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8
“아니라니. 그게 무슨 뜻이야?”
레이어드는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그냥 당연하게 생각하며 말한 걸 텐데 돌아온 율리아의 반응이 워낙 극성이었으니까.
솔직히 나도 율리아가 저렇게 단호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레이븐은 무조건 나쁜 범죄자라고 보기 힘들어.”
“···그거 굉장히 이상하게 들리는데.”
주인공의 말대로 지금 그녀의 주장은 괴도 추종자들이나 할 법한 얘기였다.
물론 전후 사정을 전부 알고 나면 그녀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겠지만 앞뒤 맥락을 쏙 빼고 저 말만 들으면 굉장히 과격한 논리인 것도 사실이었다.
“레이븐은 고아원과 교회에 돈을 전부 기부했어.”
“율리아.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잘못이 사라지는 건 아니야. 게다가 그 돈이 전부라는 증거도 없잖아.”
반박할 수 없는 팩트네.
그야말로 직구로 꽂히는 정론에 율리아도 차마 쉽게 반박을 꺼내지 못했다.
“그건···!”
“둘 다 진정해.”
결국 내가 중간에 끼어들어 과열되는 분위기를 막기로 했다.
물론 끝까지 얘기한다면 레이어드도 율리아의 마음을 알아줄 확률이 높다. 주인공이니만큼 속마음은 꽤 상냥하고 착한 녀석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반의 한가운데라 아이들의 시선도 전부 쏠리고 있고 곧 있으면 수업도 시작하기에 얘기를 끝까지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냥 놔뒀다간 서로 감정만 상할 게 뻔했다.
“······.”
둘 다 못마땅한 눈치였지만 여기서 논쟁이 길어지면 손해란 걸 본인들도 깨달은 건지 순순히 내 만류를 받아들였다.
자리로 돌아가는 레이어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율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두 사람이 이런 문제로 다툴 줄이야.
사실 다퉜다고 하기도 민망한 수준이긴 하지만 원작에는 없던 나라는 존재 때문에 둘의 관계가 변했다는 게 어쩐지 오묘하게 느껴졌다.
“정말···. 왜 못 알아주는 거지?”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 레이어드는 자세히 모르잖아.”
“그러면 전부 얘기해주면 이해해줄까?”
그야 나도 모른다.
당장 우리 조원만 봐도 나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 것과 별개로 레이첼은 시큰둥하고 샤론은 거의 혐오하는 수준으로 싫어한다.
결국 사람의 생각이 같을 수는 없다는 거겠지. 엄밀히 따지면 율리아가 특이한 취향이라고 보는 편이 맞지 않을까?
“글쎄. 적어도 그럴 확률은 올라가겠지.”
“좋아. 이번 조별 과제 발표 때 제대로 설득시켜줘야겠어.”
응? 왜 결론이 그렇게 흘러가는 거야?
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긴 한데.
“발표는 중립적이어야 해.”
샤론의 경고에도 율리아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쳤다.
“당연히 내 사견은 넣지 않아. 객관적인 정보만 넣어도 분명 이해해주는 사람이 나올 거야. 반드시.”
뭔가 조금 부담스럽다.
이러다 정말로 괴도 추종자로 암흑 진화해 버리는 건 아니겠지?
***
그 뒤로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이틀이 지나버렸다.
참고로 그동안 별다른 괴도 활동은 나서지 않았다.
우선 지금은 가짜 신분을 얻어서 기부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최우선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직 신분이 만들어지려면 하루를 더 기다려야 한다.
거기다 신분만 완성된다고 끝이 아니라 계획한 대로 재단을 설립하는 것도 분명 과정이 복잡하겠지.
그때까지 느긋하게 휴식을 취한다는 느낌으로 쉬기로 했다.
다만 그렇다고 완전히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바로 오늘이 한 주간 준비했던 조별 과제의 발표날이었으니까.
수업이 시작하기 전 마지막 쉬는 시간.
우리는 마지막으로 모여서 한 번 더 발표 내용을 점검하고 있었다.
레이첼이 기지개를 켜며 마구 투덜거렸다.
“어제 밤늦게까지 봐놓고 진짜 귀찮게···.”
“과제 점수도 내신에 들어가니까 최대한 열심히 해야지.”
사실 아카데미는 꿈과 희망이 넘치는 청춘의 무대라고 보기 어려웠다.
그야말로 치열한 경쟁의 무한 굴레. 조금만 뒤처지면 죽음의 레이스에서 탈락해버리는 것이다.
물론 나야 설렁설렁 적당히만 하고 있다.
막말로 내가 어디 마탑에 소속될 것도 아니고 결국 졸업하고서도 괴도로 살아갈 테니까.
“한 주 동안 다들 고생했어.”
“고생은 너랑 샤론이 제일 많이 했지.”
“야 찐따. 은근슬쩍 나는 왜 빼먹냐?”
왜 빼냐니. 그야 우리 둘은 딱히 고생한 것도 없으니까 뺐지.
막말로 경찰서에 가서 인터뷰 한번 했던 거 빼면 뭐가 있다고.
레이첼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면서 이럴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깨달았다.
그냥 반응하지 말고 무시하면 되더라.
“야! 씹냐? 또 씹어? 진짜 이 건방진 찐따 새끼.”
쿡쿡 나를 건드리며 도발해보지만 내가 꿋꿋하게 외면하자 결국 이번에도 녀석이 먼저 나가떨어졌다.
“후후. 힘들긴 해도 정말 재밌었어. 특히 새로운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잖아.”
율리아는 어쩜 말하는 것도 저리 천사 같을까.
정말로 레이첼과 나란히 놓고 보면 이렇게 다를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우리 과제 끝나더라도 이렇게 자주 만나서 놀자! 좋지?”
“흥. 찐따는 좋아하겠네.”
“거기서 내가 왜 나와.”
아주 기승전 찐따잖아.
내 지적에 레이첼은 오히려 얄밉게 웃으면서 억지를 부렸다.
“어라? 나는 찐따라고만 했지 누구라고 밝힌 적은 없는데? 왜? 설마 찔려?”
“네가 나를 찐따라고만 부르잖아!”
“그러면 찐따를 찐따라고 부르지 뭐라고 불러!”
“하하···.”
무시하려고 해도 그게 쉽지 않다. 내가 상대법을 깨우친 것처럼 녀석도 점점 파훼법을 개발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이런 개판을 한 발자국 떨어져서 여유롭게 관망하는 샤론까지.
그야말로 환상의 4인조가 아닐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수업 종이 울릴 때까지 계속 티격태격했다.
“아서 왕의 뛰어난 조력자이자 통찰력 있는 마법사이던 멀린은···.”
다른 조원의 발표 내용은 우리의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대부분 역사에 등장하는 대마법사들 혹은 현재의 드높은 명성을 가진 마법사 등등.
일단 우리 조와 주제가 겹치는 팀은 없는 듯했다.
그렇게 여러 조를 거쳐 마침내 우리 차례가 되었다.
발표 자료를 들고서 당당히 앞으로 걸어 나가는 율리아.
저런 발표도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하기 힘들 텐데.
[그게 괴도가 할 소리이냐?]
‘아 그것도 그렇긴 하네요.’
그런데 이상하게 괴도 활동 때는 딱히 떨리지는 않는단 말이지.
설마 이게 바로 천부적인 재능이란 건가?
어쨌든 반 아이들의 앞에 선 율리아가 침착하게 발표를 시작했다.
“저희 조가 조사한 마법사는 요즘 가장 유명한 ‘괴도 레이븐’입니다.”
술렁술렁한 분위기.
첫마디를 듣자마자 반 아이들의 반응은 격렬했다.
아예 상상을 못 했다기보단 ‘설마 했겠어?’에 가까운 느낌.
정말로 까딱 잘못했다간 후폭풍이 어마어마할 것 같았다.
천하의 율리아도 조금은 당황한 듯했다.
상상 이상의 반응에 애써 다잡았던 흐름이 깨져버린 건가.
흔들리는 눈동자. 그러다 시선이 우리 쪽에게로 향했다.
나는 입 모양으로 얘기했다.
‘파이팅!’
딱히 특별한 의미도 담기지 않은 단순한 응원.
하지만 그녀는 그것만으로 순식간에 동요를 없애고 차분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생각보다 효과가 너무 좋은데?
율리아가 그만큼 멘탈이 탄탄하기 때문이라고 결론내렸다.
그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없잖아. 막말로 내가 그녀에게 특별한 사람도 아니고.
[흐응.]
‘뭐예요. 그 기분 나쁜 콧소리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후후.]
어쨌거나 차분함을 되찾은 율리아는 발표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여태껏 우리가 열심히 모은 자료를 빠짐없이 세세하게 설명하는 그녀.
당사자인 내가 들어도 감탄할 만큼 정말로 사실만을 객관적으로 담아 넣은 발표였다.
팩트만을 나열하다 보니 자칫 잘못하면 심심할 수도 있었겠지만 애초에 괴도의 범행이라는 소재 자체가 재미없기 힘든 내용이었기에 그런 문제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중간중간 섞인 인터뷰 내용 같은 건 언론에서도 쉽게 구하지 못할 진귀한 자료였다. 특히 테리시아 수녀님의 인터뷰는 오로지 우리의 단독 취재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 보니 처음에는 웅성댔던 아이들도 시간이 지나자 집중하여 율리아의 발표를 경청했다.
‘좋아. 대성공인 거 같아요!’
[그거 잘됐구나.]
내심 망하면 어쩌나 했는데 그런 걱정은 할 필요도 없었네.
심지어 옆에서 듣는 선생님도 발표가 마음에 드는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환상의 4인조가 펼치는 유쾌한 반란이 시작됐다!
“저희가 준비한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
짝짝짝.
율리아의 깔끔한 마무리와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흠잡을 곳 하나 없는 완벽한 대성공. 이보다 더 완성도가 높을 수 있나 싶을 정도.
선생님도 손뼉을 치며 우리 조를 아낌없이 칭찬해주었다.
“훌륭해요. 정말로 좋은 발표였어요.”
“헤헤. 감사합니다!”
“이 조는 자유질문을 받아도 괜찮을 거 같은데 어떤가요?”
응? 자유질문?
앞선 조들은 그런 거 없이 발표만 하고 끝났었는데 아무래도 우리 조가 워낙 잘 준비해서 선생님도 즉석에서 제안하신 모양이다.
“네! 괜찮아요.”
별로 주저하지 않고 덥썩 승낙해버린 율리아.
약간 불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겠지.
“좋아요. 그러면 질문 있으신 분?”
주변을 둘러보니 딱히 손을 드는 사람은 없었다.
하긴 갑자기 질문하라고 해도 바로바로 튀어나올 리가···. 있네?
“네. 레이어드 학생. 자유롭게 질문하세요.”
하필 손을 든 사람은 다름 아닌 주인공이었다.
율리아와 레이어드 사이에 오가는 미묘한 눈빛.
잠시 후 레이어드가 입을 열고 질문을 던졌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다들 태풍 조심하세용!!
잘못하면 날아가버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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