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63
“저건···.”
지크프리트는 분위기가 급변한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의 등 뒤에 흐릿한 실루엣으로 생겨난 어릿광대에게 느껴지는 기묘한 기운에 자연스레 눈살이 찌푸려졌다.
‘소환수?’
아니 저건 단순한 소환수 따위가 아니다.
그보다는 좀 더 본질적인 존재의···.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조커가 된 소년이 지팡이를 고쳐잡더니 즉각 공격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무슨 마법인지 몰라도 달라지는 건 없다.”
어차피 상대는 아카데미의 꼬맹이. 용부리미 같은 규격 외의 존재가 아닌 이상 무슨 짓을 하더라도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는 없었다.
전부 얼려버리면 그만이니까.
쩌저적-!
지크프리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냉기가 그대로 복도를 얼리며 크로에게 돌진했다.
이전보다도 훨씬 빠르고 위협적인 공격에도 소년은 전혀 움츠러들지 않고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소년의 뒤에 있던 조커가 기이한 웃음을 지으며 손에 카드 한 장을 꺼내 들었다.
X. <Wheel of Fortune>
그와 동시에 카드에 그려져 있던 행운의 수레바퀴가 현실로 구현화 되어 허공에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냉기가 마침내 수레바퀴에 닿자 세상을 전부 얼려버릴 것 같던 무자비한 진격은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춰버리고 말았다.
“···뭐지?”
대체 어떤 식으로 자신의 얼음을 막은 건지 지크프리트는 아예 감이 잡히지 않았다.
대놓고 방어 마법을 쓴 거였다면 마력의 흐름을 통해 냉기가 짓눌리는 순간을 포착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자신의 마력은 마치 한순간의 환상이었다는 것처럼 한순간에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소멸해버렸다.
무슨 능력인지 파악하기 전까진 섣불리 움직이는 건 위험하다. 방심은 그만두고 경계심을 극도로 끌어올린 그는 일단 방어 태세로 전환해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이윽고 소년이 지팡이를 휘두르자 조커는 또 새로운 카드를 꺼내 들었다.
XV. <The Devil>
카드 속 염소를 닮은 악마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허공에서 차원의 틈 같은 것이 생겨나더니 불길한 기운을 담은 쇠사슬들이 사방에서 그를 향해 날아왔다.
“크윽!”
최대한 신속하게 반응해 주변에 얼음벽을 세워보았으나 사슬들은 마치 자아를 지닌 것처럼 이리저리 움직여 벽을 회피한 다음 옴짝달싹 못 하게 그를 속박해버렸다.
“젠장! 이거 놔! 감히···!!”
지크프리트는 어떻게든 사슬을 풀어내기 위해 고함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지만 아무리 기를 써도 속박은 조금도 느슨해지지 않았다.
그 일방적인 전투를 지켜보던 레이첼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엄청나잖아.”
최정상에 다다른 마법사이자 드라칸의 정예 단원인 지크프리트를 저렇게 일방적으로 압도하다니.
크로가 제 실력을 숨기고 있다는 것쯤이야 대충 예상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소년은 사슬에 묶여있는 상대를 노려보며 모자를 눌러썼다.
“이걸로 끝이다.”
마지막 세 번째 카드.
VII. <Strength>
카드에 그려진 야수가 울부짖자 소년의 몸에도 힘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단순히 강해진 것을 넘어 한쪽 팔에 점점 근육이 도드라지더니 옷소매를 터뜨려버릴 만큼 눈에 띄게 팔뚝이 굵어졌다.
힘을 한곳에 집중한 뒤 주먹을 불끈 쥐고 그대로 속박되어있는 지크프리트에게 돌진하는 크로.
‘위험해! 저거에 맞으면 죽는다!’
본능적으로 깨달을 만큼 살벌한 일격. 어떻게든 피해 보려 해도 사슬에 묶인 상태론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 모든 걸 포기하고 눈을 질끈 감아버린 순간.
안면과 충돌하기 일보 직전 소년의 주먹이 허공에서 우뚝 멈추어 서버렸다.
“안 돼 이러면 완전히 망해버린 건데. 으으!!”
그의 옆에 있던 베로니카가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주먹을 내뻗는 동작 그대로 정지해버린 크로는 이것이 그녀의 소행임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이 멍청아! 어떻게 꼬맹이 하나 제대로 못 이기는 건데!?”
“···평범한 꼬맹이가 아니야.”
“됐어. 일단 후퇴야. 완전히 망해버렸다고.”
베로니카가 잔뜩 성질을 부리며 그의 목깃을 잡고 질질 끌어당기자 그는 싸늘한 표정으로 손길을 뿌리치며 중얼거렸다.
“저놈은 위험하다. 여기서 죽여야 해.”
“여기서 더 늑장 부리다간 우리가 죽어. 너 살린다고 용부리미를 풀어버렸단 말이야.”
크우어어-!!
때마침 울려 퍼지는 드래곤의 포효.
저걸 다시 제압하기엔 너무 늦었다. 용이 완전히 깨어난 이상 그녀의 정신 간섭은 무의미해지고 말았으니까.
용부리미와 조커.
둘을 한꺼번에 상대하게 된 순간 패배는 정해진 수순이었다.
“···쯧.”
결국 지크프리트도 지금은 물러나야 할 때란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놈들은?”
“신호를 보냈는데도 오지 않은 걸 보면 아마 다들 발을 묶인 상태겠지.”
“어쩔 수 없지. 장막의 시간도 다 되어가니 일단 철수하자.”
크우어어-!!!
이젠 더 떠들 시간도 없었다. 용이 완전히 깨어나고 있음을 확인하자마자 두 사람은 미련 없이 깨진 창문을 통해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어딜···!”
뒤늦게 레이첼이 손에 불꽃을 피운 채 상대를 저지하려 했으나 뒤이어 멈춰있는 크로에게 눈이 밟혀 결국 이쪽을 먼저 챙기기로 선택했다.
“야. 괜찮냐?”
그녀가 조심스레 어깨를 툭 치자마자 속절없이 바닥으로 쓰러지는 크로.
“어 어? 야!!”
당황한 레이첼이 허둥대며 부축해주자 크로는 거친 숨을 몰아 내쉬며 나지막이 말했다.
“아직은 세 장이 한계인가···?”
단 3장을 사용한 것만으로 마력이 완전히 바닥나버리고 말았다.
그 힘과 변수 창출 능력은 절대 강자와의 전투에도 밀리지 않을 만큼 분명 뛰어났으나 그럼에도 아직 명확한 약점이 존재하는 것이다.
더 강해져야 한다. 모두를 지키기 위해선 지금보다도 더···.
그때 저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뒤에서 누군가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왔다.
“수고했어.”
레이첼은 뒤를 돌아보곤 깜짝 놀라고 말았다.
중성적인 외모를 가진 새하얀 머리의 학생 뒤엔 오금이 저릴 만큼 거대하고 무섭게 생긴 드래곤이 콧김을 내뿜고 있었으니까.
“넌···.”
이윽고 그가 자신들과 마찰이 있었던 싸가지 없는 남학생 진 그레인저란 사실을 깨닫고 레이첼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지나 역시 레이첼의 얼굴을 알아보곤 마찬가지로 눈살을 찡그렸다.
비슷한 성격의 두 소녀가 한 소년을 사이에 두고 갑작스레 눈싸움을 벌이기도 잠시 지나가 먼저 고개를 돌리고 앞으로 걸어 나가며 툭 던지듯 말했다.
“내가 제일 강해. 그러니까 내가 지켜줄게.”
자신의 힘을 노리는 미치광이 테러 조직. 그들이 아카데미를 습격한 것도 결국 자신 탓이니 수습도 자신이 해야 하지 않겠는가.
크우어어-!!
분노에 가득 찬 용의 포효가 아카데미 전체를 뒤흔들었다.
마치 자신의 앞에 나와 당당히 싸우자는 듯이.
***
한편 불시의 기습을 허용해 그대로 튕겨 나온 캐서린은 거구의 사내와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하하! 제법이군! 역시 집행자인가? 날 더 재밌게 해다오!!”
미친 전투광.
그 한마디로 표현 가능할 만큼 단순하며 무식한 상대였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한 적이기도 했다. 어떤 의미론 지크프리트보다 더.
드라칸은 목표 외엔 거의 베일에 휩싸인 수수께끼 같은 조직이지만 그 가운데서 지크프리트와 함께 정보가 존재하는 단원이 바로 디트리히였다.
파괴 전차 디트리히.
그 흉악한 이명답게 그의 마법은 단순한 신체 강화가 끝이었다.
하지만 그 하나만으로 디트리히는 어지간한 마법사는 가뿐히 때려죽일 만큼 압도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다.
거기에 전투에 열광하는 특성이 더해져 그는 드라칸 내에서 가장 외부 활동에 적극적인 단원이었다. 달리 말하면 드라칸에 의한 테러엔 언제나 디트리히가 선봉에 서 있었다.
쾅! 쾅!! 쾅!!!
‘알고는 있었지만 상상 이상이군요···!’
강하다. 너무 강하다.
폭발이라는 마법의 특성상 그녀 역시 어디에서든 싸움에서 밀릴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집행자 내에서도 최정예 전투 인력으로 손꼽히는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디트리히를 상대론 아무리 마법을 퍼부어도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질 않았다.
어떻게 되먹은 몸인지 폭발을 수십 차례를 때려 박았는데 아파하는 기색이 전혀 없을 정도였으니.
무엇보다 처음의 일격을 허용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지크프리트를 쓰러트릴 수 있다는 데 혈안이 되어 창밖에서 날아드는 그를 눈치채지 못했던 탓이다.
덕분에 제대로 들어간 복부의 치명타.
움직일 때마다 순간순간 정신을 잃을 만큼 엄청난 고통이 뒤따랐다. 아마 내부 장기가 파열된 거겠지.
‘이 몸 상태로는···.’
어떻게든 버텨보고 있지만 자신이 쓰러지는 건 시간문제다.
그렇게 된다면 누가 저 괴물을 상대할 수 있지? 저 녀석의 마법 저항력을 봤을 때 웬만한 마법으론 흠집조차 내기 힘들 텐데.
“음? 퇴각 신호라니. 작전에 문제가 생긴 건가.”
그때 디트리히가 갑자기 멈추어 서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얘기를 들은 캐서린은 복부를 부여잡은 채 상대의 눈치를 살폈다.
‘퇴각? 설마 그레인저 양이 붙잡힌 걸까요. 아니 그렇다면 퇴각이 아니라 임무를 완료했다는 것부터 알렸겠지요. 뭐가 됐든 지금 몸 상태로 계속 저자를 상대하는 건 위험하니 잘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도 디트리히는 씩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퇴각하더라도 싸움은 마저 끝내야겠지. 기다려줘서 고맙다!”
“큭···!”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주먹. 순간적으로 방심한 탓에 미처 반응하지 못한 캐서린이 이를 악문 순간.
챙-!
날카로운 검의 울림과 함께 한 소년이 등장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안 그래도 입학 뒤부터 온갖 사건을 겪으며 죽을 뻔한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는데.
이젠 유일한 휴식처였던 아카데미마저 습격을 당할 줄이야.
레이어드는 한숨을 내쉬며 검을 고쳐잡고 적을 노려보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랜만의 주인공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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