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40
“하아···.”
거친 한숨을 몰아쉬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진짜로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정말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잿더미로 변해버렸을 것이다.
전투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상황에서 간신히 살아나오니 처음에는 안도감이 들었지만 뒤이어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함이 몰려들었다.
상대는 예상했던 것처럼 더럽게 강했다. 정확히 무슨 능력인지는 몰라도 햇빛이 뜨자마자 몸이 불타기 시작한다니. 말 그대로 신의 기적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저걸 무슨 수로 상대하란 말이냐고.
지금 당장은 겨우 살아있긴 해도 위기를 완전히 벗어난 게 아니다. 현실의 시간은 멈춰있으니 거울 세계에서 나가자마자 바로 아까의 생사기로에 또다시 봉착해야만 한다.
즉 여기서 어떻게서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
이마저도 여신님이 손거울을 들라고 다급하게 외쳐준 덕분에 가능했던 거지 그게 아니었다면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기도 전에 온몸이 불타버렸을지도 모른다.
막상 내 목숨을 살려준 여신님은 내면세계까지 따라올 수 없어 곁에서 사라지고 말았지만.
지금부터는 나 혼자서 공략법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일단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건 상대의 능력이 정확히 무엇이냐는 거다. 그걸 알아야 적절한 파훼법도 찾아낼 수 있을 테니까.
일단 해와 관련되어있는 건 확실한 듯했다.
‘꽤 즐거운 담소였으나 더는 시간이 없군. 해가 뜨고 있어서 말이지.’
그 말과 함께 손을 들자마자 창가에 햇빛이 비치면서 죽을 뻔했었지. 거기에 더해 불타는 파리의 환상을 보여줄 때도 동이 트기 전까지 샤론을 구해야 할 거라고 얘기했었다.
어떤 식으로든 백작의 능력은 태양과 연관이 있다.
꽤 유의미한 정보기인 했으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더 확실하고 구체적인 단서가 필요했다.
해가 뜨자마자 죽을 뻔했다. 반대로 말하면 해가 뜨기 전까지는 괜찮았었지.
단순히 내가 시간을 벌기 위해 말을 걸어서 그런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면?
혹시 시간을 끌려고 했던 건 나뿐만이 아니라 상대도 마찬가지였던 게 아닐까?
밤 동안에는 나를 죽일 수 없었다···?
확실히 지금 와서 돌이켜 보니 백작의 대응은 어딘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상대는 내 정보에 관해 일방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에 관해 아는 것이 없다시피 했다. 그런데 본인이 신의 사도라는 힌트를 넌지시 알려주었다. 그것이 손해가 될 것임이 분명한데도.
일부러 시간을 지연시키기 위한 행동이었다면 납득이 된다. 해가 떠야지만 나를 죽일 수 있던 거다.
‘···아니 그렇게 따지면 더 이상해지는데.’
나름 정답을 찾아가나 했으나 뒤이어 떠오른 의문에 다시 머리가 지끈거리고 말았다.
백작이 동이 틀 때까지 일부러 시간을 끌려 했다면 아까 저택에서 있었던 대화는 설명이 된다.
그러나 이제는 숙소에서 보았던 환상이 발목을 잡는다.
분명 환상 속에서 줄리엣은 동이 밝기 전까지 샤론을 구하지 않으면 파리가 무너질 것이라 경고했었다. 그래. 그건 누가 보더라도 명확한 경고였다.
나는 당연히 백작이 내게 환상을 보여줬다고 생각했으며 실제로 백작 역시 본인이 먼저 그에 관한 얘기를 꺼내며 내 추측이 맞다고 인정했다.
만약 그런 환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보다 더 느긋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샤론을 구하려 했을 테고 그러면 저택에 도달했을 때쯤엔 이미 해가 떠 있었을 것이다.
앞뒤가 전혀 안 맞잖아. 내 손에 들린 단 두 개의 힌트가 서로 완전히 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이걸로는 부족하다. 최소한 다른 단서가 하나는 더 있어야 뭔가 감이라도 잡힐 것 같다.
아무것도 없는 이 거울 세계에서 혼자 완벽한 답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
터벅터벅.
‘아 혼자는 아니었구나.’
저 앞에서부터 들려오는 규칙적인 발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나 고개를 들었다.
거기엔 예상했던 대로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백발의 소녀 하양이가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그런데 내가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진심으로 반겨주긴 좀 힘들달까.”
이렇게 인사를 나누고 있으니 문득 지난번 만남이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처럼 현실에서 위기에 처한 순간에 긴급 탈출용으로 왔었던 거지. 깨닫고 나니까 최근 들어 급할 때만 찾아오는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해졌다.
축 늘어져 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양이가 입을 열었다.
“도움 필요해?”
지난번과 비슷한 흐름. 그 순수한 호의에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런 순진무구한 아이한테 도움을 받지 않고선 아무것도 못 하는 한심한 놈이 되어버린 건가.
그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양이의 도움을 받는 건 저번 한 번으로도 충분하다.
처음 시계탑을 올라 소녀를 처음으로 마주했을 때 뭐라고 결심했던가.
내가 저 아이를 이 거짓된 공간에서 꺼내주겠다고 구원을 다짐하지 않았던가.
물론 쓸데없이 자존심만 세우는 건 아니다. 어차피 시간 정지의 권능은 이례적으로 딱 한 번 양도받은 것일 뿐 무제한으로 펑펑 써댈 수 있는 편한 치트키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고마워. 그래도 이번에는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일단 불확실한 상대의 의도보다 확실한 정보에 초점을 맞추자.
백작이 신의 사도인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사도의 공통적인 약점을 찾아낸다면 상대를 공략할 수도 있으리라.
사도의 약점···.
솔직히 전혀 모르겠다. 애초에 나는 정상적인 사도라고 부르기도 힘들지 않을까. 여신님부터가 힘을 잃고 나한테 빌붙어 다니는 꼴인데.
그럼 내가 아닌 다른 사도는 알고 있을까?
지금껏 내가 만나본 사도는 나를 포함해 총 4명.
그중 내 눈앞에 있는 소녀 역시 한 명의 초월자이자 사도였다.
어쩌면 하양이는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일반적인 인간으로서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아예 시간의 여신의 권속이 되어 반신적 존재 즉 초월자가 된 케이스니까. 그래서 나한테 시간 정지의 권능도 일시적으로 넘겨줄 수 있던 거겠지.
문제는 하양이가 그런 복잡한 질문을 이해할 수 있냐는 건데···.
일단 시도라도 해보자. 설령 실패하더라도 어차피 이곳에선 썩어 넘치는 게 시간이니까.
“하양아. 혹시 신의 사도···. 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그러니까 신의 뜻을 따르는···.”
최대한 이해하기 쉽도록 말을 풀어헤치려던 순간 얘기를 중간에 싹둑 자르며 하양이의 목소리가 치고 들어왔다.
“줄을 끊어.”
“···어?”
그게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이변이 발생했다.
갑자기 내 등 뒤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거울 세계가 현실과 강제로 연결되기 시작한 것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현실로 서서히 빨려 들어갔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기에 나는 혼란에 빠진 채 손을 필사적으로 휘저었다.
하양이는 그런 내 모습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마치 이렇게 되리란 걸 전부 알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이.
“기다릴게.”
그 말을 끝으로 내 정신은 현실로 돌아왔다.
***
찰나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의문들을 억지로 밀어 넣고 현실에서 닥쳐올 위기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상황은 거울 세계에 들어가기 직전과 똑같았다. 창가로부터 스며드는 찬란한 새벽의 여명.
그 빛이 내 발끝을 불태우는 것을 느끼자마자 하양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줄을 끊어라.
그 순간 여명을 바라보던 내 시선의 끝자락에 ‘줄’이 보였다.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에 따라 카드를 던져 줄을 끊어냈다.
그러자 묶여있던 커튼이 풀리며 창가를 가리어 어둠을 선사했다.
내 기민한 대처에 살짝 당황하면서도 불쾌한 티를 숨기지 않고 인상을 찌푸린 백작.
하지만 처음부터 쭉 드러냈던 여유로운 태도를 잃지 않았다.
“제법 판단력이 빠르군. 그런다고 달라질 건 없지만.”
그 말대로였다. 이건 기껏 해봐야 임시방편 허술한 시간 끌기에 불과했다. 애초에 아무리 두꺼운 커튼이라 해도 햇빛을 100% 완벽히 막기란 불가능하다. 실제로 동이 터 오른다는 ‘현상’ 자체만으로 백작의 기세는 이전보다 명백히 강해졌으니까.
내가 아무리 필사적으로 상대가 커튼을 건드리지 못하게 막아봤자 그냥 전투력에서 밀릴 것이다.
그래도 당장 목숨을 부지했다는 게 어디인가.
‘그러고 보니···. 하양이는 어떻게 알았던 거지?’
이건 내가 질문한 사도의 공통적인 약점과 전혀 상관없는 현재의 전투 구도를 완벽히 파악한 게 아닌 이상 나올 수 없는 조언이었다. 심지어 당사자인 나조차 바로 직전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의문도 잠시 백작이 마력을 끌어올리고 있음을 느끼자마자 의문을 뒤로 제쳐두고 대응에 나서려 했다.
“이미 늦었다!!”
하지만 그보다 한발 앞서 마법으로 커튼을 거칠게 찢어내는 백작.
그리고 드러난 창가 밖에는 푸른 하늘의 풍경을 가린 거대한 무언가가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다들 더위 조심하시는 거에용..!!
뮹뮹은 하루종일 선풍기를 켜놓고 있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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