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
“너는 어떻게 생각해?”
그 말만 듣고선 뭐라고 대답해줄 수가 없었다. 율리아는 정면에 걸린 그림을 가만히 응시하며 얘기를 덧붙였다.
“샤론은 괴도 레이븐을 비판하려고 주제로 정했다고 했잖아.”
“응. 그랬지.”
“그런데 너한테 말했던 것처럼 난···. 그 사람이 꼭 나쁘다고만은 생각하지 않거든.”
그야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얼마 전 분리수거에서 들었던 말은 내게 꽤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으니까.
내가 하는 행동이 원작의 캐릭터를 변화시킨다.
사실 당연한 건데도 그 영향력을 처음으로 체감한 순간이었다.
원작에선 단순히 바르고 착한 모범 소녀였던 율리아가 나라는 존재로 인해 괴도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품으며 고뇌하게 되었다.
“그래서 생각이 복잡했던 거야?”
“응. 그런 거 같아.”
샤론뿐 아니라 레이첼 역시 괴도를 싫어한다. 일반적인 사람은 그게 당연한 반응이었다.
“역시 내가 잘못된 걸까?”
분명 괴도를 좋아하는 사람은 일반적이지 않다.
어찌 보면 율리아가 이렇게 고민하며 자책감을 느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나는 그게 나쁜 게 아니라고 생각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그냥 상냥한 위로인 건 아니고?”
“누군가에게 괴도는 자신의 보물을 훔친 나쁜 놈일지 몰라.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가족을 구원해준 고마운 은인이 될 수도 있지.”
마치 지금 그녀처럼 말이다.
“결국 사람마다 처한 상황과 생각은 다를 수밖에 없어. 그걸 단순히 좋다 나쁘다는 흑백으로 구별하는 건 어려울 거야.”
도움이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율리아는 내 말을 조용히 듣고는 한결 밝은 표정이 되었다.
“고마워. 크로는 참 상냥하구나.”
음. 갑자기 그렇게 웃으면서 말하면 조금 부끄러운데.
[이런. 공략해야 할 대상에게 반해버린 것이냐?]
‘제가 율리아를 왜 공략해요.’
그녀는 원작의 메인 히로인이다.
물론 작중에서 주인공과 사귀는 사이까진 아니지만 그건 연애가 메인 소재가 아니기 때문일 뿐이며 분명 둘은 서로 미묘한 호감을 품게 된다.
만약 내가 율리아와 사귄다면 그건 주인공의 인연을 빼앗는 거나 다름없지 않을까. 현재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란 걸 감안해도 찜찜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율리아가 절 좋아할 리도 없겠지만요.’
[물론 네 생각도 존중한다만 너무 딱딱한 생각인 것 같구나. 서로가 좋아한다면 본래의 운명이니 인연 같은 게 무슨 상관이겠느냐.]
여신님의 말도 틀린 건 아니다. 만약 서로 좋아한다면 굳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감정에 충실한 것도 잘못은 아니겠지. 어차피 그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을 테지만.
[사람의 일은 모르는 거란다.]
‘알았으니까 플래그 그만 세우세요.’
“크로? 갑자기 왜 멍하니 있어?”
“아 아무것도 아니야.”
율리아는 고민을 끝낸 것처럼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해결된 것 같아서 다행이네.
“사실 샤론의 의견에는 나도 동감해.”
“응?”
“객관적인 정보만 전달해서 사람들이 알아서 판단하도록 하자는 거 말이야.”
확실히 그런 말을 했었지. 괜히 민감한 주제에 너무 치우쳐서 의견을 표출하다간 반대쪽의 반감을 사기 쉬우니 이상적인 방법이긴 했다. 그렇게 중립을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야.
“결정했어.”
“뭐를?”
“언니한테 인터뷰 요청하려고.”
순간 무슨 말인가 싶어 눈을 깜빡이며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뒤늦게 그녀가 말한 언니가 누구인지 알아차리고 말았다.
“언니라면 괴도한테 도움받았다던···?”
“응. 맞아. 이번 발표에서 사람들한테 레이븐이 베푼 선행도 추가하자. 어때?”
[호오라. 이건 꽤 흥미로운 전개로구나.]
뭐라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주제였다.
“반응이 별로 안 좋을지도 몰라.”
“괜찮아. 중립을 유지하려면 한쪽에 치우친 내용만 넣으면 안 되는 거잖아. 어차피 선택은 듣는 사람이 알아서 할 테니까.”
“물론 그렇긴 하겠지만···.”
말했듯 이건 상당히 민감한 문제다. 단순히 괴도 레이븐의 범죄 사실만 알리는 걸 넘어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까지 덧붙였다간 부정적인 여론의 압박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 압박은 발표를 맡은 율리아에게 고스란히 쏟아지겠지.
과연 평생을 사랑과 관심만 받으며 자라왔던 그녀가 부정적인 압박을 견뎌낼 수 있을까?
“걱정할 필요 없어. 반드시 잘 해낼 테니까.”
사실 그건 원작만 봐도 쉽게 답을 내릴 수 있었다.
율리아는 결코 약한 여자가 아니니까.
“응. 믿을게.”
***
미술관 밖으로 나오니 환한 보름달이 나를 반겼다.
생각보다 율리아와 오래 붙어있어 버렸다. 그래도 원래 목표는 어느 정도 달성했으니 크게 문제 될 건 없으려나.
[이번에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저번보다 더 확실하게 가야겠죠.”
박물관을 털 때 하수도를 이용하면서 솔직히 자만했었다. 이 정도 트릭이라면 누구도 쉽게 알아채지 못할 거라고.
그런 오만함에 발목을 붙잡혀 완전히 망쳐버릴 뻔했다. 셜록이라는 생각지 못한 호적수가 등장한 탓도 있겠지만 결국 근본적 원인은 내 안일한 방심으로 시작된 거니까.
만약 내가 조금만 더 흔적을 지우는 데 신경 썼더라면?
하수도에 들어갈 때 주의를 꼼꼼히 살피며 경계했다면?
처음부터 범죄 트릭을 꼼꼼하게 설계했었다면?
어쨌든 천운이 따라준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 이제부터는 더더욱 확실하고 꼼꼼하게 트릭을 설계할 생각이다.
물론 내가 100% 완벽하게 모든 걸 통제할 수는 없다.
분명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할 테고 성공 확률이 희박한 도박수를 던져야 할지도 모른다. 즉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실패할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노력할수록 가능성은 1%라도 올라간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1%라도 올릴 수 있다면 노력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대략적인 그림은 생각해뒀어요.”
[후후.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일지 기대되는구나.]
계획을 위해선 쉴 시간도 아깝다.
부지런히 움직여 곧바로 첫 단계를 밟아나갔다.
내가 처음으로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마녀의 가게였다.
“후후. 오랜만이네요. 괴도 씨.”
능글맞은 마녀의 인사에 나도 웃으며 화답했다.
“오랜만이라는 얘기가 안 나오게 자주 들러야겠네요.”
그녀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무조건 이득이었다.
꽤 비밀이 많은 사람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비즈니스에선 확실한 장사꾼이니까.
“어머. 그 말은 저한테 호감이 있다는 거군요?”
짓궂은 농담을 많이 던지는 것만 넘길 수 있다면 말이다.
[흥. 저 여자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이지.]
평소엔 하렘을 그렇게 연호하던 여신님이 웬일로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오히려 약간 마녀를 꺼린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
설마 그런 건가?
여신님은 막상 좋다고 들이대면 뒤로 내빼는 타입인 건가?
뭐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넘어가도록 하자.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나요?”
“혹시 그림도 팔고 있나요?”
“물론이죠. 세계적 화가의 명작 컬렉션도 있답니다. 누구를 원하시나요? 고흐? 미켈란젤로? 다빈치?”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것들이 아니었으니까.
“폭풍우 치는 밤의 등대.”
“···아하. 특정한 그림을 원하는 거였군요.”
마녀는 곤란한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아쉽게도 그 그림은 없답니다. 사립 미술관에 전시되어있으니까요.”
없는 것 빼곤 다 있다는 마녀의 가게지만 미술품과 같은 유니크한 물건은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게 일반적이다. 즉 다른 곳에 있으면서 동시에 여기에도 있는 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마녀는 상당한 장사치였다. 설령 가게에 없는 물건이라도 어떻게서든 판매하려 하는 집요한 장사꾼.
“대신 방법은 있죠.”
“과연. 괴도인 저 대신 훔쳐주시는 겁니까?”
“후후. 그건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이니 제외할게요.”
그녀는 내가 처음부터 원했던 것을 빠르게 간파했다.
“대신 진짜와 똑같은 ‘가짜’를 팔아드릴 수는 있죠.”
“당연히 가격은 진품보다 싸겠죠?”
“물론이죠. 거래에 장난질은 하지 않아요.”
그런데 과연 모조품이라고 해도 그림이 뚝딱 가게에서 튀어나올까?
아쉽게도 그렇진 않은 모양이다.
“아쉽게도 당장에는 매물이 없어요.”
“얼마나 기다려야 합니까?”
“음. 제가 매주 목요일에 쉬니까 그때 가져오면 금요일까지 기다리셔야 할 거 같네요.”
그건 너무 오래 걸린다. 변수를 줄이기 위해선 신속하게 계획을 진행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괜히 늑장 부리다가 셜록한테 덜미를 잡히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더 빠르게는 안 되나요?”
“방법이 하나 있긴 해요. 모방꾼에게 가서 직접 주문을 넣으시면 돼요.”
“모방꾼···.”
“여기 카드에 적힌 주소로 가시면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거래는 그쪽에서 알아서 하면 되고요.”
나는 마녀에게 받은 카드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마녀 씨에겐 항상 신세를 지네요.”
“어머. 공짜라고는 안 했는데요. 소개비는 내셔야죠.”
쳇.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했는데 역시 안 통하네.
“얼마면 될까요?”
잠시 고민하던 마녀가 이내 불길한 미소를 지으며 자기 뺨을 톡톡 두드렸다.
“뽀뽀 한 번이면 될 거 같네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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