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8
“크로. 무슨 고민 있어?”
옆에서 들려오는 율리아의 상큼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어 아니. 그냥 아까 시험 때문에.”
“그렇구나. 하긴 평범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지나간 일이니까 너무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적당히 둘러댄 변명에도 이렇게 상냥한 대답이 돌아올 줄이야.
역시 율리아는 천사가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속였다는 죄책감도 살짝 들었다.
엄밀히 따지면 거짓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시험에서 있었던 일로 심란했던 건 사실이니까.
단지 더 구체적인 이유가 샤론의 마법 때문이란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을 뿐이다.
어차피 지금은 고민해봤자 답이 나오진 않을 것이다. 조용한 하굣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나와 율리아 단둘뿐이니까.
마법에 관해선 나중에 샤론과 따로 만날 일이 있을 때 얘기를 꺼내 보면 되겠지.
일단 현재는 율리아에게 집중해야 할 시간이었다.
“오늘 모임이 있다고 했지?”
“응. 나도 한번 가본 게 전부지만.”
저번에 미술관에서 약속했던 대로 우리는 시험을 마치자마자 괴도 추종 모임에 참석하기로 했다.
목표는 율리아를 모임에서 빼내는 것. 그게 안 된다면 차선책으로 내부에 잠입해 추종 세력의 위험 사상을 제거하는 것.
가장 쉬운 방법은 당연히 율리아가 스스로 위험하단 사실을 깨닫고 발을 떼는 거다.
그녀라면 위험성 정도야 충분히 자각할 수 있으리라. 문제가 있다면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사상에 푹 빠져버리는 상황이다.
그럴 리는 없다고 믿지만 만약 율리아가 드레이크의 과격한 사상에 동화되어서 모임에 진심이 되어버린다면? 그때는 정말로 골치가 아파진다. 어떻게든 그런 참사가 일어나기 전에 막아야겠지.
“그럼 이따 보자!”
“응. 나중에 봐.”
모임에 가기 전에 일단 각자 집에 들러 옷부터 갈아입기로 했다.
아카데미 교복을 입고 그런 데 들어갔다가 누가 보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거기에다 오늘은 여러모로 일이 많았던지라 상당히 피곤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집에서 편안히 쉬며 체력을 보충할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모임은 해가 진 뒤의 늦은 저녁부터 열리니 문제는 없었다.
집에 돌아오니 반짝거리는 빛으로 나를 반겨주는 아름다운 진주.
볼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예쁜 보석이었다.
“흡수는 얼마나 됐어요?”
[삼 분지일 정도.]
“어우···.”
아직도 한참 멀었네. 진주를 획득해 흡수하기 시작한 지 이틀이나 지났는데도 이제 겨우 30% 정도라니.
달리 생각하자면 그만큼 진주가 가진 힘이 많다는 뜻이려나.
느긋하게 옷을 갈아입으면서 여신님이 잡담을 떠들었다.
“설마 거기서 놈이 드래곤을 소환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러게나 말이다. 만약 놈들이 봤다면 군침을 흘렸겠구나.]
“놈들이요?”
[드라칸 말이다.]
“아···.”
순간 머릿속에서 지워뒀던 이름이 여신님의 언급 덕에 수면 위로 떠 올랐다.
원작에서 시시각각 등장해 주인공 일행을 방해하는 악당 조직.
소수 정예 집단으로서 개개인의 무력과 위험도가 엄청나기에 조심해야 하는 녀석들이다.
드라칸의 목적은 다름 아닌 드래곤 창조. 마법의 주인이라 불리는 전설의 종족을 자기들이 직접 만들어내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놈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망설임 없이 이용한다. 설령 그것이 인류를 배반하고 절대악이 되는 길이라 할지라도.
레이첼 역시 그들의 음모에 휘말릴 뻔했다. 이미 휘말렸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하리라.
내 행동이 나비효과로 돌아와 그녀를 죽일 뻔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가슴 속에 깊이 자리 잡아 신중하게 움직여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천만다행으로 초월적 존재인 여신님과 호수의 정령이 도와준 덕분에 드라칸의 활동을 중단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그마저도 임시방편에 불과할 뿐이며 언젠가 녀석들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확실히 만약 놈들이 봤다면 그냥 넘어가진 않았겠네요.”
그레인저가 만들어낸 드래곤은 기껏해야 흉내 낸 레플리카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와 비교하면 어린아이가 찰흙으로 빚어낸 수준의 완성도.
그렇지만 드라칸의 목표에 이보다 매력적인 존재가 또 있을까.
녀석들이 오늘의 광경을 봤다면 즉시 그레인저를 납치해 소환 마법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고 했으리라. 그 과정에서 한낱 아카데미 학생 따위야 어떻게 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겠지.
[지금 놈들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몰라도 주의할 필요는 있겠구나.]
여신님의 말대로다.
원래라면 이런 걱정은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레인저가 드래곤 브레스를 사용하는 건 한참이 지나서 지금보다 훨씬 강해졌을 때였으니까. 만약 원작대로 흘러갔다면 오늘처럼 불완전한 드래곤을 소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현재는 몇몇 심사관들만이 아는 수준이지만 만약 이번 사건에 대한 정보가 퍼져서 드라칸의 귀에 닿는 순간 진짜 위험해질 가능성도 충분하다. 물론 아카데미는 시험 과정을 철저히 비공개하니 그런 참사가 벌어질 확률은 낮겠지만.
“그건 나중에 천천히 생각하고. 일단 지금은 괴도 추종자부터 처리하죠.”
옷을 완전히 갈아입고서 시계를 바라보았다. 슬슬 천천히 출발하면 약속 시간에 맞춰 도착할 듯싶었다.
좋아. 출발하자.
***
“크로!”
내 이름을 부르며 종종걸음으로 달려오는 율리아.
나도 모르게 잠깐 시선을 뺏길 만큼 그녀의 사복 차림은 예뻤다.
풋풋하면서도 과하지 않은 원피스가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일찍 왔네. 오래 기다렸어?”
“아니. 방금 왔었어.”
“그래? 다행이네!”
뭔가 이렇게 사복 차림으로 단둘이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있으니 데이트라도 하는 기분이다.
데이트 장소가 극단적 사상을 전파하는 지하 공간이란 사실만 제외하면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살짝 설레려던 감정이 전부 죽어버렸다.
지금 만남은 데이트 따위가 아니라 친구를 구하기 위한 잠입 액션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 바로 갈까?”
“좋아. 안내해줘.”
나도 이미 한번 들러본 적이 있었지만 그런 사실은 태연하게 숨긴 채 율리아의 안내를 받아 지하 공간으로 이동했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입구 앞을 가로막고 있는 덩치.
하지만 뜻밖에도 율리아의 얼굴을 익혀놨던 건지 우리를 힐끗 보자마자 몸을 비켜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하기야 율리아 정도의 외모가 흔한 것도 아니니 얼굴을 까먹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리라.
어쨌거나 우리는 아무 막힘 없이 수월하게 지하 공간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그곳에 펼쳐진 풍경은 지난번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마치 이곳만 시간이 흐르지 않은 느낌이었다.
고막을 울리는 시끄러운 음악과 곁들여 사방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목소리.
누구라도 이런 공간에 적응되어 지내다 보면 텐션이 높아질 수밖에 없겠는데.
“안녕? 귀여운 커플이네.”
그때 우리에게 살랑살랑 다가와 요염한 목소리로 인사하는 여자.
한눈에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저번에도 내게 말을 걸었던 블랑카였다.
“아 안녕하세요···.”
율리아의 떨떠름한 인사에 싱긋 눈웃음으로 화답한 블랑카는 이윽고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율리아가 애써 시선을 피하던 와중.
“기억났다. 저번에 왔던 그 아가씨구나?”
“저를 기억하세요···?”
“그럼 당연하지. 되게 여러모로 눈에 띄었거든. 물론 좋은 의미로 말이야.”
“아 감사합니다.”
평소에는 항상 자신감이 넘치던 율리아인데 지금은 환경도 그렇고 블랑카의 기세에 완전히 말려들어 주눅 든 모습이었다.
이윽고 그녀의 시선이 옆으로 옮겨와 이번에는 나를 지긋이 응시해왔다.
“이쪽 친구는 처음 보네?”
“친구예요. 제가 얘기를 듣고 따라오고 싶다면서 졸랐거든요.”
“잘 선택했어. 한번 여기에 맛 들이면 어디를 가도 시시하게 느껴질걸.”
그 말 자체는 어느 정도 동감한다. 아마 이 중에 대부분은 처음부터 드레이크의 사상에 흥미를 느끼기보단 그냥 이 지하 공간의 신나는 분위기 자체에 매료됐을 확률이 높다. 그러면서 서서히 드레이크가 얘기할 때마다 자연스레 받아들이면서 동화됐겠지.
“음. 그런데 말이야···.”
잠시 입술을 할짝거리며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던 블랑카가 곧 고개를 들이밀더니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우리 어디선가 본 적 있지 않아?”
“······.”
너무 놀라서 움찔해버렸다. 하마터면 진짜 소리 지를 뻔했다.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은은한 향수 냄새에 코가 마비될 것만 같았다.
[쯧. 참으로 경박하기 그지없구나.]
여신님의 불평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뒤로 한 발짝 물러선 다음 침착하게 답했다.
“글쎄요. 저는 처음 뵙는 얼굴인 거 같은데···.”
“그래? 그럼 내 착각이었나 보네.”
고혹적인 미소를 보여주던 블랑카는 손을 흔들며 작별을 고했다.
“난 가볼게. 옆의 여자친구가 상당히 질투하는 것 같아서. 혹시 물어보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 내 자리로 와도 돼. 그럼 안녕~.”
“···여자친구?”
어리둥절하고 있던 와중 옆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시선.
고개를 돌려 보니 율리아가 불만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아바타2를 본 기념으로 스포를 하겠어용!
주인공은 피부가 파란색이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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