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6
순간 좌중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심지어 마구잡이로 날뛰는 신입을 제지하러 올라오던 알프레드마저 우뚝 멈춰선 채 멍하니 무대를 바라볼 정도.
그만큼 신입이 꺼낸 한마디는 이 자리의 모두에게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물론 절대다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되레 의심의 눈초리만 쏟아졌다.
“직접 물어본다고? 그게 가능하단 말이야?”
“우리 중 아무도 괴도님이랑 개인적인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는데 대체 무슨 수로 그걸 물어보겠다는 건데?”
그 와중에 율리아는 또다시 움찔하고 있었다.
지난번 그레이스 본가에서 단둘이 얘기를 나눈 걸로 모자라 아예 괴도에게 구해지기까지 했으니까.
“가능해요. 그야 레이븐은 지금 이 자리에 여러분과 함께 있으니까요.”
“···뭐?”
누군가의 되물음은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순간 지하를 밝히던 조명이 일제히 꺼지며 캄캄한 어둠이 공간을 뒤덮었다.
“이건···!!”
“서 설마!?”
돌아오는 반응은 두려움이 아닌 경악과 환희였다. 여기 모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지금의 현상이 무엇을 뜻하는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뒤이어 혼란에 빠진 이들을 침묵시키는 한 사내의 목소리.
“모두 만나서 반가워.”
사실 그들은 그토록 열광하는 괴도의 목소리조차 제대로 들어본 적 없다. 기껏해야 예고된 범행 장소 근처에 몰려들어 먼발치로나마 모습을 구경하는 정도가 전부였으니.
그럼에도 지금 들린 여유 넘치는 미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괴도 레이븐. 그가 정말로 이곳에 직접 등장한 것이다.
격한 반응은 튀어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이 음 소거된 것처럼 숨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 순간을 조금이라도 선명히 기억에 담기 위해서. 다른 요소에 방해받지 않고 오로지 괴도만을 느끼기 위하여.
“우선 고맙다고 인사부터 해야겠네. 솔직히 나를 이렇게까지 좋아해 줄 거라곤 몰랐거든.”
율리아는 레이븐의 모습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어둠이 시야를 가리고 있는 탓에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 바로 옆에 서 있는 블랑카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간헐적으로 몸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에 혹시 문제라도 생긴 건가 싶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율리아.
코앞까지 이동해 블랑카의 표정을 확인하고서야 떨림의 원인을 깨닫게 되었다.
겁을 먹었거나 패닉에 빠진 것이 아니었다. 괴도를 마주했다는 사실에 압도적인 기쁨을 느끼느라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것뿐이었으니까.
“방금 나온 얘기는 전부 들었어. 먼저 아까 무대에 나와서 얘기해준 친구한테 고맙다는 말부터 전할게. 그리고 내 생각이 어떤지 물었으니까 그것도 답해줘야겠지.”
레이븐 본인과 신입을 구분 짓는 감사 인사에 몇몇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지금까지의 흐름만 봤을 때는 무대에 나선 신입이 사실 괴도였다는 추측이 자연스럽게 나올 만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보다도 이어질 괴도의 대답이 더 중요했기에 사람들은 의문을 잠시 뒤로 미뤄두고 귀를 쫑긋 세웠다.
“나를 영웅이라 여기는 것 자체는 상관없지만 나는 딱히 내가 영웅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나는 그냥 괴도 레이븐이니까.”
사실 너무나 당연해서 김이 샐 정도의 대답이었으나 괴도 레이븐이 직접 등판해 확답을 내렸다는 자체만으로 가진 의미는 매우 컸다.
본인이 직접 자신을 영웅이 아니라 부정한 이상 드레이크가 시도하던 괴도 영웅화는 종말을 맞이한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안 돼···!!’
이대로면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워진다.
드레이크는 곧바로 위기를 감지하고 이를 꽉 깨물었다. 이렇게 상황이 끝나버리면 숙원도 이루지 못하게 된다.
최후의 발버둥을 하듯 그는 벌떡 일어서서 무대를 향해 외쳤다.
“영웅이시여! 저희에게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이렇게 어둠 속에서만 얘기하는 걸로는 부족합니다!”
“내가 모습을 보인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당신을 추종하고 따르는 자들입니다! 얼굴을 보여주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은 부탁이지 않습니까?!”
이 목소리의 주인이 진짜 괴도 레이븐이란 것쯤은 드레이크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판을 뒤집기 위해선 변화를 주어야만 했다. 이런 어둠 속에서는 무슨 수를 써도 자신이 주인공이 될 수가 없었으니.
“그걸 바란다면 그렇게 해줄게. 딱히 어려운 부탁도 아니니까.”
그와 함께 하나의 조명이 켜지더니 무대의 가운데를 밝혔다. 그곳에는 모두의 상상과 똑같은 괴도의 모습이 공연의 주인공처럼 서 있었다.
드레이크가 바랐던 것은 이게 아니었다. 조명이 전부 켜지면서 평소와 똑같은 지하로 돌아왔어야 했는데 이래서야 괴도만 더더욱 집중되는 꼴이지 않나.
사람들은 레이븐을 가까이서 보게 되자 그제야 현실임을 깨달았는지 긴 침묵을 깨트리고 환호하기 시작했다.
혼잣말로 감격을 표현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아예 함성을 지르거나 박수갈채가 쏟아지기도 했다. 다양한 방식으로 제각각 괴도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추종자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드레이크가 큰소리로 외쳤다.
“보십시오! 우리에게 이미 당신은 누구보다 위대한 영웅입니다! 이 모순된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해준 진정한 영웅이란 말입니다! 부디 겸손을 거두어주십시오!!”
그 간절함이 잔뜩 묻어나오는 애원에 고개를 끄덕이는 자들도 있었다.
드레이크가 여태껏 정성 들여 닦아놓은 기틀은 제아무리 괴도가 직접 등판한다 해도 한순간에 사라지기 어려울 만큼 깊숙이 새겨진 탓이었다.
애초에 괴도 추종자들에겐 그리 틀린 말도 아니었다. 정말로 그들에게는 레이븐이 영웅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때 드레이크가 있던 정반대 쪽에서 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인이 아니라는데 왜 너만의 생각을 강요하는 거냐. 드레이크?”
“···뭐?”
이렇게 대놓고 반박이 돌아올 거라곤 예상하지 못한 드레이크는 이윽고 저 목소리의 주인이 바로 반대 파벌의 수장임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얼굴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목소리만으로 사람을 단번에 구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누구냐? 앞으로 나와라!”
“처음부터 이상했어. 궁전을 터는 게 레이븐이 군주제 철폐를 원하는 증거라고? 마침 본인이 직접 등판했으니 대놓고 물어보면 되겠네!”
“뒤에 숨어서 얘기하지 말고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란 말이다!”
당연히 제 발로 순순히 나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설상가상 이 상황을 그냥 넘어갈 리 없는 레이븐이 씩 미소를 지으며 냉큼 질문에 답변을 내놓았다.
“나는 그런 정치적 사안에는 관여하지 않는데. 그건 내가 아니라 의회의 높으신 분들이 처리할 일이니까.”
이쯤 되니 좌중 사이의 동요는 눈에 띌 만큼 뚜렷해졌다.
그야 당연했다. 지금껏 줄곧 드레이크의 일장 연설을 들어오며 괴도는 당연히 현재의 체제에 불만족하고 저항하는 급진적 성향의 혁명가로 인식되고 있었으니까.
드레이크가 말하는 영웅이란 사실상 혁명 선동가를 뜻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솔직하게 말해. 여태껏 괴도를 영웅으로 추앙했던 건 네 개인적인 사상을 퍼트리기 위한 수단이었던 거잖아!”
이미 드레이크의 속셈을 간파한 사람이 내부에 있었다. 그 사실에 살짝 감탄하며 레이븐은 펼쳐지는 상황을 무대 위에서 흥미롭게 구경했다.
“무 무슨 헛소리를···!! 내가 여기를 만들었다! 뜻이 맞는 친구들을 위해 돈을 쏟아부어 지하를 가꿔나갔다고! 그런 나를 아무 근거도 없이 비방하다니!”
최대한 자신을 변호하며 부르짖었지만 어째선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 누구도 나서서 그를 두둔해주지 않았다.
철컥! 그 순간 어떤 예고도 없이 모든 조명이 동시에 복구되었다.
갑자기 환해진 광량에 눈을 찌푸리며 손바닥으로 눈가를 가리던 드레이크는 이내 천천히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
그에게로 쏟아지는 무수한 눈빛들.
그 속에 담겨있는 감정은 대부분 빈말로라도 호의적이라 부르기는 힘들었다.
‘어째서?’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공을 들였던가. 이 지하를 세우는데 엄청난 시간과 돈을 쏟아부었다.
설령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어도 억지로 참아내며 친구라고 불러주었다.
전부 원대한 숙원을 위해 이를 악물고 쌓아왔단 말이다.
그런데 왜 단 한 번에 볼품없는 모래성처럼 무너지려 한단 말인가.
“근거? 이미 너 빼고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을걸.”
천천히 드레이크의 앞으로 걸어오는 반대파 수장.
마침내 확인한 얼굴을 보며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예상과 달리 대단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핵심 간부는커녕 자신과 교류조차 거의 없어 얼굴만 간신히 익힌 별 볼 일 없는 남자였다.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남자는 드레이크를 보며 싸늘하게 대답했다.
“지금도 봐봐. 넌 오직 너한테 이득이 되는 쪽에만 집중해. 이 지하에 모인 평범한 사람들이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아.”
“그게 무슨···.”
“그럼 물어볼게. 처음 레이븐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어떤 생각을 했어?”
드레이크는 답을 내놓지 못했다. 어떤 생각을 했냐니. 그야···.
“비상이라고 생각했겠지. 이대로 괴도가 영웅이란 이름을 부정하면 네 입지가 위태로워질 테니까. 그래서 모습을 보여달라며 큰소리친 걸 테고.”
곧이어 남자는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그것 때문에 모두가 네 속내를 깨달은 거거든. 네 말대로면 우리의 위대한 영웅님과 처음으로 목도하는 자리에서 그렇게 악착같이 소리를 지르면서 떼를 쓰니까 방해되잖아.”
그제야 드레이크는 자신을 바라보는 친우들의 눈빛에 담긴 감정을 눈치챌 수 있었다.
감히 괴도와의 첫 만남을 방해한 훼방꾼.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낸 괴도 추종자는 상상 이상의 광신적 집단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혁명 조직이 아니라 사이비 종교였던 거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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