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9
내 물음에 세실이 귓속말로 대답했다·
“조금 유명할걸?”
그래 예쁘다면 한 번 만나겠다고 국경까지 건너는 세상에서 소문이 안 퍼질 수가 없지·
복면을 쓴 남자는 우리의 행색을 몇차례 훑고는 다소 안도한 듯이 어깨가 축 처졌다·
“일··· 일학년 맞네· 행색을 왜 그렇게 하고 온 거냐? 괜히 쫄았네·”
말하는 걸 봐선 선배인 듯했다· 한쪽 팔로 안고 있는 캔버스나 벨트에 끼워져 있는 붓으로 보아 미술부와 관련된 인물일 가능성이 컸다·
세실이 그에 반박했다·
“그쪽이 제일 수상하고 위험해 보이는데·”
“뭐 아무튼 너희들 여긴 뭐하러 왔어· 여기 애정행각 하는 곳 아니야·”
“그러는 그쪽은?”
그는 캔버스와 붓을 보란 듯이 들며 말했다·
“난 그림 그리러 온 거다·”
세실이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복장만 보면 사람 잡아다 바칠 광신도 같은데·”
그 남자가 멋쩍은 듯이 복면을 긁적거렸다·
빅터가 나서서 정중하게 말했다·
“저희는 이곳에 유령이 출몰한다는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
복면을 쓴 남자는 유령이란 단어를 듣자 몸이 경직되었다· 그러곤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젠장 내가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
그는 추궁하듯 물었다·
“너희 그 소문 누구한테 들었어?”
세실이 답했다·
“이미 퍼질 대로 퍼져서 굳이 따지는 것도 무의미할걸?”
남자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보나 마나 호기심 때문에 왔을 텐데 수호목 앞에서 대놓고 죽치고 있으면 사제님은 절대 안 나와· 방해만 될 뿐이야·”
그는 꼭 본 적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말한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나도 나서서 캐물었다·
“유령을 직접 보신 겁니까?”
“당연하지· 내가 첫번째로 만났으니까·”
“가까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으십니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다가갔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잃었지· 난 그때 사람을 압도하는 신성력을 경험했어·”
“그 뒤로 만난 적은 있습니까?”
“그 뒤로도 한 번· 멀리서 잠깐 지켜본 것 뿐이야·”
“····”
“이제 알았으면 그만 나오지 그래? 사제님은 진실로 만나길 염원하고 신앙심 깊은 자에게만 모습을 드러내시니까· 너희들 같이 치기어린 마음에 들이대는 놈들은 관심도 없으실 거다·”
똑같이 몰래 침입한 처지이면서 마치 본인 구역인 것처럼 말한다· 이 남자· 수호목 감시가 느슨해지자마자 바로 죽치고 유령이 나오기만 기다렸을 게 뻔하다· 그림 도구까지 챙겨온 걸 보면 유령한테 푹 빠진 모양이다· 내일 미술부 수업에서 볼 것 같은데·
오늘 밤은 가시정원 기숙사로 돌아가서 트리샤한테 단단히 당부해야겠다·
세실이 다시금 그의 말에 반박했다·
“그쪽도 그리 독실한 마음으로 나온 건 아닌 모양인데·”
“니 니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나 이래뵈도 모태신앙이었어·”
세실이 입을 삐죽거리며 비꼴 말들을 장전하자 서둘러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한쪽으로 빠졌다· 더이상 티격태격하면 골치 아파진다·
“실례하겠습니다·”
“어···사탕아 잠깐!”
그들과 멀찍이 거리를 벌린 뒤에 세실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
“왜 벌써 가?”
“사람이 너무 많아· 아무리 경계가 느슨하다 해도 이 정도까지 모이면 관리자가 올 수도 있어·”
알만한 건 다 알았다 트리샤에게 주의를 단단히 주면 유령 소동은 소리소문 없이 잠잠해지겠지·
“····”
세실이 힘없이 숨을 뱉는다· 와인 향을 머금은 숨결이 내 턱을 스친다·
한 손의 와인병을 흔든다· 아직 삼 분의 일은 남아 있었다·
“어휴 그래· 이렇게 불청객들이 많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네·”
“유령이 그렇게 보고 싶어?”
“응 수호목이 고해성사의 장소인 건 알아? 나 진짜 진짜 물어보고 싶은 게 있거든· 물론 사탕이 취한 것도 쪼금 보고 싶었고·”
“궁금한 게 뭔데? 나중에 만나게 되면 물어볼게·”
“풉 됐어· 사탕이 너는 속이 음흉해서 사제님이 상대도 안 해주실 거야·”
“····”
그럴 리는 없긴 하지만 진짜 그분이 존재하신다면 나도 물어보고 싶은 게 있긴 하다· 실베린과 관련된 거지만 실베린에게 직접 물어볼 수 없는 것들을· 물론 순전한 호기심이다·
“그럼 이제 나 기숙사에 데려다줘! 어두워서 무섭다·”
세실은 슬쩍 내 옆에 와서 팔짱을 꼈다·
그렇게 함께 걸어가던 중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이 세실이 입을 열었다·
“근데 사탕아·”
“응·”
“아침에 스티치는 왜 보낸 거야?”
“아 깜빡할 뻔했네·”
나는 날개없는 용의 심장에서 나온 크리스탈을 꺼냈고는 세실에게 건넸다·
이제는 서운한 감정도 제법 풀린 것 같으니 부탁해도 되겠지·
“나중에 시간나면 이것좀 감정 해줄래?”
세실이 크리스탈을 잡고 달빛에 비춰보며 말했다·
“이게 뭐야?”
“순환계의 도마뱀한테서 얻었어· 전문가의 감정이 필요해·”
***
세실을 마저 배웅하고 옷가지 일부를 챙겨서 오랜만에 미궁의 가시정원 기숙사로 찾아갔다·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돌연 2층에서 우당탕 소리가 울린다· 곧이어 트리샤가 맨발로 다급하게 계단을 내려왔다·
그러곤 계단 중간에서 난간에 몸을 걸치고 내게 소리쳤다·
“왜 이제 와!!”
“넌 낮에 어디 갔었는데· 와보니까 없던데·”
“나 수업받고 왔지· 환영식은?”
아차 생각해보니까 기숙사 환영식을 여기서 함께 하기로 했었지· 남들이 하는 거랑 똑같이····
젠장 그 난리를 겪으니 이젠 빌어먹을 속옷만 보면 넌덜머리가 난다· 아직도 내 방에는 세 바구니에 달하는 천 쪼가리들이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그 바보 같은 짓거리는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다·
트리샤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거린다· 손바닥으로 북을 치듯이 난간을 탁탁 때렸다·
“환영식! 환영식! 너는 이미 즐기고 왔지?”
“응 호되게 당했어·”
“나도 할래!”
나도 모르게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 짓거리를 진짜 경험하고 싶어?”
“응!!”
착잡하다· 그래도 약속은 했으니 간소하게나마 의식을 치러야겠지·
“그럼···속옷이나 양말 하나 챙기고 정원으로 나와·”
“응!!”
트리샤는 뭐가 그리 신났는지 힘차게 대답하고는 다시 우당탕 소리를 내며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나는 주방에서 장작 두 개 그리고 여분의 속옷 한 장을 챙기고 현관 밖 정원으로 나왔다·
그리고 불이 옮겨붙지 않을만한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장작을 세로로 쪼개서 원뿔 모양으로 세워두었다·
트리샤가 넘어지지 않을까 싶은 정도로 빠르게 현관을 나왔다· 한 손에 새하얀 천 쪼가리가 깃발처럼 휘날렸다·
그러곤 내 앞으로 쪼르르 달려와서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이제 뭐 해?”
“불을 피울 거야·”
선배들의 야만스러운 방식을 트리샤에게 그대로 보여줄 수는 없었다· 우리는 우리들만의 방식으로 성숙하게 의식을 치러야지·
나는 장작에 손을 대고 불의 정령을 소환했다· 내 손등 위에 소환된 그 녀석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장작에 불을 지피고는 위로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트리샤의 어깨 위로 올라앉았다· 저 녀석은 나보다 내 주변 사람을 훨씬 좋아하는 것 같다·
트리샤가 손가락으로 정령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얘 전에 봤을 때보다 살쪘어·”
“···그래?”
난 전혀 모르겠는데·
“응· 포동포동한 거 봐! 확실히 살쪘어· 너무 먹이는 거 아니야?”
“난 따로 먹인 적 없어·”
뭘 먹여야 하는지도 모르고·
“너 아니면 누가 먹여· 관리 좀 해! 더 먹이면 날지도 못하겠어·”
나 말고 누가 먹이겠나 싶다가 문득 의심 가는 사람 한 명이 떠올랐다·
나보다 저 녀석을 더 잘 부리는 사람이 있었지· 글쎄 난 살이 정말 찐 건지 구별도 안 되어서 정말 그 사람이 그랬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일단 앉아 봐·”
내가 먼저 연기가 피어나는 장작불 앞에서 엉덩이를 땅에 붙이자 트리샤도 맞은편에서 쪼그려 앉았다·
“이제 의식 시작한다·”
“···여기서 뭐하면 돼?”
불씨가 점차 커지면서 시뻘건 모닥불이 되자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속옷을 던졌다·
트리샤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뭐야?”
“불에다 던져·”
“···그게 전통이야?”
“응· 별로야?”
“아니 완전 무식한 방법이라 더 좋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손에 꼭 쥔 걸 쉽사리 던져내질 못했다·
“왜 그래 그거 아끼는 거야?”
“···응 내 애착 속옷이야·”
“···그럼 다른 걸 가져와· 양말이나 장갑도 괜찮아·”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아니· 그냥 나도 던질래· 이거 구멍 난 거라 어차피 입지도 못해·”
그러고는 속옷을 펼쳐서 구멍에 손을 넣고 내게 직접 확인시켜주었다·
얘는 정말 문명화가 덜 된 야생 동물 같다· 그렇게 디테일하게 보여줄 필요는 없는데·
트리샤는 크게 결심하고는 장작 위에다 그것을 툭 올려놓았다·
그렇게 의식을 위한 천 쪼가리들은 시커먼 연기를 내며 그슬렸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여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트리샤와 함께 이터니아에서 잘 지내게 해달라고·
이 정도면 이터니아의 관습에 비해 나름대로 품위 있고 점잖은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트리샤는 다리를 끌어안은 채로 무릎에 턱을 괴고 그 작은 제단을 주시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활활 타오른 샛노란 불길이 반사되었다·
트리샤는 멍한 표정으로 한동안 감상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 이거 본 적 있어·”
“···어디서?”
“확실히 기억나· 하롱코스라는 작은 마을에서·”
“거기에도 아카데미가 있어?”
“아니 마을을 경유하면서 한 번 봤어· 꽤 역사가 깊은 마을인데· 거기선 이걸 영혼결혼식이라 불렀어·”
“영혼결혼식···?”
“응· 혼약을 기약한 남녀가 성년을 맞이하지 못하고 죽으면 그 연인의 속옷하고 머리카락을 잘라서 한곳에 태웠어· 그렇게 해서라도 혼약을 맺으라고·”
“뭐 잘 입던 옷을 태우는 의식 같은 건 어딜 가나 비슷한 거 하나씩은 있겠지·”
“슬펐어· 둘이 사랑하는데 결실을 맺지 못하고 끝난 거잖아· 일면식도 없고 사연도 모르는 사람인데 그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서 울었어· 그것 때문에 기억이 나·”
“이 의식은 새 시작을 위한 거야· 과거의 기억은 잠깐 옆에다 밀어 둬·”
트리샤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지자 나는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내일 중요한 날이니까···눈 퉁퉁 부은 상태로 오면 곤란해·”
“왜?”
“전에 도와준다고 했잖아· 미술부 친구 그리기 수업·”
트리샤의 눈과 입이 놀란 듯이 천천히 벌어졌다·
“···맞다!”
“적당히 단장하고 와· 너무 화려한 옷을 입고 오면 그리기 힘들어·”
“알았어· 엄청 이쁘게 하고 올게!”
트리샤가 울적함을 털어버리고 다시금 원상태로 돌아왔다· 그래 트리샤의 이런 탄력성은 보기 좋다·
“그런데 그림 그리려면 서너시간은 차분하게 있어야 하는데 가능하겠어?”
미술부 선배들 성격이 다들 한가락 하시던데 트리샤도 워낙 예측 불능이라 괜한 마찰이 생기지는 않을까 걱정된다·
트리샤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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