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6
초승달의 뜬 밤· 소녀는 숲의 아지트라 불리우는 곳에 서 있었다· 신전에서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 덩굴로 이루어진 비밀통로를 걷다 보면 원형의 작은 공터가 나온다· 그 중심에는 버드나무가 보였다·
그곳이 둘만의 아지트였다·
소녀는 머리카락이 달빛에 반사될까 로브를 깊게 누르고 초조하게 그 버드나무 주변을 서성였다·
자정에 가까운 시각·
혹여나 침실에서 몰래 빠져나오다 걸렸을까·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소녀는 마음을 졸였다·
곧이어 아지트 인근에서 누군가가 바스락 거리며 기척을 냈다·
소녀는 화들짝 놀라 소리가 난 곳으로 몸을 돌렸다·
어둠속에서 한 남자의 인영이 보였다·
“루실리·”
그가 약초 이름의 암구호를 부르자 소녀도 그에 맞는 답을 외쳤다·
“포니!”
암구호를 확인하자 어둠속에서 한 소년이 저벅저벅 걸어나왔다·
그리고 소녀도 푹 눌러쓴 로브를 내리고 얼굴을 드러냈다· 은빛 머리카락이 스르르 허리까지 떨어졌다·
소년이 물었다·
“오래 기다렸어?”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안 와서 무슨 일이 생겼나 엄청 걱정했어·”
“분수대 앞에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돌로레스 수녀님이 밤중에 산책을 하시더라고· 그래서 수녀님이 돌아갈 때까지 버텨야 했어·”
소년은 등 뒤에 손을 대고 무언가를 숨기고 있던 상태였다·
“등 뒤에 그건 뭐야?”
소년이 씩 웃고는 등 뒤에서 어느 상자를 앞으로 내보였다·
그리고 네모난 덮개를 여니 네모난 판 위에 올려진 새하얀 케이크가 나타났다·
“···뭐야?”
“뭐긴· 케이크지·”
“이걸 어떻게··· 가져온 거야?”
케이크는 고가의 식재료가 들어가는 음식이었다· 매일 귀리죽으로 끼니를 떼우는 소년의 형편으로는 그 한 조각도 감히 꿈꿀수 없는 것이었다·
“종일 일했지· 말 했잖아· 그동안 바빴다고·”
대체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온 걸까· 아직은 몸집이 작고 힘이 없는 소년을 써주는 곳은 거의 없었을 텐데·
“····”
“잠깐 들고 있어봐·”
그는 소녀에게 케이크를 들게 하고는 주머니에서 초를 꺼냈다· 그런 뒤 케익 중앙에 꽂고는 부싯돌을 들고 탁탁 쳐냈다· 소녀는 그 모습을 보며 픽 웃고는 마법으로 불을 올렸다·
별다른 조작 없이 마지막 준비가 끝나자 그는 주섬주섬 부싯돌을 다시 넣고는 멋쩍은 듯이 말했다·
“마법이 편하긴 하구나· 이제 내가 들게·”
소년은 케이크를 다시 건네 받았다·
불이 켜진 덕에 그 둘은 어둠 속에 가려진 서로의 얼굴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자 이제····”
그가 말하기 전에 소녀가 중간에 끊었다· 바로 그의 얼굴 때문이었다·
“잠깐···· 얼굴이 왜 그래?”
소년의 이마는 멍이 들고 한쪽 뺨은 퉁퉁 부어 있었다·
그는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일하다 미끄러져서 한 번 벽에 부딪쳤어· 별거 아니야·”
소녀는 걱정스런 눈빛을 하고 그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게 왜 별거 아니야· 누가 그랬어? 누구야?”
“괜찮아· 정말 넘어진 거야·”
“넌···거짓말에 재능 없어· 우리 서로에게 거짓말 하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그녀가 추궁하듯 묻자 소년은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마지못해 말을 꺼냈다·
“밀 포대를 옮기다 한번 미끄러져서 엎었거든· 관리인이 보기에 그게 좀 아니꼬웠나봐·”
한 번의 실수를 빌미로 얼굴에 주먹질을 했다는 말이었다· 고아가 받는 대우란 늘상 이런 식이었다· 부모도 없고 힘도 없고 보호해줄 사람도 없으니 다들 마구잡이로 대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소녀의 눈에 눈물 방울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내가··· 내가··· 다 죽여버릴····”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그녀를 진정시켰다·
“그런 걸로 왜 죽여· 아내도 자식도 있는 사람인데· 난 괜찮아 정말로· 나한테 이건 진짜 아무것도 아닌 일이야·”
“····”
위로 받아야 할 사람은 소년인데 그는 조금도 아픈 티를 내지 않았다· 소년은 태연하게 소녀의 그렁그렁한 눈을 한 번 닦아주고는 말했다·
“오늘 같이 소중한 날에는 즐겁고 행복한 기억만 남겼으면 좋겠어· 일년에 단 한 번 오는 날이잖아·”
“····”
그녀의 생일을 챙겨주는 사람은 오직 그 하나뿐이었다·
그는 케익을 들어 초를 그녀의 얼굴 앞에 내밀었다·
“자 불어· 바람이 먼저 선수치기 전에·”
소녀는 옷소매로 눈가를 슥슥 닦아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바람을 불어 초를 꺼트렸다·
유일한 빛이 사라지고 그녀가 마주한 소년의 모습이 다시 어둠 속에 잠겼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심연 속에서 소년의 마지막 한마디가 나지막히 울렸다·
[생일 축하해 리자·]
그리고 리자는 잠에서 깨어났다·
보름달이 뜨고 달빛이 쏟아지는 새벽이었다·
그녀는 상체를 일으켜서 달력을 확인했다· 잉크로 지저분해질 정도로 강조해 놓았던 그 날이었다·
리자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그렇게 가만히 시간을 죽였다·
다시 잠드는 건 불가능했다· 몸이 부르르 떨린다· 리자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리자는 주먹을 꽉 쥐고 가슴을 두드렸다· 그렇게 툭 툭 느린 리듬의 두드림이 정적을 채웠다·
그러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가시정원 기숙사에서 잠들었으니 문을 두드릴 사람은 트리샤 말고는 없었다·
다시 노크 소리가 울리고는 끼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트리사가 머리만 쏙 내밀고 작게 소근거렸다·
“아직도 자?”
나는 인상을 구기며 눈을 가렸다· 꿈자리가 영 사나워서 깊게 잠들지 못했다·
요즘 계속 같은 꿈을 꾼다· 그런데 어느것 하나 명확히 보이는 게 없다·
예지몽일까· 무슨 의미가 있는걸까· 어쩌면 다 죽어가는 예지몽을 마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임종 직전의 노인이 바람 빠지는 소리로 뭐라 중얼거리지만 뭔소린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그런 느낌이다·
“데미안···?”
“···왜·”
“어디 아파?”
“아니 근데 왜 온거야·”
“그러니까···· 아니 아니야· 계속 자!”
나는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손으로 비비며 말했다·
“뭔데· 말해봐·”
“그···재료 준비 다 해놨어·”
“···재료?”
나는 상체를 일으키고 정령을 소환해 기름등에 불을 붙였다·
“응· 남은 건 네가 해주면 돼!’
“뭘 말이야?”
“요리···!”
흐릿한 눈으로 창밖을 보았다· 아직 어둑하긴 했지만 아침빛이 들고 있었다·
트리샤는 요리엔 영 재주가 없었다· 그래서 식사 준비는 내가 해주기로 되어 있었다· 그것 때문에 한동안 요리책을 달달 외우기까지 했었다·
귀찮긴 하지만 트리샤를 그냥 굶겨서 보낼 수는 없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협탁 위의 습관처럼 달력을 확인했다· 그리고 날짜를 확인하고는 머리가 잠깐 굳어버렸다·
트리샤가 날 보고는 다소 의아해 했다·
“어디 아파?”
“아니·”
나는 달력을 접어서 서랍에다 넣어버렸다·
“···왜 그래· 기분 안 좋아?”
내 행동을 본 트리샤가 다소 주늑들었다· 본인이 짜증을 돋구었다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니· 요즘 그냥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서둘러 몸을 풀고 일어났다·
“먹고싶은 거 있어?”
“···아무거나!”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어차피 내가 먹을 아침거리를 준비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트리샤는 내 뒤를 졸졸 따라와서 주방 테이블 앞에 앉았다·
주방에 식재료가 담신 바구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정말 새벽에 정성들여 준비한 모양이었다·
장작에 불을 올리고 빠르게 재료 손질을 시작했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턱을 괴고 흐뭇한 듯한 얼굴로 요리 준비에 바쁜 내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너는 가서 할일 해·”
“아니 그냥 여기 있을래!”
“할 거 없으면 이거 흙 좀 씻어올래?”
감자가 든 바구니를 손으로 지목했다· 투정을 부릴 줄 알았는데 그녀는 활기차게 수락했다·
“응!”
그러고는 바구니를 들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문득 묘한 기분이 들었다· 같이 식사 준비를 하니 왠지 모르게 정말 한 식구가 된 느낌이다·
함께 지내다 보면 티격태격하고 맞춰줘야할 부분도 있겠지만 지금 같은 안정감을 위해서라면 충분히 감수할 만하다고 느껴진다·
잠시 뒤 트리샤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감자 바구니를 들고 달려왔다·
“다 했어!”
바구니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얼음장 같은 물에 씻은 건지 손이 시뻘개져 있었다·
그걸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거면 됐어· 정령 좀 놀아주면서 쉬고 있어·”
그러곤 손 좀 뎁히라고 불의 정령을 트리샤에게 날려 보냈다·
다른건 몰라도 트리샤와는 일상을 꾸려나가는 재미가 있었다·
트리샤가 이 고립된 기숙사에서 어떤 일상을 갈망하고 있었는지 이제 그림이 그려진다·
실베린의 저택 윗드러프관 기숙사·
생활에 있어 더없이 간편한 건 사실이다·
남이 차려주는 음식· 남이 정리해준 책장· 남이 접어준 빨래· 이 모든 귀족스런 편의가 여전히 몸에 안 맞는 옷처럼 익숙하지 않았다·
누군가와 함께 직접 꾸리는 일상· 오히려 지금같은 방식이 나에겐 더 잘 맞는지도 모른다·
나는 항상 이렇게 살아왔으니까·
***
식사를 마치고 트리샤와 사이좋게 기숙사 밖으로 나왔다·
미궁을 벗어나기 무섭게 스티치가 또다시 날아들었다·
나는 다시 트리샤가 보기 전에 황급히 공중에서 낚아챘다·
트리샤는 또 호기심을 보인다· 이럴 때마다 늘 등골이 시린다·
“모야?”
“편지·”
“나도 볼래·”
“네 편지들 나한테도 다 보여주면·”
그녀는 곰곰히 생각하다 말했다·
“···그건 안돼!”
“그럼 나도 안돼·”
“····”
호기심이 많을 때라 그런가· 내 사생활에 왜이리 관심이 많을까· 편지만 날아오면 자기도 보겠다 그러네·
실베린의 편지는 따로 잘 감춰둬야겠다·
당장은 보는 눈이 있으니 편지를 뒷주머니에 넣었다·
그렇게 한동안 나아가 트리샤와는 노던 빌리지의 학생 정원에서 갈라졌다·
“저녁에 데리러 와!”
트리샤는 그렇게 손을 흔들며 소리치고는 멀리 떠나갔다·
해가 온전히 뜨지 않아 아직 하늘은 검푸른 빛깔이었다· 첫수업까지는 시간이 제법 남았지만 딱히 시간을 떼울 장소가 떠오르지 않았다·
주변을 지나다니는 학생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평화롭고 이전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이다·
더 바라는 건 없다· 그냥 이대로 아무일 없이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나는 별 계획 없이 정원 벤치에 앉아 시간이 남는 틈에 실베린의 편지를 꺼내 읽었다·
다음화 보기