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8
여왕이 건넨 뜻밖의 호의는 마냥 달갑게 받아들이긴 힘들었다.
“도움? 구체적으로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가문의 위세뿐만 아니라 그 개인 역시 강고한 자다. 만약 그가 정말 반란의 주모자라면 혼자 상대하기 힘들 터. 원군을 붙여줄 테니 함께 움직이거라.”
무슨 뜻인지 대충 이해했다. 내 대답은 당연히 정중한 거절이었다.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정말 그 백작이 그만큼 대단한 영향력을 갖춘 대귀족이라면 왕실이 섣불리 움직이는 건 되려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니까요.”
여왕은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살짝 눈가를 찌푸리고 있었다.
“그 말은 반란자의 정보를 알아냈는데도 그냥 가만히 있으란 말이냐? 네가 먼저 움직여서 전부 해결할 때까지 손가락이나 빨면서?”
“명백한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지금 네가 밑에서 증언을 듣고 나오는 길인 걸로 아는데.”
“맞습니다. 하지만 타국 출신인데다 학생에 불과한 제 말을 누가 믿어주겠습니까? 여왕님이 믿는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릴 겁니다.”
얘기가 이어질수록 그녀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짐이 믿으면 그걸로 끝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을 텐데요. 귀족이 반란에 가담했다는 것 자체가 왕권이 흔들리고 있다는 방증 아닙니까? 이런 때일수록 경거망동해서는 안 됩니다.”
이대로 얘기를 끝내면 그냥 시비를 거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 곧바로 뒤이어 해명을 덧붙였다.
“여왕님과 갈라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제가 먼저 저택으로 향해 샤론을 찾으면서 증거를 수집할 테니 확실한 증거가 나오면 그때 여왕님께서 정리해주시죠.”
뭐라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지만 여왕은 결국 긴 한숨을 내쉬며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대체···. 넌 평범한 소년이 아닌 것 같구나. 솔직히 말해라. 넌 누구지?”
나는 여왕을 스쳐 지나가며 무심결하게 대답했다.
“그냥 평범한 아카데미 학생입니다.”
***
백작의 저택은 궁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슬슬 동이 트기 얼마 남지 않은 시각. 하늘이 조금씩 차가운 새벽의 푸른빛을 머금기 시작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걸음을 내디뎠다.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저택의 정문 쪽은 경비가 삼엄했다.
물론 나는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 채 정문으로 향하지는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그러는 건 용감한 게 아니라 멍청하고 미련한 짓이다.
훨씬 쉽고 빠르면서 안전하게 돌파할 방법이 있는데 왜 굳이 경비와 싸워준단 말인가?
나는 괴도 레이븐이다. 제아무리 강한 경비라도 내 존재를 눈치채고 잠입을 막아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무언가를 훔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되찾기 위해 움직인다니.
막상 지금의 상황을 돌이켜보니 평상시와 반대되는 구도에 아이러니함이 느껴졌다.
솔직히 말하면 살짝 두렵기도 했다. 지금까지의 흐름으로 보았을 때 상대가 평범한 일반인일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지하 감옥에 갇혀있던 동료에게 강력한 발설 엄금의 마법을 걸어놓은 것도 신경 쓰이지만 그보다도 숙소에서 내게 보여주었던 환상이야말로 무시할 수 없는 근본 원인이었다.
만약 불타는 파리의 전경이 백작이 시전한 마법이라면 적어도 정신 마법에 한해 그는 나보다 더 뛰어난 실력을 갖췄을지도 모른다.
헷갈려선 안 된다. 최우선 목표는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아니라 샤론이다. 설령 이곳에 백작이 없더라도 샤론이 갇혀있다면 괜히 더 엮이지 말고 그녀만 구해서 빠져나가는 것이 이득일지 모른다.
이곳이 내가 예측한 대로 레지스탕스의 본거지가 맞다면 샤론도 분명 이곳 어딘가에 갇혀있을 것이다.
그리고 줄리엣의 모습을 흉내 내던 정체불명의 마법사 또한 이 근처에 있을 확률이 높다.
괜찮다. 보험은 이미 마련해두었으니까. 방심하지만 않으면 큰 문제 없이 해결할 수 있으리라.
저택 내부는 상당히 넓었다. 이 정도면 런던의 그레이스 공작가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수준.
하지만 그만큼 차이점도 명확했다. 그레이스 가문의 저택에선 오랜 역사에 대비되듯 뽐내지 않는 절제미가 느껴졌다면 이곳은 귀족만이 지닌 고귀함이 가득 넘쳐흘렀으니까.
그렇기에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택만 둘러봐도 느껴질 만큼 귀족으로서의 프라이드가 엄청난 백작이 대체 왜 혁명에 가담한 거지? 신분제가 철폐되고 모두가 평등해지면 가장 불이익을 얻는 자가 바로 몽테크리스토 백작일 텐데?
불현듯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예 모르는 것이 아니라 너무 자연스럽게 망각해버린 건 아닐까.
하지만 고민해도 당장 떠오르는 답은 없었다. 지금은 그보다도 샤론을 구하는 게 우선이다. 추리는 샤론을 데리고 이 위험한 저택을 빠져나간 뒤에 함께해도 충분하니까.
나는 상념을 뒤편으로 미뤄둔 채 다시 저택 탐색을 재개했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분명 환상 속의 줄리엣은 동이 트기 전까지 샤론을 찾아야만 한다고 했었지. 해는 벌써 지평선 너머로 슬그머니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창가를 타고 넘어오는 햇볕이 따스해질수록 내 마음은 초조해져 갔다.
‘어디 있는 거야···!?’
생각보다 너무 넓은 공간. 심지어 저택 안에서조차 곳곳에 경비가 배치되어 있어 그들의 눈을 따돌리는데도 시간이 지체되었다.
혹시나 지하에 있을까 해서 가장 먼저 내려가 봤지만 제대로 허탕을 치고 난 뒤에는 저택 전체를 이 잡듯이 뒤지는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한 층씩 위로 올라가며 마침내 저택 최상층의 집무실까지 도달했을 때.
그 안에서 의자에 묶여 제압되어있는 샤론을 발견하였다.
“샤론!”
기절한 듯한 소녀를 보자마자 황급히 달려가며 이름을 외쳐보았으나 곧 내 움직임을 멈춰 세우는 방해꾼이 등장했다.
“방정맞게 쏘다니지 마라. 애송이.”
창가를 향해 등을 돌린 채 여유롭게 와인을 홀짝이는 정장 차림의 사내.
본능적으로 그가 이 사태의 주범인 몽테크리스토 백작이란 사실을 눈치챘다.
몸을 한껏 긴장시키며 상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펼쳐질 전투에서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승산이 높을지 어지럽게 계산을 이어갔다.
하지만 상대는 그런 하찮은 놀음 따위에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 내게 시선조차 건네지 않고 창밖만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태도가 오히려 상대를 향한 경각심을 최대로 끌어올려 나는 조금도 방심하지 않은 채 그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왜 샤론을 납치한 거지?”
“그게 열쇠니까.”
열쇠? 딱 잘라 해석하기 모호한 상징적인 비유에 자연스레 눈살이 찌푸려졌다.
“나한테 환상을 보여준 이유는?”
“그게 각본이니까.”
열쇠에 이어 각본. 다른 걸 물어봐도 어차피 비슷한 대답만 튀어나오겠지.
그와의 문답을 이어갈 필요성을 더는 느끼지 못해 본격적인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대 쪽에서 먼저 내게 질문을 던졌다.
“참으로 아둔하구나. 아직도 깨닫지 못한 것이냐?”
“···그렇게 답답하면 그쪽부터 좀 알아듣게 얘기하는 게 어때?”
백작은 와인으로 목을 축인 다음에 내 질문에 답하기 시작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최근 네놈이 겪은 일련의 과정이 전부 우연이라고 믿느냐?”
나는 곧바로 답할 수 없었다. 사실 제대로 정곡을 찔렸으니까.
수학여행이 시작된 이후부터.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하루하루가 너무 스펙타클했다.
내가 원했던 건 단지 괴도로서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는 것뿐인데. 정신 차려 보니 어느샌가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사건들이 매일 나를 덮쳐왔다.
“프랑크의 혁명을 꿈꾼다는 레지스탕스의 수장이 어째서 브리타니아의 소녀를 납치한 건지 위화감이 들지 않나?”
처음부터 계속 생각했던 의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대가 샤론을 납치할 이유가 없는데. 심지어 대놓고 숙소에 테러를 일으켜 아카데미의 노골적인 반감을 사면서까지.
“머릿속 한편에선 답을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자꾸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찜찜함이 맴돌지 않나?”
가장 짜증 나는 건 내가 이 모든 수수께끼의 답을 이미 찾은 것 같다는 기이한 직감이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한 것 같으니 답을 알려주지.”
대체 상대는 정체가 뭐길래 내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전부 알아맞히는 거지?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샤론을 구해야 한다는 목적조차 잊어버린 채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미 방의 흐름은 완전히 백작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현재의 체제가 유지되어야 이득임이 분명한데도 혁명에 동조하는 인물. 나 이전에도 만난 적이 있지 않나?”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잊고 있던 기억의 정체를 깨닫고 말았다.
왜 내가 이 저택을 보고 찜찜한 위화감을 느꼈던 건지 알아차렸다.
이전에도 똑같은 생각을 했었으니까.
프랑크가 아닌 브리타니아에서 혁명을 부르짖던 자들.
율리아가 새로운 리더가 되기 전의 괴도 추종자 집단.
드레이크의 뒤를 쫓다 발견했던 기묘한 광경.
···라파노. 그 이름을 곱씹자 모든 기억이 되살아났다.
마침내 창가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돌아보는 백작의 얼굴이 낯익게 다가왔다.
“이제야 떠올렸나 보군. 그때 생쥐처럼 도망가던 뒷모습이 난 아직도 생생한데.”
라파노의 저택을 염탐하다 정원에서 맞닥뜨렸던 정체불명의 강자.
드라칸도 집행자도 아닌 제삼의 수수께끼 같던 존재.
과거와 현재가 맞물린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상상도 못한 정체인 거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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