입니다· 제 인격이 두 개고 수년마다 수면기와 활동기를 바꾸는 것은 제 공법 탓입니다· 이렇게 두 개의 얼굴로 음양의 균형을 맞춰 가며 선술에 가까워져 가는 공법이지요· 오늘 갑자기 깨워 버리게 되면 선술에서 한없이 멀어지게 되어 버립니다·”
“그런··· 알겠습니다·”
서란은 탄식을 터트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후후 언젠가 당신의 진짜 가족을 찾을 수 있을 거랍니다· 머리가 두 개인 만큼 예감도 두 배인 제가 하는 말이니 믿으시지요·”
유오는 다정하게 서란을 위로해 주었고
나는 머리가 두 개밖에 안 되는 걸로 왜 유세인 건가 생각하다가 문득 나는 지금 머리가 하나밖에 안 된단 걸 깨닫고 주눅이 들어 시선을 살짝 깔았다·
“흠흠 그래· 네 어머니에 대한 건 다른 성사께서 깨어나면 다시 여쭤보자꾸나·”
“···예·”
나는 헛기침을 하며 주제를 돌렸고 유오는 다시 내게 시선을 주었다·
“두 분은 어떤 관계신지요?”
“친구입니다·”
“친구라··· 친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그나저나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나는 흑매실차를 홀짝이며 진중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예비 천왕이라는 건 무엇을 뜻하는 겁니까?”
“너무나 당연하게도··· 당신들을 뜻합니다· 대강 짐작하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천거자(天拒子) 서 존자?”
“···!”
나는 그 말에 흠칫 몸을 떨었다·
서란은 천거자가 뭔지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며 긴장을 끌어올린 채로 질문을 이어 갔다·
“천거자가 천왕이라는 건··· 칠화왕이란 곧··· ‘우리 일곱’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차거광한천왕 광한천군만 해도··· 아득한 소싯적에는 연기기 칠성제의에서 하늘을 부르짖었던 걸로 유명하답니다·”
“····”
그녀는 간접적으로 광한천군 칠화왕 등이 ‘종명자’라고 내게 일러 주는 것 같았다·
“불가 칠화왕은 잘 아시다시피 존재의 마음을 형상화한 존재들· 그리고 당신들 일곱 천거자들은 그런 천왕이 될 수밖에 없는 천왕 후보들입니다· 그렇기에 칠화왕이란 결국 마음공부는 필수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존재지요· 지금까지 짧은 시간이었습니다만··· 지금껏 마음공부는 잘하셨는지요?”
“짧다라··· 700년 아니 약 800년 정도밖에 안 살긴 했지만 그렇게 짧은 시간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만·”
“후후··· 시간이 중요한 건 아니지요· 그 시간 동안 어떤 마음을 겪었느냐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랍니다· 제가 보기에 존자께서는 예상외로 마음공부를 잘하신 것 같군요· 선술의 흔적이 느껴지는 걸 보니 말입니다·”
“기연이 있어 좋은 스승을 만나 잘 배웠을 뿐입니다·”
유오는 눈을 번뜩이며 내게 질문했다·
“문득 궁금해지는군요· 존자로 승급한 것도 얼마 되지 않은 걸로 아는데··· 어찌 ‘계의’의 선술에 대한 흔적도 느껴지는지··· 어떤 스승을 만나 어디에서 수학하셨습니까?”
“좋은 스승을 만나 좋은 곳에서 수학했을 뿐입니다· 물론 성사이신 유오님보다 뛰어나지는 못하니 감히 고개를 들 순 없겠습니다만····”
내 말에 유오는 흑매실차를 홀짝이며 눈을 빛냈다·
“알려 주실 생각이 없으신가 보군요·”
“이런 말씀하긴 좀 그렇습니다만··· 그··· 저희는 오늘 처음 본 사이가 아닙니까· 제 스승의 존함은 붕우가 아닌 이상 함부로 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처음 본 사이라··· 하하 뭐··· 좋습니다· 하면 친분이 더 필요하다는 거군요·”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하면 제가 알고 있는 천왕들에 대한 한 가지 재미난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지요· 이걸 들으시며 친분을 좀 쌓아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흠··· 어떤 이야기이길래 그러시는 겁니까?”
쪼르륵-
유오는 흑매실차를 다시 따르며 웃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에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세계에 떨어져’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정인을 [무조건] 잃게 되며’ ‘그를 통해 자신의 명을 깨닫는’··· 어떤 부나방들에 대한 이야기를··· 기승전결을 곁들여 말씀해 드리지요·”
“····”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지금 말하는 ‘부나방’이란 ‘우리’를 칭하는 것·
그리고 나는 그녀의 말에서 단박에 이상한 점을 알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전부 비슷하지 않나?’
김영훈 전명훈 강민희 오현석 김연··· 오혜서는 도대체 그녀라는 사람에 대해 잘 읽을 수가 없었다만·
전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적이 있다’란 사실이 존재했다·
김영훈 같은 경우는 아예 자기 아내였지만·
‘도대체··· 왜 비슷한 거지?’
나는 무언가 기묘한 기시감을 들으며 유오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집중했다·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아주 먼 옛날· 흑요(黑曜)라는 괴물이 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