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9
흐름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점심시간 눈썹을 치켜세운 율리아를 필두로 우리는 우르르 보건실로 몰려갔다.
그리고.
“어머! 네가 길버트 씨 조카구나! 만나서 반가워!”
한껏 반겨주는 조앤의 반응에 즉시 율리아의 표정이 풀리며 어리벙벙한 귀족 아가씨로 돌아오고 말았다.
“어? 저희 삼촌이랑 아는 사이세요?”
“후후. 우리는 전쟁터에서 우정을 쌓은 전우였지. 나는 군의관이라 전투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말이야.”
“우와···. 군인이셨구나! 대단해요!”
아니 분명 아까 전까지만 하더라도 담판을 지을 것처럼 이까지 갈더니. 순식간에 언제 그랬냐는 듯 태도가 180도 바뀐 모습에 황당함이 들었다.
삼촌의 영향 때문인지 율리아는 군인에 대한 존경심이 상당했던 모양이다. 조앤이 군의관 출신인 걸 깨닫자마자 반짝이는 눈동자로 조잘조잘 떠들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두 사람.
다행히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는지 뒤에서 지켜보던 레이첼도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쟤 지금 뭐 하는 거냐?”
“음. 좋은 게 좋은 거 아닐까.”
“너야 좋겠지. 자연스럽게 여자 하나 더 꼬셨으니까.”
“그런 거 아니라니까!?”
정말 억울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조앤은 내 이상형과 억만 광년 떨어져 있는 수준인데 대체 어째서. 그리고 애초에 난 지고지순한 일편단심 순애파라고.
[쯧쯧. 우매한지고. 이토록 설득력 떨어지는 주장이 또 있을까.]
‘그게 무슨 소리죠. 여신님?’
[이미 숱한 여자들을 유혹한 주제에 본인은 그럴 마음이 없다 하니 이보다 뻔뻔한 언행 불일치가 또 어디 있겠느냐.]
누가 들으면 진짜 오해하겠네.
내가 여자들을 유혹했다고? 막말로 나한테 대놓고 호감을 표현한 여자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아리엘과 레아가 전부였다.
그중 아리엘은 바닷속에 사는 인어이니 현실적으로 이어지긴 힘들고 레아는 내가 아니라 변장한 뤼팽을 좋아하는 거니 진정한 사랑이라 보기 어려웠다.
그나마 후보를 억지로 추가한다면 율리아와 마녀 정도?
그마저도 율리아는 친구 간의 우정에 더 가까운 느낌이고 마녀는 애초에 성격 자체가 그런 식으로 남을 놀리는 걸 좋아하는 듯하니 역시 패스.
결국 아무도 없다. 어쩌다 보니 엮이게 된 여자들이 많다는 것까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 뿐 나를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여자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정말 너의 아둔함에 머리가 지끈 아파져 오는구나. 이게 가식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게 경악스러울 따름이다.]
그래. 전부 이 되먹지 못한 여신 때문이다.
하도 하렘 하렘 노래를 부르며 가스라이팅을 시전하니 나조차도 순간 헷갈릴 지경이 되어버렸으니까.
상대는 그냥 인간 된 도리로서 호의를 베푸는 것일 뿐인데 괜히 거기에 착각해서 ‘혹시 나한테 호감이 있는 건가?’ 이런 흑역사로 남을 망상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여신님이 하는 말에는 철저한 무시가 정답이었다.
[······.]
그렇게 혼자서 연애관에 대해 결론을 내리던 와중 현실에선 조앤이 율리아를 넘어 다른 아이들과도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안녕?”
“네. 안녕하세요.”
다른 애들과는 달리 낯가림이 꽤 있는 편인 레이첼은 고개만 까딱 숙이며 건성건성 인사했다.
그러자 움찔하며 살짝 멈칫거리는 조앤.
딱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감이 왔다. 요즘 애들은 무섭다느니 선생님한테 대놓고 반항하는 거라느니 불량생 양아치라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무서워서 건드리지는 못하는 느낌 아닐까.
이해는 간다. 워낙 레이첼이 사납고 드센 인상이니까.
성격만 따졌을 땐 지나가 상위호환이라 분류했었지만 사실 겉모습으로만 따지면 작고 여리여리한 지나와 달리 레이첼은 키도 꽤 커서 길쭉길쭉하고 근육도 붙어있는 육체파라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그래도 천성이 나쁜 건 아닌데다 율리아 같은 모범생에겐 은근히 고분고분해지는 상성도 존재했다. 지금 또한 마찬가지의 상황이 펼쳐졌다.
“레이첼. 선생님껜 공손하게 인사해야지!”
“잔소리는···. 내가 뭐 반말이라도 했냐. 인사 제대로 했잖아.”
“고개만 까딱거렸잖아. 제대로 다시 해.”
“으윽.”
한숨을 내쉬면서도 별말 없이 허리를 푹 숙이며 재차 인사하는 레이첼.
그에 조금이나마 조앤의 표정도 밝아졌다. 여전히 무서워하고 있는 느낌이긴 하지만.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한 사람.
“어라?”
조앤은 샤론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대놓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면서까지 유심히 샤론을 살피는 조앤. 무례한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구나.
“줄리엣 씨? 맞죠!? 우와! 아카데미 학생이셨어요?”
얼마나 반가웠으면 손뼉까지 짝짝 쳐댔지만 안타깝게도 샤론은 무심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단칼에 부정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줄리엣이 아니라 샤론이에요. 선생님은 오늘 처음 뵙고요.”
“어···? 그 그런가? 하지만 너무 닮았는데···.”
이 타이밍에 내가 굳이 끼어들어봤자 좋을 게 없어 보여 그냥 잠자코 있기로 했다.
그러자 의외의 장소에서 반응이 튀어나왔다.
“줄리엣이면 혹시 그 비서 말하는 건가?”
“아! 그때 봤던 분?”
레이첼과 율리아의 말에 나도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둘 다 줄리엣을 봤었지.
“어라? 혹시 줄리엣 씨가 누구인지 아니?”
“네. 저희 도와준 재단에서 일하는 직원분이에요.”
“그럼 설마 너희가 뤼팽 재단 장학생들인 거야? 이런 우연이 다 있네!”
그 뒤부터는 또 뤼팽에 관한 주제로 신나게 떠들어대기 시작하는 이들.
심지어 이번엔 낯을 가리던 레이첼까지 참전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기 바빴다.
대체 여자들은 왜 끊임없이 수다를 떠드는 걸까.
뤼팽에 대해 전혀 모르던 달리아는 어쩜 저리 자연스레 대화에 끼어든 건지 의문이 들었다.
결국 나와 샤론만 덩그러니 남아 시끌벅적한 여인들의 수다를 멍하니 구경했다.
역시 너밖에 없구나. 그래도 끝까지 내 곁에 있어 주는 샤론에게 작은 감동을 느끼고 있을 때쯤 사악한 적의 우두머리 조앤이 결국 그녀에게까지 마수를 뻗쳤다.
“이렇게 예쁜 얼굴이 둘이나 있다니. ···생각해 보니까 한 명 더 있던 것 같은데?”
갑자기 여기서 그 얘기를 꺼낸다고? 그러고 보니 샤론이 정말 셜록이 맞다면 조앤에 관한 것도 전부 기억하고 있을까? 알면서 처음 보는 척 연기하고 있는 거려나?
문득 피어난 호기심에 조앤이 계속 얘기하도록 내버려 둔 채 샤론에게 주의를 기울였다.
“맞다! 샬럿! 지금 보니까 이름도 되게 비슷하네!”
조앤은 의외로 금방 카지노에서의 기억을 떠올려냈다.
하긴 금방 잊어버릴 수준의 외모가 아니었으니까. 누구라도 드레스 차림의 그녀를 봤다면 상당히 인상 깊게 기억에 남는 것이 당연했다.
무슨 얘기인지 모르는 다른 아이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고 샤론은 역시나 무뚝뚝한 평상시의 모습을 유지 중이었다.
한편 기억을 떠올려낸 조앤은 둘이 동일 인물이라 확정을 내렸는지 딱 걸렸다는 눈빛으로 샤론을 심문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 적당히 가명으로 둘러대고 카지노에 왔던 거지? 아카데미 학생이란 게 밝혀지면 안 되니까. 그렇지?”
대답은 즉각 튀어나왔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요.”
“···진짜 아니야? 나 기억 안 나? 조앤이잖아. 그때 말없이 휙 사라져서 얼마나 섭섭했는지 알아?”
“저는 카지노에는 한 번도 가본 적 없어요.”
너무나 단호한 부정이었기에 조앤도 긴가민가한 표정이 되었다. 거기에 뒤이어 어시스트처럼 덧붙는 주변인들의 진술.
“쟤가 카지노에 몰래 갔다고요? 그럴 애가 아닌데.”
“선생님이 닮으신 분을 착각하신 게 아닐까요?”
“그런가···? 아니 그렇다기엔 너무 닮았는데. 정말이야? 아니면 혹시 쌍둥이나 자매는 없니? 이름이 줄리엣이라든가 아니면 샬럿이라든지.”
그러자 또다시 고개를 가로젓는 샤론.
“외동이에요.”
“···흠. 아무리 봐도 수상한데. 역시 거짓말이지? 샬럿 맞잖아!”
이건 또 신선하네. 설마 눈앞에서 대놓고 부정당했는데도 이렇게 꿋꿋이 본인의 의지를 관철하다니. 이 정도면 굳건한 신념이 아니라 완고한 고집에 가깝지 않을까.
아무튼 조앤은 당사자의 말 따위는 무시하고 본인이 믿고 싶은 대로 끝까지 밀고 나가려는 모양이다.
“기대하는 게 좋을 거야. 이 천재 명탐정 조앤 왓슨 님께서 네 정체를 파헤쳐줄 테니까.”
“······.”
어떤 의미로는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나도 저렇게 아무 근거 없이 직감에만 따라서 결론을 내린다면 얼마나 편할까. 물론 편한 것과 별개로 끝의 결과는 좋지 않을 가능성이 크겠지만.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레이첼은 살짝 머뭇거리다 내게 속삭였다.
“저 쌤 상태가 좀 안 좋은 거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너무한 거 아니니. 때로는 그런 팩트가 무엇보다 상처가 될 수도 있다고.
“진짜 저런 여자가 네 취향이냐?”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크크. 농담 몇 번 했다고 정색하는 거 봐라. 귀엽기는.”
아니. 누가 봐도 그건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어.
어쨌든 가까스로 점심시간이 끝나면서 보건실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끝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안도하려던 찰나 율리아가 턱을 짚은 채 진지하게 말했다.
“이제 이해했어. 크로는 저런 성숙하면서도 순수한 스타일이 좋은 거구나.”
···아직도 끝이 아닌 모양이다. 제발 그만해줘.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요즘 허리가 너무 아파용.. ㅠㅠ
1시간도 못 앉아 있어서 글도 잘 안 써지네용..
내일 병원에 한번 가보려구용..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