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
실베린은 나를 창고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그녀의 개인적인 물품들이 굉장히 많았다· 국적을 알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의 옷과 신발· 제각기 다른 모양의 가구들· 오래된 마법 지팡이·
장식장 한켠에는 수십가지의 트로피와 훈장들이 있었다· 얼마나 수가 많은지 트로피들 일부는 접시들마냥 겹겹이 쌓아 올려진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트로피에 새겨진 문양을 보니 제국 공국 마법학회 기사단 상회까지 없는 곳이 없었다· 실베린은 대체 뭘 하고 살았던 걸까·
창고에는 실베린의 과거가 잠들어 있었다· 엄청난 과거가·
나는 실베린의 정확한 나이를 몰랐다· 겉으로만 봐서 알 수 있는 건 굉장히 젊다는 것 뿐· 많아봐야 20대 중반이나 될까·
젊은 나이에 이런 업적을 달성하는 게 가능한 건가·
연금술로 노화를 억제해서 내면엔 할머니가 있는 건 아니겠지?
잠시 넋놓고 구경하던 나를 실베린이 불렀다·
“이리와·”
그녀는 가죽으로 된 검집에 넣어진 검을 들고 내게 등을 보이며 가만 서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자 그녀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는 내게 그 검을 건넸다·
“받아·”
나는 검을 받아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단조롭고 수수한 장식· 한손검 크기에다 들고 휘두르기에 무리 없을 정도로 제법 가벼웠다·
검집과 손잡이를 보니 제법 오래 사용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누가 쓰던 건가요?”
“응· 근데 이젠 주인 없는 검이야·”
“이전 주인은 누구였죠?”
“내 동생·”
“····”
“이젠 네 거야·”
나는 실베린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는 무덤덤한 표정이다·
그렇다면 이건 동생의 유품이다· 내가 이런 걸 써도 되는 걸까?
실베린은 내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말했다·
“버릴 물건이었어· 아끼지 말고 부러질 때까지 휘둘러·”
실베린은 내게 부담줄 생각이 없어 보이지만 막쓰면 안 될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검을 어찌 함부로 굴릴 수 있겠나·
***
실베린은 회색 로브를 걸치고 현관을 나섰다· 저택 앞에는 사용인이 말을 데리고 나와 있었다·
혹시나 했건만 말은 한마리 뿐· 그말은 즉 실베린에게 안겨서 말을 타야 한다는 뜻이다·
실베린이 내게 손짓했다·
“먼저 올라타·”
“····”
내 목표는 아카데미에서 비웃음 받지 않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는 거였다· 아무래도 검술보다 승마술을 먼저 익혀야 할 것 같다·
내가 말에 올라타자 그 뒤로 실베린이 올라탔다·
그녀는 사용인에게 말했다·
“오늘 외부 활동 일체 중단하고 저택 결계 안에만 있으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아가씨·”
그녀가 고삐를 쥐고 흔들자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빠르게 저택 부지를 벗어났다· 삼십 분쯤 달리고 나니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마을 어귀 쯤 다가가고서 말에서 내렸다· 나는 이 근방의 마을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마을 초입을 지나니 말을 타고 다니기엔 사람이 많았고 도로엔 상인들로 인해 어수선했다·
나는 작은 촌락 정도의 규모를 생각했지만 예상보다 마을은 훨씬 컸다· 마을은 소도시의 모습을 조금씩 갖춰나가는 단계에 있다고나 할까·
우리는 말을 이끌고 마을 중앙으로 이어지는 길을 나아갔다· 보따리를 쥔 행상인들과 마을 주민들이 실베린을 힐끔 쳐다보고는 수근거린다·
그녀가 마법사인걸 알아보고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는 이유는 그녀의 유별난 외모 때문이었다·
마을 아낙네들의 평균치를 훨씬 상회하는 키와 유려한 이목구비· 그리고 두드러질 정도로 새하얀 피부탓에 멀리서도 눈에 확 띌 수밖에 없었다·
실베린이 워낙 시선을 끌어서 나는 그저 귀족 영애를 따르는 종자 정도로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실베린의 얼굴을 보았다· 남정네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는데도 그녀는 조금도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았다·
실베린의 시선은 한곳에 쏠려 있었다·
마을 중앙에 있는 수십여 명의 기사들· 저만한 수의 기사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영주 뿐이었다·
구울 출현 소식에 영주도 토벌대를 꾸려 이리로 보낸 것 같았다·
실베린은 그 기사들을 향해 나아갔다·
우리가 그들 근처에 다가가자 기사들의 시선도 실베린에게 고정되었다·
말에 앉은 기사 하나가 칼을 뽑아들고 실베린에게 겨누며 말했다·
“누구냐· 신분과 소속을 밝혀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돌연 소리쳤다·
“무엄하다! 뭣들 하는 게냐!”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그곳엔 수염이 지긋하고 허리를 꼿꼿하게 핀 기사가 있었다· 기사들의 지휘관이었다·
지휘관은 곧장 부하를 제지하곤 말에서 내렸다· 그리곤 그녀 앞으로 당찬 걸음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대마법사 실베린 님을 뵙습니다·”
실베린이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군요· 포퍼·”
포퍼는 실베린의 손등에다 입을 맞추며 예를 표했다·
“제 부하의 무례를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괘념치 않습니다·”
실베린의 이름을 들은 기사들이 일제히 말에서 내려 똑같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뭐야?
이중에서 제일 놀란 사람은 아마도 나일 것이다· 나는 기사들의 행동을 보고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기사들 또한 귀족일텐데 그들이 실베린에게 이토록 쩔쩔맨다는 사실이 다소 이질적이었다·
이건 실베린이 날 너무 허물없이 대한 탓이 컸다· 대마법사라니 실베린이 이렇게 높은 사람이었어···?
“일어나시지요· 느긋하게 안부를 나누고 싶지만 시급한 상황이다보니 여유를 부릴 수가 없겠군요·”
지휘관이 일어서자 그를 따라 나머지 기사들도 모두 일어났다·
실베린이 날 가리키며 말했다·
“아 이쪽은 제 제자입니다·”
지휘관 포퍼가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러자 기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향한다·
나는 예법에 맞춰 기사들에게 인사했다· 로레일관에서 배운 예법이 이렇게 도움이 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데미안입니다· 구울 토벌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스승님을 따라왔습니다·”
부담스럽다· 이들 또한 귀족 아니던가· 실베린의 제자란 말이 모두의 이목을 내게로 집중하게 만들었다· 얼마나 뚫어져라 쳐다보는지 등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다·
포퍼가 말했다·
“대마법사 님의 안목이니 기대해봐도 되겠나?”
기대라니· 나는 보잘것 없는 십대 소년일 뿐이다·
그러자 실베린이 대답했다·
“하하· 아직 할 줄 아는 것이 없으니 기대는 마시죠· 선배님들 활약을 보고 배우라고 데려온 겁니다·”
“나잇대를 보니 저희 막내랑 또래구려· 저희 막내도 경험좀 시켜주겠다고 데려왔더니 시작도 전에 사고나 치고있고 끌끌····”
포퍼가 처음 실베린을 경계하고 칼을 들이밀었던 기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기사들 무리중에 가장 어려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잔뜩 긴장했는지 얼굴이 바싹 굳었다·
그 어린 기사는 실베린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조이스 캐럴이라고 합니다· 무례를 범한 점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괜찮다· 규율대로 행동한 거겠지· 일어나거라·”
조이스가 쭈뼛거리며 일어나자 포퍼가 그의 어꺠를 툭 치며 말했다·
“내년에 아카데미 입학을 목표로 두고 준비하고 있는 녀석입니다· 어리지만 영특하고 검술에 탁월하죠· 이번 토벌대 일이 큰 경험이 될 겁니다·”
아카데미 이야기가 나오자 내 귀가 번쩍 뜨였다·
그렇다면 내 동기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럼 데미안과 동갑이네요· 이 아이 또한 제 이름으로 아카데미에 추천서를 보내놓았습니다· 훗날 동기가 될수도 있겠군요·”
아카데미 추천서라는 말이 나오자 나는 조이스와 잠시 마주쳤다·
조이스는 재보는듯이 내 행색을 위아래로 흘겨본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추천서라는 말에 나를 시샘하는 듯한 느낌도 없잖아 보인다·
포퍼가 말했다·
“제자와 관련해서는 할 이야기가 많겠군요· 일단 그건 토벌 뒤로 미루기로 하고 구울 이야기부터 하도록 하죠·”
대화는 바로 구울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좋습니다· 구울의 위치 파악은 됐습니까?”
포퍼가 턱수염을 쓸며 말했다·
“흐음 아직입니다· 남서쪽 풍차 인근과 동쪽 감자밭에 정찰을 보냈습니다· 감자밭 땅이 무르고 바위가 적어 구울들이 굴을 파고 지내기 좋은 곳이다 보니 그 근방을 주력해서 조사하고 있지요·”
부하 하나가 슬그머니 다가와 지도를 펼쳐 실베린에게 보여준다· 친절도 해라·
“그럼 정찰대가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좀 남았을 테니까 구울이 처음 들이닥쳤던 곳을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제가 안내해드리도록 하지요·”
포퍼는 기사 둘을 대동하고 우리를 안내했다·
그를 따라 십여분정도 걸어 도착한 곳은 테라코타로 된 어느 작은 집이었다·
그 집 문 앞에는 기사 둘이 보초를 서고 있다가 우리를 보자 경례를 했다·
이 집은 마을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다· 경로가 제한적일 텐데 이곳까지 오는 동안 어떻게 눈에 띄지 않은 것인지 의문이었다·
포퍼가 그 집 문을 열자 뒤쪽에 있는 나한테까지 피비린내가 덮쳤다· 나는 코를 막았다·
“윽·”
그 집 안으로 들어가자 우릴 반긴 건 어느 노파의 시체였다·
“할머니와 손녀가 살던 집인데 구울이 창문을 깨고 덮친 모양입니다·”
할머니와 손녀· 그럼 실베린의 집에 실려온 피투성이 소녀가 떠올랐다· 손녀는 그 아이일까·
그럼 그 아이는 유일했던 혈육을 잃고 고아가 된 걸지도 모른다· 남일 같지 않아 마음이 무거워졌다·
실베린이 말했다·
“구울은 도망쳤나보군요·”
“그렇소· 마을 주민들이 비명을 듣고 몰려오자 도주했다고 하더이다·”
“추격하지는 않았나요?”
“추격은 했는데 어찌나 신출귀몰한지 순식간에 사라졌다는구려·”
“아직도 마을 중심부에 숨어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무리에 합류하기 전에 빨리 찾아내야합니다·”
내 머릿속에 바글바글하던 구울떼가 아른거린다·
포퍼가 말했다·
“당장 마을 수색을 해보겠소· 흐음 도망친 놈이 무리를 불러오면 큰 문제가 되겠구려·”
포퍼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곧이어 그는 부하들에게 집결 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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