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3
“왜 하필 볼이야?”
“그냥 한 번 만져보자· 닳는 것도 아닌데·”
“그 정보가 얼마나 유용한지 봐서·”
물론 정보가 아무리 유용하다 한들 볼을 만지게 해줄 생각은 없다· 실베린에 관한 것이라면 진지하게 고민해보겠다만 얘가 그걸 알 리가 없지·
“아··· 사탕이는 실습에 참가 안 하려나?”
“경우에 따라 다르지·”
“음····”
그러던 중 문이 활짝 열린 연구실에서 여학생 몇몇이 머리를 내밀고 세실에게 물었다·
“세실 뭐해? 거기는 누구야?”
세실이 소개를 하는 척 내 옆에 와서 은근슬쩍 팔짱을 끼고 말했다·
“아 제 친구요· 잠깐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런데 어디 좀 다녀와도 돼죠?”
여학생이 날 보며 눈썹을 크게 씰룩이고는 말했다·
“음 그래? 넌 제일 고생했으니까 좀 쉬어· 그렇다고 너무 농땡이 피우지 말고· 교수님한테 둘러댈 핑계가 그리 많지는 않으니까·”
세실이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쳤다·
“다녀올게요!”
곧바로 그녀가 날 이끌고 복도를 이동했다· 그러고는 뒤를 한 번 슥 둘러보고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뒤 내 귀에 가까이 대고 말했다·
“이번 전투부 실습에 율리시아 공국 측의 인사가 참관할 수도 있다더라구·”
“공국?”
“응· 가이낙스 공녀의 측근인가봐· 그런데··· 사탕이는 공녀님이니 뭐니 하는 건 별로 관심도 없잖아·”
공녀 쪽에서 먼저 접촉을 요구한 이상 관심이 아예 없다고 표현할 수는 없었다· 실베린에게 가이낙스 공녀의 호위 임무에 대해 물어보긴 했는데 조만간 답이 날아오겠지·
“그래서 그 이야기 하자고 부른 거야?”
“아니 그것보다 더 재밌는 소식이 있어· 사탕이가 더 관심가질 소식!”
세실은 복도를 지나 ‘마석 실험실’이라는 문패가 적힌 곳에서 멈춰섰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널씩한 실내에 용도를 알 수 없는 실험 기구들이 보였다· 쿠션 위에 마녀의 수정구처럼 가지런히 정돈된 암석들이 있었다·
세실이 어린아이를 타박하듯 말했다·
“우리 사탕이 아무거나 만지면 안 돼·”
넋놓고 구경하고 있던 차에 세실이 벽난로 내부의 무언가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춥지? 이리로 와·”
벽난로 안에는 장작 대신 시꺼먼 돌이 들어 있었다·
그녀가 손을 대로 주문을 외자 그 돌이 모닥불처럼 열기와 빛을 내기 시작했다·
하만에 있을 때나 실베린과 함께 지낼 때나 이런 식의 마도학 물품들은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마법적 힘을 품고 있는 물건들은 언제 봐도 늘 신비롭다·
그냥 구경만 하는데도 견문이 넓어지는 기분이랄까·
난로 앞에서 몸을 뎁히자 세실이 말을 이었다·
“네가 부탁한 마석 말이야· 넌 어느정도 알고 있어?”
“그닥· 날개없는 용의 심장에서 나왔다는 것 정도·”
“음 사탕이는 운도 잘따르는구나· 조금 얄미워질라 그래·”
세실이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한발짝씩 이동하며 나와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는 분필로 위치를 표시해두었다· 뭘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떻길래 그래?”
“운좋게 갈리막스 등급 마석도 얻어· 마석 인챈트에 특화된 데다 얼굴도 모르는데 친구로 대해주는 여자도 있어· 복 받았지·”
“····”
세실이 장식장으로 이동해 자물쇠가 달린 철제 상자에 열쇠를 꽂았다·
그리고 상자를 열고 꺼낸 것은 바로 내가 일전에 건넨 그 크리스탈이었다·
“사탕아 넌 거기 가만히 있어· 움직이지 마·”
세실은 수정을 꽉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바로 서리바람 폭탄이었다·
무슨 배짱인지 그녀는 폭탄을 작동시키고 손바닥에 올린 채로 대기했다· 손바닥 위에서 터지게 의도한 행동이었다·
무슨 배짱으로 그러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곧이어 펑 소리와 함께 새하얀 원형 충격파가 연구실에 퍼졌다· 내 가면과 옷에도 서리가 후두둑 날아들었다·
세실의 주변에 서리와 얇은 얼음막들이 생기고 그녀의 몸 또한 새하얀 서리로 덮여버렸다·
눈으로 된 조각상처럼 변해버린 상태였다·
“···!”
그리고 그녀는 평소처럼 몸을 움직였다·
“나 안 죽었어· 걱정 마·”
플랜테라도 꽁꽁 얼려버릴 정도의 무서운 위력을 가진 폭탄이었다·
한데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서리들을 툭툭 털어냈다·
그리고 꽁꽁 얼어붙었어야 할 그녀의 몸은 표면에만 서리가 덮힐 뿐 멀쩡했다·
주먹에 꽉 쥔 서리들도 털어내니 크리스탈이 보였다·
투명한 빛깔이 어느순간 푸른색 불투명한 돌이 되어 있었다·
“순환계에서 만났던 그 거대 도마뱀 폭탄이 전혀 안 먹혔던 거 기억나? 아마 이 마석 덕분일 거야· 이건 소유자에게 원소 적응형 결계를 펼쳐 주거든·”
“····”
원소 적응형 결계?
“아직 전부 확인한 게 아니지만 확인된 바로는 화염과 냉기 번개 그리고 부식성 액체까지 방어할 수 있어· 그 정도만 해도 가치가 엄청난데 그 이외에 아직 밝혀지지 않은 내성도 더 있을지도 몰라· 갈리마르 등급은 절대 등급에서 고작 두 단계 낮은 정도야· 최소 그 정도지· 연구가 더 진행되면 더 오를 수도 있고·”
잘은 모르겠지만 굉장히 좋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우연히 얻은 것 치고는 기대 이상의 소득이다·
“무제한으로 쓸 수 있는 건 아니겠지?”
“대단한 방어 능력을 가진 대신· 무식할 정도로 많은 양의 마력이 필요해· 지금은 색이 변했잖아? 그러면 기능이 멈춘 거야· 마력을 주입하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고· 기능이 회복 돼·”
“마력은 얼마나 주입해야 하지?”
“음···· 반복해서 강조하자면 무식할 정도로 많이· 고위 마법사가 일주일간 생성한 마력을 다 쏟아 넣어야 제 기능을 발휘해· 나도 충전히느라 고생 좀 했어· 다만 한 번 마력을 저장하면 유지되는데다 활용도가 아주아주 뛰어나서 가능성이 무궁무진해·”
“좋네·”
“아주아주 실력 좋은 마도학자가 가공하면 더 높은 효율을 발휘할 수 있어·”
“운이 좋네· 마석 가공에 정통한 마도학자가 내 눈 앞에 있으니·”
“음····”
세실이 애매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기다 그 마도학자가 예쁘기까지 하고·”
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쓰던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씰룩거렸다· 그러곤 마지못해 한다는 듯이 말했다·
“좋아· 내가 손 봐줄게· 다만 조건이 있어· 가공한 마석을 중간평가 심사에 제출할 수 있게 해 줘· 그냥 심사만 받는 거니까 교수한테 뺏기지는 않을 거야·”
실베린의 말은 틀린 게 거의 없다· 마도학자랑 친해지면 무조건 좋다· 이렇게 남는 장사가 있나·
“좋아·”
세실이 크리스탈을 철제 상자에 넣고 자물쇠를 걸었다·
“그리고····”
원하는 게 더 있는 듯했다· 헌데 세실이 조금 뜸을 들였다·
“뭔데?”
“···놀아달라고 할 때 한 번 놀아줘·”
조만간 또 술판 벌이게 생겼다·
“술친구 필요해?”
“아 아니! 그때 잠깐 마신거 가지고 그래· 나 그런 애 아니거든!”
***
나는 밤까지 마저 수련을 더하고 가시정원으로 복귀했다·
이맘때쯤 도착해야 했을 실베린의 편지는 아직 날아오지 않았다·
트리샤도 일찍 잠에 들어 잠잠했다·
나도 몸을 혹사시킨 탓에 일찍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그날 밤은 꿈을 꿨다·
흐릿한 주변 배경에 나와 한 여자가 절벽 위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검을 뽑고 누군가를 상대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꿨던 것 같은데 모든 게 흐릿해서 제대로 구분할 수도 없었다·
실베린과 함께 있었을 때엔 꿈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꿈은 예지몽인지 아니면 과거의 기억을 반복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예지 능력은 내 과거를 집어삼키며 함께 흐려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가엘 부교수는 뒷짐을 지고 원형 투기장처럼 생긴 이터니아의 수련장을 서성였다·
전투부의 첫번째 전공수업·
그녀의 앞에는 전투부 상급반으로 배정받은 학생들이 모래 바닥에 한쪽 무릎을 붙이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는 베일이 씌워진 사각형의 거대한 케이지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가엘의 발이 움직일 때마다 케이지 내부에서 무언가 강렬하게 요동치며 철창을 흔들었다· 그 내부에 무엇이 있는 알아챈 학생은 거의 없었다·
그 미지의 공포에 학생들은 잔뜩 긴장한 탓에 침을 꼴깍 삼켰다·
상급반에 배정되었다 한들 이터니아는 그들을 성취감과 자만심에 취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도리어 그 자리에 머무를 자격이 있다는 걸 스스로 증명하도록 고역에 가까운 시험에 내던졌다·
그들이 이렇게 모인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가엘의 침묵에 따라 다른 학생들도 전원 침묵했다· 케이지 안에 갇힌 거대 마수만이 정적을 흐리고 살점의 향기에 몸부림칠 뿐이었다·
긴장감 흐르는 침묵 속에서 가엘은 학생들의 얼굴을 하나씩 훑어보았다·
포식자의 소리만으로 겁에 질린 개처럼 다들 움츠리고 있었는데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 이들도 몇몇 있었다·
시온 게일 빅터 로렌스···하나씩 훑어보다 가엘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하는 학생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마스터스 클래스 심사 당시 심사관의 자격으로 마주한 적 있는 데미안이었다·
그 또한 여유롭기 그지 없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잡상은 밀어두고 수업 개시를 알렸다·
“그대들은 오늘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해라·”
가엘은 지루한 소개는 전부 생략하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베일을 잡아 당겼다·
철창 안에 갇힌 괴수의 모습이 드러났다·
“준비도 없이 마수를 만나게 됐으니까·”
챙! 챙!
마차를 끌어도 될 것 같은 크기의 거대 거미가 가엘을 보며 철창을 연신 들이받았다·
듬성듬성 자란 털· 호피처럼 얼룩덜룩한 다리· 흰자 없이 번득이는 눈알· 그리고 철창 바닥엔 식욕에 못이겨 질질 흘린 타액이 고여 있었다·
학생들의 입이 경악한 듯이 벌어졌다·
“준비할 시간은 주지 않고 바로 진행하겠다· 내가 지목한 사람은 오늘 공개적으로 이 마수를 상대하게 된다·”
몇몇 학생들이 질문을 위해 손을 번쩍 들었지만 가엘은 받아주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준비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마수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마주한다· 마수가 주섬주섬 단추를 채우고 벨트를 조이는 거 하나하나 기다려 줄 거라 생각하나?”
마수에 대한 약점 습성 혹시 모를 주의사항도 알려주지 않는다· 마수는 원래 그런 상황에서 맞이하는 것이고 그런 상황에 순발력 있게 대처하도록 훈련시키는 것이 수업의 목적이었다·
곧이어 조교들이 병장기들을 잔뜩 이고 들어와 가엘의 앞에다 풀었다·
창 활 롱소드 숏소드 활 철퇴와 도끼까지 없는 종류가 없었다·
“추가로 말하자면 본인이 쓰던 무기는 허용되지 않는다·”
실습의 형평성을 위해 무기 또한 원래 쓰던 것이 아닌 지급된 것으로 활용해야 하며 아티팩트 또한 허용되지 않았다·
오로지 기민한 관찰력과 단련된 전투 감각만이 요구된다·
제 아무리 좋은 검과 아티팩트가 있어도 그건 이 실습에서 무의미하다·
가엘은 기대감과 아니꼬움이 뒤섞인 복잡한 심정으로 데미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에게 전하듯 큰소리로 말했다·
“추가로 오늘은 가이낙스 가문의 보좌관이 수업을 참관하기로 했다· 자네들에겐 두 배로 재수없는 날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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