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8
정령들의 수가 어느새 수십 단위로 불어났다· 루나의 인기는 마치 사교계 명사를 방불케 했다·
하지만 이 녀석들 내 옆에는 죽어도 오질 않는다·
루나의 어깨와 머리에 올라 앉는 것도 모자라 양팔에 한가득 안겨서 이동했다·
그녀는 조금 쑥스러운지 내 시선에 한마디 덧붙였다·
“하나도 안 무거워·”
그러던 도중 세실로부터 답장이 날아왔다· 두 시간 만이었다·
[···네가 말하기 무섭게 그 이상한 흐물거리는 놈을 만났어· 난 그런 것 살면서 처음 봐· 무슨 사악한 정령체라는데 다행히도 교수님이 합류해서 처치해주셨어· 우린 안전해· 교수님은 원인 파악을 위해 진원지를 찾아가셨는데 사탕아 넌 괜찮은 거 맞아?]
내 경고를 받기 무섭게 그 이상한 것들을 조우했다는 소식을 확인하자 속이 들끓었다· 수많은 변수들을 계산하지 못하고 새로운 위협에 트리샤를 방치해놓은 나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내 힘으로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데미안···괜찮아?”
루나가 걱정스런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가면 때문에 표정도 안 보일텐데 내 감정 상태 알아 챈 모양이다·
“응· 세실네 그룹은 아무런 문제 없어· 혹시 이 근방에서 이상한 정령의 기운 같은 건 못 느꼈어?”
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숲의 정령들이···우리 주변은 안전하다 느끼는 것 같아· 나도 네 옆에 있으면 괜찮아·”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정령이 우릴 맴도는 것도 그 때문일까·
우리는 한참을 나아갔다· 숲의 정령들이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춰서고는 우리를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펄쩍펄쩍 뛰며 무언가를 표현했다·
그 앞에는 지면이 잘 다듬어진 원형의 공터가 있었다·
그 곳을 가만히 바라보는 루나 표정이 점점 점점 심각하게 굳어갔다· 그리고는 긴장한 것인지 손으로 가슴을 꾹 누르며 저도 모르게 뒷걸음쳤다·
“무슨 일이야?”
루나가 정령의 말을 통역해서 내게 전달했다·
“이 앞에서 나왔다 그랬어· 그리고···나도 느껴져· 뭔가가 비명을 지르고 있어·”
그러다 화들짝 놀라며 주저 앉아서 귀를 막았다·
“꺄악!”
“루나!”
나는 황급히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사념체들에게 시달릴 때와 반응이 비슷했다·
루나가 부르르 떠는 손으로 내 옷깃을 꼭 잡고 말했다·
“저 앞에 뭔가가 있어· 데미안···조심해· 조심해·”
난 그 어떤 것도 느끼지 못했다· 몬스터가 아닌 영체임은 확실해 보였다·
루나와 함께 들어가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다·
“혼자 다녀올게· 안전한 곳에 빠져 있어·”
루나는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싫어· 네 옆에 있게 해줘· 그게 가장 안전해·”
“···그럼 내 뒤에 붙어 있어·”
나는 루나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자 루나는 마음이 조금 진정됐는지 움츠러든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렇게 함께 공터로 진입했다·
그 흔한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 넓다란 곳 중앙엔 여섯 개의 목조 구조물이 육각형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마치 고대 유적지나 고위층의 무덤에서 볼만한 것이었다·
다만 온전하게 남은 구조물 하나 없이 전부 파손되어 있었다· 주변엔 새까맣게 부식된 나무 파편들이 이리저리 튀어 있었다·
“저기야···저기에서 고통에 젖은 비명소리가 들려·”
비명소리가 들린다고? 나에겐 지극히 고요한 곳일 뿐이다·
“마음 단단히 먹어·”
우리는 공터 중심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그 중심에는 우물 크기의 구덩이가 하나 있었다· 그리고 이를 둘러싼 나무 구조물 파편에는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마치 주술 의식에 쓰이는 것처럼·
“루나 어떤 것 같아?”
그녀의 숨이 거칠어진다·
“이상해···저 안에서 나를 불러· 비좁은 곳에 갇혀서··· 나오고 싶어해···· 누가···누가 이런 걸····”
루나에게서 몸의 떨림이 전해진다· 그녀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나에겐 그저 아무것도 없는 구덩이였다· 나는 근처에 있는 돌덩이를 하나 집어서 그 안에다 던졌다·
한참이 지나도 그 끝에 다다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치 영원히 어둠 속으로 사라진 것 같았다·
루나의 말을 미루어 짐작해보면 이건 즈베레프의 연구기록문에 나온 것과 비슷했다·
북부 죽음의 땅· 미쳐버린 정령사가 몸을 던지게 된다는 그 구덩이 말이다·
그때였다·
숲속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스륵· 스르륵· 스륵·
우리는 황급히 구덩이와 거리를 벌리고 이곳을 찾아온 무언가를 경계했다·
스륵· 스륵· 스륵·
그렇게 공터로 나온 것은 한 소년이었다·
옷차림과 나잇대로 보아 우리처럼 실습을 치르던 이터니아의 학생 같았다·
균형잡힌 체격과 단단해 보이는 팔뚝· 반듯하고 멀끔한 이목구비·
헌데 상태가 영 좋지 않다·
옷은 걸레짝처럼 엉망이고 입에서는 피를 쏟아냈는지 턱과 가슴께가 검게 물들어 있다· 그리고 눈이 까뒤집혀서 흰자만 드러냈다·
“크르르···으으···으윽·”
약이나 술에 취한 것처럼 팔이 축 늘어져서 검을 땅에 질질 끌고 천천히 거리를 좁혀왔다·
누군가 시체를 가지고 인형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죽은···건가?”
내 손을 잡은 루나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아니 데미안· 살아있어·”
“····”
앞으로 나가서 말을 걸려고 하자 루나가 이를 막았다·
“안돼···그 정령이 뒤에서 붙어 있어· 정령이 영혼을 삼키려 들고 있어· 안돼· 안돼·”
소년에게 붙어있는 놈의 실체를 난 볼 수 없었다·
최대한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며 녀석을 구해낼 방법을 찾아야 했다·
“크륵· 크르륵·”
우리에게 확연하게 적의를 드러냈다· 오래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 소년은 점점 속도를 붙이고 우리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루나를 뒤에 두고 목검을 뽑아 나섰다·
“일단 떨어져· 내가 싸울게·”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서 루나의 힘을 쓰는 건 위험부담이 크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말라디루트를 한줄기 꺾었다· 지금 상황에서 믿을 건 이거 하나 뿐이다·
녀석이 내게 검을 내려치려 들었다·
축 늘어진 몸으로 걸어오던 것과는 다르게 검을 휘두르는 몸짓이 날카로웠다·
나는 말라디루트를 꺼내다 말고 옆으로 몸을 굴렸다·
콰앙!
검이 찍힌 곳이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움푹 파였다· 무슨 철퇴로 내려찍은 것 같다·
젠장 몸 상태는 영 아닌데 무슨 힘이 저리 괴랄해?
나는 녀석과 다섯 걸음 쯤 떨어져서 불의 정령을 소환했다· 정령은 내 손등에 앉아서 말라디루트 줄기에 연기를 피우기 시작했다·
“흐악 크아악!”
놈은 잠깐의 틈도 남기려 들지 않았다· 녀석은 곧장 땅을 박차고 내게 칼을 내려찍었다·
다시 한 번 굴러서 피하니 겨우 붙인 연기가 꺼졌다·
“이런·”
녀석의 검날 일부가 발광하기 시작했다· 무슨 마법이라도 쓴 것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것은 인챈트 소드였다·
인챈트가 발동했다는 건 그 몸 안에 마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저거면 되겠다·
나는 말라디루트 줄기에 불을 붙이고 입에 물었다· 목검을 바닥에 꽂았다·
그리고 마검을 불러냈다·
새하얀 빛이 내 오른손에서 뻗어나왔다·
놈이 입에서 피를 튀기며 달려와 내 옆구리를 노리고 칼을 휘둘렀다·
핑!
이를 마검으로 받아내자 그의 검날이 그대로 잘려 부메랑처럼 날아갔다·
“으윽 크륵?”
놈이 어리둥절하다는 듯이 검자루를 슬쩍 바라본다·
“····”
이건 나도 좀 놀랐다· 비싼 검은 아니길 빈다·
그 상태로 놈의 몸을 발로 차서 뒤로 밀쳐냈다·
녀석의 다리에 목검이 툭 걸린다· 곧이어 검은 묘목의 형태로 변모해 몸을 거미줄처럼 옭아맸다·
“으윽 윽 흐악·”
몸을 허우적대며 묘목의 줄기를 남아있는 칼날로 잘라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내 마력을 줄기차게 흡수해댄 덕에 저 줄기는 강철보다도 단단하다·
그틈에 말라디루트의 연기를 들이마셨다·
마침내 시커먼 정령의 형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소년의 등 뒤에 사람의 그림자를 두 배로 늘린 것처럼 기다란 무언가가 보인다·
그놈은 인형놀이를 하듯 소년의 가지고 꿈틀대로 있었다·
이제는 내 차례다·
내가 다시 다가가자 정령은 소년에 대한 구속을 풀고 뒷걸음쳤다·
곧장 소년의 어깨를 밟고 뛰어서 정령의 한쪽 팔을 잘라버렸다·
“키아아악!”
소년과 정령이 동시에 괴성을 지른다·
나는 착지와 동시에 두 다리도 썰어냈다·
***
빅터는 속에서 무언가 역류하는 느낌과 함께 의식을 회복했다·
“쿨럭 쿨럭 젠장·”
그는 피를 몇번 토해내고는 눈을 비비며 주위를 살폈다·
“망할 여기는 어디야”
자신른 나무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고 앞에는 가면을 쓴 남자가 햇빛을 등지고 가만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한발짝 거리에 낯익은 얼굴의 소녀가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
빅터는 허리에서 검을 뽑아 상대를 경계했다· 수많은 훈련으로 각인되어 자동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하지만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팔만 허우적 거릴 뿐이었다· 그들에겐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했다·
“누구냐?”
가면의 남자가 답했다·
“널 구해준 사람이지·”
빅터는 검날이 사라져 있다는 걸 확인했다·
그제서야 그는 검은 정령들에게 포위당하고 그 뒤로 의식이 없어졌다는 걸 기억해냈다·
그 뒤에 있는 금발머리의 소녀는 마법부 수석인 루나 레일리스라는 것도 인지했다·
“젠장 그러네· 내 검에는 무슨 짓을 한 거지?”
“잘랐다·”
“뭐···잘라?”
“기억에 없는 모양인데· 나한테 덤벼들길래 잘랐다·”
그 단단한 검을 자른다고? 너무도 태연하게 말해서 헛웃음이 터졌지만 안타깝게도 입에선 숨대신 피가 쏟아졌다·
“쿨럭 쿨럭 젠장·”
“소중한 건가?”
“···아버지 유품이다· 쿨럭 쿨럭·”
가면의 남자는 잠시 돌이 된 것처럼 가만 있었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무슨 생각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유감이네·”
일단은 살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목숨값 치고는 싼 거지· 검은 붙이면 된다·”
“····”
그러던 중 문득 동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내 친구들이 다 죽게 생겼···!”
그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격통이 엄습한 탓에 다시 쓰러졌다·
가면의 남자가 포션 한 병을 그에게 던졌다·
“마셔·”
남이 준 포션은 의심부터 해야한다· 다만 그 포션은 출처가 명확했기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유리병에 새겨진 독특한 문양· 돈을 주고도 구하기 힘들다는 메리카니아 특제 엘릭서였다·
“입에 들어가면 그 뒤론 뱉어내라 해도 안 된다·”
그는 값비싼 포션을 주고도 아까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내장이 뒤틀린 듯한 통증 때문에 차마 사양할 수가 없었다· 그가 밀봉을 풀고 포션을 들이키자 남자가 물었다·
“자 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봐·”
포션의 효력이 돌기 시작하자 흐릿했던 의식도 점차 또렷해졌다· 그는 모든 일들을 정확히 기억해냈다·
“푸른영혼초를 먹고 나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빅터는 그간 일어난 일들을 설명했다·
순환계 중심부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푸른영혼초를 먹은 것·
기이한 목소리에 홀려 오벨리스크를 파헤친 것· 그리고 무언가가 깨어나고 스스로 미끼가 되어 싸운 이후로 의식을 잃은 것까지·
가면의 남자와 루나는 그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
“혼자 미끼가 되어 싸웠다고?”
“그래· 헛짓거리가 아니었길 바랄 뿐이다·”
“다른 동료들의 위치를 알아낼 방법이 있나?”
빅터는 주머니에서 찢어진 종이 쪼가리를 꺼내고는 흔들었다·
“도르니에의 편지지다· 찢어놔도 한 곳에 뭉치려는 성질이 있지· 이걸 4등분해서 그룹원과 나눠 가졌다· 이걸 따라가면 될 거야·”
그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앞에 손을 내밀었다·
“걸을 수 있나?”
그 손길이 마치 빅터를 인정했다는 것처럼 다가왔다·
빅터는 남자의 손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나쁜 녀석 같아 보이진 않았고 딱히 적대감을 느끼지 못했다·
가면의 남자는 휙 돌아서서 놓아둔 짐들을 챙겼다·
빅터는 옆에 널브러져 있는 칼날을 주워다 검집에다 넣었다· 기이할 정도로 절단면이 깨끗했다·
“아 의식이 없을 때 싸운 모양인데 아직 날 온전히 이긴 건 아니다· 기억해 둬라·”
은혜는 뼈에 새길 것이지만 승부는 별개의 일이었다·
남자는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또 덤비면 다음에 일어날 땐 팔다리가 없어져 있을 거다·”
끔찍한 농담이었다·
빅터도 턱에 붙은 피를 닦고 옷먼지를 털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거 기대되네·”
가면의 남자가 짐을 챙기는 모습을 보다가 빅터는 눈을 부릅뜨고 반사적으로 검을 뽑았다·
바로 그 새까만 정령이 남자의 옆에 누워 있었다·
“젠장 비켜!”
헌데 남자는 아랑곳 않고 기지개를 폈다· 그러곤 검은 정령의 머리채를 잡고 들어 올렸다·
“키아아악! 키악!”
정령은 팔다리가 절단난 채로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어댔다· 아무도 못했던 것인데 그는 하고 있었다·
기이한 풍경에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그리고 순간 팔다리 절단이 농담으로 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가자·”
빅터는 남자의 뒷모습을 가만 지켜보다 혼자 중얼거렸다·
“···쟤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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