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7
시온과 나는 이터니아강 부둣가에서 저무는 해를 바라보았다·
점을 본 것은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아직도 폭발했던 감정의 잔해가 마음을 어지럽혔다· 내 감정이 아직 미성숙하단 걸 깨달았으니 나름의 소득은 있다고 해야 할까·
노인이 말한 점괘에 대해선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날 필요 이상으로 흔들어 놓았고 평정심을 잃었던 내겐 감정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문득 실베린이 보고 싶었다· 돌아가는 길에 수리를 맡겼던 스티치를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옆에서 무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던 시온이 내게 물었다·
“그 점쟁이가 정확히 짚었나 보네·”
“뭐 나름대로·”
“그럼···고아였던 것도 사실인가?”
고아로 살아온 이력은 떠벌릴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감출 것도 아니다·
“응·”
“···이제 조금 이해가 되네·”
“뭐가?”
“스승님이 했던 말이· 유복하게 자란 사람들은 강해져야 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고·”
“무슨 말인데?”
“재능이 아무리 훌륭해도 적당한 부와 지위를 갖추면 그 자리에 안주하길 원한다고 말이야· 그래서 지옥을 경험한 사람만이 진정으로 강해질 수 있다고 그러셨지·”
강해진다라· 내 바람은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갖추는 것이었다· 지금은 왠지 모르게 그 목표가 너무도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늘 보니까 느꼈어· 너도 역시나 평범하게 살아온 건 아니었네·”
노인의 말에는 내 과거를 유추할 수 있는 정보가 담겨 있었다· 그래서 굳이 세세하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내 과거를 짐작할 수 있었던 듯했다·
시온은 무심하게 노을에 물든 강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볍게 말을 던졌다·
“나도 고아야· 어쩌면 이것 때문에 스승님이 날 거둔 것인지도 모르지·”
그 말은 시온도 저 나름의 시련을 경험했다는 것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날 인정하고 마음을 열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직도 나랑 싸우고 싶어?”
“아니 전혀·”
그녀는 이제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한 기색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시간을 죽였다· 바람이 불고 강물이 출렁거렸다·
해가 마침내 완전히 기울고 어스름한 달이 떠오르자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지에 붙은 자갈들을 툭툭 털어내는 와중에 누군가가 날 불렀다·
“···사탕이?”
나와 시온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열 걸음쯤 떨어진 곳에 세실과 마르타가 서 있었다·
미처 계산하지 못했던 만남이다· 그러고 보니 얘네들도 점 보러 온다고 했었지·
한데 세실의 낌새가 평소와는 다르다· 그녀는 우릴 보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진짜 사탕이 맞잖아····”
그녀는 시온을 흘겨보고는 다시 날 째려보았다· 상황을 파악하고는 화가 난 듯이 입술을 꾹 다문다·
세실은 그렇게 우뚝 서 있다가 휙 돌아서서 인파로 들어갔다·
마르타가 뒤늦게 세실을 쫓아갔다·
“어? 야 야! 어디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온이 피곤한 듯이 하품을 하고는 말했다·
“나도 이제 갈래·”
그러곤 뭐라 작별을 남기지도 않고 홀연히 떠나갔다· 참 바람 같은 소녀다·
나는 세실의 태도가 찝찝했던지라 세실이 떠났던 곳을 뒤따라 움직였지만 끝끝내 재회할 수 없었다·
결국 수리를 맡겼던 실베린의 스티치를 다시 회수했다· 스티치는 한 번 산산조각이 났던 탓에 깨진 유리처럼 여기저기 금이 가 있었지만 수리공이 말하길 작동에는 큰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것을 끝으로 나는 집에 돌아갔다·
긴 하루였다·
***
트리샤는 이미 가시정원으로 떠났던 탓에 저택은 고요했다· 나는 혹여나 하는 마음에 내 침대 이불을 한 번 걷어 올렸다· 역시나 없다·
그녀가 있을 땐 방이 항상 어수선한 느낌이었는데 막상 없어지고 나니 허전했다·
오랜만에 실베린에게 전할 편지를 썼다·
새로 사귄 친구들· 순환계에서 있었던 일들· 그리고 실습에서 최고 성적을 차지한 이야기까지· 실베린에게 소소한 즐거움이나마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늘의 일을 적으려다 펜을 멈추고 점성술사가 했던 말을 복기했다·
실베린은 답을 말해 줄 수 있을까· 한동안 고민하다 그 점괘 이야기는 쓰지 않았다· 나는 홀로 설 줄 알아야 하고 그녀로부터 인생의 답을 구해선 안 됐다·
그렇게 이터니아에서의 일상을 적은 편지를 날려 보내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 꿈을 꿨다·
모든 게 흐릿해서 별다른 인상을 남긴 게 없었다· 흐릿한 무언가를 마주했고 내 뒤엔 누군가가 있었고 우리는 절벽 위에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와 가장 비슷한 기억은 리자와 베네마릴을 쫓던 때밖에 없다·
전날 저녁에 잊고 싶었던 기억을 잔뜩 들쑤셨던 탓에 예고도 없이 불쑥 튀어나온 것이리라·
***
아침 일찍 이터니아의 캠퍼스에서 세실에게 스티치를 보냈다·
전날 마주했던 그 표정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고 마침 날개 없는 용에게서 얻은 크리스탈을 감정해줄 사람이 필요하기도 했다·
하지만 점심이 지날 때까지 답장은 오지 않았다·
나는 참다못해 가면을 쓰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세실은 서고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세실의 옆에 다가가자 그녀는 책을 고르다 말고 휙 돌아서서 멀어졌다·
날 본 게 분명한데 못 본 척을 하고 있었다· 행동에서 느껴지는 냉담함· 나한테 뭔가 실망했거나 서운한 감정이 있는 게 분명했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세실을 뒤따라갔다· 내 추격을 눈치챘는지 그녀는 떨쳐내기 위해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세실이 열람실 책상에 앉자 나는 슬쩍 다가가 맞은 편에 자리를 잡았다·
“이야기 좀 할까?”
“····”
세실은 대꾸도 없이 책을 펴고 얼굴을 가렸다· 나와 눈도 마주치기 싫다는 신호였다·
어제 내가 잘못한 일을 빠르게 돌아보았지만 세실이 화낼 만한 건 없었다·
“스티치는 받았어?”
“····”
세실은 책을 챙기고 다른 책상으로 이동했다·
좋지 않다· 이거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은데·
여기서 모르는 척하면 이대로 세실과의 관계는 영원히 끝날 수도 있었다· 계속 따라가서 왜 화가 났는지 반드시 캐내야 한다·
나는 뻔뻔하게 세실을 따라가 같은 책상에 마주하고 앉았다·
“네가 호기심 가질 만한 물건 가져왔는데 안 궁금해?”
세실은 책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했다·
“관심 없어· 저리 가·”
세실답지 않게 말투가 차갑다·
“얘기 좀 해·”
“싫어·”
나는 능청스럽게 그녀가 챙겨온 책 한 권을 쓱 빼서 훑어보았다·
“말할 때까지 따라다닐 건데·”
바람둥이 남자를 단죄하는 살인귀를 다룬 소설이었다· 중간중간 끔찍한 삽화 때문에 눈살을 구겼다· 얘 그렇게 안 봤는데 취향 참 별나네·
세실이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로 말했다·
“학교 내 괴롭힘으로 신고할 거야·”
“난 유령 학생이라서 신고해도 안 잡힐걸?”
“아는 선배들 다 불러서 퇴치해달라고 할 거야·”
“서운하네· 선배까지 동원해서 친구를 따돌리고·”
“···서운?”
“응·”
“서어우우운?????”
분위기가 점점 악화되자 나는 순발력을 발휘해 화제를 전환했다·
“나한테 뭔가 섭섭한 게 있나본데·”
“흥····”
“어제 날 보고서 왜 그냥 간 거야?”
“즐겁게 데이트하시겠다는데 불청객이 와서 방해하면 쓰겠어?”
“데이트 아니야·”
“아아 그러세요· 남몰래 리그베드에서 약속 잡고 단둘이 오붓하게 저녁 노을도 감상하고 보기 좋던데· 데이트는 누가 먼저 신청했어?”
“····”
“수석만 골라서 하나씩 돌아가며 만나보니까 어때? 좋아? 이리스랑은 언제 약속 잡았어?”
아 큰일이네· 이거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다· 수석만 골라 만난다는 오해는 어떻게 풀어야 하나·
“시온하고는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된 거야·”
“아 같이 데이트할 친구 따로 있고 필요할 때만 이용하는 친구 따로 있는 건가 본데· 내가 너무 주제넘게 친한 척 했지?”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가시가 돋아나 있다· 얘 화나면 제법 무섭구나·
“시온이 계속 싸우자고 달려들면 내 주변 친구들이 피곤해지니까 따로 담판을 지은 거야·”
“아 그러시겠네요· 너무 중요해서 학교에서 안 보고 분위기 좋은 곳에서 따로 그렇게 만나야 했겠네요· 다른 친구한테는 한 번도 그런 적 없으시면서·”
“····”
“아 누가 들으면 내가 널 좋아해서 하는 말인 줄 알겠어· 난 그저 서로 아끼는 ‘친구로서’ 서운함을 표현한 건데·”
머리가 지끈거린다· 얘를 말로 달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이 상태로는 의뢰를 맡기는 게 불가능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뇌물이라도 챙겨올 걸 그랬다·
세실이 책을 내렸다· 그렇게 마주한 그녀의 눈은 살짝 충혈되어 있었다·
“····”
운 건가? 아니지? 아닐 거라고 믿는다· 아무리 그래도 그거 서운하다고 울 정도인가·
···그냥 책을 오래 봐서 그런 거겠지·
“솔직히 말해봐· 너 수석만 골라 만나는 거야? 나랑 친구인 이유가 뭐야?”
“그야 넌····”
세실이 중간에 말을 끊었다·
“얼굴이 예뻐서 몸매가 좋아서 다 괜찮아· 심지어 가슴이 커서라는 개변태 같은 이유도 귀엽게 봐줄 수 있어· 그런데 마도학부 수석이라는 이유로 친구가 된 거면 용서가 안 될 것 같아·”
이거 큰일이다· 마도학부 수석이라서 그런 게 맞다· 난 타고난 영역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성취한 영역을 보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은 실력보다 외모를 보면 더 문제로 여기는데 얘는 그 반대다·
“너랑···같이 놀면 재밌을 것 같아서·”
괜찮은 답이 됐으려나·
세실이 책을 다시 들어서 얼굴을 가리고는 대답했다·
“7점짜리 답이야·”
“몇 점 만점인데?”
“천 점·”
“····”
말은 그렇게 해도 응어리진 마음이 조금은 풀린 기색이었다·
“같이 놀면 재밌을 것 같다면서 왜 한 번도 제안을 안 해?”
“재밌는 일이 생겨야 부르지·”
“···그럼 내가 부르면 올 거야?”
말을 그렇게 뱉었으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물론이지·”
세실이 책을 살짝 내려서 눈만 드러낸 상태로 말했다·
“···그럼 오늘 저녁에 수호목 앞으로 와·”
“수호목 인근은 아직 출입 금지 아니야?”
“그게 왜 출입 금지가 됐는지 알아?”
“···아니·”
“수호목 앞에서 유령이 나오거든· 그러니까 나랑 같이 유령 잡으러 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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