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4
비비의 보좌관 제럴드와 호위대장 펜릴은 수련장에서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로브를 눌러쓰고 1학년 전투부 수업을 지켜보고 있었다·
“즉시 전력감을 찾으시려는 겁니까?”
펜릴의 물음에 제럴드는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그럴 것이었으면 4학년 학생을 아무나 지목해서 데리고 가면 될 일이었다· 그가 원하는 건 데미안의 실력 측정이었다·
“이건 그저 형식적인 겁니다·”
데미안의 실력이 뛰어나면 좋으나 형편없어도 상관 없었다· 오히려 비비는 이 점을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며 그 무능함을 본인의 감정적 보복 행위를 위한 구실로 삼을 것이다·
실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발을 씻기거나 신발을 닦는 굴욕적인 잡무를 시키는 식으로 말이다·
어떤 그림이 나올지 뻔히 알기에 제럴드는 이 자리가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물론 어느 정도의 실력 검증은 필요했다· 공국으로 가는 길은 마냥 안전하지는 않다· 유사시 최소한 스스로 목숨을 보전할 정도는 되어야 한다·
곧이어 수련장에서 부교수 가엘이 말했다·
“너희들은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이 괴수와 싸울 것이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유의미한 타격을 주지 못하면 최하점이다·”
학생들이 질색하는 표정과 함께 반쯤 우는 소리를 냈다·
비비의 호위대장 펜릴이 괴수를 보며 말했다·
“키라클로군요· 저 사나운 놈을 북부에서 어떻게 공수했는지 궁금하네요·”
갈고리 같은 손톱과 두꺼운 이빨· 그리고 웬만한 갑피도 단숨에 관통하는 독침까지·
평범한 인간이 붙잡히면 작별 인사도 하기 전에 갈기갈기 찢긴다·
물론 위험 요소들은 철저히 절단해버리고 키라클로에게 남은 건 오로지 황소 같은 다리 힘과 순발력이었다·
“자아 첫 번째로 자원할 사람은 없나?”
첫 주자로 나서는 건 기꺼이 실험체가 되어 공략 힌트를 제공해주겠다는 거나 다름 없었다·
가엘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눈을 구기고는 조교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제비뽑기 통이 그녀의 앞에 놓였다·
가엘은 손을 넣고 뒤적거리는 일 없이 단번에 종이를 뽑았다·
“페코리노! 나와서 무기를 고르도록·”
모두의 시선이 단번에 한 소년에게 집중되었다· 한 소년이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눈을 꾹 감았다 뜨고는 앞으로 나섰다·
그가 무기를 고르는 동안 가엘과 조교는 키라클로의 구속을 풀어냈다·
철창이 열리자 마자 키라클로가 무서운 속도로 뛰쳐나왔다·
“아 아악!”
이를 본 페코리노는 무기를 고르다 말고 깜짝 놀아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비웃지 않았다· 나머지 학생들도 깜짝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페코리노는 치통을 앓는 사람처럼 죽상을 하고는 창을 집어서 가엘의 앞으로 나섰다·
가엘이 물었다·
“왜 창을 골랐지? 그게 네 주력 무기인가?”
“그건 아니지만 가장 리치가 길기 때문입니다· 약점을 노리려면····”
가엘은 말을 끊고 페코리노의 등을 밀쳐버렸다·
“그래 5분 주겠다·”
마음의 준비도 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고 곧바로 싸움에 밀어 넣었다·
“그 원에서 나오면 영원히 낙제점을 받는다· 명심하도록·”
“아 아····”
페코리노는 두 손으로 창을 꼭 쥐고 겁먹은 쥐새끼처럼 몸을 움츠리고 탐색전을 펼쳤다·
창으로 찌르듯이 휙휙 간을 보기를 몇차례· 페코리노는 2분 동안 제대로 근접해서 창끝을 대지도 않았다·
그저 괴수의 신경만 잔뜩 자극할 뿐이었다·
가엘이 답답한 듯이 소리쳤다·
“네가 제대로 싸우지 않으면 우리가 구속을 풀어주겠다·”
말하기 무섭게 괴수의 뒷다리를 구속한 쇠사슬이 더 길게 풀어졌다·
키라클로는 드드드드 소리를 내며 곧장 달려들었다·
페코리노는 어떻게 저항할 틈도 없이 덮쳐졌다·
“으악! 아아아! 살 살려줘!”
키라클로가 그를 바닥에 눕히고 쓱쓱 긁어댔다· 갈고리 같은 손톱이 여전히 있었으면 그는 이미 사지가 분해됐을 것이었다· 지금은 그저 뭉툭한 마디가 그의 몸을 거칠게 훑고 갈 뿐이었다·
가엘이 특수 아티팩트를 꺼내고 괴수에게 다가갔다· 그러니 녀석은 겁먹은 듯이 페코리노를 두고 철창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가엘이 페코리노의 뒷덜미를 잡고 질질 끌고 나왔다· 그는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학생들의 절반은 징그럽다는 듯이 오만상을 구겼고 나머지 절반은 얼굴이 시퍼레졌다· 그냥 괴수라면 잘 싸웠겠지만 키라클로의 혐오스러운 외형 때문에 더욱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제럴드가 펜릴에게 물었다·
“저 학생은 몇 등입니까?”
“입학시험을 기준으로는 중상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 치고는 영 실망스럽군요·”
“흠····”
가엘이 타박하듯이 말했다·
“누구든 한 명은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 공국의 기사가 보는 앞에서 체면이 안 사니까·”
학생들 몇몇이 슬쩍 제럴드와 펜릴이 서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가엘이 굳이 가리키지 않아도 일부는 그들의 위치를 꿰고 있었다·
외부 인사가 참관한 상황· 이 자리에서 망신당한다면 학생들 입장에서 그만큼 치욕스러운 것도 없었다·
가엘이 제비뽑기를 하고 다음 차례를 호명했다·
“레스콘! 나와서 싸우도록·”
호명된 레스콘도 이전 주자와 별다를 것 없이 죽상을 하고는 앞으로 섰다·
그는 롱소드를 집고 앞에 나섰다·
그러자 뒷짐을 진 가엘이 물었다·
“왜 그 무기를 골랐지?”
그는 긴장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소 손에 가장 익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다· 해보도록·”
두 손으로 검 손잡이를 꽉 잡은 레스콘은 곧장 키라클로에게 달려들었다· 그러곤 검을 힘차게 휘둘렀지만 긴 다리에 맥없이 막혀버렸다·
지나치게 경계한 탓에 긴 다리에만 별 효과 없는 칼질을 해댈 뿐 제대로 된 인상을 심어주지는 못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펜릴이 말했다·
“이전 학생보다는 낫지만 큰 차이는 없습니다· 성적도 비슷하고·”
제럴드는 턱을 쓸며 속으로 고민했다· 1학년이라 그런지 실력 면에서 기대할 만한 것은 없었다·
레스콘은 카라클로의 행동이 점점 포악해지는 걸 보고는 검을 던지고 줄행랑을 쳤다·
가엘 부교수가 달아난 레스콘을 험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검을 던지는 건 최악 중 최악의 행위다·”
“교수님 저는 다른 건 몰라도 거미에는 심각한 트라우마가····”
“길에서 만난 괴수가 네 속사정 하나하나 배려해줄 것 같나? 넌 최하점이다·”
“···!”
가엘은 최하점을 내리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다음 또 그다음 전투를 지켜보면서 제럴드는 하품을 했다· 그 모습을 본 펜릴이 넌지시 말했다·
“숙련된 기사 셋은 붙어야 하는 녀석입니다· 1학년에 불과한 학생이 상대하기엔 무리가 있죠· 역시나 큰 기대는 하면 안 되겠습니다·”
곧이어 가엘은 전투부 10위권 안에 속하는 빅터를 호명했다·
그는 곧바로 앞으로 나와서 무기들을 점검했다·
그리고 제럴드는 그 수련장의 기류가 달라지는 것을 감지했다·
검을 잡고 슥슥 흔들어보는 움직임에서 뭔지 모를 묵직함과 여유가 느껴졌다· 검술에 그리 능통하지 않은 제럴드조차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서류를 넘기며 빅터의 이력을 확인했다·
“클로디나스 형제단 출신· 흥미로운 이력이네·”
클로디나스 형제단은 마수 완전 척결을 지상 과제로 삼고 전대륙에 지부를 두고 있는 용병 집단이었다·
“제 상대를 만났으니 눈이 돌아가겠군요·”
그리고 다른 학생들도 이를 감지한 듯했다·
이번엔 이전과는 다른 결과가 나올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빅터는 롱소드를 들고는 몸을 풀고 앞으로 나섰다·
“바로 싸우면 됩니까?”
“그래·”
전투는 즉시 진행되었다· 빅터는 키라클로의 정면으로 곧장 달려들었다· 괴수는 앞발로 달려오는 빅터를 쳐내려 들었다·
그러자 그는 대각선으로 한 바퀴 구르며 왼쪽 앞다리에 칼을 휘둘렀다·
그 검격은 정확히 다릿마디의 미세한 연질을 베고 들어가 초록색 체액이 푸슉 소리를 내며 튀겨져 나왔다·
취익! 취이익!
검격이 들어간 다리는 구겨진 것처럼 접혔다· 그리고 키라클로가 고통스러운 듯 침을 튀기며 몇걸음 물러났다·
구경하던 학생들의 입에서 가볍게 탄성이 터져나왔다·
빅터는 자리에 일어나서 팔을 한 번 휘두르며 검날에 붙은 체액을 털어냈다· 이 모든 동작 하나하나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그리고 빅터는 또다시 달려가 슬라이딩을 하며 이번엔 오른쪽 앞다리를 공격했다·
촤악!
정통으로 검격이 들어가 오른쪽 다리는 아예 너덜너덜한 지경이 되었다·
빅터는 앞다리 두 개를 공격에 이용하고 나머지 다리는 이동에 이용한다는 것을 알고 미리 무력화를 시킨 것이었다·
취이이익! 취이익! 키라클로가 고통에 절어 몸부림쳤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도약해 태클하듯 몸을 낮춰서 키라클로의 배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펜릴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위험한 발상인데·”
단단한 외골격이 없는 아랫배를 공략할 수 있으나 역으로 공격을 당하기 쉬운 포지셔닝이었다·
빅터가 키라클로의 복부에 칼을 쑤셨다·
치명상을 입은 건 맞으나 단번에 숨통을 끊지는 못했다· 키라클로는 말벌처럼 반사적으로 엉덩이를 내려찍었다· 독침을 꽂아버리기 위한 마지막 발악이었다·
이는 빅터의 허벅다리에 몇차례 타격을 입혔다· 독침을 미리 제거하지 않았으면 그는 죽을 수도 있었다·
빅터는 칼을 뽑아서 다시 복부에 쑤셔 넣고는 몸을 굴려서 밖으로 빠져나왔다·
키라클로가 바닥에 체액을 뿌리며 몸부림 치다가 결국엔 철창에 몸을 박치기하고는 숨이 멎었다·
가엘은 처음으로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전했다·
“제법이군·”
빅터는 숨을 헐떡이며 흙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감사합니다·”
“앞다리를 먼저 노린 판단은 탁월했으나 배 밑으로 들어간 건 좋지 않았다· 적에게 치명타를 입힐 수 있지만 본인의 목숨도 위태로워지는 판단이었다· 그 부분은 추후 보완하도록·”
멀찍이서 지켜보던 펜릴도 빅터를 인정했다·
“나이에 맞지 않게 대담하고 감각이 좋습니다·”
빅터는 지루해지던 실습에 다시금 활력을 불어넣었다·
문제는 그가 벌인 전투가 이전과 비교가 안 되게 뛰어났기에 다음 순번의 부담은 훨씬 커졌다는 것이었다·
뭘 하든 빅터와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조교가 키라클로의 시체를 치우고 예비용으로 마련한 케이지의 베일을 벗겨내고 괴수의 마취를 풀었다·
이번 키라클로는 이전의 녀석보다 몸집이 더 거대했다·
그러는 와중에 가엘은 제비뽑기 상자에서 종이를 뽑고 다음 주자를 호명했다·
“데미안! 다음 차례로 나오도록·”
그의 이름이 호명되자 서류철을 뒤적이던 제럴드가 하던 걸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데미안· 제럴드가 이 자리까지 행차한 이유였다·
곧이어 대기자들 틈에서 갈색 머리의 소년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이런 흙먼지 날리는 훈련장보다는 연극 무대가 훨씬 잘 어울리는 인상이었다·
‘저 아이가 실베린의 제자라···’
서류상으로는 전투부 상급반 중에선 성적이 낮은 축에 속했다·
준비를 마친 새 키라클로가 철창 밖으로 뛰쳐나왔다· 며칠 굶주렸는지 먹잇감을 보자마자 구속구가 팽팽해지도록 발을 굴려댔다·
몸집도 크고 움직임도 빠른데다 무엇보다 더 포악해보였다·
펜릴은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저런 저 곱상한 소년한테는 악몽 같은 날이 되겠습니다·”
데미안은 키라클로의 기력을 빼고 다음 주자의 활약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에 머무를 가능성이 컸다·
데미안은 앞으로 나서서 오래 고민하지도 않고 숏소드를 집었다·
이전 주자 모두 리치가 긴 무기를 선택한 데 반해 그는 다른 이들의 예상을 깨고 리치가 짧은 무기를 고른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싸울지 도무지 예측할 수 없었다·
데미안은 대련장 라인 내부로 발을 들였다· 검날을 땅에 늘어트리고 무슨 생각인지 키라클로와 대치한 상태에서 시계방향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제럴드에게 인상적인 것은 그의 눈빛이었다·
팽팽한 쇠사슬에서 느껴지는 저돌성· 드륵드륵 땅을 갈며 먹잇감에 달려들고 싶어하는 괴수·
착각이었을까·
열 걸음 간격을 두고 이를 맞이한 데미안의 눈빛에 강렬한 독기가 감돌았다·
찰나의 시간 동안 모습을 드러낸 독기는 뒤이어 나타난 위장된 여유와 평온함에 종적이 스르르 지워졌다·
곧이어 가엘이 시작을 알렸다·
“네가 원하는 대로 싸워라·”
그리고 말이 끝나는 순간 우직하게 서 있던 데미안이 크게 팔을 휘둘렀다·
검날이 크게 번쩍이며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그것은 키라클로의 한쪽 눈에 박혀버렸다·
어떻게 한 것인지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키아아아악!
단말마 괴성에 뒤이어 키라클로의 움직임이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그대로 멎어버렸다·
그리고 쿵 소리와 함께 흙먼지를 일으키며 쓰러졌다·
이 일대가 완전히 정적에 휩싸였다·
모두가 끝난 것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움직임이 멈춘 키라클로의 다리에 힘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쪽 눈에 검이 박힌 채로 녀석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고통에 절어 몸을 움찔거렸지만 확실히 살아서 움직일 수 있는 모양새였다·
데미안은 이에 항복하는 것처럼 두 손을 들고 뒤로 물러났다· 지저분한 싸움은 피하겠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안 되겠네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가엘은 데미안을 보며 눈을 좁혔다·
괴수에게 제대로 된 일격을 먹였지만 죽이지는 못했다· 그리고 검을 버렸으니 끝을 볼 수가 없었다·
못 했다고 하기엔 탁월하고 잘했다고 하기엔 어딘가 아쉬우면서 도박성이 강한 그런 모호한 활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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