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3
우리는 추가적인 영입 없이 2인조 그룹으로 순환계 실습에 임하기로 합의했다·
원래 가면을 쓰지 않기로 임할 계획이었으나 오늘부로 생각이 바뀌었다·
약탈자를 조심하라는 교수의 조언 덕에 학생들 사이에선 그룹 구성을 감추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그룹 구성 파악이 안 되면 가면을 쓰고 활동해도 나를 특정할 방법이 없어진다·
일단 루나 또한 이미 알건 다 알고 있는지라 가면을 쓰고 활동하는 데 아무런 부담이 없었다·
물론 교란 기만술은 유지해야 했으므로 순환계로 이동하기 전까진 나와 루나가 그룹이 된 건 비밀이다·
마지막 준비기간 동안 나는 도서관에서 순환계를 연구하는데 시간을 쏟았다·
루나는 푸른영혼초를 구하러 왜 리그베드에 가지 않냐고 의문을 보이지 않았다· 도박과도 같은 내 계획에도 그녀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마법부 수석이라는 자존심은 버리고 내게 리드를 맡긴 것이다· 마법부 수석의 성적이 나의 선택에 따라 좌지우지 되는 상황이 되니 도무지 대충 임할 수가 없었다·
그날 트리샤와는 두어 번 마주쳤다· 그녀의 마음 속에 무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와 단 둘이 있는 상황이 되면 한바탕 쏟아낼 기색이었지만 좀처럼 둘만 있는 상황은 나오지 않았다·
트리샤는 트리샤대로 그룹원과 준비할 게 많았고 나 또한 바쁘긴 매한가지였다· 더군다나 그녀는 일신상의 이유로 저택에 함께 돌아가지 않고 이터니아에 머물러야 했기에 우리는 마땅한 기회를 잡지 못했다·
저택에 돌아가서는 마지막으로 리리아와 여분의 포션 제조를 했고 다음날 순환계로 출발하는 당일에 깜빡 잊었던 스티치 수리를 위해 새벽같이 리그베드에 다녀왔다·
그렇게 숨가쁘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집결 장소인 이터니아 강으로 향했다·
선착장에는 선원 대신 플랜테라들이 학생들의 짐을 실어나르고 있었다·
그 배경엔 웅장한 크기의 범선 다섯 척이 지평선을 가린다· 입학 시험이 끝나고 복귀하는 길에 탔던 그 배였다·
다른 학생들이 수속을 마치고 배 위에 올라탄다·
당당하게 4인 그룹이 함께 움직이는 경우도 드문 보였지만 대부분은 약탈을 의식했는지 2인조를 초과하는 인원으로 붙어다니지 않았다·
우리는 저 배를 타고 이터니아 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간다· 그리고 어느 삼각지의 무인 포구에서 정박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내리는 순간 순환계 실습이 시작된다·
가만히 배를 구경하던 중 누군가가 뒤에서 걸음을 우뚝 멈춰선다·
뒤를 돌아보니 열 걸음 쯤 떨어진 곳에 챙이 둥그런 모자를 푹 눌러쓰고 손을 가지런히 모은 루나가 보였다·
복식은 험난한 탐험에는 어울리지 않는 화사한 원피스· 일주일 간의 여정을 그걸로 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짐은 나와 마찬가지로 극도로 간소하다·
우리는 일전에 합의한 대로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잠깐의 시선교환·
배도 따로 탈거고 실습이 시작해도 초반 지점까지 따로 움직일 것이다· 지금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관계다·
그러던 중 멀리서 트리샤가 크게 내 이름을 불렀다·
“데미아안!”
이에 루나가 흠칫하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내 옆을 지나쳤다·
트리샤가 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와서는 루나를 흘겨본다· 속에 부글부글 끌어오르는 감정이 하루가 지나도 사그라들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고는 나를 살짝 올려다 본다· 표정을 보니 그 분노의 대상에 나도 포함된 듯하다· 그녀는 평소와는 다르게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그룹은·”
“결국 쫓겨났지·”
“···식사는·”
“안 챙겼어·”
“배 위에선 다 굶을거야?”
“····”
그건 생각을 못했다·
트리샤가 험상궂게 나를 타박한다
“멍청이·”
그러고는 가방에서 말린 과일과 육포 소시지를 꺼내 가죽주머니에 따로 담아 내 손에 쥐어주었다·
당장에 화를 터트릴 것 같은 심통 가득한 표정으로 자상하게 챙겨주는 모습이··· 무슨 속내인지 의문을 자아낸다·
“고맙다·”
“그리고 나중에 나랑 따로 얘기해·”
문득 섬찟한 기운이 등골을 적신다· 분위기를 봐서는 나한테 쌓인 게 많아 보이는데·
그런 뒤 그녀는 대답도 안 듣고 배를 향해 걸어갔다·
“이야기라면 지금 시간 내서····”
그녀가 내 말을 듣고 휙 돌아서서 소리쳤다·
“지금 말고!!!”
그러곤 씩씩거리며 배에 승선했다·
여자들 마음은 대체 왜 이러는 걸까· 트리샤의 마음은 유독 이해하기 힘들다· 정해진 메뉴얼이나 지침 같은 게 있으면 달달 외우기라도 할 텐데·
실베린한테 조언을 구하면 답이 나오려나· 스티치 수리가 끝나면 물어볼까·
***
다섯 척의 범선이 강줄기를 미끄러지듯 뻗어나간다· 이터니아 강 자체가 폭이 넓고 유속이 느린 덕에 배를 띄워도 흔들림으로 인하여 불편을 겪는 일은 거의 없었다·
교수들은 선두에 있는 배에 승선하여 한 선실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조르지아가 교수들에게 차를 한잔씩 돌리며 말했다·
“이번에는 약탈조가 많다면서요?”
라캄이 차를 받아들고 말했다·
“작년에는 학생들이 다 순해서 고작 약탈조가 하나 뿐이었는데 이번엔 평균보다 훨씬 많소· 올해엔 유독 독종이 많이 입학한 모양이외다·”
약탈조는 조장 연금술사 한 명에 나머지를 전투 인원으로 꾸려서 적극적으로 타 그룹의 자원을 갈취하는 부류다·
약탈조는 해마다 평균적으로 3~4개 그룹 정도· 이번에 약탈조로 추정되는 그룹은 9개 가량이다·
1학년은 호전적인 기질이 더 강하다는 걸 의미했다·
더군다나 4인 그룹이 아닌 1~2인으로 구성된 그룹까지 포함하면 약탈조는 더 많아질 수도 있었다·
“어휴 우리 미술부 애들 다치면 안 되는데· 이번엔 요주의 인물이 몇 명이나 되나요?”
환수의 영역에 접근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학생들· 그들은 2인 그룹을 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 험난한 여정을 1~2인으로 구성하는 건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엄두도 못 낸다·
안전 결계를 구축을 위해 원정에 합류한 칸디넬라 마법부 교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여섯이요· 이것도 작년보다 많아서 재밌네요· 그보다 조르지아 교수님은 미술부 학생만 편애하시니 연금부 애들은 서운하겠네요·”
“연금부는 애들이 다 샌님 같아서 정이 안 가요· 그리고 그냥 둬도 곧 잘 하더라구요· 아니 그보다 칸디넬라 교수도 연극부에 따박따박 후원금 가져다 주더만· 나한테만 이런 소리를 해요?”
칸디넬라는 북부 파견 임무중에도 연극부 후원금은 빼놓지 않고 보낼 정도로 유달리 애착이 강했다· 그들 이외에도 전공보다는 예술 특기부에 정을 더 붙이는 건 여느 교수들이나 다 비슷했다·
칸디넬라 교수가 말했다·
“하하 그러네요· 아무튼 요주의 인물이 여섯이나 되니까 고르는 맛도 있겠네요· 각자 이제 슬슬 하나씩 고르시죠?”
그곳에 있는 네 명의 교수들· 라캄 알퀘이드 조르지아 칸디넬라는 전부 예술부 고문을 맡고 있었다· 이들은 매해 합동 수업 때가 되면 예술부 활동 지원 추가 예산을 걸고 내기를 했다·
바로 누가 최고의 성적을 거둘지 맞추는 게 내기의 목표였다· 여기서 이긴 사람이 지도하는 예술부에 추가 예산을 몰아주고 진 사람은 자비로 구멍난 걸 충당해야 했다·
조르지아가 말했다·
“푼돈 말고 클라리디움 견학비를 걸고 하는 건 어때요?”
문화와 예술 그리고 마도학의 도시 클라리디움은 이터니아 학생들이 제일 가보고 싶어하는 꿈의 도시였다·
그리고 교내 대항전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예술부에겐 클라리디움에 견학할 수 있는 혜택이 주어졌고 그 중 미술부는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었다·
칸디넬라가 제안을 거절했다·
“하하 그걸 함부로 걸었다간 애들이 병장기를 들고 제 집 앞에서 시위를 해댈 거예요· 연극부는 잃을 게 많아서 사양하죠· 그보다 미술부는 머릿수가 적으니까 이번 예산만 따도 견학에 가까워지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요· 이번엔 좀 진지하게 임하려고요·”
라캄이 말했다·
“그럼 제일 급한 조르지아 교수가 먼저 선택하시지요·”
“크흠· 모처럼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조르지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테이블 위에 높인 그룹 명단표를 낚아챘다·
그리고 쭉 훑어내리는 중에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칸디넬라가 살짝 초조한 눈길로 조르지아를 지켜보았다·
조르지아는 한동안 고민하다가 말했다· 쟁쟁한 경쟁자들 틈바구니에서 자꾸만 신경이 쏠리는 그 이름·
“저는···데미안으로 할게요· 아무래도 미술부라서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나봐·”
이에 칸디넬라가 자신이 노리고 있던 것을 뺏겼다는 듯이 탄식했다·
***
배가 정박한 곳은 민가 하나 보이지 않는 드넓은 초지였다· 배가 선착장에 일렬로 정박하니 강 위에 거대한 장벽이 세워진 것 같았다· 플랜테라들이 학생들의 짐을 들고 분주하게 옮겼다·
플랜테라의 도움을 받는 건 여기까지고 나머지는 자력으로 해결해야 했다·
그리고 학생들도 줄지어 육지로 내려갔다·
그들은 땅 위에 한대 모여서 잠시 대기했다·
긴장된 표정·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옆에 있는 모두가 경쟁자였다·
그리고 소더튼 지역에서 누굴 맞이하느냐에 따라 사냥감이 될 수도 있고 사냥꾼이 될 수도 있으니 각별히 주의해야 했다·
1학년들이 전부 상륙한 걸 확인하고는 라캄이 배의 난간에 서서 큰소리로 몇가지 전달 사항들을 강조했다·
“시작 지점 인근에서는 약탈 행위는 금지니까 시작부터 쌈박질은 자제하도록· 수업 때 강조했지만 능력이 부족하면 위험 지역은 가지 않도록 주의하게나· 그리고 소더튼 초입부까지는 구간마다 안전 결계를 펼쳐둘 것이니 예기치 못한 돌발 상황이 닥치면 그곳을 적극 활용하도록· 실습을 중도 포기할 수는 있지만 권장하지는 않네· 일주일 굶어도 죽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이상· 건투를 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순환계 편입 실습이 시작되었음을 알리자 학생들은 자신의 짐을 챙기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어깨에 자신의 몸통만한 짐을 들고 부채꼴로 각각 퍼져 나갔다· 처음부터 4인으로 활동하는 그룹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약탈자 때문이었다· 다들 동선 노출을 피하기 위해 각각 흩어졌다가 미리 정해둔 집결지에 합류할 것이다·
데미안은 단촐한 짐 덕분에 남들에 비해 몸이 가벼웠다·
그도 간단하게 몸을 풀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루나와 정해두었던 바로 그 장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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