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4
며칠 만에 다시 만난 아주머니는 밝은 표정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어머. 크로 왔구나? 어서 오렴~.”
“안녕하세요. 아주머니께서 놀러 오시라고 하셨다길래 염치 불고하고 왔어요.”
내 말을 들은 아주머니는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내가 놀러 오라고 했다고?”
“네?”
“······.”
자연스레 옆으로 향하는 눈길. 내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리는 지나.
살짝 어색한 침묵이 감돌던 가운데 아주머니가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환기하였다.
“뭐가 됐든 놀러 오면 좋지! 앞으로도 부담 갖지 말고 자주 오렴!”
“하하. 감사합니다.”
“그럼 나는 부엌에서 저녁 만들고 있을 테니 기다려줄래?”
“아 그럼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됐어. 남자애들이 주방에 들어와서 할 게 뭐가 있다고. 손님이니 푹 쉬고 있으렴.”
당신의 자녀분은 남자애가 아니라 여자애인데요.
물론 성별에 따라 부엌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건 매우 시대착오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그런데 여기는 19세기잖아? 그럼 시대착오적인 게 아니라 시대 고증을 잘 지킨 거지.
아주머니가 부엌으로 가시고 단둘만 남게 되자 나는 지나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결국 내 시선을 버티다 못한 녀석이 먼저 버럭 화를 내며 실토했다.
“뭐! 약속했잖아! 우리 엄마 도와주겠다고 네가 먼저 얘기했잖아!”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갑자기 왜 그래.”
“으으···!! 됐어!!”
아 삐졌나?
저대로 놔두면 한동안 귀찮아질 것 같았기에 곧바로 주제를 전환하였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좀 어때? 혹시 그날 이후로 뭔가 달라진 건 없어?”
“······.”
이런 진중한 얘기에서까지 삐져있을 수는 없겠지.
역시나 지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곧바로 순순히 입을 열어 술술 얘기하기 시작했다.
“크게 다른 건 없어. 내가 일부러 얘기를 유도해봐도 일부러 피하는 것 같아.”
“무의식중에 트라우마를 떠올리는 걸 꺼리는 것 같네. 역시 하루아침에 해결하기는 무리려나.”
사람의 정신과 관련된 부분은 매우 민감하기에 섣불리 건드렸다간 아주 위험할 수도 있다. 그러니 최대한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하양이를 교육하는 것도 결국 정신과 관련된 문제 아닌가?
현재 가장 중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두 문제가 이렇게 겹치는 부분이 있다니. 상당히 공교로운 우연이다.
이걸 어떻게 잘 엮어보면 두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하양이한테 하는 것처럼 아주머니를 간식 훈련하는 건 말이 안 되고. 뭔가 활로가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손에 잡힐 듯 말 듯 한 애매한 상황이었다.
“저녁 먹으러 오렴~!”
아주머니의 부름에 고민에서 빠져나와 부엌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 차려진 진수성찬을 보니 순간 고민마저 잊고 군침이 돌 정도였다.
그래. 일단 먹고 나서 생각하자.
“잘 먹겠습니다!”
맛있다. 이렇게 맛있는 집밥을 먹고 있으니 문득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직원들이 떠올랐다. 지금쯤 슬슬 퇴근했으려나? 아마 줄리엣은 계속 회사에 남아 업무를 처리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직원들을 채용하고 회사가 제 궤도에 무사히 안착한 이후로 나는 사장식 출퇴근을 유지 중이었다. 쉽게 말해 내가 가고 싶을 때 들르고 오늘처럼 다른 일이 있을 때는 아예 안 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야 매우 간단했다. 어차피 줄리엣이 알아서 다 해줄 테니까.
음. 이렇게 보니까 나 너무 글러 먹은 사장인가?
분명 처음에는 줄리엣이 나를 의지하게 만들려고 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반대로 내가 줄리엣에게 잔뜩 의지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러다 줄리엣이 내 뒤통수를 때리면서 모두 프랑크 왕국에 갖다 바치면 어떡하지?
솔직히 그래도 이해할 만큼 내가 심하게 부려 먹긴 했다. 설마 내 비참한 최후의 시나리오가 그거였나?
“밥 먹다 말고 뭐 하냐?”
옆에서 들려오는 지나의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래. 이럴 때가 아니었다. 서두르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밥만 먹고서 돌아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 조금이라도 아주머니와 대화를 시도해 치료의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우선 부담 없는 주제로 천천히 접근해보자.
“아주머니는 요리를 정말 잘하시네요.”
“후후. 맛있게 먹어줘서 고마워.”
“혹시 진한테 요리를 가르쳐줄 생각은 없으세요?”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살짝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는 지나.
저 반응을 보니까 아주머니랑 다르게 요리에 자신은 없나 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지금처럼 내가 만들어주면 되는데. 나는 우리 아들이 맛있게 먹어주기만 해도 행복한걸.”
아주머니가 싱긋 웃으며 얘기하자 지나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자신을 위하는 엄마의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자신을 딸이 아니라 아들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겠지.
나는 슬쩍 눈치를 보다 회심의 공격을 날렸다.
“그래도 나중을 생각해야죠. 아카데미 졸업하고 나면 언젠가 결혼도 할 텐데 요리를 잘하면 남편도 분명 기뻐할걸요.”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두 모녀 다 내 말을 곧장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 모습.
눈을 여러 차례 깜빡인 아주머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남편?”
오. 이건 좋은 신호다. 보통 지나의 성별에 관련된 주제가 나오면 트라우마로 인해 아예 넋을 놓던 원래의 반응과 달리 지금은 멀쩡해 보였으니까.
너무 황당해서 트라우마가 자극될 겨를도 없었던 건가?
오히려 아주머니보다도 지나의 반응이 더 격렬했다.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것이 이쪽이야말로 트라우마 스위치가 켜진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
“······.”
그렇게까지 반응하니 괜히 내가 더 민망해지는데.
솔직히 그렇게 충격적인 발언도 아니잖아? 그냥 농담 삼아서 가볍게 꺼낼 수도 있는 얘기 아닌가? 결혼이란 단어가 이렇게나 무겁게 받아들일 단어였나?
혹시 그대로 돌이 되어 죽은 건 아닐까 걱정되는 마음에 손가락으로 볼을 쿡 찔러보았다.
음. 말랑말랑하네. 석화 마법에 당한 건 아닌 모양이다.
손가락의 감촉 덕분인지 그제야 마법에서 깨어난 것처럼 다시 살아 숨쉬기 시작하는 지나.
얼굴이 서서히 빨개지더니 이내 완전히 홍당무처럼 새빨갛게 익어버렸다.
“뭐 뭐 뭐 뭐···.”
이런. 석화 마법에 이어서 유아 퇴행인가.
한 글자만을 옹알이처럼 반복하는 모습을 보니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한 듯했다.
그런 아들(딸)의 모습이 굉장히 낯선지 눈을 크게 뜨고 우리를 번갈아 바라보는 아주머니.
저 반응은 설마···.
지나가 딸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건가!?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은 아주머니는 우리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 거였구나. 두 사람의 사이가 그냥 동성 친구라기엔 어딘가 이상해 보였는데.”
그래요. 알아차리셨군요!
저희는 사실 동성이 아니라 이성 지간이라는 것을!
즉 당신이 여태껏 아들이라 알고 있던 자식이 사실은 딸이었다는 것을요!
나는 기쁨에 새어 나오는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아주머니.”
“정말이었구나···. 솔직히 아직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엄마로서 응원할게.”
“네. 응원···. 네?”
갑자기 응원이란 단어가 여기서 왜 튀어나오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대답이 튀어나오자 당황하던 것도 잠시 곧 이어진 그녀의 말에서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두 사람의 앞길에 많은 고난이 있겠지만 그래도 나는 엄마로서 두 사람을 언제나 응원할게! 제일 중요한 건 서로를 사랑한다는 마음인 거니까···!”
“네? 어···. 네?”
아니 잠깐만. 그런 거 아니야. 왜 난데없이 사람을 동성애자로 몰아가고 있는 건데.
갑자기 데자뷰가 떠오른다. 분명 여기 오기 전에 반에서도 비슷한 구도가 펼쳐졌던 기분이···.
이미 오해가 확신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듯한 아주머니를 보며 당장 해명하지 않으면 상당히 곤란해질 것임을 직감했다.
“야. 너도 옆에서 듣고만 있지 말고···.”
지나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고개를 옆으로 돌린 순간.
녀석의 눈이 뱅글뱅글 돌고 있음을 깨닫고 지금 이놈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전력임을 깨달았다.
“그 그런 거였어···? 사실 나를 좋아해서···. 그래서 결혼하면 요리를···.”
“어이. 제발 정신 차려줘. 너까지 이러면 나 진짜 힘들어.”
머리가 아프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분명 내 계획은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아무래도 오만한 착각에 빠져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거라면 요리도 가르쳐줄게! 사랑하는 사람이 해준 요리를 먹고 싶은 거야 당연한 거였는데 내가 그런 것도 모르고···.”
“사 사랑하는 사람···!? 뺀 뺀질이 주제에···!!”
“하하. 이젠 나도 모르겠다.”
아아 이것이 바로 ‘파국’이라는 건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아카괴도가 백만 조회수를 달성했어용!!
우왕 짝짝짝!!!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