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
커버보기
나는 사람들의 말을 잘 믿지 못했다· 사람들의 감정에도 대부분 무감각했다·
누군가가 날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건 나에게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나를 두고 천성 자체가 고약한 놈이라고 손가락질을 하곤 했다·
내가 타고나길 타인에 무관심하고 감정이 매마른 인간이었나 하면 또 그런 것도 아니다·
나 또한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이 절실했던 적이 있었다· 타인의 감정에 진심으로 응답할 수도 있었고 모든 걸 쏟아서 누군가와 진심 어린 감정의 교류를 한 적도 있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이에 무감각해진 것일 뿐이다·
내게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들려 준 사람은 어머니였다·
아버지가 생계를 위해 타 도시로 일을 떠난 지 한 달 만에 불의의 사고로 죽고 어머니는 홀로 나를 길렀다·
몇 년간 고단하게 살다가 어느 날 어머니는 미안하다는 내용이 적힌 편지를 남기고 사라졌다·
나는 사흘 밤낮을 도시 이곳저곳을 헤맸다· 대로에서 울다가 마차에 치여 이마에서 피가 줄줄 흘러도 나는 엄마가 영영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멈추지 않고 엄마를 찾아다녔다·
울다 지쳐 길바닥에서 잠들고 그러다 다시 엄마를 찾고 열흘 가까이 그랬던 것 같았다· 너무 굶주려서 더는 눈물이 나지 않았고 시장통에서 과일을 훔쳐 먹다 걸려서 매질을 당하기도 했다·
나는 빈민가에서 반쯤 죽어 가는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고 아카테스 교단의 사제가 우연히 발견하고는 나를 거두어 주었다·
그 뒤로 나는 아카테스 신전 그곳에서 고아원으로 운영되고 있는 로레일관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나 말고도 열댓 명의 고아들이 있었다· 이들 모두 부모의 얼굴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들 대다수는 언젠가 부모가 자기를 찾으러 올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나는 밤마다 엄마를 그리워했다· 사랑한다면서 그렇게 무정하게 버리고 떠나는 게 어떻게 가능한 걸까· 어린 시절의 나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몇 달은 밤마다 울면서 지냈다· 세상으로부터 영원히 버림받은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엄마가 없는 삶이 점점 익숙해졌다· 아무리 큰 슬픔이라도 언젠가 익숙해지고 견딜 수 있게 된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때때로 자연재해처럼 버림받을 때의 서러움이 엄습할 때도 있었다· 거리에서 부모의 손을 잡고 해맑게 웃으며 걷는 또래 아이들을 보면 유독 그랬다·
로레일관의 고아들 모두 가슴속에 나와 똑같은 모양의 상처가 있었고 그덕인지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다· 나는 이들과 어울리며 마음의 빈자리를 조금이나마 채울 수 있었다·
나는 거기서 리자를 만났다· 그녀는 나와 동갑이었고 나보다 1년 일찍 신전에 의탁되었다·
그녀는 칙칙한 회색 머리칼에 크고 똘망똘망한눈을 가진 여자아이였다·
리자의 신분에는 유별난 점이 있었는데 그녀는 황실과도 접점이 있을 정도의 명망 있는 마법사 가문의 영애였다는 것이고 돌봐줄 가족이 있음에도 이곳에 왔다는 것이다·
그녀의 부모님은 전란 중에 목숨을 잃었고 숙부가 그 뒤를 이어 가주가 됐다고 했다· 헌데 리자는 숙부의 폭력과 학대에 시달렸고 온갖 반항을 하다 결국 이곳에 의탁된 것이라고 말했다·
리자와 내가 친해진 이후로 그녀는 때때로 내게 하소연을 하곤 했다·
“나는 네가 부러워·”
“왜?”
“나는 차라리 가족이 없었으면 좋겠거든·”
“가족이 없는 게 얼마나 외로운지 몰라서 그래·”
“그럼 너는 가족이랑 결혼할 수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삼촌은 항상 그랬어· 우리 가문은 대륙에서 제일가는 마법사 가문이고 이 혈통에 내려진 축복을 유지하려면 반드시 가족끼리 정을 맺어야 한다고·”
“뭐?”
“그리고 우리 엄마를 어디서 굴러들어온 혈통도 족보도 없는 잡종년이라 그랬어·”
“진짜 나쁜 사람이네·”
“말조심해· 너 그런말하다 잘못 걸리면 이거야·”
그녀는 그러고는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했다·
“삼촌은 말 한마디 잘못해도 날 밤새도록 때렸어· 너도 가만두지 않을 거야·”
“정을 맺는다는 게 너랑 삼촌이랑 결혼해야 한다는 거야?”
“응· 나는 죽어도 싫어· 내가 성인이 되면 삼촌이 날 찾으러 올 거야· 끔찍해· 삼촌이랑 결혼하느니 차라리 죽거나 수녀가 될 거야·”
리자는 다른 아이들과는 쉽게 친해지지 못했다· 다른 아이들도 리자가 귀족 가문의 영애라는 걸 알고 있었고 이때문에 쉽게 무리에 동화되지 못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리자는 나에게는 마음을 열었다· 어쩌면 내가 말을 잘 들어 줘서 맘에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말하는 걸 좋아했고 나는 듣는 걸 좋아했다·
나는 리자의 둘도 없는 친구였다· 예배를 할 때에도 교리와 교양 수업을 들을 때에도 밥을 먹을 때에도 그녀는 내 옆에 앉았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이를 할 때도 그녀는 나랑 항상 팀을 맺었다·
리자는 꽃과 약초를 좋아했다· 그녀는 시간이 남을 때면 혼자 약초학을 공부했다· 수업이 끝나면 그녀는 나를 이끌고 숲속으로 산책을 가곤 했다· 그녀는 숲을 거닐며 아는 약초가 나오면 신나서 책에 나온 이야기를 조잘거리곤 했다·
내 유년기의 대부분은 옆에 항상 리자가 있었다· 리자의 존재가 분명 내 불안했던 정서의 한 축을 지탱해준 건 맞지만 마냥 좋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어쩌다 내가 다른 아이의 옆에 앉거나 수업이 끝나고 다른 아이와 어울리면 그녀는 토라지고는 방에 박혀서 몇 시간 동안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토라질 때면 나는 리자가 좋아하는 꽃이나 약초를 따서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엘칸토라는 꽃을 제일 좋아했는데 아무 효능이 없지만 꽃잎이 예쁘고 달달한 향이 난다고 마음에 들어했다· 그녀는 꽃과 약초를 주면 금방 기분이 풀어졌다·
그러다 몇 번은 꽃과 약초로도 안 풀릴 만큼 리자가 격하게 화를 내는 때도 있었다·
리자는 신전에서 지내는 다른 여자아이와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 내가 다른 여자아이와 어울리면 과격한 행동을 통해 질투와 분노를 표출했다·
그녀는 화가 나면 내 이불에 모래를 뿌려 버리거나 내 옷과 노트를 갈가리 찢어 버리곤 했다· 나와 어울렸던 여자아이에게는 더 심한 짓했다· 다른 여자아이의 베개 속에 몰래 독초 가루를 뿌려서 중징계를 받기도 했다·
도를 넘은 행동에 질려 한번은 그녀와 절교를 선언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리자는 식음을 전폐하고 방문을 잠그고 그대로 은둔해 버렸다· 그 은둔자 행보가 일주일이나 지속되었다· 낮에는 조용했지만 새벽에 그 앞을 지나칠 때마다 서럽게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사제들은 말했다·
리자의 몸 상태가 안 좋아지자 수녀장이 나서서 우리 둘을 강제로 화해 시켰고 그제야 은둔 생활을 청산하기도 했다·
나와 리자는 청소년기에도 늘 함께 다녔다·
리자는 사춘기를 맞이하고 외모가 점점 달라졌다· 칙칙했던 회색 머리칼은 은은한 은발로 변했고 어린아이 같던 눈매는 여성스럽게 진해졌다· 하루가 다르게 키가 자랐고 볼살이 빠져 턱은 갸름해졌다· 피부는 날이 갈수록 점점 하얗게 변했다·
리자와 대사제가 면담하는 일이 잦아졌다· 리자의 혈통과 관련한 문제 때문이었다·
“마력의 샘이 열렸어·”
“그게 뭔데?”
“우리 파스칼 가문 혈통의 특별한 능력이야· 우리 가문 사람들은 내 나이쯤에 다 마력의 샘이 열렸어·”
“좋은거야?”
그녀는 자기 은빛 머리칼을 잡고 옆으로 슥 늘어트리며 말했다·
“응· 내 샘은 단전에 있는데 여기서 마력이 엄청 많이 나오는 거야· 이 머리칼도 마력의 샘 때문에 색이 변했어· 난 옛날이 좋았는데·”
“지금도 충분히 근사해·”
“우리 가문 사람들은 마력의 샘 덕분에 잘 늙지도 않아·”
“음·”
“네가 중년 아저씨가 되어도 나는 지금이랑 별 차이 없을걸·”
“난 그 나이에 애취급 받기 싫어·”
“나도야· 그리고 대사제 님이 기초 마법을 가르쳐 주시겠대·”
“언제부터?”
“내일부터·”
“내일부터 나 마법사 친구 생기는 거야?”
“응· 내일부터 나 없다고 울지 말고 말썽부리면 안 돼·”
“어디 멀리 가는 거야?”
“아니 그냥 저녁에 한두 시간씩 따로 수업 듣기로 했어·”
“난 저녁에 뭐 하고 놀지·”
“그냥 얌전히 있어· 아니 내 생각하고 있어· 나랑 뭐 하고 놀까 고민 좀 해 봐·”
그녀의 성장과정을 지켜보면서 확연히 체감한 게 있었다· 리자는 나와는 확연히 다른 인간이었다· 출신 성분도 타고난 재능도 타고난 외모도 시간이 갈수록 차이가 두드러졌다· 아카테스의 사제가 날 거두지 않았다면 어쩌면 우리는 영원히 마주칠 일이 없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녀와 나는 둘도 없는 친구이자 가족이고 동반자였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모든 걸 공유했다· 시간이 갈수록 나와 리자는 서로의 삶에 깊숙히 침투해 갔다· 우리는 정서적으로 긴밀하게 엮여 있었고 서로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리자는 나이 먹는 걸 두려워했다· 나이를 먹으면 숙부가 자신을 찾으러 올 것이란 두려움 때문이었다·
리자의 마력이 샘이 개방된 후 파스칼 가문의 가신들이 반년에 한 번씩 신전에 찾아와 리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들을 마주하는 날이면 리자의 표정은 몹시 좋지 않았다·
그 후로 리자는 입버릇처럼 커서도 함께하자는 이야기했다·
“우리 커서 꼭 같이 살자·”
그녀는 농담처럼 같이 결혼하자는 소리를 꺼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항상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다·
우리는 커서도 쭉 함께한다는 게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건지 잘 알고 있었다· 지키기 힘들었고 우리는 앞으로 함께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리자의 능력이 개화하고 하루가 다르게 성장할수록 나는 이를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다만 그렇게나마 언약을 맺으면 우리는 힘든 걸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아카테스 신전의 고아들은 17살이 넘으면 로레일관에 더는 머무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일찍 진로를 찾고 때가 되면 각자도생 해야 했다·
리자는 훌륭한 마법사가 되기에 충분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17살이 되면 아카데미에 들어갈 것이 유력했다· 그녀의 앞날은 밝았다·
나는 14살 부터 금속 세공을 배우기 시작했다· 15살에는 제법 규모가 큰 공방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조금씩 기술을 익혔다·
시간이 훌쩍 지나 우리는 15살이 되었다· 그 당시의 리자는 신경이 날카로웠고 성격도 예민해져 있었다·
파스칼 가문의 가신들이 리자를 찾아오는 횟수가 잦아졌고 리자가 날 찾는 횟수도 덩달아 많아졌다·
가신들을 접선한 날이면 이따금 나를 껴안고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말없이 몸을 덜덜 떨었다· 무슨 일이냐 물어도 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공방에서 일하며 버려지는 철조각과 철사들을 모았다· 그중에 상태가 괜찮은 것들을 골라내 녹이고 이어 붙였다· 공방에서 일을 배우며 얻은 기술들을 응용해서 밤을 꼬박 새워가며 반지를 만들었다·
내 첫 작품을 리자에게 주니 그녀는 뛸듯이 기뻐했다· 그녀는 자기 왼손 약지에 그 반지를 꼈다· 다이아 반지라도 되는 것처럼 손을 이리저리 뒤집어대고는 해사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중에 더 멋진 걸로 줄게·”
“지금도 좋아·”
리자가 웃는 모습은 언제나 보기 좋았다· 이런 미소를 언제까지 지켜볼 수 있을까· 내 내면엔 리자와 늘 함께하고픈 욕망이 차올랐다·
그리고 15살의 어느 여름날 나는 살면서 두 번째로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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