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9
릴리트와 마티아스는 숨이 턱 끝까지 찰 정도로 달렸다·
나무 잔가지에 팔뚝과 얼굴이 수도 없이 긁히고 나무뿌리에 걸려 정강이와 무릎이 잔뜩 멍들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릴리트는 뒤를 돌아보았다·
울창한 나무들 틈으로 검은 형체가 다리를 길게 뻗으며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젠장 릴리트! 더 빨리 뛰어!”
“뛰고 있어!”
이제는 체력의 한계에 거의 다다른 상태였다·
릴리트가 지지부진하게 속도를 내자 마티아스는 더욱 재촉했다·
그 검은 정령들은 몇 시간 전과는 모습이 달라져 있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처음엔 사람의 형상이었던 것이 이제는 사슴 같은 머리를 달고 뿔까지 돋아나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니 그사이 덩굴과 잡초가 발목을 스르르 감싸고 들었다·
릴리트는 곧장 발을 구르며 치워냈다·
그리고 그것들은 진짜 숲의 정령들처럼 마법의 힘까지 부리고 있었다· 경악할만한 일이었다·
“이건···말도 안 돼·”
릴리트는 다시 달렸지만 금방 한계에 다다랐다· 이제는 숨이 차서 앞이 흐려질 지경이었다·
그렇게 가던 중 다시금 덩굴이 그녀의 발목을 붙들었다· 그렇게 몸을 가누지 못하고 넘어졌다·
“꺅!”
릴리트는 발을 빼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힘으로 발목을 강하게 조였다·
“릴리트!”
마티아스가 화들짝 놀라 소리치고는 릴리트에게 황급히 다가갔다·
“이게···내 발목을 묶었어·”
“기다려!”
마티아스는 칼을 꺼내서 덩굴들을 끊어냈다· 하지만 자르는 속도보다 새로 생겨나는 속도가 빨랐다· 이제는 급기야 나무뿌리까지 가세해 그녀의 하반신을 구속하기 시작했다·
“안돼 안돼 젠장 제기랄!”
늦어버린 걸 직감한 마티아스는 검을 두 손으로 쥐고 릴리트를 등지고 섰다·
나무들 틈으로 보이는 검은 정령이 빠르게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다섯···열···열셋·
상대의 수를 세던 마티아스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단 하나의 개체조차 상대할 수 없었는데 머릿수도 압도적이었다· 이건 무슨 짓을 해도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덩굴들이 뱀처럼 뻗어나며 점차 그의 몸도 옭아매려 들었다·
마티아스는 검으로 신경질적으로 쳐내며 되뇌었다·
“막아야 해· 막을 수 있어· 젠장· 내가···!”
검은 정령들이 서서히 반원 형태로 포위망을 좁히고 있었다·
손발이 덜덜 떨리고 이성이 마비되었다· 원초적인 공포는 속으로 되뇐다고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계산은 이미 오래전에 끝나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같이 죽었다·
“이건 부 불가능해· 끝났어·”
마티아스는 검을 집어넣고 그대로 뒤돌아서 도주하기 시작했다· 릴리트는 그대로 둔 채로·
릴리트는 혼자 덩굴들과 씨름하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마티아스가 자신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는 다 끝났다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돌기 시작했다·
릴리트는 남은 힘을 쥐어짜 화염구를 날려댔다· 하지만 이는 정령들의 몸을 통과했다·
마침내 검은 정령들이 릴리트를 둘러싸고 포위했다· 곧이어 검은 손이 길게 내려와 릴리트의 목을 감싸기 시작했다·
숨통이 조여오기 시작했다·
“콜록 싫어 싫어····”
팔을 허우적거렸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 순간 검은 정령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열댓마리가 전원 머리를 서쪽 방향으로 돌렸다· 다른 누군가의 움직임을 감지해낸 것처럼·
그곳에는 햇빛이 닿지 않는 어둠과 흑갈색의 두꺼운 나무들만 빽빽했을 뿐· 릴리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데 검은 정령들은 릴리트에게서 관심을 떼고 그 방면으로 대열을 틀었다·
목을 조이던 것이 풀리자 그녀는 거칠게 기침을 해댔다·
곧이어 고요한 숲속에서 바스락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스륵 스륵 스르륵·
산책을 하는 것처럼 규칙적인 리듬으로 퍼지다가 어느 순간 뚝 끊겼다·
그리고 나무 기둥에 가려진 한 지점에서 새하얀 빛이 뻗어나왔다· 그 빛은 서서히 밝아지더니 눈이 부셔서 눈꺼풀을 좁혀야 할 정도로 강렬해졌다·
그것은 그 자리에서 빛나는 것이 아니라 릴리트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빛의 파동이 눈 깜짝할 새에 앞에 있는 걸 모조리 파괴하고 지나갔다·
“꺄악!”
릴리트는 몸을 웅크리고 몇초간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검은 정령· 나무 바위 흙까지 일직선의 경로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치워버렸다·
검은 정령 절반이 그 빛에 쓸려가 버렸고 남은 것은 어쩌지 못하고 뒷걸음쳤다·
릴리트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른 채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뒤이어 쩍쩍 소리와 함께 기둥이 박살 난 고목들이 난잡하게 사방에 넘어지기 시작했다·
쿵쿵 소리와 함께 지축이 여러 차례 울리며 나뭇잎과 잔가지가 릴리트를 덮쳤다·
릴리트는 빛이 날아온 곳에 시선을 고정했지만 쓰러진 나무들이 가린 탓에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검은 정령들이 강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쓰러진 나무들을 활용했다· 이리저리 누운 나무에서 가지가 뻗고 덩굴이 자라나 접근하는 경로를 장벽처럼 막아버렸다·
다시금 가려진 희미한 틈 사이로 빛이 터져 나왔다·
콰앙!
곧바로 굉음이 터지고 방해되는 것들을 모두 쓸어버렸다· 거센 바람에 릴리트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검은 정령들의 저항이 무색하게 빛의 파동은 장벽을 전부 무참히 산산조각 내며 일직선으로 길을 만들어냈다·
릴리트 동공이 확대되고 심장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 정도의 힘을 다루는 사람을 한 명 기억하고 있었다·
일직선으로 뚫린 길에서 한명이 걸어 나왔다· 한 손에는 빛으로 이루어진 롱소드· 다른 한 손에는 검은 정령의 머리채를 붙잡고 있었다·
가면의 남자였다·
이런 식으로 재회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는 정령의 목을 베어서 옆에다 휙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다음 정령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곧이어 빅터와 황소만 한 늑대 한 마리가 뛰어나와 릴리트에게 접근했다·
“빅터!”
빅터가 살아있는 걸 보자 릴리트는 마침내 눈물을 터트렸다· 그는 씩 웃으며 릴리트의 부상을 살폈다·
“젠장 살아서 보니까 더럽게 반갑네·”
빅터는 반토막 난 검을 들고 그녀를 구속하는 덩굴들을 잘라냈고 늑대는 입으로 물어뜯으며 이를 거들었다·
우두둑 쿠구구구-
그러던 중 몸통이 반파된 고목 한 그루가 그들의 머리 위로 기울기 시작했다·
릴리트가 빅터를 밀어내며 소리쳤다·
“안돼 피해!”
소리를 지르기 무섭게 가면의 남자가 있는 곳에서 빛이 터지더니 파동이 날아와 머리 위의 고목을 산산조각 내며 치워버렸다·
“꺄악!”
그들의 머리 위로 나무 부스러기가 꽃가루처럼 쏟아졌다·
빅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큭큭 웃으며 해체 작업을 마저 진행했다· 누가 보더라도 할 말이 없어지는 광경이었다·
빅터가 릴리트를 부축하고 안전한 곳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이동하는 와중에도 가면의 남자를 몇 번씩 돌아보았다·
그는 혼자서 검은 정령들을 무참히 도륙해냈다· 찢어 죽인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살벌한 광경이었다·
“교수님께 전갈을 받았어· 엘리아스는 무사하대·”
빅터가 릴리트를 안심시키기 위해 말을 건네자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
“마티아스는····”
“칸디넬라 교수님이 금방 찾아내실 거야·”
“····”
가면의 남자가 등장하자 전세는 완전히 뒤집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투는 끝나버렸다· 모두를 궁지에 몰아넣던 검은 정령은 그의 손에 처참하게 죽었다·
그리고 주변 일대는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완전히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마침내 가면의 남자의 손에서 검이 사라지고 릴리트와 빅터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고 그 옆에는 어느새인가 못 보던 얼굴이 하나 딸려 있었다·
천재 정령사· 루나 레일리스였다· 친한 친구처럼 팔이 닿을 듯 말 듯한 간격으로 서 있는 모습을 보자 릴리트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릴리트와 남자가 서로 시선을 마주했다·
가면의 남자는 무심하게 릴리트를 한 번 훑어보고선 침묵했다· 오랜만이라는 흔한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다·
눈을 마주한 채로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참다참다 릴리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구해줘서 정말 고마운데···고마운데··· 인사 한 번 해주는 게 그렇게 힘들어···?”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릴리트에겐 남자들의 인사는 세상에서 가장 쉽게 얻어낼 수 있는 것이었다· 너무 흔해서 이제는 발에 치이는 자갈들 만큼이나 익숙했는데 정작 받고 싶은 사람에게선 차갑게 무시당했다·
그녀의 시선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빅터는 가면의 남자와 릴리트를 번갈아보고는 말을 아꼈다·
***
칸디넬라 교수는 정령들이 기어나온 검은 구덩이를 보며 미간을 구겼다· 북부에서나 나오던 것을 이런 곳에서 다시 마주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다행히 순환계의 영향 아래 있었던 탓인지 크게 확장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칸디넬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환수의 힘이 가장 약해지는 탈피기에 사고가 터졌다· 누군가 노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는 뒤를 돌아보며 학생들에게 뒤로 물라나라고 손짓했다· 그녀가 나서지 않았다면 저들은 모두 구덩이에 제물로 바쳐졌을 수도 있었다· 자칫 대참사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던 스무 명 남짓의 학생들이 뒷걸음쳤다·
그리고는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바닥에서 검은 연기가 일면서 불에 그을린 것 같은 검은 마법진이 펼쳐졌다·
쿠구구구구-
곧이어 인근에 있던 돌과 바위들이 굴러들어오더니 부서진 오벨리스크를 감싸며 겹겹이 층을 쌓기 시작했다· 오벨리스크 복구가 끝나자 검은 구덩이는 서서히 수복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임시 봉인을 끝내고는 잠시 숨을 돌렸다· 환수의 힘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충분히 버텨줄 수 있었다·
칸디넬라가 손을 털며 봉인에서 걸어나왔다·
그러자 마티아스가 급하게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교수님! 아직 아직 릴리트를 못 구했습니다· 지금이라도···!”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에 빅터의 전갈을 받았단다· 그 애는 괜찮아· 안심하렴·”
“···!”
때마침 스무 명 무리 중에 있던 세실이 소리쳤다·
“사탕아!”
갑작스런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돌아갔다·
곧이어 숲속에서 가면을 쓴 남자 데미안이 걸어 나왔다· 그 뒤로 루나 빅터 릴리트가 따라 나왔다·
칸디넬라가 대견하다는 듯이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마티아스에게 말했다·
“저기 왔네·”
마티아스가 돌아보았지만 곧장 얼굴이 창백해졌다·
“가서 인사 안 해?”
칸디넬라가 마티아스의 등을 떠밀었지만 그는 차마 다가가지 못했다· 데미안을 적대하는 시선으로 이를 꽉 깨물 뿐이었다·
“···?”
무슨 사연이 있는 건가 의아해하다가 데미안을 향한 예사롭지 않은 시선이 하나가 아님을 확인하고는 눈을 좁혔다·
몇 발짝 떨어져서 지켜보는 것이기에 그 구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왜 답장을 안 보내· 걱정했잖아!”
데미안에게 달려간 세실이 릴리트와 시선을 교환한다· 그러곤 갑자기 데미안을 와락 껴안았다·
“어 언니!”
그 옆에 있던 루나도 세실 뒤에서 안절부절하는 성녀 아젤리스도· 표정이 일그러진 채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릴리트도· 그리고 한참 떨어진 곳에서 도끼눈을 뜨고 있는 시온도·
하나같이 데미안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칸디넬라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실베린도 참 유별난 제자를 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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