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0
난 사실 베르탕의 태도에 피로감을 느꼈을 뿐 반감은 없었다·
팀원의 안전을 맡긴 상황에서 실력을 검증하려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굳이 나서서 기싸움을 할 필요는 없다· 베르탕이란 녀석의 인정이 내게 무슨 효용이 있겠는가·
솔직한 심정으론 베르탕이란 녀석이 날 시시한 존재로 여겨도 상관없으니 아무 일 없이 평화롭게 일이 끝났으면 하는 바램이다· 하지만 워낙에 위험한 땅이니 증명할 기회는 피하고 싶어도 찾아올 거다·
“슬슬 움직이자·”
나와 루나가 먼저 앞장서 나가자 세실과 나머지들은 다섯 걸음 쯤 거리를 두고 우리를 뒤따랐다·
두 그룹이 합쳐지긴 했지만 아직 심리적 거리감은 좁혀지지 않았다·
긴밀하게 전략을 짜야할 것이 있었다· 시온의 습격 때문이었다· 목적지가 같은 이상 수렴하는 지점에서 반드시 만날 수밖에 없었다· 머릿수가 많아진 이상 즉흥 대처는 지양해야 한다·
루나 또한 곧 강력한 누군가가 우릴 찾아올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곧 찾아올 것 같아· 그런데···악의는 느껴지지 않아·”
“악의도 없이 여섯 그룹을 약탈했다는 말이니까 더 흉악하네·”
기습으로 올지 아니면 정면대결을 신청할지는 알 수 없었다· 어찌되었건 우리는 승부를 피하고 도망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순환계에 집중해야 할 상황에 동급생이랑 치고박고 싸우는 건 심각한 기력 낭비다·
“안개를 펼치고 나 대신 세실쪽 애들을 인솔해줘·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 안전한 곳에서 대기하고 있어·”
지도 위에 새로운 집결지도 지정했다·
루나는 마음이 무거워진 듯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괜찮···겠어?”
나 혼자 짊어지는 것이 미안한 듯한 표정이다· 이 일에 엮이게 한 건 엄밀히 말해서 내 탓이다· 내가 루나에게 미안해 할 일이다·
“응당 해야 할 일이야· 걱정하지 마·”
“시온은 나도···상대할 수 있어·”
루나도 엄밀히 마법부 수석이다· 아직 보여주지 않은 힘이 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보다 상성이 더 좋을수도 있겠지·
“네 힘이 필요할 때가 분명 오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야· 나한테 맡겨·”
쌈박질을 좋아하는 시온과 얽혀서 루나에게 좋을 건 없다·
내 부담을 덜어주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맙고 든든하다·
세실이 은근슬쩍 내 옆에 붙어서 나란히 걸었다·
“둘이 무슨 이야기 해?”
곧이어 트리샤도 앞쪽으로 후다닥 달려와 세실과 팔짱을 끼며 같은 대열에 섰다·
“나도 들을래!”
“시온 이야기·”
세실은 잠깐 걷다가 문득 뭔가 떠오른 듯이 말했다·
“시온이 너에 대해서 수소문 한다는 건 알지?”
“그럴 것 같았어·”
세실이 이상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음··· 사탕이는 왜 이렇게 수석들한테 인기가 많을까?”
“···?”
“지금도 보면···마법부 수석이 왼쪽에· 마도학부 수석이 오른쪽에 있고· 전투부 수석은 뒤에서 따라오고· 마법부 차석도 사탕이를 찾고· 이제 연금부는 시간 문제겠네?”
“글쎄 근데 마법부 차석은 누구야?”
세실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픽 웃으며 말했다·
“모르면 됐어·”
“···?”
“그보다 사탕이 너 성적만 보고 사람 골라서 접근하는 건 아니지? 느낌이 이상한데·”
세실은 장난스럽게 던진 것이지만 그 말엔 뼈가 있었다·
“그럴리가·”
이거 위험한데· 사실 절반은 맞는 말이다· 루나는 아무런 사심 없이 가까워진 것이지만 세실은 마도학부랑 친하게 지내라는 실베린의 조언에 따라 친해진 면이 없잖아 있었다·
세실 옆에 있는 트리샤가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여 내 얼굴을 뚫어져라 노려본다·
트리샤의 의구심 가득한 표정은 내게 ‘그게 정말 사실이냐’고 따지고 있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혹시 모르지· 동급생들한테 만족 못하고 교수까지 건드릴지?”
“····”
세실은 날 곤란하게 만들고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저혼자 큭큭 웃었다· 그녀 딴에는 장난으로 던진 것이겠지만···난 심장이 철렁 내려 앉는 기분이었다· 이거 처신 잘못하면 큰 오해를 살 수도 있겠는데·
세실과의 대화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루나가 교수라는 단어가 언급되자 순간 움찔했다· 그리고는 당황한 눈빛으로 내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세실이 일으킨 흙탕물이 루나에게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내 반응이 재밌다는 듯이 세실이 도발을 이어갔다·
“어어? 왜 당황해?”
“····”
그냥 물에다 한 번 던져버릴까·
***
“빨리 움직여 이 새끼야!”
짐꾼 역할을 맡은 그룹원이 뒤쳐지자 마음이 다급해진 폴슨이 고함쳤다·
“무 무리야!”
데미안을 추방하고 새로 들어온 그룹원이 짐꾼을 맡고 있었다·
짐을 몰아준 것도 모자라 쓸데 없는 잡동사니까지 잔뜩 나르는 탓에 서두를래야 서두를 수 없었다·
이리스가 소리쳤다·
“그냥 짐을 버리고 도망치는게···!”
“짐을 버리면 튀는 게 무슨 의미야· 이 멍청한!”
마음이 급해지니 폴슨은 이리스에게도 막말을 서슴치 않았다·
폴슨은 뒤를 돌아보았다· 어두운 숲의 그림자 속에서 시퍼런 검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푸른 마검을 쥔 한 여자의 인영이 느긋하게 걸어왔다·
화가 머리 끝까지 뻗친 폴슨은 짐꾼을 맡은 그룹원의 옆구리를 걷어차서 넘어뜨렸다·
“으아악!”
그리고는 짐꾼의 가방에서 식량을 챙기고는 다시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그룹원이야 안중에도 없었다· 폴슨은 그룹장 이리스를 비롯한 다른 이들을 다 제쳐두고 혼자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리스는 폴슨에게 소리쳤다·
“무 무슨짓이야!”
안하무인인 폴슨의 태도에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이리스도 분노에 못이겨 소리를 질렀다·
이 모든 일은 폴슨이 자처한 것이었다·
첫만남부터 쎄한 감이 있었음에도 제국 황자와의 연줄인 탓에 단호하게 잘라내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들을 추격하는 건 바로 시온 이자렐이었다· 시온은 이리스와의 친분을 이유로 약탈 없이 그냥 지나가려 했다· 헌데 폴슨이 역으로 시온을 기습해야한다 주장했고 아무도 동의하지 않자 독단으로 시온을 덮치려 들었다·
그리고 지금의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시온의 인영이 순간 사라졌다·
그리고 숲을 가로질러 뛰쳐가는 폴슨의 앞에서 어느틈에 불쑥 나타나 바닥에 대고 칼을 휘둘렀다·
그 칼이 지나간 곳에 일직선의 긴 잔광이 새겨졌다· 그곳은 넘어가선 안 된다는 한계선이었다·
“젠장 젠장·”
폴슨은 화들짝 놀라 넘어지고는 곧바로 몸을 뒤로 기었다·
시온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분명 그냥 지나가겠다 했을 텐데·”
폴슨이 기습을 감행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1학년 최강자를 이긴 사람’ 타이틀이 탐났기 때문이다· 게일도 빅터도 얻지 못한 그 타이틀을·
폴슨이 칼을 다시 뽑아서 저항하려 하자 시온은 손을 걷어차서 날려버렸다·
“으아악!”
폴슨이 손을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었다·
“이···나 나한테 위해를 가하고 무사할 거라 생각하나? 분명 이터니아가 널····”
“내가 퇴학 같은 걸 신경 쓸 것 같아?”
시온이 무감각하게 남들을 약탈하고 장난감 취급하는 이유가 있었다· 퇴학을 당해도 전혀 신경쓰지 않았으니까·
기분이 안 좋다는 이유로 폴슨에게 위해를 가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의 얼굴이 일순 창백해졌다·
시온이 다가오자 폴슨은 겁에 질려 거짓말을 늘어놓었다·
“이거 전부 이리스가 꾸민 일이야· 난 그룹장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시온은 듣는 체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감정이 빠진 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날 이기고 싶어? 그럼 순환계 어딘가에 있을 나무 가면을 쓴 남자의 정체를 알아와· 그러면 1등 보상을 넘기고 날 이겼다는 타이틀도 줄 테니까·”
시온은 발로 폴슨의 가슴을 걷어차서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 진흙에 범벅이 된 신발로 얼굴을 지긋이 밟았다·
“윽 으극”
그녀는 칼로 베어버리는 대신 굴욕을 안겨주는 점잖은 방법을 택했다·
“그게 안 된다면 내 등에 칼을 꽂을 생각은 하지 마· 지금은 이렇게 경고로 끝나지만 다음 번엔 여지없이 내장을 쏟게 될 거야·”
뒤늦게 이리스를 비롯한 다른 그룹원들이 달려왔다·
신발 밑에 깔린 폴슨을 본 이리스의 눈빛이 요동쳤다·
“···!”
시온이 이리스를 보며 말했다·
“좋은 동료를 두고 있구나 이리스· 훌륭한 안목이야·”
***
데미안과 루나는 이동하는 와중에도 주변 지형을 파악하는데 게을리 임하지 않았다·
기암 괴석과 절벽이 물결치듯 펼쳐져 있고 나무와 풀들은 그 바위 틈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단단하게 자라나 공중 정원을 만들었다·
운무는 암벽들에 걸쳐서 뱀처럼 꿈틀거렸다·
대지의 에너지가 너무 넘쳐서 그 모든 것들이 주체를 못하고 몸부림치는 것 같았다·
멀리서 봤다면 분명 멋진 풍광이었겠지만 데미안과 그 일행에겐 그 역동성은 위협으로 다가왔다·
“마력의 장이 뒤죽박죽으로 엉켜 있어서···아이들이 적응을 못 해·”
루나의 정령들도 이 환경에 쉽사리 녹아들지 못했고 그 덕에 정찰과 탐색에 난항을 겪었다·
이런 상황에선 두 눈과 직감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세 시간 가량 이동하고 어느 납작한 바위 위에서 휴식을 취했다· 지형이 험난한 탓에 조금만 이동해도 금방 기운이 빠졌다·
데미안은 잠시 주변 지형을 확인하기 위해 고지대로 정찰을 나갔다·
루나는 세실 그룹과 떨어진 곳에서 혼자 앉아서 데미안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 불쾌한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렸다·
베르탕이 루나를 흘겨보고 있었다· 그는 루나와 눈이 마주치자 모종의 확신을 얻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아직 제대로 인사를 안했네·”
루나의 주변에서 서성거리던 늑대 정령이 베르탕에게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렁 거렸다·
“이것도 나름 인연일지도 모르지· 혹시 알아? 다음번에 너랑 내가 같은 그룹이 될····”
-크르르르 왈! 왈!
늑대가 사납게 짖어대며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
말소리가 묻혀서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인지 루나는 베르탕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멀리 보이는 협곡 너머를 향해 있었다· 표정이 점점 심상치않게 굳어가자 베르탕은 눈치껏 뒷걸음쳤다·
루나의 표정이 굳은 건 베르탕 때문만은 아니었다· 심각한 위협이 그녀의 감각을 두드리고 있었던 탓이었다·
그리고 그 방향에서 괴생물체의 포효가 협곡을 타고 메아리쳤다·
-크오오오오오
이 지역 일대에 숨어있던 새들이 일제히 놀라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수가 너무 많아서 마치 철새의 행렬을 보는 듯했다·
굉장히 멀리 떨어진 곳이었지만 울림이 그들이 서있는 지면을 덜덜 떨게 할 정도였다· 거대한 괴수에게서나 나올 법한 묵직하고 낮은 울림이었다·
모두가 포효에 반응하여 깜짝 놀란듯이 고개를 돌렸다·
트리샤는 겁을 먹은듯이 세실에게 꼭 붙어버렸다·
“어 언니···!”
다들 토끼눈을 뜬 채로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자기들이 어디에 와 있는지 제대로 실감한 탓이었다·
베르탕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이거···맞지? 그 놈·”
날개 없는 용· 단순히 포효만으로 한참이나 떨어진 이들에게도 위압감과 공포를 선사하는 존재· 위험지대의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는 최상위 포식자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세실과 마르타는 무얼 말하는지 단번에 직감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탕은 이곳에 온 걸 곧장 후회하기 시작했다·
“이건 말이 안 돼· 저런 게 덮치면 대체 어떻게 대처할 거야? 아니 대처가 가능하기나 해?”
세실의 마음도 흔들렸다·
이건 단순히 거대 플랜테라를 잡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영역이었다· 사탕이의 의견을 직접 물어보고 싶었지만 당장에 그는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 괜찮을 거야 언니!”
이상하게도 제일 겁먹을 줄 알았던 트리샤가 세실을 격려했다·
루나 또한 다시 침착함을 회복했다·
압도적인 존재를 감지하고도 그녀의 눈빛엔 리더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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