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0
아직은 학기 초라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이터니아의 낮에는 어딜 가도 학생들의 웃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난 평소 웃음이 많은 편이 아니라 그 분위기가 신기하고 떄론 부럽게 느껴졌다·
웃음이 많다고 이터니아가 마냥 동화 속에 나오는 것처럼 행복 가득한 곳은 아니었다· 한명한명 뜯어보면 가문의 압력 성적에 대한 부담 대인관계의 어려움 등등 저마다 고뇌와 고통을 하나씩 지니고 있었다·
나 또한 고민이 있었다· 수석을 차지했다고 자만할 수 없는 게 내 처지다· 실베린의 제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이상 기대에 못 미치는 성과를 거두면 냉혹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시간을 허비해선 안됐다· 일정 소화가 다소 버겁더라도 나는 하루를 효율적으로 보내야 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미리 익혀둔 레시피대로 쿠키를 굽고 상자에 포장했다· 이는 야생마 같은 트리샤를 묶어두기 위한 일종의 보상책이었다·
나는 아침 일찍 연금부 온실로 향했다· 주인 없이 덩그러니 놓인 이젤들을 장애물을 피하듯 뚫고 가서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내 그림으로 향했다·
실베린의 인물화가 순환계 실습 수업을 받기 전에 놓아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완성까지는 아직 공을 들여야 하는 상태였다·
이 그림은 바라만 보아도 기분이 좋아진다· 망각의 호수 앞에 앉아 있는 실베린· 내가 기억하는 실베린의 모습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그 옆에 딸린 의자 위에 내 작업 노트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누가 둔 건지는 몰라도 한 줌의 사탕도 함께 딸려 있었다·
좋게 봐준 건 고마우나 난 모르는 사람이 준 건 먹지 않았다·
사탕을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마저 작업을 진행했다· 전체적인 밑그림 단계는 끝났지만 완성단계까지는 한참이나 남았다·
그렇게 두어시간 작업하다 말고 문득 어제의 일이 떠올라 몸을 일으켰다· 수호목에서 만난 복면의 남자가 미술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뒷짐을 지고 걸어다니면서 불규칙하게 배치된 이젤들을 하나씩 확인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호목의 모습이 담긴 스케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역시나 그 남자는 미술부의 일원이었다· 돌이켜보면 수상한 행색이긴 했지만 미술부인 걸 감출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림 속 한 소녀가 수호목에 앉아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대략적인 형상만 남아 있는데 그 선에서 상당한 내공이 느껴진다·
수호목의 유령한테 진심인 모양이다· 뭐 작품에 열정을 불태우는 사람을 깎아내릴 생각은 없었다· 난 그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가서 작업을 하던 중 미술부원들이 속속들이 들어섰다·
곧이어 미술부 부장과 부부장· 헤일리와 제니아도 문을 뻥 걷어차고 위풍당당하게 내부로 들어왔다· 걸음걸이가 꼭 산적들 같았다·
“신입!”
방금 수련을 마치고 왔는지 금발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부장 헤일리가 내 어깨를 주물거리면서 씩 웃고는 지나갔다·
제니아가 뒤이어 의자를 끌고 와 내 옆에 앉고는 물었다·
“야 신입아· ‘S’가 누구야?”
“···예?”
그 이니셜은 갑자기 왜 묻는거지?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 이니셜과 관련된 건 실베린의 스티치 말고 없었다·
“네 방 침대에 있던 ‘S’의 속옷이 누구꺼냐고· 어? 어떤 돼지년이 또 괴럽혀?”
너무 태연하게 내 방에 침입했다고 고백하는 거 아닌가· 그리고 ‘S’의 속옷은 무슨 소리야·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던 중 헤일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신입 그만 괴롭혀!”
“어휴 나중에 보자· 아니 잠깐만····”
제니아가 내 그림 속 붉게 채색 된 머리카락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러고보니 너····”
무언가를 깨달은 듯이 제니아의 점점 눈이 커졌다·
“네?”
“아 아니다· 이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해·”
***
부활동 시간이 되자 조르지아 교수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온실 내부로 들어왔다·
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인사를 하자 그녀는 괜찮다는 듯이 손짓했다·
“앉아 앉아 편하게 있어·”
그녀는 온실 중앙에 걸어와서 손뼉을 탁탁 치고는 주의를 집중시켰다·
“자자 바쁜 애들은 하던거 계속 하면서 들어· 오늘은 좋은 소식을 들고 왔어· 이 변방의 작은 미술부에도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
좋은 소식이라는 말에 학생들의 귀가 쫑긋 올라갔다·
조르지아가 흐뭇하게 학생들을 한 번 둘러보고는 말했다·
“첫번째로는 싱싱한 신입 부원이 들어왔다는 거야· 순환계 실습 때문에 소개가 많이 늦어졌네· 자 들어와·”
뒤쪽에서 여자 둘과 남자 하나가 걸어 들어왔다·
그 중 한 명은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바로 릴리트다·
신입들이 차례대로 인사를 건넸다·
“도로시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릴리트 이젤리우스에요·”
“이반입니다· 미술부에 오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그리고 잠깐동안 릴리트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좀 예민한 건가· 가면을 벗은 모습일 때엔 릴리트와는 일면식도 없었다· 날 알아보지는 못 하겠지·
“자 일단 자리로 가·”
그렇게 신입들을 보내곤 두번째 소식을 전했다·
“다음으론 우리 미술부에 상당한 금액의 활동 지원금이 들어왔다는 소식이야·”
잠시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가 한 학생이 말했다·
“···얼마나요?”
“교내 대항전에서 적당한 성적을 거두면 클라리디움에 가서 실컷 놀 수 있을 정도로?”
곧이어 온실이 술렁거린다· 주변에선 마도학의 도시니 뭐니 하며 소란스러운데 난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
“우리 미술부에 복덩이가 들어왔어·”
더군다나 조르지아는 날 보면서 흐뭇한 듯이 씩 웃는다· 활동 지원금이랑 나랑 무슨 상관이 있기라도 한 걸까·
오늘따라 내가 남들 시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손끝으로 내 옷깃을 툭툭 건드렸다·
내 뒤에는 파벨라가 정갈한 옷차림으로 서 있었다·
“신입들 의자랑 이젤 챙겨줘야 하는데··· 손 좀 빌려줄래?”
그래 이건 비교적 막내인 내가 해야 할 일이지·
“···알겠습니다·”
나는 붓을 내려놓고 조용히 일어나서 파벨라를 따라 온실 밖으로 나왔다·
앞장서서 걸어가는 그녀를 뒤따라 가면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녀는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었다· 그러다 걷는 속도를 살짝 늦춰서 내 옆에서 함께 걸었다·
그리고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내게 물었다·
“···네가 그리던 그림 봤어· 실베린 교수님이지?”
“네·”
“솜씨가 좋네· 꼭 오랫동안 배운 것처럼···· 배경은 어디야?”
“위젤입니다·”
“아 교수님 저택이 위젤에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게 맞았나보네···· 실베린 교수님이랑은 각별한 사이인가 봐·”
“네·”
나는 별다른 부연 설명을 붙이지 않았다·
우리는 한 건물 창고에 들어가서 필요한 것들을 챙겼다·
나는 이젤 세 개를 겹쳐서 한 팔로 집어 들었고 파벨라는 여분의 의자를 챙겼다·
돌아가는 도중 그녀는 내내 신경쓰고 있었는지 또 말을 걸었다·
“저기··· 실베린 교수님이랑은 위젤에서 어떻게 만나게 된 거야? 그리고···얼마나 됐어?”
“···저 심문하십니까?”
그러자 파벨라가 당황한 듯이 말했다·
“아니 그런건 아니고···· 미안해 내가 괜한 질문을 했네·”
그 뒤로 대화는 끊겼고 어색한 침묵만이 이어졌다·
그렇게 도착한 온실 입구에서 못보던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우리도 그 앞에서 잠시 멈춰섰다·
챙이 길고 둥근 모자를 쓰고 베이지 색에 장식이 과하지 않은 드레스를 입은 소녀였다· 딱 봐도 미술부원은 아니었다·
그녀는 입구에 서서 발끝을 들고 내부를 곁눈질하고 있었다·
뒷모습과 몸짓에서 묘한 친숙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트리샤···?”
그녀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정말 트리샤가 맞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그리고 뿌듯하기라도 한 듯이 보조개까지 띄운 채로 소리쳤다·
“데미안!”
트리샤는 정말 나들이를 나가는 귀족 아가씨처럼 화사하게 차려입었다·
그녀는 내 앞으로 쫄쫄 달려와서 파벨라를 보고는 가볍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미술부 선배시구나· 저는 데미안 친구예요·”
파벨라가 차갑게 되물었다·
“···친구?”
“네 데미안이 첫번째로 사귄 친구요·”
“····”
그러고는 치마를 옆으로 쭉 펼치면서 내게 말했다·
“봐! 엄청 예쁘게 꾸미고 왔지?”
“그러네 못 알아볼 뻔했어·”
그러곤 나는 파벨라에게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저희는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
‘친구 그리기’ 과제에 맞춰 각각 초대한 인원들이 온실로 들어섰다·
갑자기 사람이 많아져서 한동안 어수선했다·
릴리트는 친구가 없었는지 구석에 있던 장식용 돌 위에 쪼그려 앉아서 노트를 끄적거렸다·
파벨라는 약혼자라도 불러오는 줄 알았지만 아무도 맞이하지 않았다·
조르지아 교수는 친구를 안 데려온다고 타박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없으면 없는대로 그리도록 지시하고 하나하나 둘러보면서 필요한 조언을 건넸다·
나는 트리샤와 함께 온실에 핀 작은 꽃나무 아래에 자리잡았다·
“이렇게?”
트리샤는 모델이 되는 게 익숙하지 않은지 의자에 앉아서 어색한 자세를 취했다·
“아니· 그러면 계속 있기 힘들잖아· 몸에 힘을 풀고 편하게 있어·”
“이렇게?”
“팔도 힘 풀고 계속 그러다 쥐나겠다·”
“저기 데미안····”
“왜?”
“시선이 부담스러워····”
“매일 보면서 왜 그래·”
“그게 아니라···· 너 하나만 보는 게 아니잖아····”
사실 나도 등이 따갑다· 미술부에서 친구로 이성을 데려온 사람은 나를 포함해 서너명에 불과했다·
온실 자체가 그리 넓은 편은 아니어서 주변 시선에 자유롭지 못했다· 부원들이 트리샤 자체를 싫어한 건 아니지만 연극부 부원을 그리 반기는 기색도 아니었다·
나는 테이블을 하나 가져다가 그녀의 옆에 두고 미리 챙겨둔 쿠키를 올려두었다·
“이거 먹고 싶을 때 먹고 긴장 풀어·”
“후···알았어· 처음이라 조금 어렵네!”
그러곤 쿠키를 하나 집어서 굶주린 토끼처럼 사각사각 갉아먹었다·
“그래· 그렇게 팔만 움직이고 나머지는 고정하고 있어·”
십여분 쯤 지나니 다들 본격적인 작업에 돌입했는지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잠잠해졌다· 온실에는 옷깃이 부스럭거리거나 붓이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나한테는 트리샤가 쿠키를 사각사각 깨무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맛있니·”
트리샤는 오 분마다 한 번씩 쿠키를 갉아먹었다·
“네가 만든 거야? 제법이네!”
그래· 만족하면 됐다·
“그런데 그것 좀 털어 봐·”
“뭘?”
트리샤는 먹는 거에 정신이 팔려 입가에 과자 부스러기를 묻힌 것도 모르고 있었다·
“입가에 그거·”
트리샤가 입가에 손을 올리려다 말고 잠시 생각하는 것처럼 눈을 굴렸다· 그리고 부스러기를 그냥 놔두고 팔을 내렸다·
그녀는 상체를 내 쪽으로 살짝 기울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어디?”
나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가만 있어 봐·”
나는 손을 뻗어서 엄지 손가락을 문질러서 트리샤의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떼냈다·
그녀는 표정관리를 하려는 듯 입가에 힘을 줬지만 차마 눈웃음은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
뒤쪽에서 와장창하고 물건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트리샤는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요란스런 소리에 모두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자리엔 파벨라가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팔레트와 물감이 어지럽게 쏟아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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