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4
골짜기를 벗어나는 데엔 두 시간이 걸렸다·
습하고 답답한 통로의 끝에 다다르니 저녁 노을이 우릴 반겼다·
일행들의 얼굴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린 아침을 제외하곤 먹은 게 거의 없었다· 오전엔 도마뱀의 추격 탓에 음식 냄새 자체를 완전히 차단해야 했고 그 이후는 싸움과 이동 때문에 미처 식사를 하지 못했다·
오늘은 유독 하루가 긴 것 같았다·
맨바닥이 익숙한 나조차도 오늘따라 따뜻하고 푹신한 침대가 많이 그리웠는데 다른 애들은 오죽할까·
야영지를 찾아나서기 전에 커다란 나무 아래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나는 루나와 함께· 그리고 나머지는 조금 떨어져서 회의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밤 야영을 끝으로 우리와는 갈라지니 생각할 게 많을 것이다·
나무에 등을 기대고 쉬고 있는데 이상하게 자꾸 트리샤와 눈이 마주쳤다·
내 의도는 전혀 없었다· 내 시선이 닿는 곳에 일부러 서서 신호를 주는 듯한 기분이었다·
단둘이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 알겠다만 조금 노골적이라 일행이 눈치챌 수도 있었다·
나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소곳이 옆에 앉아 있는 루나에게 말을 걸었다·
“루나 몸 상태는 어때·”
“좋아· 많이 좋아졌어·”
솔직하게 말해도 좋으련만· 팀원에게 기대도 좋다는 믿음을 심어주지 못한 내 문제겠지· 일단은 시간을 두고 신뢰를 더욱 쌓아야겠다·
“혹시 못 먹는 음식이라도 있어?”
갑작스런 질문에 루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몇 번 깜빡거렸다·
“아무거나···잘 먹어·”
귀하게 자란 아가씨라 어떤 식성을 지녔을지 모르겠다· 나중에 식사자리에 초대해야 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거대 파충류의 내장육을 먹어야 하는데 참 걱정이다·
루나는 슬그머니 내 시선을 피했다·
“근데 당근은···잘 못 먹어·”
당근 기억해 놔야겠다·
세실이 그룹원을 이끌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사탕아 여기 야영하기에도 좋아보이는데 그냥 여기서 쉴까?”
표정들을 보니 더 이동하기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 어서 식사준비나 하자·”
“이 근방에 바바니아 푸르트가 자생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우리는 그것 좀 따오려구·”
나는 몸을 일으키고 말했다·
“위치만 말해주면 우리도 도울게·”
루나도 일어서서 내 옆에 나란히 섰다·
트리샤가 기회를 엿보다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언니! 2인 1조로 갈라져서 찾는 건 어때?”
“원래 그럴 생각이긴 했는데···갈라졌다가 야생동물이 나오면 위험하니까····”
“싸울 수 있는 사람도 셋이니까 삼등분하면 딱이겠다!”
나도 적당히 트리샤를 거들었다·
“그게 좋겠네·”
“그럴까? 그러면····”
그러자 세실이 별 고민없이 내 팔을 휙 끌어당겨서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럼 나는 사탕이랑 갈게· 그룹장끼리 따로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야·”
“····”
“····”
그건 그렇고 그룹장은 베르탕 아니었나?
타이밍을 빼앗긴 트리샤는 당황한 듯이 입을 뻥긋거렸지만 차마 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표면적으로 나랑 트리샤랑은 아무런 접점이 없었으니 같이 갈만한 이유도 없었다·
베르탕이 용기를 낸 표정으로 앞으로 나서서 루나를 보며 말했다·
“그럼 난····”
낌새가 좋지 않아 내가 먼저 그의 말을 자르고 들어갔다·
“루나는 트리샤랑 같이 가·”
***
과수원처럼 과일 나무가 군집을 이룬 곳에서 우리는 작업을 시작했다·
바바니아 푸르트는 사과처럼 붉은 껍질에 속 안에는 우유 크림같은 과육이 들어있는 과일이었다·
내가 목검으로 열매의 꼭지를 따면 세실은 옆으로 다가와 망토로 만든 임시 보따리에 담았다·
“그 목검 볼수록 신기하단 말이야· 나무가 어떻게 그렇게 날이 잘 들어?”
“뭐 목검 치고는 쓸만하지·”
“나도 한 번 만져봐도 돼?”
나는 잠깐 고민했다가 목검을 세실에게 건넸다· 그녀는 다이아 반지라도 구경하는 것처럼 기뻐했다·
신기하다· 마도학자는 연구거리를 보면 좋아하는 건가·
어쩌면 나한테 흥미를 보이는 이유도 그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보따리를 잠시 내려놓고 목검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생각보다 무겁고 그거 말곤 별다른 게 없네· 생각보다 평범한데?”
세실은 두 손으로 칼을 쥐고 검사 흉내를 내는 것처럼 가볍게 휘둘렀다·
“오래 쥐고 있으면 안 돼·”
“왜? 무슨 이유···!”
말하다 말고 검의 능력을 몸으로 느낀 세실이 놀라서 검을 떨어트렸다· 그러고는 식겁한 얼굴로 말했다·
“뭐야? 얘 방금 내 마력을 흡수했어·”
“그것 때문에 위험해· ”
나는 목검을 다시 집어서 열매의 꼭지를 땄다· 그녀는 그대로 굳어서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이지도 않고 말했다·
“넌 마력을 흡수 못하게 하는 아티팩트라도 있는 거야?”
“아니 내 마력도 가져가지·”
“그게 무슨··· 이걸 다 버틴다고? 사탕이 너 마법사야?”
“아니·”
그녀는 납득이 안 간다는 얼굴로 말했다·
“···어떻게 된게 네가 가진 것중에 내가 알 만한 게 하나도 없을까· 마력을 굶주린 것처럼 빨아들이는데 이걸 어떻게 버텨? 거기다 마법사도 아니야? 진짜 정체가 뭐니?”
“자랑스런 이터니아의 학생이지·”
“잠깐 혹시 네 가면도 검이랑 같은 나무로 만든 거야?”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가면은 마력을 흡수하지는 않으니까 다른 재질이지 않을까·
나는 열매를 마저 따면서 말했다·
“서로 다른 곳에서 얻은 거라 잘 모르겠네·”
“목검이랑 똑같이 엄청 튼튼한 것 같은데· 보면 엄청 거칠게 싸우면서도 가면엔 흠집이 하나도 없어·”
“····”
예리한 관찰력이다· 에르제베트의 가면은 내 목검만큼이나 단단하다· 그토록 많은 전투에도 내 얼굴에 작은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은 것도 다 가면 덕이다·
에르제베트가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방어구로 활용해도 손색이 없었다·
세실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돌연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사탕아 너 혹시 엘프야?”
“···뭐?”
“아니··· 엘프들처럼 나무로 된 가면이랑 무기를 쓰고· 정체는 감춰야하고· 정체불명의 포션들은 귀가 원래대로 돌아가는 걸 막는 건가 싶고· 딱 엘프 같잖아·”
“엘프 아니야·”
세실이 내 옆에 딱 붙어서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솔직해져도 괜찮아 사탕아· 우리 폰타르 가문엔 엘프의 피도 섞여 있거든· 엘프여도 우리 아버지가 환영해주실 거야·”
잠깐· 세실이 엘프 혼혈이라고?
그게 가능한 건가· 난 인간과 엘프가 서로 피가 섞일 수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왜 그렇게 봐? 엘프의 피가 섞였다니까 내가 갑자기 달라보여?”
“····”
기분탓인가· 이제 보니까 세실의 얼굴에서 에르제베트와 같은 엘프의 선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마도학에 출중한 것도 엘프의 피하고 관련이 있으려나·
날개없는 용에게서 획득한 크리스탈의 감정을 세실한테 맡겨볼까·
“그건 그렇고 그룹장끼리 할 이야기라는 게 뭐야?”
“그거? 그냥 지어낸 거지·”
***
식사를 끝내고 다들 일찍 수면을 취했다·
어둠 속에서 모닥불이 타는 소리와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정적을 채웠다·
그리고 트리샤만이 잠들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런저런 생각이 엉킨 실타래처럼 엮여 있었다·
트리샤는 몸을 일으키고는 혼자 멀찍이 떨어진 곳에 누워 있는 데미안을 바라보았다·
일행들이 깊게 잠든 것을 확인한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데미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와 몸을 붙이고 옆으로 몸을 뉘였다·
그런 뒤 혹여나 누가 들을까 숨죽이며 말했다·
“···일어나·”
몇 번을 불러도 반응이 없자 손가락으로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바보야··· 일어나서 나랑 이야기 좀 해····”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에휴·”
속이 답답했지만 이 이상으로 무리해서 깨울 수는 없었다· 데미안은 이들 중 가장 고된 하루를 보낸 사람이었으니까·
데미안의 팔을 끌어다 베개처럼 머리를 기댔다· 그렇게 뾰루퉁한 얼굴로 자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에게 투정부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차마 그럴수가 없었다·
그의 몸의 흉터에 난 보고 다시금 상기한 진실 때문이었다·
매순간 죽음을 불사하고 싸우는 사람이었다· 순환계 실습 또한 그는 어중간한 마음가짐으로 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에게 왜 자기는 끼워주지 않냐고 따질 수 있을까·
***
데미안은 새벽녘부터 일어나 캠프를 점검했다· 주변에 사람이나 야생동물의 발자국이 있는지 살피고 죽어가는 모닥불에 장작을 더 넣었다·
그러던 중 이상을 발견했다·
다들 먼저 누웠던 그 자리에 곤히 자고 있는데 트리샤만이 사라져 있었다·
그녀가 누웠던 자리엔 발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다행히도 낯선 이의 것은 없었다·
데미안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목검을 뽑고 천천히 발자국을 추적했다·
그렇게 삼백 걸음쯤 이동하니 작은 개울이 나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트리샤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개울가에 쪼그려 앉아서 사연이 있는 사람처럼 조약돌만 맥없이 던져대고 있었다·
“뭐하고 있어 여기서·”
그녀는 고개를 돌려서 데미안을 확인하고는 풀죽은 얼굴로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걱정 마· 나 혼자니까·”
“···이끼를 밟고 발목을 접질렀어·”
“사람을 부르지 그랬어·”
“몰라· 짜증나서 그냥 있었어·”
데미안은 그녀의 옆에 가서 발목을 확인했다· 시뻘겋게 퉁퉁 부어 있었다·
“야영지에 포션 있으니까 가자· 업혀·”
“····”
데미안이 등을 내밀자 트리샤는 잠깐 망설이는 척하다 냉큼 등에 올라탔다·
그렇게 돌아가는 도중에 트리샤가 말했다·
“따로 이야기 하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 사탕이 인기 많아서 참 좋으시겠네요·”
“····”
“왜 내가 그렇게 깨워도 안 일어나? 답답해서 확 깨물 뻔했어·”
“피곤해서 못 들었어· 무슨 이야기 하려 그랬는데?”
이 짧은 순간 말고는 사담을 나눌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었다·
“···네 검·”
“응·”
“정체가···뭐야?”
“나도 몰라·”
그녀가 팔로 목을 확 조였다·
“왜 나한테는 그렇게 비밀이 많아? 진짜진짜진짜진짜 서운해·”
“유감이지만 스승님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그 누구도 몰라· 나만큼 알고 싶은 사람도 없을 걸·”
“그럼 흑마법사랑···그 검으로 싸운 거야···?”
“응·”
트리샤는 잠시 침묵했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한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데미안 부탁이 있어·”
“뭔데?”
“방학 때 우리 집에 같이 가줘·”
갑자기 결연하고 차분해진 태도에 데미안은 의아해했다·
“···너네 집이 어딘데?”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곳·”
“밥만 잘 준다면야·”
“약속해·”
“응· 약속할게·”
트리샤의 부모들은 어떤 사람들일지 문득 궁금해졌다·
대답을 확인한 트리샤는 데미안의 옷을 잡아당겨서 새하얀 어깨죽지를 드러냈다·
“···?”
그리고는 어깨를 냅다 콱 깨물었다·
갑작스런 기행에 데미안은 몸을 움찔했다·
“너 지금 뭐하냐?”
그녀는 입을 물린 채로 답했다·
“으르그르으흐르으·”
데미안은 크게 한숨을 쉬고 반쯤 포기한 어조로 말했다·
“하던 거 마저 하세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녀는 젖먹이를 하는 아기처럼 촙촙 소리가 나게 깨문 부위를 빨아들였다·
충격적인 행동에 데미안은 눈을 질끈 감고 트리샤를 업어주기로 한 자신을 속으로 질책했다·
그렇게 작업을 마친 그녀는 소매로 타액을 슥슥 닦아내고는 옷으로 덮었다·
“됐다!”
“너···뭐 한 거야?”
“아젤리스 특제 저주의 표식 새기기·”
“····”
“이게 있어야 우리 집에서 귀빈 대접을 해주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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