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59
“자 그럼 오늘 수업의 내용은···.”
대체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평화로운 일상.
긴장감이라곤 하나도 없는 따분하고 지루한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수업 내용을 한 귀로 흘리면서 딴생각에 몰두했다.
내용은 다소 뻔했다. 예언과 프랑켄에 관한 풀리지 않은 의문 그리고 이제 마지막 남은 단서인 시계탑에 관련된 내용 등등.
자리에 앉아서 고민해봤자 풀리지도 않을 문제를 가지고 끙끙대길 한참.
옆에서 내 팔꿈치를 툭툭 두드리는 느낌에 그제야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야. 오늘은 또 뭐 때문에 그리 죽상이냐?”
왠지 오랜만에 보는 것만 같은 옆자리 짝 레이첼.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샌가 교탁에 있던 선생님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반에는 떠들썩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적당히 레이첼이 떠드는 잡담에 호응해주었다.
그러자 자연스레 이쪽으로 다가오는 또 다른 소녀.
율리아가 살짝 불만이 담긴 듯한 표정을 지은 채 비어있던 앞자리에 앉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혹시 그녀에게도 지나처럼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하며 물어보자 율리아는 시무룩한 태도로 대답했다.
“레이븐이 활동을 안 해···.”
순간 맥이 풀려 자세가 무너질 뻔했다.
뭔가 했더니 그런 거였나. 난 또 심각한 문제인 줄 알고 괜히 가슴 졸였잖아.
그보다 이젠 숨길 생각도 없는 건가? 애들이 있는 앞에서 대놓고 자기가 괴도 추종자라고 밝히는 거나 다름없는 행보에 감탄이 나올 정도다.
레이첼 역시 나와 비슷한 감상을 느꼈는지 헛웃음을 흘리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야. 드디어 인정했구나. 네가 답도 없는 중증의 괴도 추종자라는 사실을!”
“그냥 팬심이 있는 것뿐이야. 그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
참 뻔뻔하게 잘도 받아치는구나. 괴도 추종 집단의 엄연한 리더가 그냥 팬심이 있는 정도일 리는 없을 텐데.
아무튼 그녀가 말한 대로 괴도 추종자는 의외로 그렇게까지 인식이 나쁘지 않았다.
드레이크를 끌어내리고 리더 자리를 차지한 율리아가 괴도 추종자의 인식을 바꾸려고 노력하며 동분서주한 덕분이었다.
그 노력은 빛을 발해 현재는 그냥 특이한 취향을 가진 별난 사람들 정도로 여겨질 뿐 그 이상으로 사회 불안 요소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취급을 받지는 않게 되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일반 대중 사이에서의 여론이 그렇다는 것뿐 정부와 그 산하 기관인 경찰 및 집행부는 여전히 괴도는 물론 그를 추앙하는 괴도 추종자들 역시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다.
“흠. 그러고 보니까 놈이 요새 조용한 것 같긴 하네. 제일 최근이···. 크루즈에서였나?”
“아니지! 그건 선장의 모략이었잖아!”
“뭐 그랬던 것 같기도.”
역시나 레이첼은 괴도에겐 큰 관심이 없는지 율리아의 격한 반발에도 손을 휘저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내게는 오히려 저런 태도가 훨씬 편하고 좋았다. 까닥 잘못했다 내가 괴도라는 사실을 걸리기라도 했다간 굉장히 피곤해질 게 뻔했으니.
그런 점에서 유일하게 내 정체를 알고 있는 샤론은 위험한 변수이기도 했다.
물론 그녀가 남한테 함부로 그런 비밀을 알려줄 리는 없겠지만.
봐라. 지금도 평소와 다름없이 제 자리에만 앉아서 조용히 책을 읽는 데 집중하고 있지 않나.
언제나처럼 변함없는 모습에 지켜보는 나까지 마음이 차분해질 만큼 지조 넘치는 태도였다.
그런데 착각일까?
왠지 아까부터 자꾸 한 번씩 시선이 마주치는 기분이 드는데.
저쪽에서 주기적으로 슬쩍슬쩍 힐끔거리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뭐 당연히 착각한 거겠지.
샤론이 그럴 성격도 아니고 내게 용건이 있으면 대놓고 다가와서 아무렇지 않게 먼저 얘기를 꺼내는 게 훨씬 더 자연스러우리라.
“아무튼 크루즈는 직접 활동한 게 아니니까 그걸 빼면 휴식기가 길단 말이야! 분명 얼마 전에는 꾸준히 활동하겠다고 해놓고서···.”
“뭐? 괴도가 너한테 그런 말을 했다고?”
레이첼이 한쪽 눈을 찌푸리며 묻자 율리아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격렬하게 부정했다.
“아 아니! 그런 뉘앙스로 예고장을 남긴 적이 있었거든!”
“그랬냐? 난 왜 기억이 안 나지?”
“그 그야 레이첼은 원래 괴도한테 딱히 흥미가 없잖아···? 하하···.”
다행히도 율리아의 변명은 무사히 먹혀든 듯했다.
사실 괴도에 대해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 들었다면 단번에 고개를 갸웃거릴 만큼 어색한 변명이긴 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좀 이상한 것이 왜 그런 시답잖은 활동 주기 계획 따위를 범행 예고장 내용에 집어넣겠는가? 그랬다간 괜히 숨겨진 다른 뜻이 있다고 착각해 수수께끼의 해석만 꼬이고 말 것이다.
음. 그나저나 생각해보니 내가 율리아한테 뭐라 할 처지는 아니긴 했다.
실제로 나는 드레이크와 관련해 추종자들의 문제가 해결된 뒤 율리아를 직접 만나서 앞으로 꾸준히 활동하겠다고 약속했었으니 말이다.
딱히 속이려는 의도는 없었다. 실제로 나도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괴도 레이븐으로 활동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런데 지금 당장은 상황이 여의치 않은 걸 어쩌겠는가. 일단 내가 살고 세계의 멸망을 막아야 도둑질도 계속할 수 있는 것을 말이다.
도둑질을 위해 세계를 구하는 괴도라니 좀 많이 이상하긴 해도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그러니 절대 농땡이를 피우는 게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한테 쓸데없는 내용을 알려주어 위험에 휘말리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샤론한테 사실을 얘기해준 것도 어디까지나 그녀가 프랑켄과 긴밀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을 뿐 그게 아니었다면 설령 내 정체를 안다 해도 절대 모든 것을 얘기해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크흠! 그보다 레이첼이야말로 표정이 안 좋은데?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이대로 주제가 계속 이어지면 위험하다고 판단한 걸까 율리아는 상당히 노골적으로 화제를 돌려버렸다.
그러나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줄곧 레이첼은 똥을 씹은 듯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있었으니까.
차마 본인도 부정할 수는 없었는지 한숨을 내쉬면서 머리를 쓸어넘기다 작게 중얼거렸다.
“며칠 전부터 언니 상태가 영 별로거든.”
“어? 레아 언니가 왜? 무슨 문제인데?”
아 나는 레이첼의 말을 듣자마자 그 이유를 눈치챌 수 있었다.
“나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직장에 뭔 문제가 생겼나 봐. 지금 하루 만에 쫄딱 망해버린 것 같아.”
“진짜? 그런데 레아 언니가 다니는 직장이면···. 너한테 장학금 주는 재단 아니야?”
“그러니까.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지금 미치겠다고. 다음 학기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인상을 쓰는 레이첼.
참 공교롭게도 그건 나 또한 머리를 싸매고 끙끙대는 중인 문제였다. 그 재단의 이사가 다름 아닌 나였으니까.
지난번 집행부에 방문해 캐서린과 대화를 나눌 때를 생각하면 어떻게 잘 해결될 가능성도 아예 없는 건 아닌 느낌이었지만 그렇다고 아무 걱정 없이 안심할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막말로 집행부가 날 간첩과 관련된 용의자로 찍어버리면 그 순간부터는 브리튼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질 것이다. 다른 나라로 도피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특히 재단을 복구시키는 데엔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조차 미지수였다.
직원들은 전부 간첩죄로 잡혀가 버렸고 가장 유능했던 핵심 인사 줄리엣 또한 적대 관계로 틀어져 현재 행방불명 상태.
레이첼의 장학금이야 내가 개인적으로 해결해줄 수도 있다지만 레아의 일자리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런 것들을 일일이 생각할수록 머리만 아파지고 자연스레 한숨이 튀어나온다.
“하아···.”
어쩌다 보니 율리아와 레이첼 두 사람의 고민거리가 전부 나와 관련이 있었다.
단순히 연관된 수준이 아니라 내가 문제의 핵심이다 보니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두 사람의 고민도 해결될 리가 없었다.
문제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둘에겐 미안하지만 지금은 그것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만 했다.
마침 그 문제와 관련된 당사자 중 한 명인 샤론이 나를 힐끔거리길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율리아의 문제가 괴도 레이븐의 활동.
레이첼의 문제가 뤼팽 재단의 해체 위기라면.
샤론의 문제는 프랑켄 박사의 행방.
둘과는 달리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가 훨씬 어렸을 때부터 줄곧 쫓아왔던 문제였다.
세 문제는 전부 나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앞선 두 문제와 마찬가지로 샤론의 문제 또한 오로지 나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되새기며 주먹을 꽉 쥐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늦게 와서 죄송합니당..!
사과의 의미로 AI를 사용해 여캐들의 일러를 새로 뽑아본 거에용..!!
공지에 올려두었으니 가서 구경해주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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