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6
드문드문 보였던 나무도 이제는 눈에 자주 밟히고 불쑥 솟은 거대한 바위도 자주 마주친다· 새로운 환경에 진입하고 있다는 신호다·
우리는 비교적 고지대 축에 속하는 언덕에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순환계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곳엔 먹구름이 드리워 있었다· 아직 이곳은 따사롭게 내리쬐는데 저 멀리에선 이따금 폭우가 쏟아지고 천둥번개가 번쩍거렸다·
새카만 장막이 쳐진 것처럼 순환계의 경계가 명확하게 나뉘어져 있었다·
저 비바람과 운무의 커튼 틈으로 기암 절벽과 울창한 원시림이 드문드문 속살을 드러냈다·
구름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탓에 영역 일대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 같았다·
서너 시간 정도 더 걸어가면 순환계 위험지대에 진입하게 될 것이다· 느긋한 여정은 끝나고 본격적인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가만 서서 루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생전 정수리에 비 한 번 안 떨어졌을 것 같은 얼굴이다· 귀하게 자란 아가씨가 저런 오지에서 잘 버틸 수 있을까·
“비 맞아도 괜찮아?”
“응·”
“잠깐만·”
나는 망토를 벗어다가 루나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우리는 빗속을 뚫고 가야 한다· 머리가 젖는 건 못 막겠지만 옷은 어느정도 보호할 수 있겠지· 나야 옷이 다 젖으면 벗어서 말리면 되는데 루나는 그러지 못하니까·
순환계에서 내리는 비 또한 마법의 힘이 담겨 있다고 했으니 몸을 적시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그 일부가 되는 과정에 기여할지도 모르니·
그녀는 손으로 망토를 여미며 말했다·
“···고마워·”
“위험지대에 가서 동굴이나 야영할 만한 곳을 찾아보자·”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려와는 달리 그녀는 조금 기대하는 눈치였다·
***
베르탕과 마르타가 잠시 정찰을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세실이 물었다·
“트리샤 왜 그렇게 종일 기운이 없어?”
“···아무것도 아니야·”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녀는 속앓이를 하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뭔데 짜증나는 사람 있어? 베르탕이 또 집적대?”
“아니····”
“말해봐· 언니가 다 들어줄게·”
트리샤는 입술에 힘을 주고 꾹 다물고 고심하다가 말을 꺼냈다·
“언니는 내가 아무 쓸모 없다고 생각해?”
마침내 꺼낸 트리샤의 말투엔 희미하게 울분이 섞여 나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런 말을 하는 걸까· 그녀가 그룹에 데려오려 했던 데미안과 관련이 있는지도 모른다· 자랑거리라도 되는양 소개했다가 어느 순간부터 그에 관한 이야기를 뚝 끊어버렸으니까·
“음 누가 너한테 쓸모없다 그랬어?”
“아니 그런건 아닌데····
“그럼?”
“모르겠어····”
트리샤가 대답을 잠시 망설이자 세실은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음 네가 스스로 느끼기에 쓸모 없는 것 같다는 거야?”
“으응···비슷해·”
“데미안이라는 애 때문에 그런 거야? 걔가 무슨 말 했어?”
트리샤는 강하게 부정했다·
“아니!!”
“····”
그 덕에 세실은 확신할 수 있었다· 데미안 때문인 게 맞았다·
세실은 잠시 고민했다· 트리샤는 대인관계에 아직 미숙한 소녀다· 어떤 성장 환경 속에서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인관계에 대한 이해도는 거의 백지상태에 가까웠다·
남자를 어떻게 상대해야하는 지도 모를 것이고·
“아무튼 다른 친구이야기인데· 나는 걔랑 엄청 친하다 생각했거든· 근데 걔는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아· 나한테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고 뭐든 혼자서 비밀스럽게 하려고 해· 뭘 하는지 전부 공유하는 게 친구잖아· 나한테 같이 그룹하자는 말도 안하고 몰래 다른 여···그룹에 들어갔어·”
그러니까 자신에게는 그룹하자는 말을 한 번도 안 해서 스스로를 쓸모없다 생각하게 된 건가·
“트리샤 부부라고 해도 모든 걸 공유하지는 않는걸·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
“그치만···!”
“그렇게 서운하게 느낄 필요 없어· 좋은 남자들 특징이 뭐인줄 알아? 남한테 의존하려 하지 않아· 소중한 사람한테는 험한 꼴 보이기 싫어서 혼자 해결하려는 것일수도 있잖아·”
“남자라고는 말 안 했어!”
세실은 트리샤의 말을 가볍게 웃어넘겼다·
그리고 사탕이와의 관계를 떠올리며 트리샤에게 조언했다·
“친하다고 해도 상대의 영역을 존중해주지 않으면 관계가 망가질 수도 있어· 너무 과하면 도망갈 걸·”
“····”
트리샤는 생각할 거리가 많아졌는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곧이어 정찰을 나갔던 그룹원들이 돌아오면서 대화는 마무리됐다·
베르탕은 땀을 뻘뻘 흘리며 정찰하면서 알아낸 것들을 공유했다·
“위험지대로 가는 길목에 건천이 있어· 비가 안 오는 날에는 맨땅이라 쉽게 건너는 구간인데 지금은 물이 약간 차오른 상태야· 더 불기 전에 건너면 약탈자 놈들 추격은 한동안 따돌릴 수 있겠다 싶은데·”
물이 더 불기 전에 건너자는 말에 이견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이제는 하천이 되어버른 그곳으로 서둘러 이동했다·
흙탕물이 줄줄 흐르고 물살도 조금 거칠었지만 못 건널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누구도 먼저 가겠다 자처하질 않자 세실이 치마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어휴 내가 간다·”
그녀는 신발을 들고 물살에 발을 내딛었다· 몇 걸음 나아가 중간에 서 있어도 허벅지 중간 정도로 잠길 뿐 그리 깊지는 않았다·
괜찮은 걸 보고 트리샤도 발을 뻗었지만 세실은 이상을 감지하고 제지했다·
“잠깐 오지마!”
3분의 2를 넘어가자 바닥이 더 깊어지는 구간도 아닌데 세실의 배꼽까지 물이 차올랐다· 유량이 급속도로 늘어난 것이었다·
세실이 다 건너고 나니 물은 빠르게 불어나 폭포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천의 폭도 급격히 넓어져서 이들은 뒤로 물러나야 했다·
트리샤가 손을 나팔처럼 만들어서 소리쳤다·
“언니!”
예상치 못한 변수로 세실 혼자 급류 건너편에 격리된 상황이었다·
“난 괜찮아! 절대 무리해서 건너지 말고 우회해서 다리를 찾아서 건너와!”
“언니는 어쩌려고!”
“나는 우릴 도와줄만한 그룹을 찾아볼게! 무슨 일 있으면 스티치 보내!”
“너무 위험해!”
“괜찮아!”
정말 저렇게 혼자 가도 되는지 걱정스러웠다 세실의 수중엔 식량이라곤 육포 몇 조각이 전부였다· 이 상황이 얼마나 지속될지도 모르는데 어쩌려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베르탕과 마르타는 위험지대에서 그룹을 찾는다는 게 가당키나 한 건지 의심했다·
그러던 중 트리샤는 세실의 행동을 보고는 의문을 표했다·
그녀는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윗단추 세개를 풀어냈다·
“윗옷은 안 젖었는데···?”
그런 뒤 세실은 위험지대 방면으로 향했다·
***
우리는 암석과 나무가 절반씩 섞인 숲을 헤쳐나갔다· 마침내 발을 디디게 된 순환계엔 밀가루를 뿌리는 것처럼 입자가 작은 안개비가 내렸다·
우리의 첫번째 목표는 야영을 할 수 있는 동굴을 찾는 것이고 그 다음은 식량을 수급하는 것이었다·
땅 위에 불쑥 솟은 거대한 바위들이 심심치 않게 보여서 동굴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아 보였다· 다만 식량이 문제였다· 아직은 동물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가급적 먹이사슬의 상층에 자리잡은 동물을 찾고 그게 안 되면 약초나 버섯이라도 채집해야 한다·
나아가던 중에 루나가 나를 불러 세웠다·
“내가 부리는 정령 중 하나가 동굴을 찾았대·”
안개비가 점점 두터워지고 있던 차에 모처럼 반가운 소식이었다· 루나의 정령이 시간도 절약해주는구나·
“좋아· 가서 확인해보자·”
지하로 이어진 동굴이면 피해야 했다· 비가 오면 물이 동굴 안으로 쏟아질 위험이 있었고 벌레와 박쥐가 드글드글할 가능성도 컸다·
나는 루나를 따라 이동했다·
그녀가 안내한 동굴은 적당한 고지대에 위치해 있었고 암반 자체도 단단해서 붕괴의 위험도 없었다· 정령들이 제대로 된 곳을 찾아낸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 짐을 풀었다·
“장작 패올게·”
불을 지펴서 캠프를 차리는 게 급선무였다·
리니어 나무는 껍질만 제거하면 눈이오나 비가 오나 속이 건조해서 땔감으로 쓰기 좋으니 그걸 찾아오면 된다·
루나는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는 싫었는지 나를 따라 움직였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도 되는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동안 버섯을 따 올게·”
본인이 하겠다니까 딱히 말리지는 않았다·
오는 길에 버섯을 제법 많이 보긴 했다만 먹을 만한 건 없었는데 믿어도 되려나·
우리는 따로 움직였다· 쓸만한 리니어 나무를 한무더기 들고 와 껍질을 다 벗길 때쯤 루나가 버섯을 한 아름 끌어안고 동굴로 복귀했다·
그녀는 뿌듯해 보이는 얼굴로 버섯을 내 앞에 내밀었다·
나는 이를 확인하고선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총천연색의 알록달록한 빛깔· 사과같이 붉은 것도 있는가 하면 풋사과처럼 푸른 것도 있었다· 빛깔만 보면 이쁘고 탐스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것들은 전부 독버섯이었다·
뿌듯해보이는 얼굴 때문에 군말 없이 다 먹어 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녀의 어수룩한 모습이 밉다기보단 오히려 정감이 가지만 이건 목숨이 달린 일이니 마음이 아파도 진실을 말해야 했다·
“전부 독버섯이야·”
정말 하나도 빠짐 없이 맹독을 지니고 있었다·
“···!”
열심히 따온 것 같아서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다 결국 그것들을 밖에다 던져 버렸다· 루나는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충격을 받았는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죄지은 것 같지· 하나 정도는 먹어 줄 걸 그랬나·
독버섯의 포자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 루나의 손을 씻기고 연기가 잘 빠져나갈 위치에서 불을 지폈다· 때마침 빗줄기가 온 세상을 쓸어버릴 것처럼 불어났다·
우리는 동굴 입구 쪽을 바라보는 위치에 나란히 앉아 몸을 녹였다· 빗줄기 덕에 이 동굴 안이 더욱 안락하게 느껴졌다· 루나는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적당히 체온을 끌어올리고 다시 일어서서 목검을 챙겼다· 그리고 루나도 나를 따라 일어났다·
“지금 나가면 망토를 둘러도 흠뻑 젖을 거야· 여기서 기다려· 사냥하고 올게·”
루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독버섯을 떠올렸는지 이내 수긍했다·
“···응·”
내가 동굴 밖으로 나가려하자 루나가 갑자기 나를 불렀다·
“저기··· 주머니에서 빛이 나오는데···지금 확인 안 해도 괜찮은 거야?”
“응?”
허리춤을 확인하니 정말 그 한 가죽 주머니 안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건 세실의 스티치를 담은 주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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