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1
이렇게까지 쫓는 이유라도 있을까· 정말 진심으로 칼질에 인생을 바치기로 한 건가· 날 이기면 어디 살림살이라도 좋아지나· 차라리 내 검을 뺏고 싶어하는 거면 이해는 하겠다·
그래도 다 죽어가기 직전이니··· 데리고 가긴 해야겠지·
루나가 난처하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버리고 갈 수는···없는 거지?”
웃기게도 루나도 나랑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독수리 밥이 되기엔 아까운 인재니까 살리긴 해야겠지·”
살려준 은혜를 칼부림으로 갚을 정도로 막무가내는 아닐거다· 그래도 대단하신 소드마스터의 수제자인데·
나는 시온을 들고 늑대의 등에 눕혔다· 그러고 다시 여정을 이어나갔다·
저녁이 될 때까지 시온은 꺠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전날부터 잔뜩 드리워 있던 먹구름이 드디어 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리는 폭우를 피해 암벽이 처마처럼 앞으로 나온 곳에 자리를 잡고 야영 준비를 했다·
따뜻한 모닥불 옆으로 옮기기 위해 늑대의 등에서 시온을 들어올리자 네모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먼저 시온을 양지바른 곳에 눕히고 편지를 들어 확인했다·
고급스런 포장에 보라색 리본까지 달려있다· 무슨 귀족들의 연회 초대장 같다·
누굴 위한 것이길래 순환계까지 편지를 들고 왔을까·
그러다 편지의 뒷면을 보고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거기엔 ‘사탕이에게’ 라는 이름이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바로 나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못 볼 걸 본 기분이다·
도전장이라고 보기엔 너무 고급스러운데· 시온은 천쪼가리에 피로 휙휙 써갈길 것 같은 성격 아닌가· 이런 초대장을 정성스럽게 준비했으리라고는 상상이 잘 안 된다·
그러다 불현듯 일전의 대결에서 그녀가 한 말이 머릿속에 스쳐간다·
‘스승님이 널 무척이나 보고싶어 하시더라고·’
아니겠지? 소드마스터가 뭐가 아쉽다고 날 보겠다고 할까·
이걸 그대로 가져가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말없이 챙기면 도둑질 같고 그렇다고 그냥 돌려주기엔 다음 만남이 부담스럽다·
속으로 갈등하다 결국 편지를 품안에 넣었다·
루나는 조용히 몸을 녹이고 비를 감상했다·
나도 그녀를 따라 순환계의 풍경을 감상했다· 실습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이니 거센 빗줄기도 이젠 그리 밉지가 않았다· 과열된 마음을 식혀주는 것 같아 마음이 평온해졌다·
불청객이 하나 딸려 있는게 흠이다만 뭐 갑자기 깨어나서 쌈박질만 걸지 않으면 되니까·
그렇게 한동안 시간을 죽이다가 루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는···포션 받으면 어디에다 쓸 거야?”
수석 보상인 사랑의 비약을 말하는 것이었다·
“너랑 반으로 나눠야지·”
날 보는 그녀의 얼굴에 옅은 웃음기가 감돈다·
“···욕심이 없구나·”
“너는 어디에 쓰고 싶은데?”
루나는 잠시 빗줄기를 감상하며 뜸을 들이다 말했다·
“···나는 괜찮아· 반으로 나눠 줄 필요 없어·”
“네 몫은 확실히 챙기는 게 좋아· 앞으로 나랑 같이 그룹으로 할 걸 생각하면 보상 나누는 문제는 확실····”
단체활동이 또 있으면 루나와 앞으로도 함께 움직일 거란 본심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내서 잠시 말문이 막혔다·
“···뭐 아무튼·”
루나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조용히 웃는다·
“···이미 많이 받았는 걸· 이번 실습··· 너무 재밌었어·”
고생만 잔뜩 시킨 것 같아 마음이 좀 걸렸는데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포션을 어디에 썼는지만 알려줘···· 그거면 충분해·”
***
다음날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섰다·
그러던 중 정오가 될 즈음 반가운 인물들을 만났다·
바로 이리스와 폴슨이었다·
그들은 외곽의 안개낀 참나무 숲에서 길을 헤매고 있었다· 몰골이 거지꼴이나 다름없는 걸 보아 그곳에서 며칠은 갇혀있었던 모양이었다·
“제 젠장 사람이야!”
이리스 그룹은 피골이 상접한 얼굴로 우릴 마치 구조대마냥 여기며 손을 흔들며 쫓아왔다·
땟국이 줄줄 흐르는 얼굴과 흙색이 되어버린 옷들· 며칠을 굶었는지 볼이 헬쓱해져 있었다·
거기에 폴슨은 누구한테 얻어맞은 모양인지 얼굴 한쪽이 부어 있었다·
사실 처음엔 약탈이라도 할까 싶었는데 그 모습들을 보니 그런 마음마저 사라졌다· 굳이 긁어서 부스럼 만들 필요나 있을까 싶었다·
폴슨과 이리스는 몰골이 멀쩡한 우리를 보고 놀라더니 늑대 위에 정신을 잃고 누운 시온을 보고 더 놀랐다· 혼절한 시온이라니 보기 드문 광경이긴 할 거다·
“도 도 도와줘!”
폴슨이 다가오려 하자 나는 목검을 뽑고 목을 겨냥하며 말했다·
“떨어져·”
그는 두 손을 들고 뒤로 물러났다·
“사 사흘을 굶었어· 가 같은 학생끼리 도울 수도 있는 거잖아!”
나는 시온의 주머니에 있던 육포를 한 장 꺼내다 진흙에다 휙 던졌다· 첨벙 소리와 함께 육포는 흙탕물에 절여졌다·
이들을 괴롭힐 마음은 없지만 그렇다고 도울 마음도 없었다·
그들이 뒤따라오는 걸 쳐내고 루나와 함께 떠났다·
순환계의 끝에 다다를 즈음이 되니 플랜테라와 자주 마주쳤다· 그것들은 숲속에서 길을 잃은 학생들이나 짐승들을 상대하는 경비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셋이서 같이 복귀하면 이런저런 말들이 나올 수도 있기에 시온을 플랜테라에게 맡겼다·
그리고 한동안 상의한 끝에 나도 루나와 갈라져서 플랜테라의 등에 실려가기로 했다·
필수적인 과정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급적 ‘데미안’도 실습에 참여했다는 정황은 남겨야 했기 때문이다· 다른 애들이 있는 곳에서 가면을 쓰고 가만히 있는 것도 좀 이상하긴 하다·
그리고 루나와는 이터니아로 복귀할 때까지 모르는 사이인 것처럼 행세하기로 했다·
목검은 붕대를 감아 위장하고 환수의 뿔과 사탕이로 지낼 때의 남은 소지품은 전부 루나에게 맡겼다· 루나는 이곳에 있다가 눈에 안 띄게 조용히 선착장으로 복귀하고 나는 학생들이 모여 있는 안전결계에 있기로 했다·
나는 이리스네 그룹의 몰골을 참고해서 고생 많이 한 것마냥 옷을 더럽혔다· 그런 뒤 플랜테라의 어깨에 몸을 걸치고 루나에게 말했다·
“일단 우리도 여기까지네·”
“응·”
“조만간 우리 집에 초대할 테니까 놀러와·”
“···응!”
그녀는 멀어지는 내게 손을 흔들었다·
***
플랜테라를 타고 안전 결계가 펼쳐진 지역에 도착하고는 땅에 내려서 전경을 살폈다·
그곳에는 이터니아의 학생들이 모여 거대한 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몇몇 이들이 간이 천막에서 나와 내 얼굴을 확인했지만 별거 아니라 생각했는지 금방 관심을 끊었다·
그리고 예상을 깨고 누군가가 나를 격하게 반겨주었다·
“데미안!!”
트리샤가 어느틈에 날 발견하고 머리를 휘날리며 힘차게 달려왔다·
그녀가 소리를 내지른 덕에 조용히 묻혀가려던 내 계획이 단번에 물거품이 되었다·
트리샤가 내 앞에 다가오고는 밧줄로 결박하는 것처럼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걱정했어!”
그러고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가만히 있었다·
“···?”
주위의 몇몇 학생들이 우리를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거기에 이어 멀리 떨어져 있는 세실과 그 친구들이 이쪽을 내다본다· 세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는데 이거 약간 불안하다·
“···너 뭐하냐?”
얘는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그러자 트리샤가 퉁명스런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친구 걱정 좀 해보자·”
나는 주변 눈치를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시선 안 끌고 조용히 묻어가려 그랬는데· 네가 이러면····”
“어차피 시온 때문에 너는 신경도 안 써·”
“···시온이 왜?”
“너는 모르겠구나? 몇시간 전에 시온이 기절한 상태로 실려왔어· 여기 애들 누가 환수의 뿔을 가져오나 한창 말이 많았는데 시온마저 실패하고 돌아오니까 난리도 아니야·”
“····”
“그보다 나 그룹 없는 거 눈에 띄면 곤란해·”
“여기 애들은 이미 그룹 다 쪼개진지 오래야· 아무 상관 없어·”
“····”
뭐 그렇다면 다행이네· 남들은 나한테 별 관심 없는데 내가 괜히 예민하게 굴었던 모양이다·
트리샤는 아무도 듣지 못하게 작은 목소리로 소근거렸다·
“뿔은?”
“몰라·”
“뿔 못 구했어?”
“···환수는 못 만났어·”
“그럼 그렇지· 전체 수석 마법부 수석이 합쳐도 환수 앞에선 어쩔 수 없네!”
실패했다니까 트리샤는 왠지 모르게 들뜬 목소리다·
그래 누가 누굴 걱정하냐· 뿔이 궁금해서 냅다 달려온 게 확실하다·
“히히 간다!”
그녀는 내 등을 달래듯이 토닥거리고는 도망치듯 세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
실습은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플랜테라는 낙오된 학생들 전원을 안전한 곳으로 인솔했고 별다른 사건 없이 모든 게 마무리되었다·
“게일이 가져왔을지도 몰라·”
“시온이 못했는데 걔가 어떻게 해?”
“진짜 아무도 못 챙겨온 거야?”
“시작할 때 교수가 그랬잖아· 뿔 가져오는 거 기대도 안 한다고·”
안전 결계에서는 누가 수석을 차지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었는데 결국 끝날 때까지 아무런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수석들이 실패하길 은근히 기대했으면서도 제대로 한 건 해온 사람이 한 명 없다는 것이 충격이라는 듯이 떠들어댔다·
그렇게 하루 더 머물고 다음날 복귀를 위해 선착장으로 이동했다·
나는 이터니아로 돌아가는 배의 난간에 걸쳐서 잔잔히 흘러가는 강줄기를 감상했다·
그리고 시온에게서 갈취한 편지를 읽어야하나 말아야하나 속으로 한참을 고민했다·
그렇게 시간을 죽이고 있던 차에 등 뒤로 갑판을 삐걱대며 누군가가 다가왔다·
곧이어 그 사람은 내 옆으로 어깨를 붙이고 섰다·
트리샤였다·
그녀는 사과를 들고 말없이 두 입 베어물고는 날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먹다 만 것을 내게 슥 내밀었다·
“먹어·”
“····”
“안 배고파?”
사양하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젓자 그녀는 마저 다 먹고는 강에다 휙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주변을 살피며 갑판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난 다음주에 그 안개 낀 기숙사로 돌아오래· 가기 진짜 싫은데·”
“벌써 돌아가?”
좀 풀어주는 건가 했더니 트리샤는 다시 감금되는구나·
“실습가기 전에 불러서 그 말을 하더라구· 너한테는 아무말 안 했어?”
“응·”
트리샤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좋겠다·”
“나도 조만간 윗드러프관에 한 번 들러야지·”
트리샤는 난간에 몸을 기대고 늘어트렸다·
“아 너는 신입생 환영식도 경험하겠네··· 난 그런거 못 경험하는데·”
“환영식?”
“응·”
“뭐하는 건데?”
“몰라· 근데 부러워·”
“뭔지 모르는 건데 뭐가 부러워?”
“그냥····”
생각해보니까 처음 윗드러프관에 입주할 때 실베린이 신입생 환영식같은 게 있다고 이야기 했던 기억이 난다·
속옷을 가지고 뭘 어떻게 하고 방을 더럽힌다는 것 정도로 알고 있었다·
풀이 죽은 트리샤를 보니 좀 안타깝다· 나는 잠시 기운을 북돋아줄만한 말을 생각했다·
“우리 둘이서 환영식 하면 되지·”
“진짜?”
“응· 내가 환영식 하는 법 배워서 올게·”
“좋아 좋아· 진짜 좋아!”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지· 잠시 잊고 있었는데 할일이 너무 많았다·
***
윗드러프관 3층 두 소녀가 은밀하게 왼쪽 끝으로 걸어가 31F호실 앞에서 멈춰섰다·
미술부 부장 헤일리가 훔쳐온 복사키의 고리를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며 말했다·
“여기가 확실하지?”
그러자 미술부 부부장 제니아가 씩 웃으며 말했다·
“맞아· 우리 귀여운 신입 방이래·”
“왜 이렇게 구석이야· 뭐 밉보인 거라도 있나· 아니 그보다 돼지년들이 먼저 접수한 건 아니겠지?”
“훔친 열쇠는 우리가 계속 보관했으니까 일등이지·”
헤일리가 망설임 없이 문에 열쇠를 꽂고 손목을 돌렸다·
덜컥 소리와 함께 31F호실 문이 스르르 열리고 그들은 조심스럽게 내부로 들어섰다·
10대 소년에게서 나오는 날것의 정취를 기대했지만 지나칠 정도로 잘 관리된 모습에 제니아는 다소 실망했다·
“음 우리 신입···실망인데·”
헤일리는 문을 잠그고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선배를 실망시켜? 기강을 잡아야지·”
제니아는 넓은 통창 앞으로 가서 전망을 살폈다· 저 멀리 바람에 흔들리는 은빛 수호목이 창밖 풍경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제일 구석진 호실이긴 했지만 전망 하나는 최고의 명당이었다·
헤일리가 제니아를 툭치며 말했다·
“뭐해? 작업 해야지·”
그러고 그녀는 서랍장 앞으로 다가가 하나씩 꺼내며 옷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잠시 뒤 그녀가 속옷을 한 뭉텅이 손에 쥐고 흔들었다·
“찾았다 땔감·”
“풋 푸하하·”
제니아가 그 모습을 보며 배를 잡고 웃었다·
헤일리가 미리 챙겨온 바구니에 속옷들을 구겨넣었다·
제니아는 그틈에 침대를 구석구석 뒤지기 시작했다·
“우리 후배는 금지된 음서를 어디에다 숨겨놨을까·”
혈기왕성한 십대의 은밀한 약점을 찾아낸다면 신입을 미술부에 꽁꽁 묶어둘 수 있었다· 이들이 온 주목적은 바로 음서 때문이었다·
그렇게 침대 밑을 뒤지던 제니아의 손끝에 이상한 것이 걸렸다·
“뭐야···이게?”
그녀는 그것을 쭉 잡아당겨서 빼냈다·
“···!”
가슴을 가리는 여성용 속옷이 그녀의 손에 걸려서 나왔다·
학칙이 엄격할수록 보이지 않는 일탈 행위는 거세지기 마련이었다·
이터니아도 깐깐한 학칙의 반작용으로 ‘헌 속옷은 불태우고 새 속옷을 두고 온다’는 과격하고 암묵적인 환영 의식이 자리잡았다·
이것이 나왔다는 건 즉 누군가가 후배의 기숙사에 침입해서 신입생 환영식을 선점했다는 말이었다·
제니아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듯이 소리쳤다·
“아씨 돼지년이 벌써 왔다 갔어!”
헤일리가 화들짝 놀라며 반문했다·
“뭐? 그럴리가 없는데?”
제니아는 보라는 듯이 그것을 들고 흔들었다· 화려한 자수가 들어간 장인 제작 고급 속옷이었다· 제니아는 그 어깨끈에 새겨진 이니셜을 확인했다·
“S· 이 이니셜 쓰는 년이 누구야?”
“하! 연극부 무용부 중에 하나겠지·”
제니아는 자신의 가슴에 슬쩍 그것을 덧대보고는 경악했다·
“이···이···진짜 망할 돼지년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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