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7
순환계와 인접한 소더튼 남부 외곽 지역 한 구석엔 안전 결계가 펼쳐져 있었다·
결계 내부엔 급조한 막사가 옹기종기 모여 촌락을 형성했다·
순환계에 진입하지 못한 이터니아의 학생이 그곳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그 중 과반수는 약탈조를 꾸렸던 이들이었다·
미리 챙겨온 물자들과 약탈품들까지 더해서 생활하는데엔 큰 불편함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처지에 걸맞지 않은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마음편히 즐기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안전 결계에 머무르는 이들은 대부분 입학시험 때 중상위권을 차지한 학생들이었다· 기대주라고 불리던 이들이 실습 기간의 절반을 넘기고도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풍족한 자원과 군더더기 없는 팀 구성· 분명 상위권을 차지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고 자부했고 모든 면에서 타 그룹들에 비해 우월하다 여겼었다·
하지만 순환계는 이들을 받아주지 않고 이리저리 농락하다 결국 뱉어버렸다·
“거지같네·”
“다 망했으면 좋겠다·”
이들이 하는 하루 일과의 대부분은 멍하니 순환계 쪽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죽치고 있노라면 때떄로 플랜테라가 객사하기 직전의 학생들을 안전 결계로 운반하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온다 온다·”
“신참이다!”
그리고 한 무리의 플랜테라가 안전 결계로 복귀헸다·
모두의 이목이 그곳에 쏠렸다·
자신과 같은 낙오자들을 반겨주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기대와는 달리 플랜테라가 데리고 온 건 레몬빛 머리칼의 소녀 엘리아스 단 하나였다·
“아 아니네·”
“슬슬 한 명 쯤은 올 때가 됐는데·”
“쟤는 누구랑 그룹이었대?”
“몰라·”
어떤 그룹에 속해 있었는지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 명이 낙오했으니 조만간 같은 그룹원들도 줄줄이 실려올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그들은 입학 성적이 실습 성과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에 수석들이 실려올 날만을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아스가 잔디 위에 놓이자 얼굴을 아는 이들이 다가가 그녀를 확인했다·
그녀는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흐 흑흑··· 무서워···무서워····”
안전 결계로 밀려나온 이들이 쏟아내는 감정과 비슷한 양상이지만 미묘하게 결이 달랐다·
정령들에게 농락을 당한다던가 환영 혹은 환청을 경험한다던가 몸에 갑자기 힘이 빠진다던가·
순환계를 경험하고 다들 느끼는 공통적인 감정은 ‘공포’였다·
겁이야 다들 먹는 것이지만 엘리아스처럼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서 통곡을 하는 사람은 여지껏 없었다·
여자아이들이 엘리아스에게 뭉쳐서 그녀를 달래주었다·
따뜻한 차와 담요· 안정감을 주는 모닥불을 앞에 두고 한참이 지나서야 엘리아스는 이성의 끈을 붙잡았다· 그리고 마침내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악마···악마가 깨어났어· 다 죽을 거야···· 순환계에서 당장 나와야 해····”
괜한 공포 분위기를 조장한다며 인상을 구긴 이들이 대다수였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전말을 듣고 사태의 심각성을 받아들였다·
그녀의 감정은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리그베드에서 가져온 푸른영혼초는 전부 써봐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어· 그래서 우리는 순환계에서 직접 얻어내려고 했었어···· 흐흑 시체의 몸에서 피는 약초라니까···· 그래서 그래서···우리는 동물의 사체를 찾기 위해 순환계 서쪽 지역을 뒤지고 다녔어·”
그렇게 순환계 내부를 돌아다니다 엘리아스의 그룹은 정체불명의 오벨리스크를 발견하게 되었다·
“나무로 된 오벨리스크가 여섯 개나 있었는데··· 그 중 두 개는 이미 파괴된 상태였어· 생김새가 묘비같기도 해서··· 우리는 그게 동물의 묘지인 줄 알았어· 이미 두 개나 망가졌으니까 다른 이들이 먼저 무언가를 얻어갔구나 생각했어···· 그래서 우리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그 중 하나를 파괴하고 그 밑을 파헤쳤어· 왜 그랬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정말 무언가가 우릴 조종하는 것 같았어·”
엘리아스는 잠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손은 흙으로 얼룩져 있었고 손톱에는 전부 피가 흘렀다· 그녀가 말한 대로 마구잡이로 흙을 파낸 것 같았다·
한참을 그러다가 엘리아스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뭔가가 깨어났어·”
오벨리스크 하나를 부수자 갑자기 나머지 3개가 갑자기 도미노처럼 새까맣게 부식되었고· 불가해한 무언가가 봉인을 풀고 깨어나 그룹을 덮쳤다·
“그 뒤로는 기억이 잘 안나··· 마법도 통하지 않고···검술도 안 통했어· 우리는 계속 도망쳤고 무언가가 우리를 계속 따라왔어· 그리고···그리고··· 모두 위험해지니까 빅터 빅터가 혼자 그것들을 유인하고 갈라졌어·”
엘리아스는 혼자 도망치다 탈진해 쓰러졌고 운좋게 플랜테라에게 발견되어 돌아오게 되었지만 남은 그룹원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빅터? 그 빅터가 너희 그룹이었다고?”
전투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빅터가 함께 있었음에도 속수무책이었다는 사실에 다들 적잖이 놀란 얼굴이었다·
곧이어 엘리아스의 말을 들은 무리들이 저마다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게 환수 아니야?”
“솔직히 못 믿겠는데·”
“어쩐지 교수님들이 갑자기 급하게 어딜 가시던데·”
“결계에서 나가지 말라 한 것도 그것 때문이야?”
“순환계 서쪽이면 시온이 갔던 곳이잖아·”
그리고 누군가가 엘리아스에게 물었다·
“너네 그룹원은 누구누구 있었어?”
엘리아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빅터···그리고···그리고···마티아스···또····”
그러다 한 번 심호흡하고 마지막 이름을 말했다·
“리···릴리트·”
그리고 그 이름을 들은 몇몇 남학생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알게모르게 그녀에게 연심을 품던 이들이었다·
***
“숲의 정령들인가 봐·”
내가 거리를 벌리자 그 기묘한 정령들은 다시 루나 주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도 싫지는 않았는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그것들을 안고 쓰다듬었다·
고아원에 살 적· 어린 꼬마들이 유독 예쁜 수녀님한테 모여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어리광을 부렸는데· 왠지 모르게 그 모습과 겹쳐 보인다·
루나는 가만히 관찰하는 내 시선이 조금 민망했는지 슬쩍 물었다·
“얘네들한테··· 환수의 영역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볼까?”
“좋은 생각이야·”
루나가 알 수 없는 언어로 정령들에게 말을 걸었다·
정령들이 갑자기 폴짝폴짝 뛰며 무언가를 표현했다·
“환수···님은 지금 기운이 약해진 시기라 안 된대· 몇 년에 한 번씩 이런 때가 오나 봐·”
“안 된다면 별 수 없지· 슬슬 다시 움직이자·”
그녀도 몸을 일으키려 하자 정령들이 죄다 몸에 매달려 늘어졌다· 떠나지 말라고 붙잡는 것 같았다·
루나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엉덩이를 붙이고는 대화를 나눴다·
“응···· 위험해···? 시꺼먼 무언가가 정령들을 잡아먹어서 더 나아가면 위험하다고 그랬어·”
위험하다는 말에 순간 신경이 곤두섰다·
“뭐가 있는지 자세히 알아봐줄 수 있어?”
루나는 고개를 저었다·
“자기들도 모르겠대·”
정령들을 잡아먹는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소더튼 순환계에 그런 생물이 서식한다는 소리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사람도 잡아먹어?”
정령들에게 물어본 루나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그리고는 날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도 가리지 않나 봐·”
내 머릿속엔 돌연 트리샤의 모습이 스쳐갔다·
세실 그룹엔 싸울 줄 아는 사람이 없는데 괜찮으려나·
타지에 동생을 두고온 오빠가 이런 심정일까· 평소엔 별 생각 없다가도 뭔가 위험하다 싶으면 신경이 온통 트리샤에게 쏠린다·
“커다란 도마뱀 같은 거면 우리가 손볼 수 있다고 전해줘· 물론 순환계 중심부로 길안내를 해준다는 조건으로·”
숲의 정령들에게 통역해서 내 말을 전달한 루나의 표정이 점차 심각하게 변했다·
“순환계의 생명들과는 이질적인 존재···라고 그랬어·”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든다·
“그것들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아낼 수 있어?”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들이 안내해주겠대· 다만 너무 깊이 들어가지는 말래·”
나는 세실 전용 스티치를 꺼냈다· 그리고 좀전에 알아낸 정보를 간단하게 적어서 날려보냈다·
뭔지는 몰라도 트리샤한테까지 깽판을 놓기 전에 내가 먼저 손보는 게 좋겠지·
“어서 가자·”
***
마티아스와 릴리트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어느 동굴에 몸을 숨겼다·
릴리트는 얼굴을 감싸고 좌절했다·
“빅터···빅터가····”
일행을 지키기 위해 혼자 멈춰선 빅터가 검은 그림자들에게 습격당하는 장면을 릴리트는 두 눈으로 목격했다·
마티아스는 그런 릴리트를 지켜보며 말했다·
“분명 괜찮을거야· 강한 녀석이니까····”
그녀는 뚝뚝 끊어지는 경멸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하지 말라고 했잖아·”
“····”
릴리트는 오벨리스크를 건드리지 말자고 주장하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룹원들은 뭐에 씌이기라도 한 것인지 넋나간 듯이 땅을 파댔다·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뭔가···· 뭔가가 불렀어· 분 리그베드에서 구한 푸른영혼초가 우리를 씌이게 한 게 분명해·”
그 약초를 먹지 않은 릴리트만이 이성을 유지했었다· 무언가 그들의 정신을 조종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누구의 잘못이라고 탓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릴리트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훌쩍였다·
마티아스가 그녀에게 다가가 위로하듯 끌어안으려 들었다·
그러자 릴리트는 낌새를 눈치채고 그를 밀쳐냈다·
“가까이 오지 마·”
거부당한 마티아스는 분이 차올라 잠시 이를 꽉 깨물었다·
“나는 뭐 격려도 못 해주냐?”
“····”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물불 안 가리고 격분을 토해냈다·
“어차피 교수들이 우릴 먼저 못 찾으면 뒤지고 모든 게 끝나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야겠어? 어?”
릴리트는 시뻘개진 눈으로 마티아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난 안 죽을 거야· 그리고 실습이 끝나면 우리 사이는 영원히 끝이야·”
마티아스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딴 식으로 엿같이 굴지 마· 그동안 내가 쏟은 정성을 다 무시하고 니 마음대로 끊으려 들어?”
“네가 한 약속이야· 훌쩍 마지막으로 한 팀을 맺어주면 그 뒤로 접근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마티아스는 릴리트와 한 팀을 맺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릴리트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마티아스는 그동안 그가 제공한 선물과 심부름의 대가를 내놓으라 억지를 부렸고 결국 그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고 서로 관계를 청산하는 조건으로 릴리트를 끌어들였다·
“빅터를 데려온다니까 네가 좋다고 수락한 거잖아· 안 그래? 그 가면 쓴 변태 새끼가 그러면 질투라도 해줄 거라 생각했어?”
“네가 맘대로 데려온 거지· 부탁한 적 없어·”
“아 망할!”
마티아스는 고함을 질렀다가 한동안 동굴 안을 서성거렸다· 그러다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뒤 흥분을 가라 앉히고 말했다·
“하 미안해· 내가 잠깐 흥분했어· 서로 힘을 합쳐야 할 때에 이러고 있으면 안 되겠지· 이번 역경을 같이 이겨내면···우리 관계도 다시 좋아질 수도 있을 거라 믿어·”
릴리트는 그제서야 자신이 속았음을 직감했다· 마티아스는 애당초 연을 끊을 생각이 없었다·
“난 그런거 조금도 원하지 않아·”
마티아스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릴리트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자신의 말만 내뱉었다·
“내가···내가 널 지켜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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