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5
“일어나·”
세실이 베르탕의 어깨를 툭툭 쳐냈다·
그러자 베르탕이 눈살을 구기고 짜증을 냈다· 그는 불침번 때문에 늦은 시각에 잠이 들었던 탓인지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아···음· 아니 왜····”
“움직여야 해·”
“아···흐아암 아직 해도 안 떴잖아·”
“멀리서 보이는 불빛이 우리랑 가까워지고 있어· 먹구름도 점점 몰려오고· 초입부는 전부 평원이라 마땅히 비를 피할 곳도 없어·”
“아이···약탈자일 거라는 보장도 없잖아· 결계구 쓰면 비 정도는 막을 수도 있고· 조금만 더 자면 안 돼?”
“멍청아 결계구 설치하면 이동을 못 하는데 여기 평생 이러고 있을 거야? 그리고 스티치 받았는데 벌써 테이나 그룹 약탈당했대·”
그 말을 들은 베르탕이 정신이 확 드는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 뭐라고?”
“말 그대로야· 테이나 쪽은 벌써 모든 물자가 털렸대· 우리 조장께서 약탈자 놈들 다 막아주실 수 있으면 우리도 그냥 자고·”
베르탕은 눈을 비비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를 제외한 다른 그룹원들은 이미 떠날 채비를 완료한 상태였다·
그룹원의 표정을 보니 더는 싫은 소리를 할 수 없었다· 마르타 세실 트리샤 전부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그룹은 약탈에 취약했다· 저항 정도는 할 수야 있겠지만 작정하고 달려드는 전투부 마법부 놈들을 막아내는 건 무리였다· 그룹원 중 그나마 전력이 준수한 건 마르타 뿐이다· 만약 약탈당해서 모든 포션과 마도구를 빼앗긴다면 그대로 지옥길을 걸어야 했다·
그리고 이 그룹에서 전력이 가장 약한 사람은 베르탕이었다·
계산이 끝난 그는 빠르게 일어나서 모포를 정리했다·
마르타가 볼멘소리를 했다·
“우리 아무래도 쌈박질 잘하는 애를 데려왔어야 했어·”
입학시험 때도 이들은 전력이 약해 강제로 해산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때는 운이 좋아서 다시 모일 수 있었지만 이번에도 운이 좋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분위기가 더 안 좋아지기 전에 세실이 바로 일축했다·
“이미 이렇게 짠 걸 어쩌겠어· 늦기 전에 움직이자·”
그들은 채비를 마치고 행군을 시작했다·
사냥감이 되어 쫓기는 신세가 된 게 영 불만족스러웠는지 팀원들의 움직임에 하나같이 기운이 없었다·
그리고 트리샤의 얼굴은 유독 시무룩해져 있었다·
이를 눈여겨본 세실은 트리샤와 걸음을 맞추며 슬며시 말을 걸었다·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
“언니····”
트리샤가 세실을 한 번 올려다봤다가 다시 힘없이 눈을 떨궜다·
세실의 그룹은 멤버 구성이 이미 다른 이들에게 알려질 대로 알려져 있었고 더군다나 세실의 희귀한 마도구 덕에 약탈조에게 이들은 걸어 다니는 보물창고였다·
세실이 픽 웃고는 그녀의 등을 토닥거리며 안심시켰다·
“너무 걱정하지 마· 약속할게· 우리는 약탈당할 일 절대 없을 거야· 언니는 다 계획이 있거든·”
마르타도 나란히 서서 트리샤를 격려했다·
“맞아· 세실 이 여우 같은 기지배가 도와달라 하면 침 질질 흘리면서 달려올 놈이 한둘이 아니니까·”
“····”
그녀는 속내를 다 털어놓지 않았다· 세실이 보기엔 트리샤는 일전에 그룹에 넣자고 했던 데미안을 내내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는 데미안이 속했던 이리스 그룹과 함께 활동하자는 소리도 했었다· 뭐가 잘 안 풀렸는지 그 계획은 전부 무산되어 버렸다·
데미안이 같이 있었으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라 여기는 걸까·
뒤에서 그들을 따라가던 조장 베르탕이 슬쩍 끼어들었다·
“차라리 다른 그룹이랑 협력하는 게 더 나은 것일 수도 있어· 엘리아스도 어쩔 수 없이 우리랑 떨어지긴 했지만 도움을 요청하면 걔네 그룹도 우리랑 협력할 수도 있고· 엘리아스 그룹엔 빅터가 있잖아· 약탈조 정도는 쉽게 퇴치하겠지·”
클로디나스 형제단에서 배출한 불세출의 천재· 전투부 입학 성적 3위를 기록한 빅터 드미트리 바튼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트리샤는 그룹의 사기가 떨어질 걸 염려했는지 괜찮아진 척 표정을 지으며 적당히 수긍했지만 아쉬운 기색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다·
베르탕이 그런 트리샤의 태도를 의식하고 한마디 추가했다·
“전투부 한 명이 그룹에 있으면 좋기야 했겠지· 근데 작정하고 약탈하는 놈들을 막으려면 한 명으로는 턱없이 부족해· 피난 다니는 신세인 건 똑같았을걸?”
걔가 왔어도 달라지는 건 없다·
트리샤가 추천했던 인물인 데미안을 은연중에 겨냥한 말이었다· 이에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나아가다 뒤따라오는 불빛이 보이지 않자 그들은 야트막한 둔덕 위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세실은 나무 뒤에서 마르타를 따로 불러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했다·
마음이 안 놓이고 찝찝하기는 마르타나 세실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냥감이 되어 쫓기는 건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위험지대쪽으로 가야겠어·”
마르타가 착잡한 표정으로 답했다·
“달리 방법이 없지···?”
약탈조 대부분은 상위권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이 세실 그룹을 최우선 순위로 노리는 이상 꼬리가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남은 방법은 모두가 기피하는 위험지대 인근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응·”
“어휴 엘리아스가 갑자기 부러워지네·”
엘리아스도 그들과 항상 같이 다니던 친구였다· 하지만 이번엔 세실 그룹의 정원이 꽉 차 다른 그룹으로 옮겨야만 했다· 그런데 운이 통했는지 엘리아스는 빅터와 한 팀을 맺었다·
세실이 마르타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내가 하나 데려올까?”
제아무리 빅터라 해도 모든 약탈조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와 몇등 차이 안 나는 이들이 결성한 약탈조라면 빅터라도 버거울 수밖에 없다·
세실은 그 어떤 약탈조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인물을 하나 알고 있었다·
그 남자라면 아마 시시한 것들은 다 제쳐두고 가장 강력한 놈의 목을 치러 위험지대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누구?”
세실은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말없이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자신만 아는 무언가가 있다는 듯이·
***
루나가 걸어가던 중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
뒤에는 푸른 둔덕이 펼쳐져 있을 뿐 그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모르겠어· 무언가 우리를 따라오는 것 같아·”
“···정령이 알려준 거야?”
루나는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직감적으로 느끼는 것이겠지만 루나의 직감은 희미하게 예지 능력이 깃들어 있어서 무시하고 넘어가선 안 됐다·
우리를 따라올 사람이라면·
글쎄 의심가는 사람이 한 명 있다·
시온이 나에 대해 수소문하고 다닐 가능성이 다분히 컸다·
패배를 안겨주고 그 이후로 증발했으니 약이 바짝 오를 만하지·
내 위치 알고 추적하지는 않겠지만 문제는 시온의 경로가 우리랑 겹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위험지대는 반드시 피해야 하는 곳이 아니다· ‘능력이 부족하면’ 가선 안 되는 곳일 뿐이다·
승부욕의 화신인 시온이 그곳을 피해 갈 리가 없다· 일부러 강자만 찾아가 도장깨기를 하는 도전욕이 그녀를 위험지대로 이끌어갈 것이다·
시온이 날 발견하면 답이 없다· 그녀는 아티팩트를 활용해 나보다 대략 서너배 정도 빠르게 달린다· 입학시험 때야 시온이 발목을 다쳐서 쉽게 도망쳤지만 이제는 무작정 도망치는 게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와 마주한다면 싸우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지만 솔직한 심정으론 피하고 싶었다·
일단 마검을 꺼내서 싸운다면 싸움의 규모가 너무 커진다· 난 힘조절하는 법을 모르고 시온도 전력으로 싸울 테니 둘 중 한 명의 팔다리가 절단나야 싸움이 끝날 것 같았다·
보통 검으로 상대하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 왜냐면 난 실력이 시온에게 못 미친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인전에서는 검법과 경험치가 크게 작용하고 그 두 개는 나에게 없다· 근본 없는 검법으로는 소드마스터의 제자를 상대하는 데엔 한계가 있다·
지는 싸움은 그다지 하고 싶지 않은데·
나 또한 지는 건 질색이니까·
어떡해야 하지· 사탕 몇 개 쥐여준다고 넘어갈 것 같지는 않다·
루나가 생각에 잠긴 내 모습을 보고는 조심스레 묻는다·
“왜···그래?”
루나에게는 미리 말해두는 게 좋겠지·
“날 쫓아올 만한 사람이 하나 있긴 해·”
“···?”
“시온이 날 찾아올 거야· 너한테까지는 해를 끼치지는 않겠지만 좋은 목적으로 오는 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아 둬·”
루나의 눈이 흥미롭다는 듯이 살짝 커진다·
“···자세히 말해줄 수는 있어?”
루나는 나와 한 그룹인 이상 숨길 것도 없었다·
“나랑 싸우고 싶어 해·”
“····”
“걔는 달리기 하나는 무진장 빨라서 도망치는 건 힘들어· 싸우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어·”
“데미안은···죄가 많은 사람이구나·”
“····”
루나가 한동안 머뭇거리다 물었다·
“혹시 안개라도 괜찮아?”
“···응?”
“마법의 안개 정도면 시온한테서 도망칠 수 있을까?”
“안개?”
“집안의 간섭을 피하고 싶을 때 안개를 만들어서 도망쳤었거든· 그거라면····”
안개라· 제법 그럴듯하다· 미궁에서 지낸 덕에 익숙하기도 하고 시온의 속도는 이길 수 없으니 감각을 차단하는 쪽으로 전략을 짜면 가능성이 있었다·
“한 번 보여줄 수 있겠어?”
“응·”
루나가 잠시 심호흡하고 알 수 없는 언어로 허공에 속삭인다·
곧이어 말의 형상을 한 푸른빛의 정령이 그녀의 주변에서 모습을 드러내더니 야생마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루나가 허공을 한 번 쓸어내자 정령의 수가 하나씩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말이 지나간 곳에는 짙은 수증기가 꼬리처럼 길게 이어졌다·
정령이 우리 주변을 둥글게 감싸더니 몇 분 안 지나서 사방이 희뿌연 안개로 뒤덮였다·
마치 뭉게구름이 땅 위에 내려앉은 것처럼· 네다섯 걸음 떨어진 루나마저 흐리게 보일 정도로 밀도가 짙다·
안개 속에서 실루엣만 남은 루나가 내게 물었다·
“···이 정도면 괜찮을까? 해가 떠 있으면 오래 유지하지는 못해·”
나는 허공에 손을 휙휙 저었다· 밀도가 진해서 내 손바람으로도 휙휙 저어진다· 마법부 수석은 괜히 수석이 아니구나· 너무 탁월해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잠깐이지만 그래도 미궁에 필적하는 짙은 안개를 생성할 수 있다면 도주엔 굉장히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훌륭해· 루나 너는 어릴 때 숨바꼭질 많이 해봤어?”
“응· 사람이랑은 안 해봤지만····”
그거면 충분하다·
***
시온은 다 불이 다 꺼진 잿더미를 발로 툭툭 쳐냈다·
야영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 앞에 누운 흔적은 고작 둘· 2인 그룹이 있었나? 기억에 없는 걸 봐선 필시 비밀스럽게 행동하는 것이 분명했다· 발자국은 북서쪽으로 쭉 이어진다·
위험지대로 향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우회하려는 걸 수도 있다·
찾아낼만한 단서가 거의 없었다· 시온은 육포를 하나 꺼내서 질겅질겅 씹으며 발자국을 따라갔다·
그러던 중 흙먼지에 얼룩진 천쪼가리가 그녀의 눈에 밟혔다·
시온은 바로 그것을 집어서 확인했다·
질감을 봐선 누군가가 입던 옷 같았다· 옷감의 끝이 검게 그을린 걸 봐선 불에 태우다가 바람에 날아간 탓에 미처 소각이 안 된 것 같았다·
옷을 불에 태울만한 이유가 있을까· 정체를 숨기는 것 말고 다른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설마····”
그러던 중 불현듯 무언가 떠올라 그 옷감을 천천히 코에다 가져다 댔다·
흙냄새와 탄내· 그리고 그 속에서 희미하게 허브향이 났다·
바로 사탕이에게서 나던 그 체취였다·
그가 이곳에서 실습을 치르고 있다는 증거였다· 심지어 그녀가 모르는 새로운 동료까지 데리고·
시온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녀는 오랜 실전 경험으로 이미 마수 추적에는 베테랑 실력이었다· 그러니 그 자식을 다시 만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드디어 잡았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