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20
“아빠!”
한 어린 소녀가 활짝 웃으며 사내에게 달려든다.
품속에 소중하게 안아 들고 있던 책을 내밀면서 소녀가 말했다.
“이 동화책 읽어주면 안 돼?”
“이건 어제 읽어준 거랑 똑같은 책인데. 그래도 읽고 싶어?”
“응! 이 동화책이 제일 좋아!”
그건 아빠가 자신을 위해 직접 만들어준 생일 선물이었으니까.
시간이 흘러도 소녀는 여전히 이 동화책을 가장 소중한 보물로서 간직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 보인 사내는 딸의 손을 잡고 함께 방으로 들어가 동화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문득 소녀는 이 동화를 아빠에게 처음 들었던 때를 떠올렸다.
한밤중에 불어닥친 태풍으로 천둥 벼락이 사납게 몰아치던 날.
겁에 질려버린 아이는 안방으로 도망쳐 아빠의 품에 안긴 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런 딸을 달래주기 위해 사내는 자신밖에 모르던 옛이야기를 동화처럼 각색하여 들려주었다.
아주 먼 옛날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숲속에서의 운명적 만남을.
그 이야기는 너무나 따스하고 부드러워서 소녀는 어느샌가 천둥소리조차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아빠가 들려주는 동화 내용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무리 무서운 폭풍우가 찾아온다고 해도 이 이야기를 떠올리면 절대 겁먹지 않을 거라고.
지금의 행복한 추억을 떠올리면서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소녀는 본인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희미한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좁은 옷장 안에 몸을 숨긴 채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앉아 벌벌 떨며 애써 그날의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려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도리어 대조되듯 비참하고 잔혹한 현실의 상황만이 뇌리를 선명하게 채워버리고 만다.
한밤중에 괴한이 갑자기 침입했다.
상대는 집에 거칠게 들이닥쳐선 아빠의 이름을 연신 외치며 온 집안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그리고서 갑작스레 찾아온 정적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몇 분이나 흘렀을까?
어쩌면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간 건 아닐까?
괴한은 사라진 거야?
아빠는 어디 있는 건데?
옷장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아니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려 나갈 수가 없었다.
괴한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방문을 열고 집을 둘러봤을 때 아빠가 무사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 무서웠다.
그래서 옷장 밖을 나갈 수 없었다.
이렇게 계속 옷장 안에 숨어있다 보면 반드시 아빠가 방에 들어와서 나를 찾아줄 거라고.
옷장을 열고서는 겁에 잔뜩 질린 딸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면서 품에 꼭 껴안고 이제 전부 괜찮다고 말해줄 거라 믿으며.
다시 한번 동화책을 읽어주면서 자신을 무섭게 만드는 태풍을 몰아낼 줄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소녀는 이미 현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 따위 깨달은 지 오래였다.
그야 이건 과거를 재현하는 꿈일 뿐이니까.
언제나 꿔왔던 악몽이다.
그래. 자신은 어린아이가 아니다.
다음 달이면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17살의 소녀이다.
이건 전부 꿈.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10년 전의 기억을 재현해냈을 뿐인 악몽.
이 이야기의 결말이 무엇인지 샤론은 이미 전부 알고 있었다.
벽장 속의 소녀는 언제까지고 그 안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결국 현실을 자각하고 스스로 나오게 된다.
그리고 온 집안을 샅샅이 뒤진 끝에야 자신의 불안감이 현실이 되었음을 아빠가 괴한과 함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음을 깨닫고 탈진하여 쓰러져버리고 만다.
현실은 동화처럼 행복한 결말로 끝나지 않는다.
동화는 어디까지나 동화일 뿐이란 걸 샤론은 이때가 되어서야 완벽히 이해하게 된 것이다.
“···생각하지 마.”
샤론은 웅크린 채 귀를 틀어막고 눈까지 질끈 감은 채 중얼거렸다.
어느샌가 소녀가 중얼거리는 혼잣말은 반대가 되어 있었다.
천둥 벼락의 공포를 없애주던 아름다운 동화의 이야기 따위 지금으로선 오히려 괴로운 현실을 자각시킬 뿐이었다.
그날의 행복한 추억을 회상하면 할수록 지금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꿈이란 걸 깨달은 순간부터는 그저 어떻게든 이 악몽에서 깨어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더는 상처 입고 싶지 않아.
괴로워하고 싶지 않아.
슬퍼하고 싶지 않아.
어차피 오지 않을 거란 걸 아니까 이 어둠 속에서 아빠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싶지 않아.
그때였다.
끼익-.
몇십 번 몇백 번이나 반복해서 꿔왔던 꿈에서는 단 한 번도 들리지 않았던 믿기 힘든 소리와 함께.
옷장의 문틈이 커지며 환한 빛이 샤론을 포근하게 뒤덮었다.
어린 소녀는 눈물을 흘리던 것조차 잊어버린 채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너무나도 그리워하고 보고 싶었던 아빠가 언제나 간절히 바랐던 대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양팔을 뻗고 있었다.
“여기 있었구나. 무서웠지? 이제 괜찮아. 전부 괜찮으니까.”
그 따스한 위로에 샤론은 참았던 눈물을 다시 펑펑 흘렸다.
그리고 몇 번이나 아빠를 불러대며 넓은 품에 와락 안겨들어 머리를 비비었다.
옷장을 나와 마주한 소녀의 방에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창밖으로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전날 밤 몰아닥치던 태풍과 비바람은 어느새 그친 지 오래였다.
밝은 햇살이 두 부녀의 재회를 환히 비추어 주었다.
“···아빠.”
그 순간 샤론은 잠에서 깨어나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위로 뻗어 올린 팔은 무언가를 잡으려고 했던 것처럼 필사적으로 보였다.
꿈에서 봤던 것과 똑같은 온기를 지닌 햇살이 그녀의 눈가를 간지럽혔다.
몽롱한 정신을 몰아내며 샤론은 물기로 촉촉한 눈가를 쓸어내렸다.
그리고 작게 미소 지었다.
“고마워···.”
비록 꿈이라고는 해도 다시 만날 수 있었음에 감사했다.
샤론은 알 수 있었다.
방금의 재회로 분명 10년 전 어린 시절의 자신은 행복해졌으리란 걸.
마치 동화의 결말처럼 해피 엔딩을 맞이한 채 언제까지고 아빠와 오순도순 단란하게 살아갈 것이다.
이제는 현재의 자신 또한 행복해질 시간이었다.
그리고 필시 그 행복은 멀지 않은 곳에 있으리라.
“샤론! 아직도 자고 있어? 이러다 지각하겠어!”
현관문을 쿵쿵 두드리며 자신을 재촉하는 한 소년의 목소리가 창밖으로부터 들려온다.
그 반가운 목소리를 듣자마자 샤론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침대에서 기지개를 켠 후 기상했다.
그녀의 얼굴엔 더 이상 한 줌의 그림자도 남아있지 않았다.
***
“이걸로 모두 다 행복해진 거 같네.”
엘디나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인간 아이들은 물론이고 우리 자매랑 하양이도 멋지게 구원해줬으니. 이건 안 반하고 못 배기는 하렘 주인공의 정석이잖아.”
“언제나 말했지만 난 하렘보단 순애가 취향이라고.”
내가 작게 투덜거리자 그녀는 음흉하게 웃으며 물었다.
“호오? 그래서 순애물로 끝내겠다고? 그럼 누구를 선택하게? 선택받은 1명을 제외한 모두의 가슴에다 비수를 꽂아 넣을 각오는 되어있어?”
“···뭐 그렇다고 딱히 하렘이 싫다는 건 아니니까.”
딱히 모두를 내 걸로 만들겠다는 독점욕은··· 솔직히 말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나도 남자이니만큼 매력적인 여성들이 호감을 표시하는데 싫어할 이유는 없다.
다만 누군가의 마음을 거절해 상처 입히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컸다.
그러니 이 이상 다른 여자들을 더 꼬셔서 하렘 인원을 늘린다느니 하는 욕심은 전혀 없다.
“과연 그럴까? 아직도 그대를 연모하는 서브 히로인이 많이 남아있다고? 인어공주라던가 마녀들이라던가 운명의 여신이라던가!”
“제발 그만둬 줘. 이 이상은 나도 진짜 무리라고.”
“후후. 걱정하지 마. 신에게 일부다처제쯤은 아무 흠도 아니니까. 물론 인간으로 모두를 받아들이겠다면 윤리적으로 손가락질을 받긴 하겠지만.”
하렘을 위해서 신이 되어야 한다는 거야?
터무니없는 이유이긴 하지만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일개 인간이 그만한 여자들을 혼자 독점해버리면 남자들에게 얼마나 원성을 사게 될지 가늠조차 되지 않으니까.
“물론! 첫째 정실부인은 당연히 나겠지?”
엘디나가 매혹적인 눈빛으로 대담하게 미소 짓는다.
그 모습은 신성한 여신이라기보단 남자를 홀리는 서큐버스에 가까워 나도 모르게 주춤하고 말았다.
게다가 복장 또한 평소의 그녀에게선 보기 힘든 파격적인 차림이다 보니 더더욱 눈길이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응? 눈빛으로 내 옷을 뚫어버릴 셈이야? 그럴 필요 없이 그냥 직접 벗기면 될 텐데~.”
“하 하하···. 옷차림이 잘 어울려서 무심코.”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네. 후후.”
새하얀 블라우스와 넥타이 그리고 짧은 기장의 치마.
엘디나가 입고 있는 익숙한 복장은 다름 아닌 아카데미의 교복이었다.
“결과적으론 네가 말했던 그 이상향처럼 된 거네.”
“그러게.”
엘디나와 이터나는 인간의 육신으로 나와 함께 아카데미에 다니게 되었다.
확실히 이 세상은 이상향과 비슷하게 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차이점도 분명하다.
그곳은 마법이 없는 현대 배경이었으나 이곳은 마법이 실존하는 19세기 런던.
그 외에도 하양이는 겉모습이 아직 어려서 함께 입학하지 않았다는 점을 비롯해 여러 사소한 요소가 달랐다.
즉 이곳은 다른 세상이 아니라 원래부터 내가 있었던 세상.
내가 모두와 함께 직접 걸어왔고 마침내 도달한 목적지.
물론 이곳에서 만족할 생각은 없다.
애초에 인생에 있어 목적지라는 건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언제나 최선을 다해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내리며.
그렇기에 나는 여전히 앞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준비는 됐어? 괴도 레이븐 씨.”
내 조수 엘디나의 물음에 씩 웃으며 모자를 푹 눌러썼다.
검은 실크햇에 슈트 그리고 까마귀가 새겨진 지팡이.
그래. 나는 괴도 레이븐.
그 어떤 진귀한 금은보화도 내게 있어선 하나의 유흥거리일 뿐.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훔쳐낸다. 하물며 그게 운명이라 할지라도.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쓰게 될까. 기대되네.”
이야기는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
-End-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드디어 완결이네용..!!
무려 320화라는 뮹뮹 인생에 있어 가장 긴 이야기이자 오래 쓴 작품이 끝났다니 이렇게 후기를 쓰면서도 믿기지가 않는 거에용..
부족한 점도 많고 그때그때 재밌어보이는 소재를 마구 추가하느라 설정도 되게 엉성해서 완결이 난 시점에서도 풀리지 않은 떡밥이나 내용이 잔뜩 있을 거에용..
그래도 매화 댓글에서 독짜님들이 항상 재밌게 읽어주신다고 댓글을 달아주셔서 저도 열심히 쓸 수 있었던 거 같아용!!
사실 최근 정산금 정책 변경이라던가 여러 문제로 수익이 급감하면서 어쩔 수 없이 알바를 시작하고 연재 주기도 무너지기 시작했어용..
최근에는 너무 힘들어서 그냥 이 작품만 완결내고 집필을 그만둬야 하는 게 아닐까도 고민했었어용..
그래도 역시 뮹뮹은 글을 쓰는 게 제일 재밌어서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는 거에용..!!
앞으로도 열심히 쓸 테니 독짜님들도 함께해주신다면 정말 기쁠 거 같은 거에용..
다음 차기작은 아직 고민 중이긴 한데 어쩌면 TS로 가지 않을까도 고민하고 있는 거에용..
모르는 독짜님들도 있겠지만 사실 뮹뮹은 첫작품부터 TS로 시작한 근본 TS작가인 거에용..!!
최근에는 성적에 욕심이 생겨서 TS의 길을 잠시 중단하고 여러 장르의 글을 써봤지만 역시 사람은 좋아하는 걸 해야 하는 거에용..!
TS에 거부감이 있으셔서 차기작을 못 따라오신다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거에용..
대신 TS가 아닌 작품도 동시 연재하고 있으니 관심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보러 와주시는 거에용!!
후기가 너무 길면 지루할 테니 이쯤에서 슬슬 마무리하는 거에용
읽어주시는 독짜님들 항상 감사하며 언제나 행복하기만을 진심으로 바라용..!!
뮹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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