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83
천천히.
소년이 눈을 뜨자 기억 저편에 가라앉아있던 진실이 떠올랐다.
“···아.”
절대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한 여인의 존재를 상기했다.
눈앞의 검은 머리를 한 관능적인 여신과는 상반된 새하얀 순백의 여신.
“그녀는 어디에 있나요···?”
기억을 되찾자마자 동생부터 찾는 소년의 모습에 잠시 쓴웃음을 머금던 여신이 대답했다.
“걱정하지 말렴. 쭉 우리와 함께 있었으니까.”
그 말과 동시에 뒤쪽에 있던 작은 여우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윽고 소년은 아까 풀숲으로 사라진 여우가 진짜이며 오두막에서부터 자신을 줄곧 바라보던 존재는 여우의 모습을 빌린 다른 누군가임을 깨달았다.
그 상상도 못 했던 진실에 아연한 표정이 된 소년은 천천히 여우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그 사이를 밤의 여신이 끼어들어 가로막아버렸다.
“왜···.”
“진실을 알려준다고 했지. 너와 내 동생의 재회를 허락한 건 아니란다.”
그녀도 이렇게까지 매몰차게 행동하고 싶진 않았다.
특히 편견을 가졌던 것과 달리 직접 마주한 소년이 사려 깊고 상냥한 아이란 사실을 깨달은 지금은 더더욱.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저 둘이 서로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든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작별을 받아들이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커 보였으니까.
이미 소년이 기억을 되찾아 자신들이 여신이란 진실을 알아차린 것만으로 매우 위험하다.
본인이 입 밖으로 발설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상함을 느낀 신들이 소년의 머리를 헤집어 기억을 읽는 순간 모두 끝나버리고 말 것이다.
“정신 차리렴. 우리의 정체를 깨달은 순간 인연도 끝나야만 해. 그냥 하룻밤의 특별한 추억으로 간직하며 단념해줘. 그게 너와 네 동생 모두에게 최선의 선택지니까.”
소년은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었으나 쉽사리 반론을 꺼내진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의 뒤에 있는 이터나가 여우의 모습을 유지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신과 인간이라니. 인간과 동물 이상으로 아득한 격차를 지닌 아예 격이 다른 사이였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작별 인사 한번 하지 못한 채 끝이라니.
겨우 잊었던 기억을 되찾았는데. 마지막에 멋대로 호수에 뛰어들어 난처하게 한 것도 아직 사과조차 못 했는데.
게다가 아직 눈앞의 여신과는 제대로 얘기 한번 해보지 못했다.
여태껏 기억의 괴리로 인해 멋대로 사람을 착각해서는 그녀의 진정한 모습을 제대로 봐주지도 않았다.
“약속했잖아요···. 당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고!”
“그래. 지금 넌 나를 제대로 바라봐주고 있잖니. 그건 고맙게 여기고 있단다. 이 말만큼은 진심이야.”
여신은 한편으로는 철없이 행동한 동생의 심정을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었다.
자신 또한 마음 같아서는 이 숲속에서 조금 더 오랫동안 소년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책임을 지고 상황을 수습해야만 할 책임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일은 자신이 먼저 동생에게 땅으로 내려가자고 제안했었기 때문이니까. 이미 물은 엎질러져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언니로서 책임을 져야만 하는 것이다.
“슬슬 해가 저무는구나. 밤의 장막이 걷히면 우리는 떠날 거야. 두 번 다시 땅에 내려오는 일은 없겠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가볍게 넘어가긴 힘들더라도 자신들이 어떻게든 잘 둘러대고 소년이 입단속만 철저히 한다면 큰 문제로 불거지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소년의 기억을 지워버리는 거겠지만 그가 잔혹한 진실을 선택한 이상 여신은 그의 결정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누구도 거짓말을 좋아서 하진 않는다고 했던가···.
다시 생각해도 참 당돌한 말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거짓의 여신 앞에서 그런 말을 내뱉다니. 천벌을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불경한 발언이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이 말한 대로 거짓말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설령 그것이 선의로 꾸며진 달콤한 거짓이라 할지라도 듣는 사람은 결국 진실을 원하게 된다. 그 진실이 얼마나 잔혹하든 간에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년이 호기롭게 던진 약속은 결국 이뤄지지 않을 환상과도 같았다.
거짓 그 자체나 다름없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겠다는 건 다시 말해 진실과 거짓 중에서 거짓을 택하겠다고 얘기하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이미 소년은 진실을 택했다.
하물며 모든 기억을 되찾고 동생에 대한 마음까지 되살려낸 시점에서 한번 기억을 지워버린 자신을 믿고 거짓을 받아들일 리가. 간신히 되찾은 기억을 다시 없애버리는 선택지를 선뜻 동의할 리 없다.
그럼에도 여신은 덤덤히 소년을 내려다보며 얘기했다.
자신들의 안위는 둘째치고 이대로 진실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면 소년이 맞이할 최후가 비참할 거란 사실은 너무나도 당연했기에.
“어차피 오늘 이후로는 평생 만나지도 못할 거란다. 그냥 기억을 지운 채 모든 걸 잊고 살아가는 편이 훨씬 행복할 거야.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 추억을 쌓고 네게 주어진 평화로운 삶을 즐기렴.”
이건 마지막 기회였다. 여신은 간절한 눈빛으로 소년을 바라보면서도 오롯이 본인이 선택할 수 있도록 어떤 강요나 압박도 하지 않았다.
소년의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놀랄 만큼 침착한 어조로 덤덤하게 대답했다.
“절대 잊지 않아요. 비록 하룻밤의 꿈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잠시간의 침묵.
그 너머에서 여신은 허탈하게 쓴웃음을 머금었다.
“···어쩔 수 없구나. 그게 네 뜻이라면 존중해줄게.”
이제는 정말로 작별의 순간이 다가왔다.
잠깐 고민하던 여신은 충동적인 변덕으로 동생의 본모습을 소년에게 보여주었다.
이 정도로 흔들릴 만큼 소년의 정신이 나약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터나는 자신의 모습이 소년에게 제대로 보인다는 걸 깨닫고 잠시 머뭇거리다 억지로 슬픈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행복하게 지내세요.”
“아직 이름을 듣지 않았어요.”
뜻밖의 대답에 잠깐 놀란 이터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요. 이름을 알게 된다면 지금보다도 훨씬 위험해질 거예요.”
“제가 둘의 이름을 모른다고 해도 어차피 위험한 건 매한가지잖아요. 누군가 제게서 억지로 입을 열게 만들 수 있다면 이름을 알려주지 않더라도 두 분을 특정할 요소는 차고 넘치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둘은 애초부터 인간과 마주칠 가능성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았었기에 따로 변장하지도 않았었으니까. 만약 다른 신들이 소년의 기억을 조사한다면 그녀들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대화 내용만으로도 손쉽게 정체를 유추해낼 것이다.
그보다도 둘이라니. 옆에 살짝 비켜있던 밤의 여신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동생만이 아니라 나까지?”
“그야 그쪽과도 약속했으니까요.”
잠시 얼이 빠진 표정으로 멍하니 있던 여신은 이내 헛웃음을 흘리며 가볍게 얘기했다.
“이제 보니 인간답지 않은 그릇을 가졌구나. 설마 여신을 한꺼번에 두 명이나 심지어 자매를 동시에 품으려 하다니.”
“···네? 그 그게 무슨.”
“후후. 아무것도 아니란다.”
덕분에 분위기는 환기되었지만 곧 작별해야 한다는 상황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그것도 잠깐의 이별이 아닌 영원한 헤어짐. 앞으로 평생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은 찰나를 살아가는 인간에게나 불멸의 시간 동안 존재하는 신에게나 똑같이 괴로운 일이었다.
소년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물었다.
“다른 방법은 없는 건가요? 정말 이대로···. 영영 헤어져야만 하나요?”
“이게 최선이란다. 다른 방법은 어떤 식으로든 서로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만을 줄 거야.”
여신의 단언에도 소년은 쉽사리 인정하지 않았다.
“제 생각은 달라요···. 설령 힘든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해도 함께할 수 있다면 버텨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함께할 수 있다는 확실한 보장조차 없단다. 오히려 다른 신들에게 들키고 양쪽 다 최악의 결말을 맞은 채 언젠가 다시 마주할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조차 부수어지고 말겠지.”
그 모습을 상상한 건지 소년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어째서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거죠!?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앞날을 볼 수 없는 인간들뿐. 이미 세상의 흐름은 정해진 순리대로 흘러간단다. 못 믿겠다면 직접 확인시켜 줄 수도 있어. 내 동생은 시간의 여신이니까.”
“···시간의 여신?”
말없이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던 이터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언니가 하는 말이 사실이리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여태껏 조용히 있던 것이다.
“저는 이미 미래를 보았어요.”
안 볼 이유가 없다. 어떻게서든 소년과 함께하는 미래를 찾기 위해 셀 수도 없이 무수한 가능성을 읽어보았다. 신의 권능을 남용해서라도 정해진 운명에 간섭해 뒤틀어보기 위해서.
하지만 신이라 해도 한계는 존재한다. 다른 수많은 신격과 이 땅의 무한한 생명이 촘촘하게 얽히고설켜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는 고작 한 명의 신이 마음껏 바꿀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죄송해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아요.”
이터나의 울먹거림 가득한 선고에 소년은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꽉 쥐었지만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저는 운명 따위 믿지 않아요. 가능성은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거니까요.”
“정말 고집이 세구나. 네 말이 사실이라면 어디 한번 증명해봐라. 정해진 운명을 거슬러 보인다면 우리도 생각을 고쳐볼 테니.”
여신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내 이름을 맞혀보렴.”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틀이나 쉬어서 죄송해용..
내일까지 바쁠거 같은데 내일 올수있을지 잘 모르겠네용..
그래도 최대한 올려고 노력해볼게용..!!
이건 사죄의 애교에용~ 뮹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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